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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름은 조용필-굿데이 이을용선수 수기

meisin, 2002-07-31 23: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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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홍이형, 명보형 감사합니다."
 
내 짧지만 순탄치 않은 축구인생을 말하기 전에 우선 두 형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두 형은 내가 축구를 그만뒀던 위기에서 나를 구해줬다.

축구를 포기하고 방황했던 94년 여름. 미국월드컵 독일전에서 나란히 골을 터트린 선홍형과 명보형을 보며 나는 다시 축구화를 신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94년 초 강릉상고를 졸업했지만 전국대회 4강에 오르지 못해 대학진학에 실패했다. 축구화를 벗어야 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당시 5월 스리랑카에서 벌어질 제22회 아시아학생축구선수권대회 대표선발전에 출전했다. 그리고 박성배 서동원(이상 전북) 등 동기들과 당당히 선발됐다.

신문에도 조그맣게 내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이름은 대학 출신의 한 선수로 교체돼 있었다. 좌절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대학 딱지가 그리 중요한 걸까. 나는 홧김에 축구복, 축구화 등 장비를 갖다 버리고 축구를 그만뒀다. 아니 축구를 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방황은 시작됐다. 당시 여주에서 쌀장사를 하셨던 아버지를 돕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뒀고 공사판을 떠돌았다. 가출한 뒤 친구와 충북 제천에서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내 명찰은 한국 최고의 가수 '조용필'이었다.

온갖 술시중을 들며 자존심 상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고 종종 동네 깡패들과 시비가 붙어 흠씬 얻어터진 게 부지기수다. 몸은 이내 망가졌고,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나는 이미 포기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앞서 얘기한 대로 94년 미국월드컵을 본 뒤 꼴도 보기 싫던 축구가 하고 싶어졌다. 장마가 끝나가던 8월 최종걸 강릉상고 감독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대뜸 "짐싸라. 강릉에 가자"며 내 손을 이끈 감독님은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지옥훈련을 시켰다. 혹독한 1주일간의 훈련을 거친 뒤 나는 9월부터 당당히 한국철도 소속으로 실업대회에 출전, 2골을 터트렸다. 나는 살아나고 있었다.
 
한국철도 생활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일용직의 신분으로 월급 84만원(휴일이 많은 달은 70만원대)을 받으며 싸구려 합숙소만도 못한 용산 보선사무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보일러가 고장 나 겨울이면 전기장판과 담요 한장으로 버텨야 했는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입김마저 아까웠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95년 12월 상무에 입대했다. 이곳에서 나는 프로선수들과 생활하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프로에 갈 수 있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던 96년 다시 청천병력 같은 절망이 찾아온다.

큰형(동원)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우리집의 희망과도 같던 큰형의 죽음으로 나는 축구를 그만두고 부모님 곁에서 장남 역할을 해야 했다. "내 주제에 무슨 프로선수"라며 또다시 쓰러질 뻔했다. 이 때 아내의 도움이 축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줬다.(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겠다)
 
제대하던 98년 2월 나는 마침내 프로에 데뷔했다. 부천 SK가 나를 드래프트 2순위로 지명한 것이다. 나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시즌이 끝나자 허정무 당시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난생 처음 받아본 국가대표 유니폼을 안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태극마크가 닳도록 만지고 또 만졌다. 하지만 붉은 유니폼만 입으면 다치는 통에 국가대표 생활도 평탄치 않았다. 99년 6월 코리아컵 대표로 뽑혔지만 훈련 도중 어깨 인대를 다쳐 한 경기도 못 뛰고 도중하차했고, 지난해 1월 히딩크호에 포함됐을 때도 울산대와 연습경기를 하다 왼쪽무릎이 부분파열돼 이후 3개월간 경기장에 나설 수 없었다.

잘 아는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내 얼굴에 그늘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 앞에서 잘 웃지도 못하는 것도 이때 고생 때문이다. 하지만 시련은 많았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나를 지켜준 은인들과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2 댓글

meisin

2002-07-31 23:25:05

월드컵에서의 한번의 실수로 다른 좋은 활약들이 묻혀버린 이을용 선수의 얼굴엔 다른 스타들과는 다른 그림자가 정말 느껴지는거 같습니다.

meisin

2002-07-31 23:25:38

읽어보시고 마음으로라도 그의 터키 진출후의 활약에 응원을 보내면 좋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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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상원님 화이팅,조용필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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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1999-10-23 9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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