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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 평양서 위대한 탄생 조용필






‘한국 대중음악의 제왕’

‘한국 대중가요의 살아있는 전설’.

가수 조용필을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음악 인생 37년이라는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명실공히 한국 대중음악을 이끌어온 선두주자다.

그를 중심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쓴다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의견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런 그가 평양을 갔다. ‘2005 평양콘서트’.

160cm의 작은 키에 외소해 보이는 몸집을 가진 그가 지난달 23일 평양 유경 정주영체육관에 마련된 콘서트 무대에 올랐을 때,

아무도 그의 외모가 작다고 보지 않았다.

피를 토하듯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아리랑’은 노래이기 이전에 시였고, 민족의 한이었다.

조용필 그의 노래는 반세기 동안 서로 다른 문화와 정서 속에서 살아온 평양 시민들의 가슴속을 후비며

끝내 눈물짓게 만들었다.

그의 노래에는 가식도, 허구도 없었다.

그냥 그대로 흩어진 민족의 영혼을 읊조렸을 뿐이었다.

“내 음악생활 중 최고로 의미있는 공연이었습니다.”

조용필이 지난달 23일 평양의 유경 정주영체육관에서 ‘광복 60년 SBS 특별기획 평양 2005’ 콘서트를 마친 뒤 밝힌 소감이다.

올해로 데뷔 37년을 맞은 가요계의 거물 조용필에게도 이번 평양 공연은 그 어느 공연보다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조용필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성사된 이번 공연은

지난 2002년 이미자 이후 한국 가수의 단독 콘서트로는 두 번째 공연이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성들과 형형색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 등

7천 여명의 평양시민들이 참석한 이번 공연은 처음에 지나치게 차분해서 조용필 측에서도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 차분하고 경직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기 시작하자 객석 이곳 저곳에서 리듬에 맞춰 박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관객들의 딱딱했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조용필의 히트곡 ‘단발머리’ ‘못찾겠다 꾀꼬리’ ‘미지의 세계’와

북한 노래 ‘자장가’ ‘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리’ 등의 곡들이 이어지면서 관객들은 환호했다.

‘한오백년’과 ‘봉선화’ ‘황성옛터’ 등 우리의 한이 어려 있는 노래를 부를 때는 관객 몇 명이 눈물을 흘리기도 해

“음악은 이념의 벽을 넘는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이날 공연의 감동은 마지막에 불렀던 ‘홀로 아리랑’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북한측의 요청으로 급하게 준비한 ‘홀로 아리랑’이 끝난 뒤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해 박수갈채를 보낸 것이다.

북한에서 가수들의 공연에 기립박수를 치고, 노래 도중에 박수를 치는 일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로 북측 관계자들 사이에서 “역시 조용필이다”라는 찬사가 터져나왔다.


‘최초’를 달고 다니는 가수

그렇다, 올해로 무대인생 37년을 맞은 작은 거인 조용필.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한국가요사에서 그의 기록을 깨뜨릴 사람이 없다.

80년대 발매한 공식 1집 ‘창밖의 여자’는 독집 음반으로는 국내 최초로 100만장을 돌파했고,

81년 7월 미국 카네기홀에서 국내 가수 최초로 단독공연했다.

82년에는 일본 NHK 리사이틀홀 무대에 서는 기록을 남겼으며,

83년에는 일본 NHK 등 4개 방송사에서 조용필 특집을 방송하기도 했다.

또한 88년에는 한국 가수 최초로 중국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89년에는 최초로 미국시장에 진출했다.

99년에는 교수·평론가 등 10여 명이 모여 ‘조용필학’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면서 학계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최초의 접근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의 최초 행진은 데뷔 31주년이 되던 해 대중가수 최초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서면서

‘대중음악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낳았다.

음악적 성취나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조용필을 앞지를 사람이 없다는 평가는 그래서 당연한 결론이다.

그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통합하는 ‘소리꾼’인 것이다.


무명에서 스타가 되기까지

조용필은 1950년 3월21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현재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가요계의 거물,

조용필도 어린 시절에는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거의 없던 평범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 비틀스와 벤처스의 음악에 심취해 자연스레 기타를 잡게 됐지만,

그의 음악인생이 처음부터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딴따라’를 반대하던 아버지 때문에 68년 경동고를 졸업한 후

결국 집을 뛰쳐나와 친구들과 ‘애드킨스’라는 밴드를 만들면서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미8군에서 외국음악을 접하는 등 음악활동을 하면서 실력을 키웠고,

72년 데뷔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처음 기타로 녹음하면서 그의 본격적인 음악인생의 막이 오르게 된다.

