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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뉴스메이커 
기사 날짜 2016-03-07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 모두‘조용필 화(化)’했던 조용필의 가장 조용필다운 음반
조용필 데뷔 당시 음반을 다시 듣다

‘조용필 작, 편곡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조용필의 첫 독집앨범은 현재 조용필의 음악세계에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소중한 음반이다. 작사, 작곡, 편곡, 기타 연주, 가창력까지 한꺼번에 집약되어 있는 첫 음반기록인 동시에 조용필 음악의 원류(原流)이기 때문이다.
또한 ‘드럼 드럼 드럼, 엠프 기타 고고 고고 고고!’라는 부제가 붙은 3인조 그룹, 김트리오 첫 음반 역시 ‘김대환 드럼과 조용필, 이남이 기타’가 빚어낸 빛나는 걸작이다.
2013년, 정규 앨범 19집 ‘Hello’를 통해 여전히 지금의 10대들에게 까지 ‘옵빠’로 불리는 조용필. 물리적인 나이로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음악들은 각각의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왔다. 동시에 그의 노래들은 다시금 각각의 시대와 세대를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날마다 증발, 늘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이 말은 필자가 한창 필드에서 뛰던 기자 시절, 전성기 때의 조용필이 한 말이다. 그렇듯 현재까지도 끊임없는 변신을 거듭해오고 있다.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 모두 ‘조용필 화(化)’했던 조용필의 가장 조용필다운 음반, 그 데뷔 당시 음반들을 다시 들어본다.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각각의 시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조용필 음악의 원류(原流)

  
 

아무리 설명을 길게 해도 부족한, 그래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가왕(歌王)’ 조용필.
‘70~80년대 옵빠부대’를 이끌던 여학생들의 ‘책받침 스타’를 넘어 전 국민이 좋아하는, 말하자면 당시 문화 예술계를 통틀어 최고의 스타였던 그. 집집마다 조용필 음반 한, 두 장 없는 가정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음반시장의 ‘밀리언셀러시대’를 열었고, 또한 우리나라 음반시장을 팝의 시대에서 가요의 시대로 전환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남녀노소, 전 국민적인 사랑이 그러하듯 그는 모든 장르를 완벽히 소화하는 가수다. 트로트에서 락, 민요에서 동요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어떤 장르든 그를 거치면 ‘조용필화’되는, 이른바 ‘조용필 창법’이라는 새 음악용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이 첫 독집음반은 싱어송라이터로써의 음악성이 돋보이는 자작곡들과 편곡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외국 곡들, 그리고 넓은 음역대의 다양한 가창력을 만끽할 수 있는 노래들로 채워져 있다. 이를테면 ‘한오백년’으로 회자되는 득음, 탁성으로 바뀌기 이전의 미성을 들을 수 있는 음반이자 생생한 기타 연주와 함께 진성과 가성의 절묘한 조화를 들려준다.

김대환의 김트리오 시절, 음반 기획자 최동권 만나 첫 독집 음반 발표

이 음반은 아세아레코드사를 통해 1972년 2월 25일 발표되었다. 발표 당시 조용필은 미8군 클럽을 거치며 김대환, 최이철(이후 이남이) 등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최이철(현 사랑과 평화)씨는 말한다. “당시 그룹 멤버로서 용필이형은 매우 특이한 음악을 했어요. Yardbirds 음악에 심취해 ‘What Do You Want Lyrics’를 비롯한 4분의 5박자 노래에 관심을 갖는 등 매우 앞서갔었죠. 특히 ‘Lead Me On’ 같은 노래를 부를 때면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귀 기울이곤 했죠. 그런 중에서도 ‘항상 네 것을 하라’고 강조하는 김대환 형으로 인해 음악적 독창성에 더 빠르게 눈 떴을 거예요.”
김트리오를 이끌던 드러머 김대환. 우리나라 그룹사운드의 맏형이자 ‘열 손가락에 끼운 여섯 개 스틱’으로 상징되는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가. 당시 김대환은 김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 그룹사운드협회 초대회장(한국연예협회 그룹사운드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71년 5월에 열린 ‘플레이보이컵 쟁탈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출전을 조용필에게 권유, 가수왕 상을 수상하는 데 한몫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조용필은 ‘뮤지컬 사랑의 일기(오스카 OR-1001)’음반을 통해 가수로 첫 취입을 하게 된다. 이 음반에 수록된 ‘케세라’ ‘Lead me on(님이여)’ 등을 작사했던 김상만씨는 ‘조용필이 부산 다운타운가에서 활동할 당시부터 부산 국제시장에서 음반 도매상을 하던 최동권(당시 국제레코드 대표)씨가 눈 여겨 보고 있었다.’며 이후 국제레코드를 접고 국제기획을 시작, 조용필 독집음반을 적극 추진했다고 밝힌다.

