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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의 대중음악 아틀라스<3> - ‘트로트고고’를 아십니까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1976년 한 해를 강타한 최고 대중가요는 훗날 우리 가요 역사를 대표하는 곡으로 꼽히는 조용필(사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조용필의 매력적인 음색과 애절한 곡조는 말할 것도 없고 조총련의 고국방문 시점과 맞물린 시의성에도 힘입어 이 곡은 삼천리 방방곡곡을 메아리쳤다.

음악 판도는 신중현의 ‘미인’과 어니언스의 ‘편지’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의 록과 포크에서 갑자기 기성세대가 선호하는 트로트로 중심이 이동했다.

1976년은 젊은 록밴드에게는 가혹한 형벌이나 다름없는 유신정부의 대마초 파동과 가요규제조치가 대중음악계를 할퀴고 간 다음 해였다. 그룹사운드들의 생존법은 위험하지 않으면서 대중친화적인 트로트를 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트로트고고라는 변형된 스타일은 바로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움튼 것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성공의 깃대를 꽂게 되자 트로트 분위기가 완연한 노래들이 봇물을 이뤘다. 최헌의 ‘오동잎’과 ‘구름나그네’,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 김훈의 ‘나를 두고 아리랑’, 장계현의 ‘잊게 해주오’ 등이 그런 노래들이었다. 하지만 이 노래들은 결코 처음부터 끝까지 트로트는 아니었다. 그 속에는 록의 숨결도 흘렀다. 가요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록과 트로트가 결합했다고 해서 ‘록트로트’ 혹은 ‘트로트고고’라고 일컬었다(당시 고고는 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렇게 부른 데는 애절하거나 구수한 트로트의 선율을 내건 노래들이었지만 실은 그 가수들이 모두 록밴드, 그때 표현으로 그룹사운드 출신이었던 점도 작용했다. 조용필은 록을 하겠다고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 판에 뛰어들어 기타를 연주했고 김트리오를 거쳐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최헌은 대표적인 그룹사운드 ‘히식스’의 리드싱어였고, 윤수일도 신중현이 막후에서 지휘한 그룹 ‘골드 그레이프스’에서 노래했다. 장계현은 ‘템페스트’, 김훈은 ‘트리퍼스’라는 밴드를 이끌고 있었다. 모두 비틀스 이후 서구 로큰롤에 영향을 받아 밴드를 결성한 인물들로 애초 트로트, 즉 ‘뽕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국의 강렬한 록 사운드를 동경해 밴드생활을 해온 이른바 로커들이 어찌 기성 취향의 뽕짝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들에게 스타덤을 안겨준 노래들은 하나같이 명백한 트로트였다. 왜 그랬던 걸까. 젊은 록밴드에게 1976년은 가혹한 형벌이나 다름없는 유신정부의 대마초 파동과 가요규제 조치가 대중음악계를 할퀴고 간 이듬해였다. 제대로 질러대야 하고 날카로운 노랫말을 생명으로 하는 록은 대마초라는 불온 이미지 때문에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감히 대놓고 하기가 어려웠다.

그룹사운드들의 생존법은 위험하지 않으면서 대중친화적인 트로트를 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트로트고고라는 변형된 스타일은 바로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움튼 것이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 당대의 그룹사운드 출신 가수들이 자신의 히트곡에 만족할 리 만무했다.

조용필은 로커로서 트로트를 한 것이 창피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음반의 밑 곡으로 내려달라고 했으며 나중 백업 밴드 ‘위대한 탄생’을 만들어 기어코 원래의 록으로 돌아갔다(‘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 윤수일도 빅 히트송 ‘제2의 고향’과 함께 윤수일밴드로 거듭났으며, 최헌도 ‘오동잎’으로 자신의 음악 색깔이 매몰되는 것에 불편해하며 밴드 ‘검은 나비’와 ‘불나비’를 결성했다.

이들이 트로트고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대중은 여전히 위 가수의 대표곡으로 트로트고고 시절의 노래를 떠올린다. 당사자들은 자신에게 무명의 설움을 벗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고마움이 없지는 않겠지만 록 출신으로서 뽕짝을 했다는 일말의 수치심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대마초 파동과 가요규제는 이처럼 가수 본연의 자유를 어둡게 하는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음악가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구현하는 일이 먼저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창작의 자유라고 부른다.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출처:http://www.posco.co.kr/homepage/docs/kor2/jsp/news/posco/s91fnews003v.jsp?menuCatId=0959&idx=21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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