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팬클럽 미지의 세계 Cho Yongpil Fanclub Mi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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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문화일보 
기사 날짜 2013-06-1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1&aid=0002158857

<파워인터뷰>“‘과거 조용필’은 남겨두고 ‘미래와 만나는 음악’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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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주얼 와이셔츠에 청바지로 한껏 멋을 낸 조용필은 젊어진 새 음반의 노래들을 대변하듯 싱그럽고 풋풋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 5월 2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YPC프로덕션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60대 육체로, 20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임정현 기자 theos@munhwa.com
歌王 조용필

‘작은 거인’ 조용필(63)은 원래 말수가 적다. 그것뿐인가. 잘 웃지도 않는데다, 농담도 제대로 건네지 않는다. ‘슈퍼스타’ ‘가왕(歌王)’ ‘국민 가수’ 등 최고의 수식어에 익숙한 그는 1인자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고독과 외로움을 40여 년간 숙명처럼 달고 살았다.

이 익숙한 삶은 1970, 80년대 아티스트의 모든 일상을 쥐락펴락했던 미디어의 위력에 눌려, 90년대와 2000년대 방송에서 벗어나 라이브 무대에만 집중하는 일정한 환경의 틀에 갇혀 도식화되기 일쑤였다. 아내 안진현(2003년 심장마비로 별세) 씨의 병간호를 할 땐, 오후 6시 이후 한번도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던 그다. 그리고 지금까지 집, 스튜디오, 사무실만 오가는 그의 ‘따분한’ 일상은 사회성 약해 보이는 그의 태도를 대변하는 듯했다.

올해 데뷔 45주년을 맞아 지난 18집 이후 10년 만에 새 음반 ‘헬로(Hello)’를 낸 그는 달라져 있었다. 예상을 빗나간 감각적인 선율, 10, 20대들이 만끽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리듬, 뮤지션과 대중 모두 좋아할 수 있는 노래들이 담긴 새 음반에 대한 전세대의 열광은 그를 ‘안’에서 ‘밖’으로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아이돌 그룹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온라인 음원차트 상위권에 그의 이름 석 자가 오랫동안 머물고, 모든 매체가 쉴 새 없이 그의 소식을 퍼다 나르기 바쁘고, 시내 곳곳에서 그의 신곡들이 연이어 울려 퍼지면서 그도 공개 소통의 끈을 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 5월 2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그의 기획사 YPC프로덕션을 찾았을 때, 조용필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얼굴에 한아름 머금고 이따금 10대들이 즐겨 사용하는 유행어를 툭툭 내던졌다. 전성기를 거른 해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올해는 ‘특별한 전성기 같다’고 하자, 그는 “요즘 ‘대박’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며 웃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여기저기서 전화도 많이 오고, 찾는 사람도 많아져 ‘멘붕’(‘멘탈 붕괴’의 약어로 강한 충격 상태를 일컫는 신조어)에 빠졌어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하하.”

새 음반만큼 젊어진 표현력이 의외이면서 반갑기도 했다. 그는 ‘조용필’이라는 이름으로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고 있었다. 그의 오늘은 어제까지 해 온 일들과 미련없이 결별할 수 있는 용기이자, 결단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의 모든 변화 또는 진화는 음악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삶의 대부분의 지표와 중심이 음악에서 발현되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음악 얘기가 아니면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음악 이외의 얘기에서 그는 별로 할 말이 없는 듯했다. 몇 년 전 그와 10시간이 넘도록 고깃집에서 자동차 안으로, 다시 노래방에서 그의 집으로 옮겨 다니며 수다를 떤 적이 있는데, 그 시간 동안 한 일이라곤 소주잔을 주고받는 것과 음악 얘기를 한 게 전부였다. 지난 10여 년간 그를 지켜보며 느낀 건 ‘조용필은 음악에 미친 뮤지션’이라는 사실이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새 음반 얘기부터 꺼내자, 그는 대뜸 전자 기타를 잡았다. 다양한 코드를 지판 위에 옮겨 잡으며, “나는 멜로디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보다 한 음에서 다양한 코드로 연주되는 음악을 좋아한다”며 조금씩 목소리를 높였다.