그렇듯 이 독집음반은 최동권씨에 의해 기획되었다. 이후 그는 ‘김대환 드럼생활 20주년 기념음반-김트리오 연주집’을 비롯해 ‘에보니스’, ‘리바이블 크로스’, ‘윤희정’ 등의 음반을 기획, 제작했다.

이 음반에 적혀있는 ‘조용필 작, 편곡집’이라는 부제가 그렇듯 이 음반은 조용필의 자작곡과 그가 무대에서 주로 불렀던 애창곡들로 채워져 있다. ‘꿈을 꾸리’는 김미성 작사, 최이철 작곡. 이 음반에서 단연 주목받는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일 것이다. 작곡가 황선우씨에게 당시 얘기를 들어봤다.
“최동권 대표로부터 연락을 받고 악보 두 장을 건넸는데 그중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조용필이 골랐어요. 처음 충무로 초동여관서 조용필을 만나 노래 연습을 시켰지요. 무대에서 팝만 주로 불러왔기 때문인지 트로트 창법이 다소 미숙해 몇 군데 지적을 해주긴 했지만 노래를 썩 잘했어요. 이 노래는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많은 가수가 불렀지요. 하지만 이때 조용필이 직접 기타 치며 부르는 노래만큼 감동을 받은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거예요. 비록 여관방이라 작은 소리로 불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순간적으로 노래가 드디어 주인을 제대로 만났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음반 발매 얼마 후 뒷면 타이틀곡인 ‘일하지 않으면 사랑도 않을래’가 금지곡 판정을 받으면서 음반 역시 판매 금지된다. 금지 사유는 ‘가사 저속’과 ‘퇴폐’. 이 노래 가사의 '오늘도 늦잠에 세수도 안하고/ 늘어놓은 담배꽁초 치렁한 머리칼' 같은 부분 때문이었다. 이 노래의 금지곡 판정에 따라 앨범 자체도 판매 금지되면서 자동적으로 희귀 음반이 됐다. 때문에 아세아레코드 측에서는 부랴부랴 ‘돌아와요 부산항에’만을 따로 떼어내 옴니버스 음반에 수록, 제작하지만 이 또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이 음반은 조용필의 음악성이 집약된 음반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 진성과 가성을 동시에 구사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 자작곡 ‘내 마음 속의 그림자’, ‘일하지 않으면 사랑도 않을래(작사가 김미성은 김트리오 멤버들과 자주 어울렸던 인물로 조용필 노래 이후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번안곡 ‘Lead Me On(님이여)’ 등을 통해 두 가지 음색의 창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이를테면 조용필 혼자 구사하는 진성과 가성의 절묘한 하모니가 마치 호흡이 잘 맞는 듀오의 노래를 듣고 있는 듯 느껴질 정도다.

넓은 음역대의 가창력을 유감없이 증명해 보이는 이 노래들은 이후 전개되는 조용필의 화려한 창법, 즉 소리를 달리하며 내는 다양한 표현 방식에 이미 눈 떴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로부터 3년 뒤인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편곡과 가사 일부를 바꿔 대히트, 전국을 강타한다. 당시 조용필은 그룹사운드 ‘25시’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룹 25시의 리더 조갑출 씨, “용필이가 25시 싱어이자 퍼스트 기타로 활동하고 있을 무렵 재일동포 모국방문이 이루어졌어요. 때맞춰 음반제작자인 킹박(본명 박성배)이 안치행씨에게 편곡을 의뢰, 가사 일부를 바꿔 재취입했죠. 물론 연주는 우리 25시가 맡았지요. 트로트와 록을 접목한 새로운 스타일의 국민가요, 그리고 새로운 슈퍼스타가 동시에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우리나라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가수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가까운 일본에서도 ‘가장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한 외국 가요’라는 명예도 갖고 있는 이 노래. 처음 부산에서 시작된 열풍이 단숨에 전국으로 번지자 이전에 발매되었던 이 독집음반이 재발매되지 못하도록 국제기획 쪽에 온갖 압력이 가해졌다는 것, 또한 유명한 일화다. ‘그리운 내 형제여’가 ‘그리운 내 님아’로 불리어지면 안 되는 상황...등, 비하인드 스토리는 다음 기회에 밝히기로 한다.

