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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별 이야기 ]
1. 탄생전야
결혼해서 이민을 갈것인가
음악과 함께 이 땅에 남을 것인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우리 가요사상 일찌기 보기 힘든 히트를 거두었던 趙容弼이 최근 「돌아와요 뉴욕항에」를 열창하는 미모의 교포처녀의 열렬한 구애가 들어와 美國이민을 떠나는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고민 중이라는 소식.
조용필은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情」등을 발표, 국내의 시장에 가요 해적음반 소동까지 일으킨, 1백장 장 상당의 판매기록을 세운 장본인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살고 있는 해외교포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모국방문 붐과 함께 더욱 유명해진 곡이다.
그런데 이번엔 이 노래의 주인공 조용필이 거꾸로 가족들의 미국이민과 교포 아가씨의 프로포즈 틈바구니에 끼여 부산항을 떠날지 모를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다.
조용필과 미모의 교포 아가씨 엘레나 박양과의 비밀데이트가 팬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76년 11월.
조군이 리드하는 5인조 로크 그룹 위대한 탄생이 출연하는 여의도 모 나이트클럽에서였다.
당시 박양을 주시해본 측근의 얘기를 빌면「그녀는 1m 62㎝ 정도의 날씬한 몸매로 한창 유행하는 디스코 팬츠 차림의 뛰어난 미모」였다고 전한다.
박양은 그녀가 미국이민 전 여고때 조군을 알게 됐고 현재 뉴욕에서 대학을 중퇴, 가사를 돕는 미혼처녀라는 것.
박양은 현재 같은 뉴욕에서 이민생활 중인 조용필의 두 누이 그리고 둘째 형 등과 왕래를 계속 중이라 한다.
조용필은 현재 서울에서 노부모 趙敬九(78)씨와 金南淑여사(71)를 모시고 있으며 두 누이 趙容姬(49), 趙容男(47)씨와 형 趙英一(38)씨 등 가족이 모두 10년 전 이민, 뉴욕에서 정착하고 있다.
그 중 누이들은 뉴욕 웨스트 30번가에 위치한 5층 빌딩 코리아하우스를 경영 중이다.
뉴욕의 조씨 일가는 서울에 남아 있는 노부모와 여동생(趙鍾順), 그리고 조용필의 이민을 추진중이며, 박양을 귀국시킨것도 조군의 이민결심을 부채질하기 위한 고려에서였다는 얘기다.
조용필은 이와 같은 교포미녀 데이트설과 미국 이민설의 眞否를 묻자 이렇게 경위를 설명한다.
「박양이 저와의 결혼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박양은 지난 78년 어머니가 6개월간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 친딸처럼 열심히 어머니를 보살펴 주었기에 며느리감으로 어머니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에요. 또 누이들의 성화로 박양이 귀국해 결혼과 동시에 이민을 종용했어요. 부모님과 여동생은 어차피 올봄에 출국 예정이시거든요.」
박양과의 비밀 혼담의 결론을 묻자, 조군의 대답은 한마디로 '노'였다.「그녀가 서울에 머문 것은 3일밖에 안되었어요. 저는 결혼, 이민에는 관심이 없고 음악과 결혼한 음악광입니다. 그녀에게 결혼도, 이민도 거절하는 것이 여간 미안하지 않았어요. 저에게 아내라는 동반자는 제가 이끄는 음악생활에 여간 거북스런게 아니라고 설득해 그녀의 발길을 돌리게 했어요.」
조군은 京東高 졸업 직후인 60년대 말부터 로크 그룹 金트리오를 조직, 신중현과 쌍벽을 이루던 원로 로크아티스트 김대환, 사랑과 平和의 최이철 등과 음악을 시작했다.
「저에겐 74년도부터 그림자처럼 붙어 함께 음악을 하는 그룹 위대한 탄생이 있어요. 그리고 또 그토록 저를 아끼시는 팬들을 떠날 수 없어요. 올봄에 미국으로 마지막 이민길을 떠나는 부모님과 헤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한편 조군의 노모 김남숙여사는 「우리 용필이는 어려서부터 집을 나가 미아가 돼 다시 찾아오곤 한게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이번에도 가족을 버리고 여기에 혼자 남아 있겠다니 말릴 수는 없지만 언제고 용필이를 데려가겠다」고 설명한다.
조군에게 재기의 신곡「창밖의 女子」「잊혀진 사랑」등을 선사한 작곡가 金熙甲씨는「조용필의 음악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南仁樹 李美子에 이은 제 3기의 가요 스타라 할 수 있다.
그의 노래엔 남이 갖추지 못한 스피리추얼(靈歌的)한 요소가 가미 되어 있는데, 한오백년 등의 민요와 바비 블랜드의 블루스를 들어보면 이를 절감할 수 있다」고 평한다.