―1980년에 나온 1집 수록곡 ‘단발머리’ 때처럼, 새 음반도 ‘파격의 연속’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외국 음악을 많이 듣던 시기였어요. 사실 전 우리나라 음악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했거든요. 그래서 가요 쪽에는 잘 쓰지 않던 메이저 세븐 코드를 ‘단발머리’에 처음 실험적으로 썼어요. 새 음반의 수록곡도 제가 쓴 건 아니지만, 현재의 트렌드를 읽고 반영할 수 있는 곡들을 모으다 보니, 감각적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음악들을 결과적으로 고르게 된 거예요.”

―(새 음반에) 한국적 한의 정서를 살린 곡들이 없어 아쉽다는 의견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시도한 음악들은 전에 했던 음악들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 흔적들이에요. 제가 모자란 사람이란 걸 잘 알기 때문에 더 배우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과거는 과거대로 조용필을 남겨두고, 현재와 미래의 조용필과 만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어요. 유명 외국 작곡가와도 손잡고, 모르면 배운다는 정신으로 작업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10년 만의 새 음반이 10, 20대 젊은 층에게 크게 어필해서 큰 화제였습니다.

“90년대 초반에 콘서트만 하겠다고 발표하고 미디어, 특히 TV와 거리를 뒀어요. 그 이후에 제가 음반을 열심히 만들어도 히트가 잘 안됐어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죠. 아무래도 TV나 라디오를 통한 홍보가 아니고서는 알릴 기회가 적었으니까요. 이번에는 달라진 환경에 맞게 홍보 창구를 다양화한 게 주효했던 것 같아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하거나, 음원과 음반 홍보를 따로 나눠 하거나 하는 식으로 좀 공격적인 홍보 전략을 구사한 셈이죠. 이를테면 ‘바운스’는 온라인으로 음원 선공개를 하고, ‘헬로’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알리는 식이었어요. 2010년부터 저는 과거 조용필이 아닌, 신인 조용필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과거에 제가 어떤 영광을 누리고, 어떤 히트곡을 가졌는지는 아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중요한 건 앞으로 제가 어떤 음악을 할 것인가예요. 이미 19집이 나왔으니, 이젠 20집에 대한 고민을 투영해야죠.”

그는 여기까지 얘기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7월이나 8월 중 중요한 이벤트가 하나 있다고 귀띔했다. 언론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20집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것들 중 하나는 이 시기에 유럽의 유명 작곡가와 조용필이 만나 20집 음반 계획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력한 행보는 조용필이 유럽으로 떠나 그곳의 작곡가들과 20집 수록곡을 어떻게 그려 넣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토의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새 음반이 발매된 지 채 2개월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이미 20집을 계획하고 있었다. 조용필은 “이르면 내년쯤에 20집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20집은 어떤 색깔로 꾸려지나요.

“전 결국 19집의 10곡을 만들어냈지만, 아쉬움이 많은 음반이기 때문에 다음 음반에는 아쉬움을 줄이는 작업이 될 거예요. 제가 19집의 수록곡 같은 음악을 만들려다 제 능력에 부쳐 포기하고 다른 작곡가의 곡을 받았잖아요. 이런 스타일의 감각적인 음악들을 제가 만들 수 없다면, 과감히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작곡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20집도 그런 것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어요.”

―모두가 극찬하는 새 음반에 대해 왜 ‘아쉽다’고 말하시는 건가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화음이나 (사운드) 밸런스가 마음에 안들었어요. 초기 작업에서 ‘바운스’를 스튜디오에서 들을 땐 사운드 밸런스가 잘 맞았는데, 휴대전화나 CD플레이어에서 들으면 다르게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믹싱을 했어요. 처음에는 런던에서 작업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미국으로 달려갔죠. 그때 ‘외국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되나’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라, 우리나라에서 쓰지 않는 기계까지 구입해서 소리를 맞추려고 했어요. 그리고 자존심이고 뭐고 배울 게 있으면 배우자는 주의로 미국에 가서 “가르쳐달라”고 했죠. 그렇게 여러 번 시도하고 배우고 해서 가까스로 맞추긴 했는데, 아직도 100% 마음에 든 건 아닙니다.”

―60대에 다시 ‘국민 가수’ 타이틀 방어전에 성공했다는 얘기도 나돕니다.

