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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조용필은 누구…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 1980년대 가수상·대상 휩쓸어
2013.06.15 02:47
신문사 | 문화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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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날짜 | 2013-06-14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1&aid=0002158856
<파워인터뷰>조용필은 누구…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 1980년대 가수상·대상 휩쓸어
조용필을 웃게 하는 것은 오로지 음악 얘기를 할 때뿐이다. 그는 일주일에 최소 다섯 번은 연습실에 들러 목청과 손가락을 가다듬는다. 가사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음정을 제대로 내기 위해 ‘발성 연습’을 잊지 않는다. 그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YPC프로덕션 연습실에서 기타를 잡자마자 “음악은 내 운명”이라며 웃음을 멈추고 연주에 집중했다. 임정현 기자 theos@munhwa.com |
조용필은 경기 화성군 송산면의 농가에서 3남 4녀 중 여섯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심야 라디오 방송을 즐겨들었던 그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고 3때인 1968년 가출했다. 그 해, 그는 동네 친구 3명과 함께 록그룹 애트킨스를 결성했다.
몇 개월 못가, 팀은 해체됐지만 조용필은 미 8군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다. 이 시절 들은 리듬앤드블루스(R&B), 로큰롤, 솔(Soul) 등 다양한 장르는 지금의 조용필을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1976년 트로트 록 음반에 수록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대마초 사건에 연루된 조용필은 남산 지하 취조실에서 심한 고초를 겪은 뒤 77년 은퇴 선언을 했다. 이후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 우연히 ‘한오백년’을 듣고 감명받은 그는 내장산, 속리산 등을 돌며 목소리를 다시 다듬었다. 조용필은 79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라는 팀을 꾸려 다시 나타났다.
이후 그는 단 한 차례 위기 없이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으로 승승장구했다. 80년 1집 ‘창밖의 여자’부터 그는 ‘최초’ 아니면 ‘최고’의 훈장을 달았다. 이는 각종 기록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미국 카네기홀 공연(1980년), ‘창밖의 여자’ 음반 100만 장 판매(1980년), 해운대 단독 콘서트 10만 명 동원(1993년), 음반 판매 1000만 장 돌파(1994년) 등에서 국내 최초 가수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방송 수상 기록도 화려하다. 80∼86년까지 MBC 10대 가수상, 80∼85년 KBS 방송 가요대상을 받은 그는 내리막길 없이 80년대를 평정했다. 일본에서 발매한 음반 3장은 50만 장이나 팔려나가며 골든디스크를 기록했다.
방송 활동을 접은 90년 대 초, 조용필은 무대로 눈을 돌렸다. 최초 3년은 썰렁했다. 방송에 보이지 않으니, 찾는 관객도 드물었다. 조용필은 그러나 사람이 찾지 않을수록 무대에 더 많은 돈을 쏟아부으며 수준 높은 공연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자로 길게 뻗은 직선형 무대를 처음 선보이기 시작했고, 조명이나 사운드를 외국의 어떤 공연 못지않게 화려하고 완벽하게 입혔으며, 급기야 최근엔 상하좌우 전천후로 움직이는 순수 국내 기술의 ‘무빙 스테이지’까지 선보였다.
최근 10년간 대중, 평단, 음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최고 가수’를 뽑는 설문조사에서 조용필은 늘 수위를 차지하며 식지 않는 인기를 과시해왔다. 조용필이 올해 10년 만에 낸 19집 ‘헬로(Hello)’는 이미 20만 장이 팔려나갔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