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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낳은 국제적 가수.. 조용필 ※
조용필은 한국이 자랑하는, 한국이 낳은 국제적인 가수이다.
이미 일본시장을 두루 섭렵하였고,
자신의 활동무대를 범 동남아로 향해 홍콩을 거쳐 중국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우리나라 가수로 국제무대에 진출한 사례는 김시스터즈가 미국의 팝차트에
잠깐 얼굴을 내민 후, 패티김, 윤복희, 김치 캐츠가 국제무대에 간헐적으로 진출했었다.
그 후 이렇다할 가수의 진출이 없다가 조용필의 해외시장 진출은 한낱 트로트풍의 가수들이
일본의 야간업소에서 인기를 연명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1950년 3월 20일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에서 아버지 조경구씨와 어머니 김남숙씨 사이에서
3남 4년중 여섯째로 태어난 조용필은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랐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동중·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남들처럼 특징없는
평범한 학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고교졸업반때 우연히 생긴 기타를 만지작거리다가 음악에 빠지면서
도서관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가족들 몰래 음악학원에 나가기 시작하며
기타와 악보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호된 꾸지람을 듣고 가출을 했는데,
죽어도 가수가 되겠다는 조용필과 자식을 딴따라로 내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의 뜻이 엇갈린 것이다.
그러나 가출은 방황과 좌절의 연속으로 어두운 생활뿐이었다.
아버지 몰래 어머니를 졸라 약간의 돈을 마련해 동대문 근처에 허름한 월세방을 얻었다. 말이 방이지 창고를 개조한 형편없는 곳이었다.
여기서 친구 3명과 함께 기거하며 피나는 연습끝에 드디어 ‘애트킨즈’라는 그룹을 결성했지만
좀처럼 쉽게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기를 3개월여,
팀을 해체시키느냐의 갈림길에서 택한 것이 서울에는 내노라하는 그룹이 많아
명함을 내밀 수 없으니 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렇게하여 경기도 문산의 법원리 용주골에서 기지촌 그룹으로 첫 발을 내 딛으며
애트킨즈는 주로 컨트리 음악을 연주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연주했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일뿐 아무 소득이 없었다.
점차 그곳 생활에 회의를 느껴 1년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패배감과 좌절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거리에서 대학 뺏지를 단 동창을 만나는 고통,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 초조감과 소외감에 신세를 한탄하고 수면제를 먹고
자살까지 꾀했지만 조물주는 음악에 젖은 그를 떠나게끔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살기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는데 결정타가 되어 그토록 완강하던 반대를 꺾고
하고픈 일을 마음대로 해보라는 말을 듣고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다시 밤무대에서 연주와 노래를 시작해 화이브 휭거스에 가담하게 된다.
화이브 휭거스에서 그는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템테이션스 등의 블랙뮤직에 심취했다.
조용필의 트레이드 마크적인 소울풍의 호소력과 강한 휠링은 이때에 다듬어진 것이다.
조용필이 본격적인 록 뮤직으로 전환한 것은 1970년,
재즈 드러머 김대환과 함께 만든 ‘김 트리오’에서 그는 록 음악을 익혔고 이때
작곡하는 법을 익혔다.
1972년에는 그룹 25시로 옮겨 싱어로써 확고한 기반을 다졌으며 음악에 발을 디딘지
6년만인 1974년 그는 드디어 독자적인 그룹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유재학(당시 베이스담당으로 현재 레코드제작자)과 함께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만들어
1974년 주간선데이 서울이 주최한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때 레코드업자가 찾아가 음반을 취입하자는데 신이 나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준비를 서둘렀지만 레코드 제작자는 돈을 챙겨 어디론가 도망쳐 버려
음반에의 꿈을 보류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를 낸 것은 1974 <사랑의 자장가>가 타이틀곡으로 담긴
것이었지만 실패작으로 끝나고 만다.
