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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2008-03-07] "'극지의 노래' 제대로 썼다는 보람 느꼈죠"
2008.03.07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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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의 노래' 제대로 썼다는 보람 느꼈죠"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남극노래 만들다 환경지킴이 된 정풍송 작곡가
서울에서 1만 7240㎞나 떨어진 남극 세종기지에서는매일 아침, 가수 인순이 씨가 부르는 흥겨운 노래가 울려 퍼진다는데요.

‘억만년 전의 지구 비밀. 억만년 후의 미래.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비 속의 남북 극지~’ 이렇게 시작하는 ‘극지의 노래’란 곡입니다. 이 노래는 ‘허공’으로 유명한 작곡가 정풍송 씨가 만든 곡인데요. 강추위와 싸우며 힘들게 연구하는 세종기지 대원들은 매일 아침, 이 노래를 들으며 많은 힘을 얻고 있답니다.
이렇게 노래로 남극과 인연을 맺게 된 정풍송 씨는 최근 세종기지 설립 20주년 기념식에 초대 돼, 직접 남극을 방문하고 오셨는데요. 작곡가 정풍송 씨를 3월 6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남극에 울리는 기상나팔 ‘극지의 노래’
▶ 남극 세종기지에 얼마 동안 다녀오신 건가요?
16일 걸렸어요. 극지연구소에서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왔었어요. 남극의 세종기지, 북극의 다산기지 두 곳이 있는데 이곳의 뜻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제가 가사를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허공을 작사한 분이니까 알아서 해달라고 하더라고요.사실은 세종기지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았어요.
어릴 때부터 천체나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는데 2003년도에 전재규 대원의 사고로 인해서 더 관심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기뻤죠. 가사 만들 자료로 책을 여러 권 보내줘서 뒤늦게 독파하면서 가사도 만들고 곡을 만들고 편곡도 하고 가수 인순이씨가 노래를 했어요.
▶ 노래는 미리 만들고 극지는 나중에 가셨어요?
이번에 세종기지에 갔더니 새벽 기상나팔처럼 전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인순이씨의 노래가 나오는데 같이 간 일행이나 세종기지 대원들이 가사를 극지연구소에서 만든 줄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썼다고 했더니 마치 자기들이 생각한 내용을 전문가처럼 썼다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썼구나 싶어서 보람도 느꼈어요.
▶ 세종기지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죠?
비행기로만 36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LA까지 갔다가 칠레 산티아고를 거쳐서 지구상에 있는 최남단의 도시인 푼타아레나스라는 곳을 갔어요. 거기서 기상을 봐가면서 킹조지섬을 갔어요.
▶ 고생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이 했어요. 킹조지섬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세종기지로 들어가야 하는데 시간은 30분밖에 안 걸려요. 그런데 바람이 많이 부니까 고무보트가 출발을 못하고 있다가 러시아 기지에서 3시간 동안 피난해 있었어요. 그러다가 날씨가 좋아져서 다시 출발을 했는데 다시 바람이 불더라고요. 남극의 날씨는 10분 후를 모르겠어요. 파도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거예요. 세종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구명복을 입었는데도 얼마나 파도가 심하고 불이 찼는지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어요.
◇ 물자공급 1년에 한 번, 쇄빙선 완성 시급
▶ 설원과 빙원을 직접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남극에 빙하도 있고 빙산도 있고 빙벽도 있고, 그림으로는 참 좋잖아요. 그런데 기상의 악조건 속에서 보니까 더 고생스러웠던 것 같아요. 순간적으로 내가 왜 이런 곳에 오려고 했던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곳에 1년 내내 있어야 하는 세종기지 대원들이 고생스럽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 세종기지 개설 20돌을 맞이해서 초대를 받으신 건데 어떤 일을 하고 오신 거예요?
20주년 행사와 더불어 그동안 낙후된 장소나 시설들을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6개월 전에 끝냈어야 했어요. 세계 20여 개국이 남극에 기지를 두고 있는데 폴란드와 우리나라만 쇄빙선이 없더라고요. 쇄빙선이 없다 보니까 이런 공사를 위해서 중국에 의뢰를 하는 거예요. 중국이 최근에서야 갖다 주기 시작해서 공사가 시작이 되었던 거죠.
우리나라도 쇄빙선을 올해 1월에 건조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빠르면 2009년 말에는 완성이 된다고 하네요.그렇게 되면 필요한 물자를 세종기지에 언제든지 실어 나를 수 있어요. 지금은 세종기지에 필요한 부식품들을 1년에 한 번씩 실어 나른다고 하니 사과 같은 건 반은 썩어버리죠. 채소를 싱싱한 걸 먹는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세종기지 대원들이 모두 17명인데 공사를 위해서 우리나라에서 40명이 파견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동행한 일행들이 11명이었고요. 그러니 2평쯤 되는 방에 4명씩 들어갔어요. 어쨌든 가서 건설현장이나 행사, 세종기지 대원들의 연구 활동, 탐사 등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 환경지킴이로 돌아오셨어요?