기타를 너무 많이 쳐 손가락이 까맣게 변했다는 고교 시절부터 친구들과 그룹 '앳킨즈(Atkins)'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자리매김 되기까지... 그리고 그동안 정치계와 기업인들이 무수히 접근했지만 단 한 차례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으며 ‘가수 조용필’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던 진

  
 

정한 가객.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빅 히트 직후인 1976년, ‘나의 길’의 노랫말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음악을 찾기 위해 수도 없이 길을 잃었다’고 고백했다. ‘가지 말라고 그렇게 어머니가 만류하던 길’, ‘매번 길을 잃고 방황하던 나날들’...
그러나 잘못 들어선 길이 새로운 지도를 만든다던가? 이제금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대중음악의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조용필. 우리 대중음악사에 빛나는 자신의 음반들마다 무수한 변화를 이끈, 그 출발지점에 있는 이 음반은 ‘대한민국 대표가수 조용필’이라는 과녁을 향해 ‘영점’을 잡은, 매우 소중한 기록임에 틀림없다.

김대환 드럼 생활 20주년 기념 음반 ‘김트리오-드럼 드럼 드럼, 엠프 기타 고고 고고 고고!’

‘김대환 드럼 생활 20주년 기념 음반’이라는 부제가 붙은 ‘김트리오-드럼 드럼 드럼, 엠프 기타 고고 고고 고고!’음반은 또 어떤가.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가’이자 ‘열 손가락에 끼운 여섯 개 스틱’으로 상징되는 김대환(1933~2004). 신중현과 조용필로부터 ‘한국 그룹사운드의 맏형’이라 불리는 그는 우리나라 미8군쇼 60년사와 그룹사운드 50년사를 관통하는 인물로 3인조 그룹 김트리오를 이끌었다. 음악의 형식과 틀을 깨 ‘김대환 타법’이라는 새로운 음악어법을 창조해낸 ‘Free music’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타계 10주년을 즈음하여 재조명 & 재평가 작업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는 김대환의 초기 음반이 발굴되어 재발매되는 것은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드럼 드럼 드럼, 엠프 기타 고고 고고 고고!’라는 부제가 붙은 이 음반은 70년대 고고시대의 산물이자 라이브만을 고집했던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대중문화 기록이기 때문이다.

김대환은 미8군쇼 활동 당시 처음 신중현을 만나 ‘클럽데이트’라는 패키지쇼를 시작으로 ADD4, Questions를 거치는 동안 늘 새로운 소리를 찾는 실험에 몰두했다. 생전에 그가 들려준 일화 한토막.“외국 그룹사운드들이 내는 기타의 ‘쉰 소리’가 너무 신기해 신중현과 둘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했죠. 어떻게 하면 이러한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이태원에 가서 시계태엽에 쓰이는 강철을 구해 신중현의 기타에 묶고 떨림을 이용해 소리 내기를 시도해봤죠. 마침내 ‘거억~ 거억~’하고 쉰 소리가 나는데 얼마나 감동했는지, 둘이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러댔죠.”

명불허전(名不虛傳), 김대환 드럼과 조용필, 이남이 기타가 빚어낸 빛나는 걸작

미8군쇼 활동 이후 68년부터 그룹 ‘코리아나’와 함께 월남을 시작으로 동남아 순회공연을 거친 뒤 귀국, 다시 신중현과 Questions에 몸담았다. 신중현을 통해 록을 알게 됐지만 이후 비트 강한 록보다 블루스가 좋아 1970년 말, ‘김트리오’를 결성한다. 미8군쇼 무대에서 알게 된 기타리스트 조용필, 최이철과 함께.

당시 무서운 신예이자 김트리오 멤버였던 최이철(현 사랑과 평화)은 ‘김대환은 자기만의 음악 색깔을 유독 강조, 곡을 만들 때도 되도록 다른 음악을 듣지 말고 자신만의 음악을 찾으라고 했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최이철을 비롯해 52년생 19살 동갑내기 6명을 모아 ‘아이들(Idol)’이라는 그룹을 조직, 음반 제작에 나섰을 만큼 뛰어난 기획자이기도 했던 김대환은 생전에 인터뷰를 통해 김트리오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 무렵 나는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초대회장을 맡음과 동시에 그룹 ‘아이돌’ 등의 쇼 무대를 위해 바쁘게 보내던 중 또 한사람의 재목을 만나게 되었죠. 바로 21살, 음악이 좋아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조용필이었어요. 유독 숫기 없고 붙임성도 없었지만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기타리스트 최이철과 나, 그리고 용필이에게는 보컬과 세컨드기타를 맡겼죠. 얼마 안 있어 최이철 대신 이남이가 합류했지요.”

‘드럼 생활 20주년 기념 음반, 김대환과 김트리오-드럼 드럼 드럼, 엠프 기타 고고 고고 고고!’ 음반은 1972년 3월, 국제기획(대표 최동권)이 기획한 야심작이다. 유니버샬 스튜디오에서 녹음, 아세아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되었다. 이때 멤버가 최이철에서 이남이로 바뀌었다.