이 노래는 먼저 부산에서 열풍이 불었고, 나중에 서울에서 대폭발을 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75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한동안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이로 인해 76년 그는 밴드를 해체하고 음악 중단을 선언한다.

그는 이때는 두고 “내 인생이 처음으로 빛났던 시기이자, 가장 괴로웠던 첫 시기”라고 회상했다.

공백 기간 동안 그는 판소리 창법을 공부하는 등 보컬에 대해 폭넓게 공부했고,

이후 그는 록, 발라드 뉴 웨이브, 소울, 동요 등으로 음악의 폭을 다양하게 넓혔다.

당시 그와 함께 노래를 했던 가수 유현상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번은 남산에 올라 밤늦게 노래 연습을 하고 내려오는데,

저만치서 키작은 사람이 통키타를 매고 걸어오면서 쉰목소리로 노래연습을 하더라.

가까이 가보니 조용필이었다.”

79년 정부의 해금 조치로 가요계에 복귀한 그는 밴드의 이름을 ‘위대한 탄생’으로 바꾸고,

80년 ‘조용필’이라는 이름으로 1집을 냈다.

이 앨범에 실린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등 모든 수록곡이 동시에 전대미문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가요를 담당했던 기자는 “1980년대는 조용필 기사만 쓰면 됐다”고 회고할 정도로 줄곧 가요계의 정상에 서 있었다.

특히 ‘한오백년’ 같은 국악풍 노래는 ‘당대의 절창’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젊은 세대들은 ‘고추잠자리’ ‘자존심’ 등의 전형적인 록에 전폭적인 갈채를 보냈다.

한국가요역사에서 처음으로 객석에서 ‘오빠’ 라는 소리가 나온 것이 바로 이 때다.

우리나라 최초로 ‘오빠부대’를 탄생시킨 그는 그 당시 음반 이외에 사진이나 각종 액세서리 등

연예계의 부가가치 산업을 창출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80년대는 그야말로 조용필의 시대였다.

그는 최다 ‘최고 인기 가수상’을 수상하면서 가요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왕 수상 총 6회(80,81,83,84,85,86),

KBS ‘가요대상’ 최고인기가수상수상 총 4회(81,82,83,85),

TBC ‘방송대상’ 최고 가수상 총 11회 등이 그 것. 하지만

그는 87년 이후 후배들을 위해 “연말 결산 가수왕을 사양한다”고 선언하면서

TV 중심의 음악활동에서 콘서트 위주로 음악활동을 바꾸었다.


무대위의 ‘영원한 오빠’

92년 조용필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거미연인의 키스’를 보고 충격을 받은 후 ‘노래’ 만큼 ‘무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곧바로 TV 출연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TV에 출연하지 않자 일각에서는 ‘조용필도 한물 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고,

음반 홍보도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고,

93년부터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TV 출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객석이 꽉 차지 않는 일도 많았고,

음반 판매량도 뚝뚝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그가 가야할 길은 콘서트 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모든 방송 출연을 완전히 중단했고,

브로드웨이를 다니면서 무대연출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가수인생의 화려함과 달리 그의 사생활은 그리 화려하진 않았다.

한창 인기가 치솟던 80년 초반에 그는 전 국회의원의 딸과 결혼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이별했다.

한동안 혼자 살던 그는 안현진씨와 94년 재혼했다.

하지만 안씨는 결혼 3년 만인 97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두 번의 결혼이 비극적 종말을 맞고 만 것이었다.

그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추모곡 ‘진(珍)’을 냈다.

그 이후 새로운 음악세계를 꿈꾸기 시작한 그는 대학로 소극장의 공연을 통해 무대에 대한 연구를 했고,

애니메이션과 라스베이거스 쇼,

외국인 밴드들의 연주실황을 보면서 더욱 ‘무대공부’에 심취했다.

그의 이런 ‘공부’는 지난 2003년 잠실 스타디움에서 무대 길이 110m, 스피커 260개, ENG 카메라 70대,

스태프만 3천 여명의 초대형 공연을 가지면서 실험에 나서기도 했다.

그의 이런 실험정신은 국내 대중가수 사상 처음으로 2004년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가지면서 다시금 빛을 발했다.

현재 그는 국내 최대 규모인 관객 30만 명 동원을 목표로 전국 월드컵 경기장 투어를 하고 있다.

올해 그의 나이는 56세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향한 끝없는 열정은 새로운 신화창조를 향한 큰 걸음으로 계속되고 있다.

<김민주 기자 >kimmj@ilyoseoul.co.kr

2005-08-30 11: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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