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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사보] [2005년 평양 출장기] 김수현 기자

2005.09.16 17:55

ypc스타 조회 수:4796 추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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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년 평양 출장기> 김수현 기자


2000년 8월. 서울

사상 처음으로 남북 교향악단의 합동 공연이 열렸다. 북측의 조선국립교향악단이 서울에서 KBS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회를 연 것이다. 지휘자 김병화 씨가 이끄는 교향악단은 물론이고, 베이스 허광수, 테너 리영욱 씨 등 북측의 음악가들이 대거 서울무대에서 선보였다.

남북이 함께 한 공연 자체도 감동적이었지만, 축하 만찬도 인상적이었다. 북측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조선국립교향악단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글월’을 주고받았다. 허광수, 리용욱 씨에게는 사인도 받았다.

만찬이 끝나고 버스에 오르는 그들을 배웅하면서,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면서, 나는 감격에 겨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었다. 이게 ‘민족’이란 것인가.

그로부터 5년 뒤인 2005년 8월 18일. 평양.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조용필 평양 콘서트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푸른 하늘 아래, 공항 청사에는 ‘평양’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김일성 주석의 커다란 초상화도 보였다. 북녘 땅은 생전 처음 밟는 것이었다. 흥분할 법도 했지만, 나는 담담했다. 아니, 담담하려 애썼다.

남북 문화교류의 봇물이 터졌던 2000년은 이미 지나가 버린 지 오래다. 이제 남북 교류가 새삼스런 뉴스도 아니다. 남북 관계는 그동안 ‘긴장’과 ‘대화’의 두 봉우리를 사이에 두고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탔다. 마침 6.15 5주년을 맞아 남북 대화가 다시 물꼬를 텄다지만, 여전히 남은 남이고 북은 북인 것이다.

공연은 23일이니, 며칠 빨리 도착한 셈이었다. 그 동안 조용필 콘서트의 준비 상황 뿐 아니라 평양의 모습을 취재할 계획이었다. 조선국립교향악단을 다시 취재하고 싶기도 해서, 북측에 취재 협조를 요청해 놓았다. 취재 협조를 요청한 건 중에는 백두산 관광도로 건설 현장, 용천 복구 모습 같은, ‘원대한 계획’들도 들어있었다.

평양 땅에서 취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취재팀을 안내하는 북측 안내원들과 수없이 부딪혔다. 기본적으로 뉴스 제작과 취재에 대한 개념이 다른 상황이라, 이들을 설득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매일 저녁 다음날 취재 계획을 놓고 북측과 입씨름을 벌였다. 날마다 입이 아프게 똑같은 이야기를 했고, 귀가 아프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은 이들이 안내하는 대로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와 주체사상탑, 3대 헌장 기념탑, 동명왕릉, 김정숙 탁아소, 학생 소년궁전, 지하철 역 등을 둘러봤다. 남측의 TV에서도 이미 많이 소개된 곳들이다. 며칠이 지나고서야, 북측에서는 우리의 요구 중 일부를 수용해 대동강 뱃놀이 등 평양 시민들이 여가 보내는 모습을 취재하도록 협조해 줬다.

길고 긴 ‘토론’ 끝에, 북측도 우리의 취재 스타일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우리도 그들의 ‘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됐다. 이번 취재에는 인원이 제한돼 있어 오디오. 조명 담당자가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취재 기자인 내가 무거운 카메라 삼각대와 조명장비들을 들고 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두고만 보던 안내원들이 며칠이 지나자 자청해서 들어주기 시작했다. ‘우리도 SBS 보도 일꾼이라우.’ 하면서.

공연단 본진이 도착한 것은 공연 전날인 22일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본진 도착을 취재하기 위해, 평양 순안공항으로 나갔다. 본진보다 며칠 먼저 도착했을 뿐인데, 그동안 ‘현지’에 적응돼 있었나 보다. 어느새 스스럼없이 북측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열렬히 환영합네다” 하는 내 말에, 본진으로 온 한 선배는 ‘웬 평양 아줌마가 환영 나왔나 했더니 김수현 씨였어?' 했다.

공연은 평양의 유경 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조용필 씨는 오자마자 공연장으로 직행해 공연 준비에 몰두했다. 먼저 도착한 무대 기술팀들이 무대는 다 설치해 놓은 뒤였다. 이 날부터 우리 취재 팀도 뉴스 생방송을 시작했다. 평양에서 하는 생방송. 방송사상 처음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처음이었다. 뉴스가 끝난 뒤에도 리허설은 계속됐다. 노래도 노래거니와 무대가 굉장했다. 궁금했다. 평양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23일. 공연 당일.

공연 시각인 저녁 6시를 앞두고, 고운 한복과 정장을 차려입은 평양 시민들이 긴 줄을 이뤄 공연장에 입장하고 있다. 뉴스 준비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남다른 감회가 느껴지려 한다. 이럴 때가 아니야, 마음을 다잡았다. 6시부터 8시까지 공연 녹화해서 서울로 송출하고, 8시면 뉴스 시작이다. 시간이 촉박했다.