저뿐만 아니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지구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요즘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잖아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7번째로 이산화탄소 배출국가에요. 그만큼 책임을 져야죠.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태평양 한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석유를 땝니까, 석탄을 땝니까?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어요. 바닷물이 녹아서 자꾸 수온이 높아지니까 다른 곳으로 피난가고 그러거든요.
제가 가 있는 동안에도 세종기지 맞은편에 있는 빙하의 빙벽이 밤사이에 굉장히 큰 진동을 내면서 무너지더라고요. 비바람이 불 때는 더 심하죠.지구 온난화라고 해서 몇 년 사이에 무너져 내리는 면적이 넓어요. 그래서 유빙들이 근처 바다를 떠다니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남극이나 북극의 빙하들이 다 녹으면 바다 높이가 50~60m가 높아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네덜란드는 아예 없어지고 태평양과 대서양의 섬들도 다 잠겨버리는 거죠.
◇ 민주화의 열망을 담은 <허공> ‘민주’를 ‘그대’로 바꿔
▶ 작곡하신 대중가요들이 다 명곡인데 그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어떤 건가요?
히트와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은 한상일 씨가 부른 <웨딩드레스>가 있고 홍민 씨가 부른 <석별>, 그리고 조영남 씨가 부른 <옛 생각>, 그 외에 <허공><미워 미워 미워><갈색추억> 등이 있어요.
▶ 조용필 씨가 부른 <허공>을 만드실 때 에피소드가 있었다면서요?
1979년에 10.26이 터졌어요. 그 다음에 유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서울의 봄이니 뭐니 하면서 국민들이 민주화에 대해서 열망을 하던 때였어요. 정부 역시 민주화에 대해서 국민들과 약속을 했었고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민주화가 되는가 보다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었죠.
그런데 느닷없이 12.12, 5.17 같은 군사쿠데타가 다시 일어나면서 그토록 국민이 열망하던 민주화가 허공에 묻혀버렸어요. 그래서 ‘허공’이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만들었는데 사실 유신정권 때 끌려가서 고초를 당한 적이 있어요. 저 역시도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 열망이 허공에 묻히니까 뭔가 쓰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그래서 ‘허공’이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썼어요.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에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민주...설레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하지만 ‘민주’라는 말을 썼다가는 당연히 심의도 안 나올 거고 끌려가서 고생할 거고 그래서 ‘민주’ 대신 ‘그대’라는 말을 넣었어요. 전체 문장에서 ‘민주’ 대신 ‘그대’라는 말을 넣으니까 절묘하게 숨겨지더라고요. 심의를 넣었을 때 머리 좋은 사람이 있어서 발견할까 봐 한편으로 조마조마했어요. 다행히 눈치 채지 못하고 심의가 나와서 조용필 씨한테 노래를 시켰어요.
민주를 그대로 바꾼 걸 우리 국민들이 이심전심으로 알아주지 않았나, 그래서 지금까지도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아이러니컬하게도 전두환 씨가 <허공> 노래를 더 좋아했어요?
당시에 통일의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만들어줬는데 그 일로 인해서 5공 실세들과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어요. 그러고 난 다음에 룸살롱에 가자고 해서 다가갔는데 10명 정도 되는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허공>을 부르는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10번쯤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앉아서 생각하기를, 내가 너희들의 등장을 가슴 치며 한탄 하면서 만든 노래인데 너희들이 뭣도 모르고 부르는구나 싶어서 내가 작사 작곡을 하기를 잘했다는 희열까지 느꼈어요. 대중예술도 작가가 사회적인 양심과 책임을 갖고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특별히 인연을 맺고 있는 가수들이 있으실 것 같아요.
저는 참 행복한 작곡가에요. 대한민국의 최고의 인기를 얻은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과 거의 작업을 다 했거든요. 작곡은 신통치 않아도 그런 가수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아요.조용필 씨 같은 경우는 처음에 곡을 준 것이 <미워 미워 미워>였어요. 당시에 같은 회사에 저는 작곡가로, 조용필 씨는 가수로 소속이 되었는데 조용필 씨가 대마초로 인해서 고전을 할 때였어요. 그때 저한테 와서 가슴을 울리는 곡을 하나 달라고 하더라고요.
<미워 미워 미워>는 오래 전에 작곡해 놓고 숨겨둔 곡인데 피아노 앞에서 연습을 시켜봤더니 조용필 씨가 무릎을 치면서 이걸로 하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1981년도에 굉장한 히트를 치면서 100만장이 팔렸어요. 그리고 일본에서 더 히트를 쳐서 트롯 가수 16명이 리바이벌을 했죠.
