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팬클럽 미지의 세계 Cho Yongpil Fanclub Mizi

뉴스

신문사  
기사 날짜  
창가에 선 세 남자 조용필, 오혜성, 전두환




1980년, 조용필은 이렇게 물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대중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물처럼 떠오르는 ‘창 밖의 여자’를 울면서 불렀을망정.

사랑을 아름답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집권을 한 신군부였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정의’와 ‘자유’와 ‘사랑’은 피의 냄새가 났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대답이 나왔다. 깡마른 체구의 까치머리 오혜성이었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
1983년의 어느 후미진 만화방에서의 일이다.

사랑조차 아름답지 않던 1980년

시비가 있을 수 있지만, 조용필과 오혜성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그들은 ‘메이드 인 80년대’였다. 그런 만큼 그들의 등장엔 80년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이다.

조용필은 대한민국가요사 전체를 통해 가왕(歌王)이란 타이틀을 시비 없이 붙일 수 있는 가수다. 1집이 발표되던 1980년 그 해, 조용필은 ‘TBC 가요대상’과 11월 ‘서울국제가요제’, 12월 ‘MBC 10대가수가요제’의 상을 싹쓸이 한다. 이런 싹쓸이는 몇 년을 계속했고, 어느 해부터는 가요제 수상을 거절하였다. “기도하는~ 까~악”이란 유행을 낳으며 원조오빠부대를 만들었다. 방송 가요프로그램의 피날레는 언제나 조용필이었다. 무엇보다 조용필 최고의 업적은 서양대중가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국대중가요의 수준을 높였다는 것이다

가왕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은 ‘창 밖의 여자’와 ‘단발머리’가 실린 1집의 발매가 있던 1980년의 일이다. 비록 그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미 대중들에게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대마초 파동’으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7년 활동금지를 당하였던 까닭에 그가 재기를 위해 1집 앨범에 혼신의 힘을 실었던 것이다. 앨범은 성공하여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지금에도 대단한 150만장 이상이 팔렸다.

박정희가 죽던 1979년10월26일 이후의 한국사회는 희망과 불안이 수시로 교차하던 시대였다. 조용필은 1970년대를 마감하던 이때에 정서가 판이하게 다른 두 곡, 비극의 ‘창 밖의 여자’와 희망의 ‘단발머리’를 작곡하고 있었다. 1980년 3월, 1집 앨범을 통해 발표된 이 곡들은 모두 히트하여 지금도 애송되고 있지만, 대중들은 1980년의 노래로 비극적 정서에 닿아있던 ‘창 밖의 여자’를 선택하게 된다. 새로운 10년을 여는 1980년은 정치사회적으로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력이행 과정의 엇박자 속에서 잠깐 찾아왔던 해방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18년10개월을 통치하던 박정희가 죽고, 갑자기 등장한 머리 없는 군인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어느 날은 남쪽의 어느 도시에서 군인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등 사회는 대중들이 기대하던 방향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중들은 희망을 접고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잠들고 싶다는 비극의 정서를 받아들인 것이다.

70년대의 노래처럼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의 부드러운 선율로 표현하지 않고, 신디사이저의 강렬한 전자음과 절규하는 듯한 창법에 담긴 조용필의 노래는 낯선 것이었지만, 대중들은 받아들였다. 시대의 격한 우울을 부드러운 소리로 담는 것, 그것이 배반이었다. 도대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도대체 누가 ‘사람’을 아름답다 했는가. 현실에 압도당한 대중들을 조용필의 노래가 위로해주었던 것이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

사랑이 아름답지 않은 시대에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1983년 어느 골목 안 만화방에 진열되어 있던 만화책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대중들은 시대를 꿰는 대사를 발견한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

깡마른 체구의 사내가 한 여인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가 직선의 강렬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던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과 주인공 ‘오혜성’은 1980년대의 최고의 히트상품이 된다. 프로야구의 인기와 맞물려 ‘공포의 외인구단’은 80년대 최고의 만화가 되고, 오혜성은 뒷골목 만화방 스타에서 전국구 인물이 된다. 1986년 이장호 감독은 만화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를 만들어 크게 히트를 하였고, 가수 정수라는 만화의 대사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를 원용한 주제가를 불렀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오혜성과 마동탁 이라는 출신과 성장배경이 완전히 다른 두 남자와 그 사이의 여인 엄지를 통해, 비록 통속적이었을 망정 1980년대 대중들의 욕망과 판타지를 표현하였다. 오혜성은 가난하고 열등감이 많지만 인간적이고 순순한 인물이었다. 반면 마동탁은 그 반대로 재주도 많고 부유하지만 이기적이고 자만심이 많았다. 엄지는 오혜성의 지고지순의 사랑과 마동탁이 가진 현실적인 배경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현세는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사랑을 쟁취하고자 한 오혜성이 마동탁과의 승부에서 승리하여 엄지의 사랑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렸다. 이러한 설정은 이후 이현세 만화는 물론 80년대 대표적인 만화가였던 허영만, 박봉성, 고행석 등에 의해 비슷하게 반복되었고 대중들은 그 비슷한 이야기들을 질리지도 않고 읽어나갔다. 그것이 대중들의 욕망이었고,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현실이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한국사회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닮았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최고권력자는 국민들의 영혼을 팔아 권력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파우스트를 지옥에 떨어뜨리지 않았다.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았다. 피를 묻히고 집권한 최고권력자는 비판기능을 상실한 언론에 의해 “단군 이래 최고 성군”이 되어갔다. 살인도 정당화하는 권력, 그 힘.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진조국창조’와 ‘서울올림픽’을 국가이데올로기로 삼아 경제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고 하였다. 그 결과로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철거에 밀려 서울 땅을 벗어나 변두리 판자촌으로 밀려갔다. ‘대도 조세형과 5.7캐럿의 물방울 다이아몬드’,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수 천 억대의 사기’ 같은 사건들이 간간히 터져 나와 소외감을 더욱 깊게 하곤 했다.