공연이 시작됐다. 객석이 꽉 찼다. 7천여 명의 평양 시민들이 무대를 주시한다. 조용필 씨는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객석도 긴장했다. 첫 곡인 ‘태양의 눈’부터 시작해 세 번째 곡인 ‘못 찾겠다 꾀꼬리’까지, 빠르고 음량이 큰 곡들이 이어졌지만, 객석의 분위기는 엄숙하다 못해 경건했다. 남측 표현대로라면, ‘썰렁한 분위기’였다.

살얼음 같은 긴장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조용필 씨가 ‘친구여’를 부르면서부터였다. 조용필씨 자신도 공연이 끝난 뒤, 이 때부터 관객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돌이켰다. 관객들은 공연장 무대 오른편 스크린에 떠오르는 가사 자막을 보면서 노래를 음미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모자랐다. 이제는 좀 터져 나와야 하는데.

조용필 씨가 북측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북측의 인기가수 전혜영이 부른 ‘자장가’, 그리고 김광숙이 부른 ‘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네’. 꼼짝 않고 고개만 무대에서 자막으로, 자막에서 무대로 돌리던 관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뼉 치며 박자를 맞추고, 따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 이제 됐다 싶었다.

50년대 이전 옛 노래들인 ‘봉선화’와 ‘황성옛터’에 이르자, 관객들의 표정은 점점 아련해지고 있었다. 혼을 다하는 노래가 가슴 깊은 곳에 사무쳐 왔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한을 담은 이 노래들에 어디 남과 북이 따로 있었으랴. 나는 이즈음부터는 무대가 아니라, 관객석을 더 자주 바라봤다. 조용필 씨의 노래에 눈시울을 붉히는 북녘 동포들의 표정을, 자꾸자꾸 보고 싶었다.

마지막 노래인 ‘꿈의 아리랑’. 커다란 한반도기가 무대에 내려졌다. 수만 개의 종이 꽃잎이 흩뿌리는 가운데, 조용필 씨는 관객들과 함께 ‘아리랑’을 합창했다. ‘꿈의 아리랑’의 가사대로, ‘아리랑’은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노래를 끝내고, ‘생애 가장 의미 깊은 공연을 하게 해 주신 평양 시민들에게 감사 드립니다’라고, 감격에 찬 목소리로, 천천히, 인사했다. 이례적인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재창, 앙코르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조용필 씨가 준비한 앙코르 곡은 ‘홀로 아리랑’이었다. 사실 이 곡은 북측에서 공연 당일 특별히 요청한 노래였다. 조용필 씨는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어 악보를 보고 불러야 했단다. 그렇지만 ‘홀로 아리랑’은 이 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북측에서도 ‘독도 아리랑’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이 노래. 이미 무대와 객석은 둘이 아니었다. 손뼉 치며 목청껏 ‘홀로 아리랑’을 따라 부르면서 나도 가슴이 울컥 해 왔다. 5년 전 그 느낌이었다.

공연 다음날, 나는 북측의 안내로 묘향산의 ‘국제 친선 전람관’을 참관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해외에서 받은 선물들을 전시해 놨다는 곳. 그들은 이 시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속으로 웃고, 또 울었다. 그리고 묘향산의 수려한 절경에, 유서 깊은 사찰 보현사의 고즈넉함에 눈을 돌렸다.

이 날 평양에서의 마지막 8시 뉴스를 끝내고 나서, ‘여기는 평양’이라고 쓰인 세트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서울로 도로 가져가 봤자 쓸 수도 없는 세트다. 중계 감독이 세트를 맡기고 가자고 한다. 언제 여기 다시 와서 방송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누가 맡아줄까요?’ 했더니, 씩 웃으며 ‘그동안 여기 사람들하고 친해졌거든’ 한다. 유경 체육관의 방송실 한 구석에 세트를 세워놓고 나왔다. 언젠가, 여기 다시 와서 방송을 하게 될까, 생각하며.

평양의 마지막 밤. 취재팀은 북측 안내원들과 함께 뒤풀이를 했다. 어느새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숙해져 있었다. 남측에 내려오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고려 호텔 식당의 종업원들과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호텔 지하의 가라오케에서는 고운 한복 입은, 가수 뺨치게 노래 잘 하는 ‘평양 처녀’ 직원과 함께 ‘다시 만납시다’를 불렀다.

25일, 나는 평양 출장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 조용필 씨 팬클럽 회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조용필 씨를 ‘오빠’라고 부르던, 3, 40대 주부로 보이는 회원들은, 취재팀에게도 ‘수고하셨다’며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북측에서 절대 볼 수 없었던 남측의 ‘오빠 부대’, 그 열광과 환호를 보면서 나는 서울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다시 시작된 서울에서의 일상. TV 뉴스에서는 금강산에서 이뤄진 이산가족들의 눈물어린 상봉을 전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다시 담담해져 있었다. 남북의 이산가족이 이렇게 만나도, 조용필 평양 콘서트가 성공적으로 이뤄져도, 내가 평양 사람들과 ‘다시 만납시다’를 목청껏 함께 불러도, 남북 관계에 당장 변화가 오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공연에서 조용필 씨의 노래로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남과 북이 하나 된 순간을 목격했다. 5년 전의 공연도 아마 그런 것이었으리라. 조용필 씨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민족이었으니까. 음악은 정서요,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니까. 이런 순간들은 아마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조용히 쌓이며 훗날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리라.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문화과학팀 김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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