그 다음에 한 것이 <허공>이에요. 제가 조용필 씨하고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어떤 걸 가르친다든지 감정을 이쯤에서는 이 정도만 넣으라고 지시를 하면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아요. 또 녹음할 때나 공연할 때 최선을 다하는 것, 혼신을 다하는 것이 가수로서 히트를 칠 수 있었고 장수할 수 있었던 요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과학소년, <가고파>에 꽂혀 걷게 된 작곡가의 길

▶ 어릴 때 꿈은 뭐였어요?
어렸을 때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방학 숙제로 건방지게 지구의 지층, 단층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했었어요. 그래서 그걸 갖고 가면 선생님이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는데 결정적으로 작곡을 하게 된 동기는 따로 있어요. 하루는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가고파> 노래를 하는데 완전히 홀린 거예요.
당시에는 어떤 분이 작곡했는지도 몰랐지만 확실히 음악에 소질은 있었던 모양이에요. 우리 집 마당 뒤에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거기서 잘 자란 대나무를 잘라서 피리나 퉁소, 플롯 같은 모양을 만들었어요. 악보도 볼 줄 모르면서 그걸 가지고 연주를 했죠.
그런데 할아버지나 주위 어른들이 혼을 내시는 거예요. 양반 집안에서 풍각쟁이 되려느냐고.중학생이 되어서는 밴드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어른들이 그러시니까 꿈도 못 꾸고 혼자 몰래 숨어서 불곤 했죠.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중2 때 ‘가고파’를 듣고는 나도 저런 작곡가도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가고파’를 작곡하신 분이 누군가 알아봤더니 김동진 교수님이서더라고요.
그래서 뒤늦게 김동진 교수님이 계신 대학에 가서 작곡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제 고향이 경남 밀양인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녔어요.
▶ <감옥으로부터 사색>을 쓰신 신영복 교수님과 친구시라고요?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신영복 교수가 정말 공부를 잘 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응원단장도 한 적이 있어요. 한 동네에 자라면서 아침에 학교가면서 영복아, 부르면 만나서 학교 같이 가고 올 때는 영복이 집에 들러서 감도 까먹고 영복이 누님이 맛있는 것도 내주시곤 했어요.
신영복 교수가 클 때 집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아버님이 밀양의 교육장이셨거든요. 집안의 분위기가 신영복 교수가 학자가 되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신영복 교수는 어릴 때부터 깊이 있는 글을 잘 썼고 아버님의 영향으로 한자공부도 많이 했고 학자집안이었어요.
▶ 당시에는 한국전쟁 직후라 모두 가난할 때인데 정풍송 선생님은 유복하셨나 봐요?
6학년 때까지는 잘 살았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자 형제만 5명인데 어머님이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죠.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돈을 좀 벌다가 서라벌예술대학 작곡과를 뒤늦게 갔어요.
▶ 대중가요를 택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김동진 교수님이 숙제를 내주시면 클래식, 세미클래식, 대중적인 것 3가지 버전으로 써갔어요. 그렇게 가면 왜 이렇게 해왔느냐고 여러 번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하루는 이렇게 대답했죠. “선생님,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만이 하는 음악은 별로 매력이 없습니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아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음악이 매력 있습니다. 미국의 포스터 같은 작곡가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랬더니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마음 놓고 아주 대중적인 것도 하고 클레식한 것도 했어요.
제가 작곡집을 처음 만들어낸 것이 한상일 씨의 <웨딩드레스>와 이상열 씨의 <아마도 빗물이겠지>인데 판의 성격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웨딩드레스>는 이게 무슨 유행가냐 클래식이지, 대중가요가 아니라고 판도 안 실어주겠다고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아마도 빗물이겠지>는 정말 유행가거든요. 저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다 하되 결코 천하고 퇴폐적인 것은 하지 말자는 주의에요.
훗날 아들이나 손자가 저를 보고 왜 이런 지저분한 음악을 했을까 하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대중들이 잊지 않을 수 있는 음악을 하려고 해요.
▶ 요리를 잘 하신다고는 소문이 나셨어요?
일요일 같은 때는 아이들에게 좀 색다른 걸 해주고 싶어서 가끔 요리를 하거든요. 아이들이 먹고서 맛있다고 하면 더욱 신이 나서 요리를 하는데 요리도 어떤 면에서는 창작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양념을 써서 어떤 맛을 낼지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창작이거든요.
5가지 정도는 자신 있게 하는데 요리를 하면 아이들이 맛있게 잘 먹어요. 스테이크 종류를 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개발을 해보거든요. 채소도 새콤달콤하게 해주고요. 아내도 전혀 요리를 할 것 같지 않은 성격인데 하면 맛있다고 신기해해요.
◇ 동생 뒷바라지에 밀린 결혼, 진주 처녀가 구제해 줘
▶ 결혼을 늦게 하신 편이시죠?
시골 살림에 어머니 혼자 벌어서 아들 다섯을 먹이고 공부시킨다는 게 50년대에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공무원인 형님이 계시긴 했지만 제가 쓴 <웨딩드레스>와 <아마도 빗물이겠지>가 다행히 처음부터 히트가 돼서 방송일을 많이 했어요. 편곡, 심사, 작곡일을 하니까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동생들 학교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게 35살에 끝났어요.
