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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동아일보 
기사 날짜 2013-11-21 
한일국민 가깝게 만든 대중예능… 그 한류의 선구자 가왕 조용필

15년만의 도쿄무대 친구야 열창 ‘우정은 불변’ 메시지 가슴 울려

소중한 양국관계 유지해 가려면 정치권에만 맡겨선 안된다는 말, 한국 빅스타 콘서트 보며 실감

[동아일보]

“곤방와, 오히사시부리데스네(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라며 조용필이 일본말로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올해 크게 히트를 친 ‘헬로’와 ‘바운스’의 일본어판 발표를 겸해 15년 만에 도쿄에서 열린 이달 7일의 콘서트.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 왔던 팬들 중에 나도 있었다.

내가 처음 그의 노래를 들었던 것은 1981년이었다. 빠른 템포의 팝에 애수를 가득 채운 ‘고추잠자리’. 애절한 마음을 아름답게 노래한 ‘창 밖의 여자’. 가창력과 참신함에 매료된 일본인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해, 일본 문화방송이 도쿄에서 연 아시아 뮤직 포럼에 초대된 그는 얼마 후 ‘추억의 미아’와 같은 일본어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그 이후 30여 년. 한일 국민들을 가까워지게 한 대중예능의 힘을 생각하면 조용필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

획기적이었던 것은 1987년 12월 31일 NHK방송의 홍백가합전(홍백가수전)에 한국 가수로서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것이다. 그때 ‘창 밖의 여자’를 불렀고 다음해 흰 한복을 입고서 ‘한오백년’을 선보였다. 1990년에는 서울 롯데월드에서 실황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4년간 계속해 홍백가합전에 나간 한국인 가수는 조용필뿐으로 그는 곧 꽃피는 한류 붐의 선구자였다.

1987년은 민주화를 선언한 해였다. 1988년에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한국의 국제적 이미지는 크게 높아졌다. 시대는 그에게 순풍으로 작용한 것이다. 아니, 이미 일본에서의 활동을 개척한 그에게 시대가 뒤따라왔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음악가이고 정치와 관계없다”라고 말해온 그이지만 시대 속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 예를 들어 ‘창 밖의 여자’가 탄생한 때는 광주에서 비극이 있었던 1980년이었다.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그 누구도 그 누구를 위로하지 못했을 때, 가녀린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되는 그 노래가 역사의 비수에 찔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줄 상상하지 못했다”,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는 광주사태를 기억 속에 갈무리했다”(동아일보, 2006년 10월 26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데뷔곡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감춰진 수수께끼를 취재한 적이 있다. 일본어 가사에서는 항구에서 연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실연을 노래한 것인데 한국어 가사에서는 형제를 기다리는 노래다. 그 차이에 주목했는데 그는 원래 사랑의 노래였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연인이 형제로 바뀐 것은 음반회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사는 북한 동포들에게 성묘를 위한 귀향을 권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산가족이 된 형제들에게도 사회적 관심이 쏠려 있었다. 노래 가사에는 남북 분단의 애절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조용필은 실제 2005년 평양콘서트도 실현시켰다.

15년 만의 도쿄 콘서트에서 받았던 인상은 우정이었다. 관객석에는 처음 일본에 온 이후부터 사귀어 왔던 일본인 가수 다니무라 신지(谷村新司)가 있었다. 스테이지 위에서 그를 소개한 조용필은 곧바로 ‘친구여’를 불렀다. 한일 정상 간에 회담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큰 장벽이 생긴 가운데 사람의 우정은 변함없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여겨져 내 마음은 흔들렸다.

15년 만이라는 타이밍에도 기묘한 우연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에 와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와 함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한 때가 기이하게도 같은 15년 전인 1998년이었다. 당시는 한일 화해 무드의 정점이었다. 한국이 일본의 대중문화에 문을 열어준 것도 그 선언 덕분이었다.

지난가을 일본에서 강연한 한국의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은 “전쟁을 장군들에게 맡겨 두기에는 너무나도 중대하다”고 말한 조르주 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의 말을 인용해 한중일 3국 관계에 대해 “정치 지도자에게 맡겨두기에는 너무나도 중대하다”며 경종을 울렸다. 소중한 한일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양국 국민들이 뒤섞여 친구를 늘려가는 방법 외에는 없을 것이다. 한국 빅스타의 무대를 보며 절실히 그것을 실감했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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