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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만 관객이 '허공'을 합창한다. '여행을 떠나요'가 시작되자 객석의 중년 부부는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일순간 공연장은 대형 노래방이 된다.

2.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환상적인 조명과 오케스트라의 반주, 정교한 음향이 어우러진 대중 가수의 공연. 클래식 공연을 보는 듯한 소름이 돋는다.


상반된 두 장면의 주인공은 모두 국민 가수 조용필(59)이다. 이젠 너무 흔하게 쓰여 값어치가 예전만 못한 '국민가수'란 단어는 조용필에겐 한치의 모자람도 여유도 없이 꼭 맞는다. 그의 공연장엔 트로트·발라드·록·민요·팝까지 장르의 가림이 없고, 백발의 노인에서 10·20대의 신세대까지 남녀노소의 벽도 없다. 80년대 '조용필의 시대'를 뒤이어 90년대를 주름잡은 신승훈·이승철·서태지는 닮고 싶은 가수로 조용필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우리 시대의 '가왕' 조용필, 그의 음악 인생 41년엔 '음악'과 '팬'이란 두 가지 화두만이 존재한다.

조용필, 음악을 만나다(~1978)

1968년 경동고를 졸업한 조용필은 기타를 부순 아버지에 대항하며 수면제 40알을 삼켰다. 자살 기도 후 가출, 그해 11월 친구 셋과 밴드 애트킨스를 결성했다. 조용필의 음악 인생 첫 페이지다.

미 8군에서 '화이브 핑거스' '25시' 등의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며 리듬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씨는 "그가 보컬로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가 된 것은 다 밴드 시절 오랜 연주 경험에서 온 결과다.

음악에 대한 기본이 갖춰져 소리에 수준이 있다. 그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떨림, 휨, 스트레이트 창법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리 패턴을 모두 구사한 독보적인 가수"라고 말한다.

75년 '조용필과 그림자'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녹음, 발표해 큰 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곧 시련이 닥쳤다. 72년 미군 부대서 활동했을 당시 대마초를 피웠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밴드를 해체하고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조용필은 35주년 인터뷰 당시 "이 때가 내 인생이 처음으로 빛났던 시기이자 가장 괴로웠던 첫 시기"라고 회고했다.

40년 연습벌레 조용필

평론가들은 조용필의 롱런 비결을 '장르가 다양하고 독보적인 가창력을 지녔다'고 거창하게 분석하지만 조용필이 내놓는 답은 단 하나 '연습'이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40년이 넘게 노래를 했지만 그는 "하루라도 목을 쉬게 해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난 목을 계속 써줘야 노래가 잘 나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생각 날 때 가끔씩 노래를 하면 잘 할 수가 없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성대결절이란 얘기를 많이 하는데 평소 목을 계속 쓰면 그런 증상을 겪지 않는다."

공연을 앞두고는 최소 한 달 전부터 밴드와 연습을 한다. 오전 10시에 출근, 오후 6시까지 샐러리맨처럼 규칙적으로 생활한다. 실전에 대비해 완벽하게 '공연용' 몸을 만들기 위해서다.

한 지인은 "바깥 출입도 거의 없으시다. 집근처(서초구 반포동)단골집에서 가끔 소주를 한 잔 하는 것 외에는 공연 준비와 연습 밖에는 특별한 일이 없다. 가끔 술자리를 가져도 음악 얘기가 전부다. 간혹 골프(조용필의 골프 실력은 평균 80타 중반) 얘기를 나누는 정도"라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다.

정치권에선 선거 때마다 조씨의 도움을 빌리고 싶어하지만 본인이 전혀 뜻이 없다"고 말한다.

조용필, 노래방과 아내 사랑

'인간' 조용필에 대해 물으면 측근들의 입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는 말은 노래방이다. 지금껏 질리도록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을 그이지만 지인들과 거나하게 취한 후엔 어김없이 노래방을 찾는다.

지난 2003년 아내 안진현씨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미국에서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도 아내와 찾던 노래방에서 아내의 애창곡을 불렀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 최근엔 서울 역삼동 소속사 YPC 사무실에 노래방을 대신할 간이 스튜디오를 마련 했을 정도다.