그 다음에 결혼을 하려고 중매를 넣으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매일 여가수와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그냥 있었겠느냐고 의심만 하고 성사가 안 되는 거예요. 당시에 굉장히 억울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처음 밀양에서 올라와서 대학을 다닐 때 김동진 교수님이 저를 좋게 생각하시니까 여학생들이 저한테 상당히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여자를 사귀면 내 공부고 뭐고 다 끝난다, 또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동생들 공부는 거기서 끝난다고 생각해서 여자를 사귀는 걸 극히 조심했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려고 보니까 그런 이야기나 듣고 상당히 억울했던 거죠.
그러다가 겨우 39살에 결혼했어요. 진주 처녀였는데 잘 아는 친척이 중매를 했어요. 그렇게 저한테 시집을 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총각일지 모르겠어요.(웃음) 큰 아이가 불과 며칠 전에 대학을 졸업했고 작은 아이가 대학 3학년이에요.
▶ 어머니를 생각하시면서 만드신 노래가 있으시죠?
<고향의 구름>이라는 곡인데 멀리서 흘러오는 구름을 보면서 저 구름은 고향을 지나서 왔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머님 얼굴의 주름살은 얼마나 깊더냐. 어머님의 머리칼은 얼마나 희더냐. 내 말 전해 다오. 어머님이 하셨던 말씀 잊지 않고 있다고...> 조영남 씨가 노래했었죠.
▶ 대부분의 곡들을 작사, 작곡까지 다 하셨어요?
작사할 때는 「정욱 작사, 정풍송 작곡, 편곡」 이렇게 해요. 처음에 <아마도 빗물이겠지> 이 노래는 「정풍송 작사, 정풍송 작곡, 정풍송 편곡」으로 넣었거든요. 그러데 당시 60년대는 선후배 간에 위계가 강할 때니까 선배들이나 레코드회사 간부들이 혼자 다 해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이러다가 미움 받겠구나 싶어서 「정욱 작사」로 몰래 냈어요.
당시에 전문 작사가가 없었는데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사가들이 주는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직접 작사를 했었어요. 나중에 히트가 나오니까 레코드 회사에서 저한테 직접 작사를 해달라는 주문을 하는데 작사자 정욱이라는 이름을 10년 동안 숨겨서 냈어요. 그런데 저작권협회에 정욱과 정풍송이 같은 사람이란 걸 신고해야 돈이 나온다고 해서 정욱이 정풍송이라는 걸 알렸어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테너 임웅균 교수하고 <클래식 가요>라는 음반을 낸 적이 있어요. 제가 작사, 작곡, 편곡, 지휘하고 임웅균 교수가 벨칸토 창법으로 노래를 해서 만든 음반이었어요. 하루는 차를 몰고 가는데 라디오 방송에 모 음악평론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마침 <클래식 가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테너 임웅균 교수가 새로 음반을 냈군요. 작곡가 정풍송 씨와 손을 잡았네요. 정욱 씨와 정풍송 씨는 명콤비죠. 허공을 비롯해서 많은 곡을 만들었어요.”명색이 음악평론가이고 이 계통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도 정욱과 정풍송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명콤비라고 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 축복받은 지구, 깨끗한 보존만이 우리가 살 길
▶ 신비의 극지 남극을 다녀오시고 나서 느낀 점이 많으실 것 같아요.
그런 극한 상황에서 가족과 떨어져서 고생스럽게 일하는 건 좋은 말로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극의 평균 기압이 낮아서 바람이 보통 12m~13m로 부는데 눈이나 비가 오면 바로 내리는 게 아니라 옆에서 때리는 거예요. 그리고 한 발을 내딛는 것도 위험하고 무엇보다도 기상 예측을 믿을 수가 없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10분 후의 기상 상황을 알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상황 속에서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겠죠.
산업혁명 이후에 우리 인간들이 석유나 석탄 같은 연료를 너무 많이 사용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결국 지구 온난화라든지 기상이변이 생기는 건데,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그분들이 앞장서서 갚아나가려는 자세를 가진 것 같아요. 정말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구나, 지구의 모든 생명체로부터 박수를 받을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 대중의 감성에 영향을 미치는 대중음악가로서 또한 환경지킴이로서 계속 활동을 하실 거죠?
저뿐만 아니라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이 후손을 위해서 가능하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고 폐자재를 버리는 것도 자제하고 먹는 것도 낭비하지 않는다면 지구가 훼손되는 걸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1세기 과학으로는 이 우주의 생명체라고는 지구밖에 없거든요. 그야말로 선택받고 축복받은 지구를 인간이 100년 사는 동안에 더럽힌다는 것은 죄악이에요. 물론 안 더럽힐 수야 없겠죠. 먹은 것을 배출하는 정도야 있겠지만 가능하면 깨끗하게 보존을 해야 합니다.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출처:http://www.cbs.co.kr/nocut/show.asp?idx=767413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남극노래 만들다 환경지킴이 된 정풍송 작곡가
서울에서 1만 7240㎞나 떨어진 남극 세종기지에서는매일 아침, 가수 인순이 씨가 부르는 흥겨운 노래가 울려 퍼진다는데요.

