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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동아 2008-06-23] [인물포커스]노래 인생 40년 가수 조용필
2008.06.2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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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노래 인생 40년 가수 조용필

가수 조용필 씨는 현재 데뷔 40주년 전국 순회공연을 매진 속에 진행 중이다. 공연 관람 가능 나이는 만 7세. 공연 입장료는 4만∼15만 원이다. 싸지도 않지만 비싼 가격도 아니다.
2008년 2월. 이 공연 관계자가 제안했다.
“100만 원대의 비싼 VIP석을 만들고 ‘칸막이’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차별화된 마케팅이 가능합니다. 아니라면 적어도 30만 원 정도의 티켓은 판매해야 합니다.”
조 씨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공연무대에 칸막이란 있을 수 없어요. 모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 한자리에서 적당한 가격에 관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틀스, 가출 그리고 오빠부대
40년 전 기타 하나를 들고 음악계에 뛰어든 열여덟 살 소년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과 오로지 노래로 소통하며 무대를 지켜왔다.
그는 민요에서 트로트, 팝, 댄스뮤직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는 ‘무(無)장르의 가수’이며 초등학교 교실에서 야구장, 노인정까지 그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만든 진정한 슈퍼스타다. 노래 외에는 한눈을 판 적이 없는 가왕(歌王)의 모습이다.
조 씨는 1950년 3월 21일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 경동고 3학년이던 1968년 그는 ‘벤처스’와 ‘비틀스’에 빠져 살았다. 결국 대학 진학을 강요하는 부모의 강권을 물리치고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해 미군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화성학(和聲學)을 독학했다. 종이를 기다랗게 이어 붙여 건반을 그려 넣은 ‘종이 피아노’로 음계와 화성을 깨쳤다.
첫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1976년 발표했고 1980년 정규 1집을 냈다. 1980년 ‘창 밖의 여자’로 정상에 오른 그는 1981년 한국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섰다.
1980년대는 조 씨의 독무대였다. 여성 팬이 연예인을 부르는 ‘오빠’라는 말의 원조는 바로 조용필이었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방송사의 인기가수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고 1987년 ‘후배들을 위해 더는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18집의 정규앨범을 냈고 1994년 음반 총판매량이 1000만 장을 돌파했다.

●삼성 이건희 전 회장에서 북한 주민까지
2004년 12월 10일 서울 예술의 전당. 삼성그룹 이건희 당시 회장 부부가 경영진과 함께 조 씨의 콘서트를 관람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21세기는 문화 콘텐츠가 중요한 ‘소프트 경쟁력’의 시대라는 점을 강조해 온 이 회장의 뜻에 따라 경영진들이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한류(韓流)’의 선구자인 조 씨의 콘서트를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5년 8월 23일 평양 유경 정주영체육관. 조용필이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단독 콘서트를 했다. 그는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 ‘봉선화’ ‘황성옛터’ 등을 열창했다. 7000여 명의 관객은 두 손을 모은 채 눈물을 흘렸다. 남과 북이 그의 노래로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가수는 무대에서 가창력으로 승부해야
그의 고향인 화성시에 ‘조용필연구소’가 생긴다. 400평 규모에 각종 공연 시뮬레이션 설비가 갖춰진다. 실제 공연처럼 조명과 음향이 갖춰진 무대에서 뮤지컬 연극 콘서트의 ‘모의 공연’을 할 수 있다. 실제 무대와 같은 환경의 리허설을 통해 완벽한 공연을 보여 주자는 취지로 수많은 공연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후배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조 씨는 “연구소 건립이 평생 꿈이었다”며 “국내 공연 때 현장 리허설을 충분히 하지 못해 아쉬운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말한다.
“가수에게 중요한 것은 인기도 히트곡도 TV 출연도 아닌 공연뿐이다. 무대에서 가창력으로 승부해야만 가요계 불황도 이겨낼 수 있고 한류 열풍도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는 무대에서 라이브로 2시간 이상 쉬지 않고 열창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가수이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조용필은 최근 발간된 책 ‘조용필의 노래 맹자의 마음’(동아일보사) 서문에서 가수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지만 노래는 결국 대중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책임은 더욱 무겁습니다.”
<허운주 기자>apple297@donga.com
출처:http://kids.donga.com/news/vv.php?id=20200806236282