공연을 앞두고 간혹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후에도 식사 후엔 노래방을 찾는다. 그의 노래방 애창곡은 아내 안씨가 생전에 좋아했던 가곡 '떠나가는 배'다.

노래방에 동석했던 후배 가수 이승철은 "노래방에서도 형의 절창에 할 말을 잃었다. 목소리 자체에 카리스마와 힘이 담겼다고 할까. 감히 형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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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부대의 탄생(1979~1986)

80년 드디어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가 담긴 1집이 발매됐다. 처음으로 '오빠부대'가 등장했다. 데뷔한 해부터 연말 가요 시상식은 조용필의 독무대였다. 80년대 대중 가요계는 조용필이 열고 끝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집 '촛불', 3집 '미워미워미워', 4집 '못찾겠다 꾀꼬리', 5집 '나는 너 좋아', 6집 '눈물의 파티', 7집 '미지의 세계', 8집 '허공', 9집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등 발표하는 음반 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연말 가요 시상식에선 전해 대상 수상자인 조용필이 그해 수상자를 발표하러 나와 '또 접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웃지못할 장면도 연출됐다.

가요 평론가들은 "80년대 조용필을 통해 우리 가요는 신기원이 열렸다"고 평가한다. 서구 팝을 일방적으로 맹종하던 시절 록·블루스·소울·포크 그리고 우리 전통 음악까지 조용필의 손을 거치며 '한국 음악'이 통합 정립됐다.

일본 진출도 조용필이 먼저였다. 87년부터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 출연했다. 당시 조용필의 매니저였던 맹정호씨는 "일년에 일본에서 100회 이상 공연을 했다. 전국 순회 공연은 늘 만석이었고 공연이 끝나면 일본 지역 유력인사들이 조용필을 보고 싶어 파티를 열기도 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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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으로 돌아가다(1987~1997)

가요 대상을 휩쓸던 조용필이 갑자기 연말 가요대상 출연을 거절했다. 92년부터는 방송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조용필은 "히트곡을 더 내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방송 중단을 선언했다.

내 한계를 인정한 것"이라며 "마흔 넘어 젊은 층을 끌어안으려는 것은 욕심이다. 그래서 무대로 가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방송 중단을 선언할 무렵 그는 '거미 여인의 키스'란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며 '우리나라에도 저런 무대와 공연을 보이겠다'는 결심을 한다.

조용필이 공연 무대로 돌아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었다. 기타리스트에서 출발해 가수가 된 조용필의 고향은 어차피 공연 무대였다. 방송을 중단하자 세상에선 '조용필 한물 갔다'는 얘기가 들렸다.

음반을 내도 알릴 경로가 없었고 공연 홍보도 마찬가지였다. 93년부터 전국 투어를 시작했지만 지방 공연장엔 객석이 빌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용필은 무대에 집착했다.

예술의 전당, 40주년(1998~현재)

99년 조용필은 국내 대중 문화 공연계에 새 지평을 열었다.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 입성, 6년 넘는 공연을 했다. 대중가수의 공연도 좋은 무대에선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국민가수'의 힘은 서울 잠실주경기장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로 펼쳐진 35주년, 40주년 기념 공연에서 절정에 달했다. 35주년 기념 공연 당시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5만여 관객은 흰색 우비를 입은 채 2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 광경 자체가 어떤 무대 장치도 능가하는 감동이었다. 빗속에 음향 장비가 망가졌지만 조용필의 절대 음감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공연에 참여했던 신승훈은 "비 때문에 장비가 망가져 이어 모니터가 고장났다. 반주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아 첫음을 잡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용필이 형은 역시 미군부대에서 갈고 닦은 실력 덕분인지 절대음감으로 노래를 이어가더라"며 감탄했다.

조용필은 지난해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무려 35만 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했다.

임진모씨는 "대부분의 가수들은 청년시대의 스타덤으로 인기를 끌어가지만 조용필은 중년시절 음악과 공연에 집착하며 완벽하게 가수로서 자기 관리를 했다. 함부로 TV에 출연하지 않고 공연을 통해 중년팬들을 끌어들여 현재진행형의 스타가 됐다"며 롱런 비결을 분석했다.

이경란 기자 [ran@joongang.co.kr]

 

출처: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18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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