‘억만년 전의 지구 비밀. 억만년 후의 미래.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비 속의 남북 극지~’ 이렇게 시작하는 ‘극지의 노래’란 곡입니다. 이 노래는 ‘허공’으로 유명한 작곡가 정풍송 씨가 만든 곡인데요. 강추위와 싸우며 힘들게 연구하는 세종기지 대원들은 매일 아침, 이 노래를 들으며 많은 힘을 얻고 있답니다.
이렇게 노래로 남극과 인연을 맺게 된 정풍송 씨는 최근 세종기지 설립 20주년 기념식에 초대 돼, 직접 남극을 방문하고 오셨는데요. 작곡가 정풍송 씨를 3월 6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남극에 울리는 기상나팔 ‘극지의 노래’
▶ 남극 세종기지에 얼마 동안 다녀오신 건가요?
16일 걸렸어요. 극지연구소에서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왔었어요. 남극의 세종기지, 북극의 다산기지 두 곳이 있는데 이곳의 뜻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제가 가사를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허공을 작사한 분이니까 알아서 해달라고 하더라고요.사실은 세종기지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았어요.
어릴 때부터 천체나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는데 2003년도에 전재규 대원의 사고로 인해서 더 관심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기뻤죠. 가사 만들 자료로 책을 여러 권 보내줘서 뒤늦게 독파하면서 가사도 만들고 곡을 만들고 편곡도 하고 가수 인순이씨가 노래를 했어요.
▶ 노래는 미리 만들고 극지는 나중에 가셨어요?
이번에 세종기지에 갔더니 새벽 기상나팔처럼 전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인순이씨의 노래가 나오는데 같이 간 일행이나 세종기지 대원들이 가사를 극지연구소에서 만든 줄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썼다고 했더니 마치 자기들이 생각한 내용을 전문가처럼 썼다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썼구나 싶어서 보람도 느꼈어요.
▶ 세종기지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죠?
비행기로만 36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LA까지 갔다가 칠레 산티아고를 거쳐서 지구상에 있는 최남단의 도시인 푼타아레나스라는 곳을 갔어요. 거기서 기상을 봐가면서 킹조지섬을 갔어요.
▶ 고생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이 했어요. 킹조지섬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세종기지로 들어가야 하는데 시간은 30분밖에 안 걸려요. 그런데 바람이 많이 부니까 고무보트가 출발을 못하고 있다가 러시아 기지에서 3시간 동안 피난해 있었어요. 그러다가 날씨가 좋아져서 다시 출발을 했는데 다시 바람이 불더라고요. 남극의 날씨는 10분 후를 모르겠어요. 파도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거예요. 세종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구명복을 입었는데도 얼마나 파도가 심하고 불이 찼는지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어요.
◇ 물자공급 1년에 한 번, 쇄빙선 완성 시급
▶ 설원과 빙원을 직접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남극에 빙하도 있고 빙산도 있고 빙벽도 있고, 그림으로는 참 좋잖아요. 그런데 기상의 악조건 속에서 보니까 더 고생스러웠던 것 같아요. 순간적으로 내가 왜 이런 곳에 오려고 했던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곳에 1년 내내 있어야 하는 세종기지 대원들이 고생스럽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 세종기지 개설 20돌을 맞이해서 초대를 받으신 건데 어떤 일을 하고 오신 거예요?
20주년 행사와 더불어 그동안 낙후된 장소나 시설들을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6개월 전에 끝냈어야 했어요. 세계 20여 개국이 남극에 기지를 두고 있는데 폴란드와 우리나라만 쇄빙선이 없더라고요. 쇄빙선이 없다 보니까 이런 공사를 위해서 중국에 의뢰를 하는 거예요. 중국이 최근에서야 갖다 주기 시작해서 공사가 시작이 되었던 거죠.
우리나라도 쇄빙선을 올해 1월에 건조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빠르면 2009년 말에는 완성이 된다고 하네요.그렇게 되면 필요한 물자를 세종기지에 언제든지 실어 나를 수 있어요. 지금은 세종기지에 필요한 부식품들을 1년에 한 번씩 실어 나른다고 하니 사과 같은 건 반은 썩어버리죠. 채소를 싱싱한 걸 먹는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세종기지 대원들이 모두 17명인데 공사를 위해서 우리나라에서 40명이 파견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동행한 일행들이 11명이었고요. 그러니 2평쯤 되는 방에 4명씩 들어갔어요. 어쨌든 가서 건설현장이나 행사, 세종기지 대원들의 연구 활동, 탐사 등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 환경지킴이로 돌아오셨어요?