“외국 속담에 성공은 운과 시기, 본인의 능력이 좌우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저도 그런 것 같아요. 10년 만에 낸 새 음반은 그만큼 운도 따랐고 타이밍도 좋았던 셈이에요. 하나 더 있다면, 저를 모르는 세대들은 저를 신인으로 봐주고 있다는 거예요. ‘신인 같은 구인’이 다른 소리와 리듬, 장르의 음악을 갖고 나왔는데, 젊은 세대들은 마치 신인 가수의 등장처럼 봐준 것 같아요. 그리고 처음부터 이 음반을 히트시켜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그걸 없애기 위해 많이 자제했죠. 저는 원래 음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 히트나 성공 같은 거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작품을 하나의 역사로 인식하자는 개념에서 출발했어요. 그래서 이 음반을 음악하는 뮤지션들이 좋아해 주면 그걸로 만족하려고 했어요.”

조용필은 지난 4월 23일 새 음반 공개를 위한 쇼케이스 무대를 갖기 전에 부모님과 부인 안진현 씨 산소를 찾았다. ‘음반 잘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는지, ‘(아내 숨진 지) 10년 만에 새 작품 만들었다’고 알리고 싶었는지 구체적인 답변은 내놓지 않았다. 그는 다만 “(아내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했다”며 “어떤 말을 했는지는 둘 만의 비밀”이라고 웃었다. 아내를 잃고 10여 년간 홀로 빈방을 지키고 있는 조용필은 그 긴 허기의 세월에도 절제의 생활을 꾸려왔다. 담배는 7, 8년 전에 일찌감치 끊었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한 달에 한두 번 간단하게 마시는 정도다.

―절제로 꾸려진 생활 덕분인지, 새 음반 노래를 들은 미국 유니버설뮤직 사장이 “20대 신인 가수냐”고 물었다고 하던데요.

“27세 정도 된 목소리라고 말했다고 들었어요. 그 얘길 듣고 ‘멘붕’이 왔어요. 제 생각에 목소리가 변한다는 건 저·중·고음 중에서 고음이 떨어졌다는 의미거든요. 저도 앞으로 5년 후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고음만 유지할 수 있다면 계속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하는 가사처럼 사랑을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그러기엔 제게 자격이 없어요. 너무 나이가 들었잖아요. 그래서 이젠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이것이 운명이려니 하고 생각하고 살아요. 솔직히 ‘나도 있었으면’하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에이 이게 운명이다’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죠. 운명을 받아들이면, 아주 마음이 편해져요.”

―‘조용필의 음악’엔 기쁜 노래에도 슬픈 연민의 정서가 있는데, 이번에는 그것마저 다 버렸습니다.

“정서라는 것은 시대마다 달라지지 않나요? 1980년대와 90년대 정서가 다르고, 또 2000년대의 정서가 바뀌잖아요. 우리의 정서는 우리도 모르게 변화해왔어요. 옛날에는 통곡 같은 한의 정서가 있었지만, 지금 시대엔 이런 정서도 희석되고 있죠. 그래서 예전에는 늘 노래를 할 때, 통곡하듯 불러서 듣는 이와 슬픔을 공유해야 했어요. 이제 제가 할 일은 절제예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그 겨울의 찻집’)는 제 노래 가사처럼, 가사는 슬프지만 소리는 꾹꾹 참아내는 게 필요한 시대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조용필을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뮤지션이라고 거침없이 외칠 수 있는 것은 현재 대중음악이 걸어가고 있는 형태와 내실을 예리하게 뚫어보고 있는 혜안과 수십 년간 거르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성실한 태도 때문이다. 그는 1968년 미 8군에서 기타리스트로 데뷔한 이래 주한미군방송(AFKN) 주파수를 놓은 적이 없고, 매주 5회 이상 녹음실에서 가창 연습도 빠뜨린 적이 없다. 거창한 말이나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남을 감동시키는 재주를 연마하는 시간에, 그는 ‘음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성장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여왔다.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 노력 중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나요.