미군 캠프 주변 클럽의 오픈밴드를 거쳐 부산과 서울의 밤무대에서 주로 활동하던 김트리오. 이들이 발표한 첫 음반 수록곡 중 A면 첫 곡 ‘꿈을 꾸리’는 최이철 작곡의 창작곡이다.

이어 두 번 째 ‘마음대로 해라’는 ‘김대환 드럼 20주년 기념음반’의 백미라고 할 만큼 김대환 드럼이 빛을 발하는 걸작이다. 조용필과 이남이의 기타, 그리고 김종호의 건반이 비교적 악보에 충실한 반면 김대환의 드럼과 강태환의 색소폰은 박자와 리듬의 틀을 깨며 자유자재로 싱커페이션(syncopation, 앞당김음)과 앤티시페이션(anticipation)을 구사한다.

제목 ‘마음대로 해라’가 그러하듯 록과 재즈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주를 선보인 김대환은 이후 재즈 드러머로 변신, 강태환(색소폰), 최선배(트럼펫)와 함께 ‘강트리오’를 결성해 10년간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Free Jazz 공연을 펼쳤다.

이어지는 곡들은 모두 외국 곡들로 구성, 비교적 원곡의 리듬과 박자에 충실하고 있다. 각각의 곡들의 원곡을 살펴보면, 라피오챠(Lapiogga), 사랑은 오직 하나(I Only You Love), 비(Rain), 사랑의 자장가(Geordie). 빛나는 성좌(Aquarius), 굳바이(Good-bye), 돌아오라(Get Back), 계절 속의 사랑(Time of the Season).

라인업은 드럼 김대환, 기타 조용필, 베이스 기타 이남이 외에 색소폰 강태환과 건반 김종호가 세션으로 참여했다. 김종호는 77년 YMCA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김종호와 북두칠성’의 리더이자 작곡가.

가히 명불허전(名不虛傳), 각각의 멤버들은 이후 김트리오를 떠나 대한민국 음악사의 Legend로 자리매김 되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설명을 길게 해도 부족한, 그래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가왕’ 조용필, ‘아이들’, ‘서울나그네’를 거쳐 현재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최이철, 또한 ‘신중현과 엽전들’에서 ‘사랑과 평화’, ‘세나그네’를 거쳐 ‘철가방 프로젝트’까지 대한민국 밴드사를 지켜온 이남이, 그리고 스스로 테두리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 타악기 연주가 김대환까지.
 
김대환, 음악이라는 형식 자체가 걸림돌이라며 또다시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 나섰던 그의 음악을 먼저 알아본 것은 일본과 유럽이었다. 1985년 사물놀이패와 함께 일본 순회 협연을 시작으로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공연으로 보내며 1천회 이상의 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가로 평가받았던 그의 연주는 어느 악기와도 어울릴 수도 있었고 어떤 박자와도 맞출 수 있었다.

특수 제작한 1400CC 할레이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악기로 이용하고, 쌀 한 톨에 283자의 반야심경을 새겨 기네스북에 오른 미각(微刻) 조각가이기도 했던 그가 스스로 지은 호는 ‘흑우(黑雨)’. 흑(黑)은 ‘어두운’ 또는 ‘숨겨진’이라는 의미이고 우(雨)는 ‘비’인 동시에 ‘때림(Beat)’을 뜻한다. 흑우(黑雨)는 바로 ‘숨겨진 소리’를 의미하며 ‘세상 속에 감춰진 소리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한 번의 때림으로 완성시키는 ‘원비트(One-beat)’, ‘김대환 타법’이라는 음악어법을 새롭게 창조해낸 그는 하나의 비트에 세상의 온갖 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오토바이를 통해 땅의 울림, 심장의 울림을 듣고 세각(細刻)을 통해 섬세한 감각과 만나며 소리가 몸에 밸 때까지 연습과 훈련을 거듭해 비로소 ‘소리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던 그. 신중현 그룹, 김트리오, 재즈 드러머를 거치며 리듬과 박자를 버리고 틀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 평생 소리의 근원을 찾아 다녔던 수행자. 그렇듯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소리에 바쳤던 ‘장인’ 김대환, 2004년 타계 당시 담당의사는 그의 신체기관 거의 모두가 남김없이 소진된 상태임을 확인하고 한 번 더 놀랐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트리오 신화를 이끈 김대환과 조용필, 이남이. 아직 찾아내지 못한 소리가 무수히 많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음악은 목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들을 때마다 우리의 심장을 두드리는 이들의 뜨거운 박동소리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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