저뿐만 아니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지구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요즘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잖아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7번째로 이산화탄소 배출국가에요. 그만큼 책임을 져야죠.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태평양 한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석유를 땝니까, 석탄을 땝니까?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어요. 바닷물이 녹아서 자꾸 수온이 높아지니까 다른 곳으로 피난가고 그러거든요.
제가 가 있는 동안에도 세종기지 맞은편에 있는 빙하의 빙벽이 밤사이에 굉장히 큰 진동을 내면서 무너지더라고요. 비바람이 불 때는 더 심하죠.지구 온난화라고 해서 몇 년 사이에 무너져 내리는 면적이 넓어요. 그래서 유빙들이 근처 바다를 떠다니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남극이나 북극의 빙하들이 다 녹으면 바다 높이가 50~60m가 높아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네덜란드는 아예 없어지고 태평양과 대서양의 섬들도 다 잠겨버리는 거죠.
◇ 민주화의 열망을 담은 <허공> ‘민주’를 ‘그대’로 바꿔
▶ 작곡하신 대중가요들이 다 명곡인데 그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어떤 건가요?
히트와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은 한상일 씨가 부른 <웨딩드레스>가 있고 홍민 씨가 부른 <석별>, 그리고 조영남 씨가 부른 <옛 생각>, 그 외에 <허공><미워 미워 미워><갈색추억> 등이 있어요.
▶ 조용필 씨가 부른 <허공>을 만드실 때 에피소드가 있었다면서요?
1979년에 10.26이 터졌어요. 그 다음에 유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서울의 봄이니 뭐니 하면서 국민들이 민주화에 대해서 열망을 하던 때였어요. 정부 역시 민주화에 대해서 국민들과 약속을 했었고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민주화가 되는가 보다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었죠.
그런데 느닷없이 12.12, 5.17 같은 군사쿠데타가 다시 일어나면서 그토록 국민이 열망하던 민주화가 허공에 묻혀버렸어요. 그래서 ‘허공’이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만들었는데 사실 유신정권 때 끌려가서 고초를 당한 적이 있어요. 저 역시도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 열망이 허공에 묻히니까 뭔가 쓰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그래서 ‘허공’이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썼어요.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에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민주...설레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하지만 ‘민주’라는 말을 썼다가는 당연히 심의도 안 나올 거고 끌려가서 고생할 거고 그래서 ‘민주’ 대신 ‘그대’라는 말을 넣었어요. 전체 문장에서 ‘민주’ 대신 ‘그대’라는 말을 넣으니까 절묘하게 숨겨지더라고요. 심의를 넣었을 때 머리 좋은 사람이 있어서 발견할까 봐 한편으로 조마조마했어요. 다행히 눈치 채지 못하고 심의가 나와서 조용필 씨한테 노래를 시켰어요.
민주를 그대로 바꾼 걸 우리 국민들이 이심전심으로 알아주지 않았나, 그래서 지금까지도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아이러니컬하게도 전두환 씨가 <허공> 노래를 더 좋아했어요?
당시에 통일의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만들어줬는데 그 일로 인해서 5공 실세들과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어요. 그러고 난 다음에 룸살롱에 가자고 해서 다가갔는데 10명 정도 되는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허공>을 부르는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10번쯤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앉아서 생각하기를, 내가 너희들의 등장을 가슴 치며 한탄 하면서 만든 노래인데 너희들이 뭣도 모르고 부르는구나 싶어서 내가 작사 작곡을 하기를 잘했다는 희열까지 느꼈어요. 대중예술도 작가가 사회적인 양심과 책임을 갖고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특별히 인연을 맺고 있는 가수들이 있으실 것 같아요.
저는 참 행복한 작곡가에요. 대한민국의 최고의 인기를 얻은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과 거의 작업을 다 했거든요. 작곡은 신통치 않아도 그런 가수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아요.조용필 씨 같은 경우는 처음에 곡을 준 것이 <미워 미워 미워>였어요. 당시에 같은 회사에 저는 작곡가로, 조용필 씨는 가수로 소속이 되었는데 조용필 씨가 대마초로 인해서 고전을 할 때였어요. 그때 저한테 와서 가슴을 울리는 곡을 하나 달라고 하더라고요.
<미워 미워 미워>는 오래 전에 작곡해 놓고 숨겨둔 곡인데 피아노 앞에서 연습을 시켜봤더니 조용필 씨가 무릎을 치면서 이걸로 하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1981년도에 굉장한 히트를 치면서 100만장이 팔렸어요. 그리고 일본에서 더 히트를 쳐서 트롯 가수 16명이 리바이벌을 했죠.
그 다음에 한 것이 <허공>이에요. 제가 조용필 씨하고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어떤 걸 가르친다든지 감정을 이쯤에서는 이 정도만 넣으라고 지시를 하면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아요. 또 녹음할 때나 공연할 때 최선을 다하는 것, 혼신을 다하는 것이 가수로서 히트를 칠 수 있었고 장수할 수 있었던 요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과학소년, <가고파>에 꽂혀 걷게 된 작곡가의 길

▶ 어릴 때 꿈은 뭐였어요?
