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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8-09-26] [광화문에서/허엽]조용필과 도지사
2008.09.2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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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5월에 이어 공연을 두 번째 봤다. 새삼 놀라운 점은 잠실의 5만 명과 와스타디움에 모인 3만 명의 표정이 한결같다는 것이다. 한 가수 앞에서 그들은 한마음이 돼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조용필 씨 자택에서 새벽까지 뒤풀이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가 들려준 이야기 하나.
얼마 전 지방 공연을 앞두고 그 지역의 도지사가 그를 식사에 초대했다. 도지사는 “정치인의 연설은 공짜인데도 사람들이 안 오고, 조용필 씨의 공연에는 10만 원을 받는데도 매진된다. 이를 주제로 간부들과 회의했는데 답을 못 얻었다”며 비결을 물었다. 그는 “정치 경력이 30년이 넘고 이곳이 고향인데도, 연설이나 행사 한번 하려면 매번 ‘팬’이 얼마나 올지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조 씨는 그냥 웃어 넘겼다고 한다.
기자와 함께 이 말을 들은 한 지인은 “그거 간단하지. 감동의 유무(有無) 아냐?”라고 정리했다. 정치인의 연설에는 감동이 없고, 조 씨의 노래에는 감동이 있어 팬들이 온다는 것이다. 조 씨도 “40년간 팬들의 마음을 읽어보려 했는데, 우리 정치가 그러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다”고 맞장구쳤다.
40주년 기념 공연은 미국 뉴욕을 포함해 연말까지 23곳에서 열린다. 상반기에 15만 명이 공연장을 찾았고, 앞으로 그만큼 더 올 것으로 추산된다. 27일 전주월드컵경기장(3만5000여 석) 공연도 거의 매진돼 시가 떠들썩하다. 전주는 대중가수의 공연이 잘 안되는 지역이어서 조 씨도 무척 걱정했다. 내년이면 예순인 그가 이만한 갈채를 받는 것은 값진 기록이다. 앞으로도 깨지기 어렵다.
도지사의 눈에 30만 관객은 모두 표로 보였을 것이다. 첨예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정치와 단순 비교할 순 없다 하더라도 그만한 유료 관객은 100만 표가 넘는 가치가 있지 않을까.
물론 인기 가수가 정치를 잘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우리 정치가 국민에게 감동을 준 경우도 손꼽을 정도다. 명연설이나 명장면도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정치 현장인 국회를 생각하면 깔끔한 논리나 발랄한 유머보다 삿대질과 맞고함이 먼저 떠오른다.
MBC가 2005년 이후 4년간 방영한 348개 프로그램 시청률 중 ‘18대 국회 개원식’이 333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청문회’가 339위에 그친 것도 그런 사례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보다 국민 감동에 대한 정치인의 무관심이 더 심각하다.
글로벌 경제 위기, 취업난, 자녀 교육, 노후 대책 등 숨 막히는 현안으로 누구에게나 문화는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가 경쟁력’이라는 말도 오래됐지만, ‘반짝 한류’에 이어 CF에서나 통할 뿐 구체적 실체는 요원하다. 다른 부문이 시급하다고 본 탓이다.
하지만 공연장에 온 이들은 대부분 서민이었다. 크고 작은 걱정거리를 지니고 있을 그들은 공연장에선 신명을 냈고 걱정도 털어냈다. 그 도지사의 고민도 이 대목에서 출발한다면 문화와 정치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출처:http://www.donga.com/fbin/output?f=i__&n=20080926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