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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 20주년 만찬…'財王과 歌王' 짧은 포옹 긴 여운
2013.10.29 21:36
신문사 | 아시아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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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날짜 | 2013-10-29 |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삼성을 향해 뭐라고 말하고 있었을까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 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2013년 10월28일 밤 서울 신라호텔. 삼성 신경영 20년 축하 만찬 자리에서 63세 가수 조용필이 마지막 노래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고 무대를 내려왔다. 자줏빛 구슬 무늬의 넥타이를 맨 71세의 회장이 다가왔다. 평소의 무표정을 풀고 미소를 머금은 이건희 회장. 조용필은 악수를 하리라고 생각해 손을 내밀려고 했는데, 회장은 그를 덥썩 껴안았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언행을 절제하던 이 회장이었기에 뜻밖의 포옹이었다. 주위에 있던 한 삼성 관계자는 "아마 두 분이 동질감을 느꼈기에 저절로 우러나온 애정과 경의의 표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3년. 삼성전자의 세탁기 생산라인에서 불량제품의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사내 방송을 통해 이 장면을 본 이건희 회장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삼성이 망할지 모른다." 그해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200여명의 삼성 경영진을 불러 비장한 목소리로 '삼성헌법'을 발표했다. "기업은 인간미와 도덕성과 예의범절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21세기 초일류 기업으로 나기 위해서는 양보다 질(質)의 경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창한다. 이 변화는 머리로 되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거기서 나온 말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곤 다 바꿔라"라는 비장한 슬로건이었다.
20년 뒤 삼성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스마트폰, 반도체, TV, 모니터 등 주요 제품이 모두 월드베스트 반열에 올라갔다. 1993년 29조1000억원이던 그룹 매출은 2012년 383조9000억원으로 13.2배로 늘어났다. 특히 갤럭시폰은, 2013년 3분기 경쟁사 제품 아이폰 판매량의 2.6배의 제품을 팔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최강자로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올 10월 삼성경제연구소는 그룹의 최고경영진에게 '건전한 위기의식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번 경제위기는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 속처럼 저강도 충격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상황이라, 외환위기 때와는 달라 기업인들이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솥 속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최후를 맞을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였다. 이건희 회장은 이날 만찬에서 삼성을 향해 한 마디를 뱉었다. "자만하지 마라." 글로벌 1위라고 안전한 것 같은가?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하지 않으면 삼성도 망한다는 20년 전의 벼랑정신을 환기시키는 일침이었다.
이 회장이 조용필에 대해 보여주었던 '인간적인 경외(敬畏)'는, 그가 20년 동안 고심해왔던 기업의 '혁신DNA'를, 이 가수가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한 음악방송이 전문가 50명에게 물어 '한국 가요사의 레전드(전설적인 아티스트)'를 조사한 결과 1위는 조용필이었다. 1979년 '창밖의 여자'로 데뷔한 그는, 단일앨범 100만장 판매로 기네스에 등재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올 들어 10년 만에 낸 19집 앨범 <헬로>로 환갑이 넘어 히트가수로 부활하는 괴력을 과시했다. 조용필의 '인생경영'과 '노래경영'은 이 회장의 꿈꾸는 기업경영과 놀랍게도 닮아있다. 조용필을 34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표 가수로 군림하게 해온 혁신DNA는 무엇일까. 그의 노래 '바운스'를 들으면서, 삼성맨들은 튀어오르는 '조용필정신'을 함께 귀에 담았을까. 여섯 가지 그의 미덕을 풀어본다.
◆자기 정체성 인식= 그는 자신의 목소리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고음 영역의 샤우팅(고함지르듯 부르는 창법)과, 감수성을 뒤흔드는 가성(여성적인 고음)은 노래들을 구성지게 하거나 감미롭게 풀어냈다. 다른 가수들의 방식을 치열하게 공부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방식대로 작품을 이끌어온 것이 '온리 조용필'의 세계를 만들었다. 삼성 또한 하드웨어에서 출발해 소프트웨어로 확장하는 변곡점에 서 있다. 스스로의 강점과 경쟁력을 버리지 말고 보다 강화하여 삼성만의 색깔을 지니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회장은 역설해 왔다.
◆자기 혁신= 조용필의 노래는 장르를 넘나들며 시대를 넘나든다. 민요나 트로트에서 외국의 최신 흐름까지를 모두 소화해낸다. 단순히 '넘나들기'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화하여 독특한 감성을 창출한다. 전통을 이해하는 깊이와 현대적인 트렌드를 읽어내는 센서가 동시에 갖춰져 있다. 대중이 자기의 방식에 싫증낸다고 판단되면, 하루 아침에 어제까지의 자기를 죽이고 새롭게 탄생한다. 그것이 처음의 멤버 이름이었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창의적 면모이기도 하다. 삼성도 가장 고점(高點)에 있을 때 자기 혁신을 시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의 주문을 받아왔다. 그 주문은 이 회장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위기 극복력= 그는 여러 차례 고비를 겪었다. 데뷔 초창기에 대마초로 방송 출연을 정지당했던 시련은 그의 중요한 '경험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1983년 그가 돌연 음악방송에서 자취를 감춘 때가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 앨범이 나왔을 때 대중이 주목해주지 않아 1위를 못하게 되었을 때 먹먹한 절망감에 빠졌다." 이 일로 그는 방송 대신 무대에서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그는 당시로선 생소했던 '무빙 스테이지'를 선보여 팬과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위기'는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정면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 바로, 신경영 20년 이 회장의 생각일 것이다.
◆자기 겸손= 가수 신승훈은 이런 고백을 했다. "최근 조용필 선배 때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요즘 젊은 음악인들이 무슨 악기를 쓰는지 구체적으로 다 알고 있더군요. 저 선배도 저런데, '난 이제 다 아니까 저 친구들 음악은 들을 필요 없어'라고 자만했던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졌습니다." 조용필은 TV의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 출연해 후배들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는, 여러 가지 칭찬을 해준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힘을 빼세요." 삼성에게 자만하지 말라고 외치던 목소리와 겹치지 않는가.
◆디테일의 저력= 조용필의 노래는 모르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고음질의 음향기기에서 들어본 그의 노래는 지금껏 들어왔던 그것과 전혀 달랐다. 노래의 구석구석을 풍성하게 하고 정교하게 끌어가는 목소리의 마력이 결결이 살아 있었다. 이런 디테일이 갖춰지는 것은 피나는 연습과 죽도록 쌓은 공력의 결과이다. 아름다움과 완전함과 새로움과 놀라움을 향한, 그의 집요하고 처절한 자기완성적 태도는 글로벌 리더 삼성이 지녀야할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태도일 것이다.
◆영원한 '오빠정신'= 그는 부드럽고 소박하다. 유머도 즐기며, 장난끼도 있다. 나이로 보자면 그럴 때를 이미 지난 것 같은데 영원한 '오빠'로 통한다. 그가 무대에서 '비련'을 부를 때 첫 마디의 '기도하는…'이라는 그의 음성이 터져나옴과 함께 쏟아지던 '오빠'의 함성. 그 극적인 대중과의 교감을 그는 이해하고 있다. 대중음악인이 대중이라는 끈을 놓치고 서둘러 '어른'행세를 하기 시작하면, 그는 목소리를 파는 직업인이 되어버리기 쉽다. 삼성은 20년 전과 같은 '젊고 패기 넘치는 자아'를 지니고 있는가.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다시 리뉴얼하는 자리에서, 세계 소비자와 매력적으로 교감하는 '조용필정신'을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
씁쓸하지만 음악밖에 모르시는 분이시니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