어렸을 때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방학 숙제로 건방지게 지구의 지층, 단층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했었어요. 그래서 그걸 갖고 가면 선생님이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는데 결정적으로 작곡을 하게 된 동기는 따로 있어요. 하루는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가고파> 노래를 하는데 완전히 홀린 거예요.
당시에는 어떤 분이 작곡했는지도 몰랐지만 확실히 음악에 소질은 있었던 모양이에요. 우리 집 마당 뒤에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거기서 잘 자란 대나무를 잘라서 피리나 퉁소, 플롯 같은 모양을 만들었어요. 악보도 볼 줄 모르면서 그걸 가지고 연주를 했죠.
그런데 할아버지나 주위 어른들이 혼을 내시는 거예요. 양반 집안에서 풍각쟁이 되려느냐고.중학생이 되어서는 밴드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어른들이 그러시니까 꿈도 못 꾸고 혼자 몰래 숨어서 불곤 했죠.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중2 때 ‘가고파’를 듣고는 나도 저런 작곡가도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가고파’를 작곡하신 분이 누군가 알아봤더니 김동진 교수님이서더라고요.
그래서 뒤늦게 김동진 교수님이 계신 대학에 가서 작곡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제 고향이 경남 밀양인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녔어요.
▶ <감옥으로부터 사색>을 쓰신 신영복 교수님과 친구시라고요?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신영복 교수가 정말 공부를 잘 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응원단장도 한 적이 있어요. 한 동네에 자라면서 아침에 학교가면서 영복아, 부르면 만나서 학교 같이 가고 올 때는 영복이 집에 들러서 감도 까먹고 영복이 누님이 맛있는 것도 내주시곤 했어요.
신영복 교수가 클 때 집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아버님이 밀양의 교육장이셨거든요. 집안의 분위기가 신영복 교수가 학자가 되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신영복 교수는 어릴 때부터 깊이 있는 글을 잘 썼고 아버님의 영향으로 한자공부도 많이 했고 학자집안이었어요.
▶ 당시에는 한국전쟁 직후라 모두 가난할 때인데 정풍송 선생님은 유복하셨나 봐요?
6학년 때까지는 잘 살았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자 형제만 5명인데 어머님이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죠.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돈을 좀 벌다가 서라벌예술대학 작곡과를 뒤늦게 갔어요.
▶ 대중가요를 택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김동진 교수님이 숙제를 내주시면 클래식, 세미클래식, 대중적인 것 3가지 버전으로 써갔어요. 그렇게 가면 왜 이렇게 해왔느냐고 여러 번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하루는 이렇게 대답했죠. “선생님,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만이 하는 음악은 별로 매력이 없습니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아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음악이 매력 있습니다. 미국의 포스터 같은 작곡가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랬더니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마음 놓고 아주 대중적인 것도 하고 클레식한 것도 했어요.
제가 작곡집을 처음 만들어낸 것이 한상일 씨의 <웨딩드레스>와 이상열 씨의 <아마도 빗물이겠지>인데 판의 성격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웨딩드레스>는 이게 무슨 유행가냐 클래식이지, 대중가요가 아니라고 판도 안 실어주겠다고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아마도 빗물이겠지>는 정말 유행가거든요. 저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다 하되 결코 천하고 퇴폐적인 것은 하지 말자는 주의에요.
훗날 아들이나 손자가 저를 보고 왜 이런 지저분한 음악을 했을까 하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대중들이 잊지 않을 수 있는 음악을 하려고 해요.
▶ 요리를 잘 하신다고는 소문이 나셨어요?
일요일 같은 때는 아이들에게 좀 색다른 걸 해주고 싶어서 가끔 요리를 하거든요. 아이들이 먹고서 맛있다고 하면 더욱 신이 나서 요리를 하는데 요리도 어떤 면에서는 창작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양념을 써서 어떤 맛을 낼지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창작이거든요.
5가지 정도는 자신 있게 하는데 요리를 하면 아이들이 맛있게 잘 먹어요. 스테이크 종류를 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개발을 해보거든요. 채소도 새콤달콤하게 해주고요. 아내도 전혀 요리를 할 것 같지 않은 성격인데 하면 맛있다고 신기해해요.
◇ 동생 뒷바라지에 밀린 결혼, 진주 처녀가 구제해 줘
▶ 결혼을 늦게 하신 편이시죠?
시골 살림에 어머니 혼자 벌어서 아들 다섯을 먹이고 공부시킨다는 게 50년대에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공무원인 형님이 계시긴 했지만 제가 쓴 <웨딩드레스>와 <아마도 빗물이겠지>가 다행히 처음부터 히트가 돼서 방송일을 많이 했어요. 편곡, 심사, 작곡일을 하니까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동생들 학교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게 35살에 끝났어요.