그러므로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오혜성의 말은 1980년대 권력과 금력에 소외된 대중들의 욕망과 판타지였다. 악하다 할지라도 강하면 아름다운 것이 현실인 세상에서 지고지순의 사랑과 불굴의 의지로 엄지의 사랑을 차지하는 오혜성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패하고 돌아선 주머니 헐거운 이들의 영웅판타지였다. 또한 “너 죽어봤어”라는 오혜성의 다른 대사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이기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변두리 청춘들의 욕망을 대리표출해주었다.

그리고 1992년

온전하진 않지만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30년 군사독재를 서서히 무너뜨려간다. ‘난 알아요’를 들고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은 조용필이 장기집권하고 있는 대중가요시장을 접수한다. 일본만화이긴 하지만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가 90년대 캐릭터로 부상한다. 이 모든 것은 1992년에 시작하였다.

1980년대의 사람들은 무대 위의 세 명의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건지는 알 수도, 해독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전의 스타들과 달리 카리스마가 느껴지기 보다는 동생 같고, 아들 같은 이 세 명의 아이들의 시대가 왔음을 직감하게 된다. 여자 친구의 호감을 얻기 위해 농구부에 들지만, 오혜성과 달리 강백호는 부족한 농구실력에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긍정하며 극복해가는 밝은 인물은 이후 만화주인공의 전형이 되어간다.

80년대 인물들의 자리는 이렇게 90년대의 인물들로 바뀌어갔다. 현장에서 물러난 80년대 인물들은 역사 속으로 갔다. 다행히 역사는 잔혹한 것이어서 당시의 주역들은 자신이 지은 공과대로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성현 기자 (shlee@ticketlink.co.kr)
번호 제목 신문사 기사 날짜 조회 수
2273 [조선일보] 조용필 인천 공연     4830
2272 [마이데일리 2005-07-05] 50대 스타파워는 강력하다-조용필, 안성기,     4830
2271 [스포츠서울 2005-08-29] [김용습의 TV플러스] 남-북, 대중문화 통일     4830
2270 [스포츠조선 2008-04-16] [화보] 조용필,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 기자회견 ☜ 사진모음     4830
2269 [흥국생명 2005-08-24]‘평양시민’ 움직인 ‘조용필’의 열창     4831
2268 [헤럴드경제 2005-11-24] 조용필`12월은 콘서트의 달` file     4831
2267 [문화일보 2008-09-24] [AM7]조용필 “요즘 노래들은 귀만 간지럽혀…가슴 때릴 ‘센 음악’ 필요할때”     4831
2266 [경인일보 2008-10-06] 슈퍼스타 조용필·3만여팬 '특별한 무대'     4831
» [티켓링크 2005-09-21] 창가에 선 세 남자 조용필, 오혜성, 전두환     4832
2264 [연합뉴스 2007-10-17] 조용필 "정부가 문화도시 조성해야" 지적     4832
2263 [노컷뉴스 2008-04-16] '긴장되는 영원한 오빠' ☜ 사진모음     4832
2262 [스포츠칸 2008-04-16] 조용필 데뷔 40년에 부쳐…“오직 노래밖에 모르는 兄”     4832
2261 [일간 스포츠 2007-10-17] 조용필, 40주년 콘서트서 초대형 무대 꾸민다     4833
2260 [동아일보 2008-03-23][전문가 100인 리서치]‘파워 1위’ 조용필 “나의 애창곡 No.1은 꿈”     4833
2259 [마이데일리 2005-08-04] 조용필과 조명애, 남북대중문화교류 기폭제되다     4834
2258 [중앙일보 2006-04-06] [me] '가요계 거목' 김희갑 작곡인생 40년을 노래     4834
2257 [문화일보 2008-05-23] [AM7]가슴 뛰는 ‘콘서트 삼국지’     4834
2256 [에이빙뉴스 2006-06-22] 가수 조용필이 애용하는 ‘James Tyler'     4835
2255 [ETN 2005-05-02] 조용필 'Hi Seoul Festival'전야제 공연     4836
2254 [경인일보 2005-08-12] 亞게임유치 홍보대사 조용필씨 위촉     4836

공식 미지 트위터

뉴스 - News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메달 수익 음악 영재 발굴에 기부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메달 수익 음악 영재 발굴에 기부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기념 메달 수익금 '음악역 1939' 전달식 (왼쪽부터 조폐공사 류진열 사업 이사, 김성기 가평군수, 음악역 1939 송홍섭 대표) [음악역 1939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가왕' 조용필 50주년 기념 메달 판...

뉴스 - News

조폐공사, 조용필 메달 수익금 일부 음악영재 '후원'

조폐공사, 조용필 메달 수익금 일부 음악영재 '후원' 한국조폐공사(사장 조용만)가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음악영재 지원 사업에 후원한다.   공사는 11일 경기도 가평 뮤질빌리지 '음악역 1939'에서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가운데 2500만원을 가평군과 함께 가평뮤직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