가수 조용필 씨는 현재 데뷔 40주년 전국 순회공연을 매진 속에 진행 중이다. 공연 관람 가능 나이는 만 7세. 공연 입장료는 4만∼15만 원이다. 싸지도 않지만 비싼 가격도 아니다.
2008년 2월. 이 공연 관계자가 제안했다.
“100만 원대의 비싼 VIP석을 만들고 ‘칸막이’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차별화된 마케팅이 가능합니다. 아니라면 적어도 30만 원 정도의 티켓은 판매해야 합니다.”
조 씨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공연무대에 칸막이란 있을 수 없어요. 모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 한자리에서 적당한 가격에 관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틀스, 가출 그리고 오빠부대
40년 전 기타 하나를 들고 음악계에 뛰어든 열여덟 살 소년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과 오로지 노래로 소통하며 무대를 지켜왔다.
그는 민요에서 트로트, 팝, 댄스뮤직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는 ‘무(無)장르의 가수’이며 초등학교 교실에서 야구장, 노인정까지 그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만든 진정한 슈퍼스타다. 노래 외에는 한눈을 판 적이 없는 가왕(歌王)의 모습이다.
조 씨는 1950년 3월 21일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 경동고 3학년이던 1968년 그는 ‘벤처스’와 ‘비틀스’에 빠져 살았다. 결국 대학 진학을 강요하는 부모의 강권을 물리치고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해 미군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화성학(和聲學)을 독학했다. 종이를 기다랗게 이어 붙여 건반을 그려 넣은 ‘종이 피아노’로 음계와 화성을 깨쳤다.
첫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1976년 발표했고 1980년 정규 1집을 냈다. 1980년 ‘창 밖의 여자’로 정상에 오른 그는 1981년 한국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섰다.
1980년대는 조 씨의 독무대였다. 여성 팬이 연예인을 부르는 ‘오빠’라는 말의 원조는 바로 조용필이었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방송사의 인기가수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고 1987년 ‘후배들을 위해 더는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18집의 정규앨범을 냈고 1994년 음반 총판매량이 1000만 장을 돌파했다.

●삼성 이건희 전 회장에서 북한 주민까지
2004년 12월 10일 서울 예술의 전당. 삼성그룹 이건희 당시 회장 부부가 경영진과 함께 조 씨의 콘서트를 관람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21세기는 문화 콘텐츠가 중요한 ‘소프트 경쟁력’의 시대라는 점을 강조해 온 이 회장의 뜻에 따라 경영진들이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한류(韓流)’의 선구자인 조 씨의 콘서트를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5년 8월 23일 평양 유경 정주영체육관. 조용필이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단독 콘서트를 했다. 그는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 ‘봉선화’ ‘황성옛터’ 등을 열창했다. 7000여 명의 관객은 두 손을 모은 채 눈물을 흘렸다. 남과 북이 그의 노래로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가수는 무대에서 가창력으로 승부해야
그의 고향인 화성시에 ‘조용필연구소’가 생긴다. 400평 규모에 각종 공연 시뮬레이션 설비가 갖춰진다. 실제 공연처럼 조명과 음향이 갖춰진 무대에서 뮤지컬 연극 콘서트의 ‘모의 공연’을 할 수 있다. 실제 무대와 같은 환경의 리허설을 통해 완벽한 공연을 보여 주자는 취지로 수많은 공연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후배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조 씨는 “연구소 건립이 평생 꿈이었다”며 “국내 공연 때 현장 리허설을 충분히 하지 못해 아쉬운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말한다.
“가수에게 중요한 것은 인기도 히트곡도 TV 출연도 아닌 공연뿐이다. 무대에서 가창력으로 승부해야만 가요계 불황도 이겨낼 수 있고 한류 열풍도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는 무대에서 라이브로 2시간 이상 쉬지 않고 열창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가수이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조용필은 최근 발간된 책 ‘조용필의 노래 맹자의 마음’(동아일보사) 서문에서 가수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지만 노래는 결국 대중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책임은 더욱 무겁습니다.”
<허운주 기자>apple297@donga.com
출처:http://kids.donga.com/news/vv.php?id=20200806236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