그 다음에 결혼을 하려고 중매를 넣으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매일 여가수와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그냥 있었겠느냐고 의심만 하고 성사가 안 되는 거예요. 당시에 굉장히 억울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처음 밀양에서 올라와서 대학을 다닐 때 김동진 교수님이 저를 좋게 생각하시니까 여학생들이 저한테 상당히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내가 여기서 여자를 사귀면 내 공부고 뭐고 다 끝난다, 또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동생들 공부는 거기서 끝난다고 생각해서 여자를 사귀는 걸 극히 조심했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려고 보니까 그런 이야기나 듣고 상당히 억울했던 거죠.
그러다가 겨우 39살에 결혼했어요. 진주 처녀였는데 잘 아는 친척이 중매를 했어요. 그렇게 저한테 시집을 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총각일지 모르겠어요.(웃음) 큰 아이가 불과 며칠 전에 대학을 졸업했고 작은 아이가 대학 3학년이에요.
▶ 어머니를 생각하시면서 만드신 노래가 있으시죠?
<고향의 구름>이라는 곡인데 멀리서 흘러오는 구름을 보면서 저 구름은 고향을 지나서 왔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머님 얼굴의 주름살은 얼마나 깊더냐. 어머님의 머리칼은 얼마나 희더냐. 내 말 전해 다오. 어머님이 하셨던 말씀 잊지 않고 있다고...> 조영남 씨가 노래했었죠.
▶ 대부분의 곡들을 작사, 작곡까지 다 하셨어요?
작사할 때는 「정욱 작사, 정풍송 작곡, 편곡」 이렇게 해요. 처음에 <아마도 빗물이겠지> 이 노래는 「정풍송 작사, 정풍송 작곡, 정풍송 편곡」으로 넣었거든요. 그러데 당시 60년대는 선후배 간에 위계가 강할 때니까 선배들이나 레코드회사 간부들이 혼자 다 해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이러다가 미움 받겠구나 싶어서 「정욱 작사」로 몰래 냈어요.
당시에 전문 작사가가 없었는데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사가들이 주는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직접 작사를 했었어요. 나중에 히트가 나오니까 레코드 회사에서 저한테 직접 작사를 해달라는 주문을 하는데 작사자 정욱이라는 이름을 10년 동안 숨겨서 냈어요. 그런데 저작권협회에 정욱과 정풍송이 같은 사람이란 걸 신고해야 돈이 나온다고 해서 정욱이 정풍송이라는 걸 알렸어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테너 임웅균 교수하고 <클래식 가요>라는 음반을 낸 적이 있어요. 제가 작사, 작곡, 편곡, 지휘하고 임웅균 교수가 벨칸토 창법으로 노래를 해서 만든 음반이었어요. 하루는 차를 몰고 가는데 라디오 방송에 모 음악평론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마침 <클래식 가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테너 임웅균 교수가 새로 음반을 냈군요. 작곡가 정풍송 씨와 손을 잡았네요. 정욱 씨와 정풍송 씨는 명콤비죠. 허공을 비롯해서 많은 곡을 만들었어요.”명색이 음악평론가이고 이 계통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도 정욱과 정풍송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명콤비라고 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 축복받은 지구, 깨끗한 보존만이 우리가 살 길
▶ 신비의 극지 남극을 다녀오시고 나서 느낀 점이 많으실 것 같아요.
그런 극한 상황에서 가족과 떨어져서 고생스럽게 일하는 건 좋은 말로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극의 평균 기압이 낮아서 바람이 보통 12m~13m로 부는데 눈이나 비가 오면 바로 내리는 게 아니라 옆에서 때리는 거예요. 그리고 한 발을 내딛는 것도 위험하고 무엇보다도 기상 예측을 믿을 수가 없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10분 후의 기상 상황을 알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상황 속에서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겠죠.
산업혁명 이후에 우리 인간들이 석유나 석탄 같은 연료를 너무 많이 사용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결국 지구 온난화라든지 기상이변이 생기는 건데,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그분들이 앞장서서 갚아나가려는 자세를 가진 것 같아요. 정말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구나, 지구의 모든 생명체로부터 박수를 받을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 대중의 감성에 영향을 미치는 대중음악가로서 또한 환경지킴이로서 계속 활동을 하실 거죠?
저뿐만 아니라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이 후손을 위해서 가능하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고 폐자재를 버리는 것도 자제하고 먹는 것도 낭비하지 않는다면 지구가 훼손되는 걸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1세기 과학으로는 이 우주의 생명체라고는 지구밖에 없거든요. 그야말로 선택받고 축복받은 지구를 인간이 100년 사는 동안에 더럽힌다는 것은 죄악이에요. 물론 안 더럽힐 수야 없겠죠. 먹은 것을 배출하는 정도야 있겠지만 가능하면 깨끗하게 보존을 해야 합니다.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출처:http://www.cbs.co.kr/nocut/show.asp?idx=767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