그는 다시 1975년 킹 프로덕션에 사정을 해 다른 가수와 함께 묶은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하고는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이 노래가 항도 부산에서 상상도 못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인기의 여세를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당시는 재일동포 모국방문단이 대거 귀경하던 때인지라 이곡은 시의적절한 글귀가 호평을
받았고 마침내 조용필은 하루아침에 스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 음반은 가요사상 최초로 100만장이나 팔려 나갔다.
그러나 1년 남짓 인기를 누리던 그에게 대마초 가수라는 낙인이 찍혀 다시 눈물을 흘리며
무대를 더나 방황과 울분속에 3년7개월을 보내야 했다.
1979년 12월6일 해금과 함께 새 음반을 내며 그룹 ‘위대한 탄생’을 조직했다.
그무렵 동아방송의 드라마 주제가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고 시인 배명숙의 노랫말을
건네 받아 직접 작곡까지 한 <창밖의 여자>를 발표해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곡은 조용필의 재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린 드럼을 사용한 댄스리듬풍의 <단발머리>가 연달아 히트하면서
그는 가요계에서 부동의 4번타자로 안착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년말 그는 KBS, MBC, TBC의 방송가요대상에서 작곡상, 인기가요상, 인기 가수상 등
모든 부분을 휩쓰는 대기록을 세우며 1980년을 생애 최고의 해로 장식했다.
1981년 7월,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카네기홀 무대에서 노래했고
1982년에는 서울, 부산, 대구 등지를 돌며 독립기념관 성금모금 공연을 가져 1억원을 모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웃나라 일본 땅에서 조용필의 붐이 일기 시작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물론 <미워 미워 미워>등이 인기를 얻었고 1983년 NHK홀 및 5개 도시에서
성대한 콘서트를 가지면서 재일동포들에게 한국 가수의 진수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국제적인 가수로 발돋움과 함께 현지 매스컴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83년 말 NHK-TV에서 ‘1983년의 화제의 가수’로 선정되었다고 아사히신문에서는
바이올리스트 정경화와 함께 ‘한국의 국제적인 음악가’로 뽑혔으며
TV도쿄가 방영한 ‘세계인의 메시지’를 통해 그의 공연 모습이 세계 38개국에 인공위성을 통해
중계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1984년 한·불 수교 100주년의 일환으로 프랑스에서도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이런 바쁜 여정은 계속돼 1985년 8월에는 일본에서,
11월에는 홍콩에서 ‘팩스 뮤지카’에 참여하였다.
1985년 문화체육관에서 심장병 어린이을 위한 자선공연을 가져 인간애의 휴머니즘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 전야제에서 주역을 담당한 명실상부한 한국의 대표 가수였다.
한동안 빈번한 해외공연으로 국내에서 그의 인기는 약간은 저조했던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기실 1985년에는 가수왕의 자리를 김수철에게 빼앗겼지만 <허공>으로 예전의
인기를 되찾아 1986년을 평정했다.
그는 또 1987년 「사랑과 인생과 나」라는 타이틀이 붙은 앨범을 발표하고
<마도요>, <아하! 그렇지>등을 히트시키며 한국가요계의 왕자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 보였다.
이밖에도 조용필의 히트곡은 너무나 많다. <킬리만자로의 표현>, <바람이 전하는 말>,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모나리자>, <아하 그렇지>, <추억속의 재회>, <해바라기> 등이 있으며
‘86아시안 게임’에서는 <아시아의 불꽃>을 불렀으며 ‘88 서울올림픽’을 찬양하는
<서울 서울 서울>을 내놓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댄스뮤직이 극성을 부리자 환멸을 느끼고 한때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야인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3년만인 1997년 통산 16번째 앨범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일몰>, <바람의 노래>, <판도라의 상자> 등이 담긴 성인취향의 팝, 록,
발라드로 꾸몄다.
조용필의 음악은 천부적으로 뛰어난 가창력, 특히 한국인의 특기인 창(唱)이 몸에 밴
혼이 담겨있어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수 없는 고도의 테크닉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다 음악적 감각이 특출해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악적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대중이 요구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재빨리 간파하는 선구안도
뛰어났다.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살아있는 민족혼의 노래’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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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스타광팬
2003-03-14 19:5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