“타고난 것도 영향이 있겠지만, 후천적인 노력이 더 많았다고 생각해요. 비율로 치면 3대 7 정도 될까요? 돌이켜보면 저는 음악을 너무 좋아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음악이 너무 좋아요. 좋은 곡을 들으면 ‘나도 꼭 이런 곡을 해야지’하는 다짐을 하게 되니까,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음악가는 사실 대중의 입장에서 판단하기 힘든데, 작곡이나 선곡 능력이 대중과 잘 호응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택 과정에서 더 냉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제가 좋아하면 관객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음악은 멋이 아니라 순수함 그 자체라고 보거든요.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건 훌륭한 곡이죠. 음악 지식 아래서 만들어지는 곡도 있고, 대중이 쉽게 좋아하는 대중적인 곡도 있지만, 저는 대중적인 것을 더 원하는 편이에요.”

―주변에서 조용필은 신이 내린 음악가라는 얘길 많이 합니다. 늘 ‘최고’를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 음악 역사가 짧아서 그런 얘기들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저는 다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항상 음악과 함께 살면 된다’ 제가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자극과 충격을 끊임없이 받는 거예요.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으면 다시 뭔가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1등의 자리에 있을 때, 방송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라이브 무대에만 집중하셨습니다.

“한번은 TV 음악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베이스나 드럼 소리가 잘 안들리게 세팅을 해놨더라고요. 명색이 밴드(‘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인데, 방송에서 그걸 잘 서포트 해주지 못했어요. 그게 싫어 TV를 안하겠다고 선언했죠. 그 뒤부터 라이브 무대만을 고집한 거예요. 한번은 미국에 가서 TV를 트는데, 제가 아는 유명한 뮤지션들은 TV에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들 모두 TV가 아닌 무대에서 자신의 음악을 알리고 있었던 거예요.”

―음악을 할 때, 늘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 같습니다.

“성격일 수 있어요. 하하. 어떤 때는 ‘내년에는 좀 쉬면서 유럽 여행도 다녀야지’다짐하면서도 늘 생각에 그치기 일쑤예요. 어느새 녹음실에 처박혀서 고민하고 있는 절 발견할 때도 많죠. 한 달로 보면 70% 정도는 음악에 할애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인생 아닌가요?”

조용필의 음악성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숨겨진 일화가 하나 있다.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지난 35주년 공연 이야기다. 객석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세차게 몰아친 비 때문에 무대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보컬을 비롯한 각 연주자에겐 모니터가 하나씩 설치돼 있는데, 이 모니터로 연주자들은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들으며 연주할 수 있다.(모니터가 없으면 연주했을 때, 다른 악기 소리를 몇 초 후에나 들을 수 있다. 그 소리의 파장이 주경기장 맨 끝쪽을 치고 돌아오는 시간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야외무대에선 소리의 파장을 고려해 모니터가 제대로 작동돼야 한다)

그런데 몇 곡을 부른 뒤, 조용필의 모니터가 갑자기 고장이 났다. 초특급 사고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관객 5만을 두고 엔지니어가 무대에 뛰어올라 모니터를 고칠 수도, 그렇다고 잠시 중단한다는 안내방송을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필은 모니터가 고장 났다는 걸 노래를 부르면서 알게 됐다. 1소절을 부르며 모니터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이렇게 대처했다. 비 때문에 씌워진 모니터 위의 비닐을 이용한 것이다. 모니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키보드가 연주할 때 그 세기의 파장으로 (조용필의) 모니터에서 비닐이 펄럭거리는 모양새를 보고 박자를 맞춘 것이다.

35주년 공연을 끝내고 그는 “나는 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마음속으로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10년 뒤, 새 음반의 대박 행진과 콘서트 매진으로 다시 우뚝 선 그는 45주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제 몇 주년 하는 수식이 너무 구태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변화를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제 음악관과 맞지 않는 느낌이죠. 앞으로 제 음악에서 소위 ‘뽕끼’ 선율은 더이상 나오기 힘들 거예요. 10, 20년 뒤 제 노래를 듣고, ‘그 때 그런 음악을 했었네’하는 소리를 듣고 싶거든요.”

조용필이 한사코 거부하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이는 수식이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수식을 붙여야 비로소 그의 이름 석자 ‘조용필’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호기심과 기대감을 자극하는 ‘작은 거인’ 또는 ‘슈퍼스타’의 내일이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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