2. 음악 세계
밀리언 셀러가 된 吐血의 노래
「가수는 많되 스타는 없다」이 한마디로 표현돼오던 가요계의 스타부재현상을 깨뜨리고 마치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듯, 神話를 창조하는 새로운 수퍼 스타가 80년 초반을 넘기며 태어났다.
가요계가 입을 모아 수군대며 그 히트의 위력에 숨을 죽이는「창밖의 여자」「단발머리」의 주인공인 1m 65㎝, 55㎏ 단신의 (趙容弼 33)이 그 장본인이다.
이 음반은 테이프 (카세트 및 카트리지를 포함 국내 공식적 판매집계 밀리언 셀러(1백만 장 판매)를 기록한 최초의 가요앨범이라는 점에서 음반가에서도 놀라고 있다.
과연 조용필은 어떠한 가수며, 어떻게 노래해왔으며, 사생활은 어떠할까? 1981년에 본인의 입을 통해 들었던 고백적 기록을 발표한다.
가요계의 히트는 흔히 음반 판매수자라는 수학적 계수로 결정되는 것이지만 조군은 가수로서 자신의 노래의 히트를 어떤 형식으로 느끼고 확인하는지?
- 「창밖의 여자」의 경우는 50일간의 미국 공연에서 실감했어요. 지난 80년 7월9일 뉴욕 카네기홀에선 3천 명의 팬들이 운집했는데 저는 창밖의 여자가 신곡인 관계로 레퍼터리에서 제외시키려 하기까지 했어요. 마음을 바꾸고 여러분이 잘모를 신곡을 불러보겠다며 곡명을 소개하자 와! 하는 함성이 터져나오는 거였어요. 어느 사이 美國 교포들도 멜로디와 가사를 외우고 있었어요.
국내에서의 히트는 귀국 후에 실감했지요. 지난 7월 31일 귀국하는 날 TBC 젊은이가요제가 열리는 장충체육관 무대에 섰는데 팬들의 열광이 마치 외국 영화에서 보던 것 같아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지난 8월 12일 숭의음악당에서 있던 TBC FM 팝 콘서트에선 공연이 끝난 뒤에 공연장을 빠져나오기가 어려웠어요. 여대생 팬들이 차를 둘러싸고 놔주질 않는거예요.
주말의 제 아파트 앞도 팬들이 몰려서 휴식하기가 어려워요. 가수로서 히트란 이렇게 행동의 제약을 받는거구나 라고 느겨집니다.
美州공연으로 한국을 비운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히트가 되었다면 아이로니컬한데 그 히트의 원인을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
- 노래도 노래지만 가수란 자칫 인기의 와중에서 무대공연이다, 술집출연이다, 아니면 TV 방송이다 해서, 팬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질 정도로 1백% 開墾되다 못해 황폐해질 정도의 過剩 노출되기 쉬운 것 같아요. 저는 출국 중 라디오, 레코드팬들이 사랑해 주었고 반면 브라운관을 통한 과잉개발활동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봅미다. TV 브라운관이 얼마나 많은 가수들을 친절하게 대해주다가 몰락을 가져다 주었는지 팬들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76년도의 히트곡「돌아와요 釜山港에」시절보다, 돌아온 조용필의 音幅 창법은 훨씬 넓어진 것 같아요. 假聲·高音에서 특히 低音의 濁聲이 인상적인데, 이같은 일련의 발전에 비결이 있다면?
- 저는 노래보다 악기 연주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어요. 어려서는 바이얼린, 트럼피트 등을 좋아하다 고교시절에 기타를 시작했죠. 벤춰즈, 비틀즈 등의 연주를 듣고는 혼자 코드를 만지며 독학을 한셈이죠. 노래는 69년부터 그룹에서 시작했고, 71년부터 비로소 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노래다운 노래를 알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이 히트한 뒤 제 활동이 규제된 77년 5월부터였어요.
많은 대마초 연예인이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을 때 저는 지난 3년 7개월간 自省 속에 한가닥 희망에 인생을 걸고, 그야마로 피의 성대 연마를 포함한 음악공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피의 성대 연마란 구체적으로?
- 和聲學, 작편곡 공부를 비롯해 성대연구에 가장 큰 심혈을 기울였어요. 이비인후과의 두부 단면도(頭部 斷面圖)를 구해다가 성대화 후두를 앨토 색소와 테너 색소의 마우드피스와 비교해가며, 목의 떨판과 음향의 구조를 연구했어요. 판소리 등 국악 레코드, 그리고 팝 싱어 로드 스튜어트의 레코드를 들으며 소리의 변화를 연구했죠. 특히 로드 스튜어트는 노래에선 진한 탁성이면서 인터뷰 중엔 고음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죠.
양동이에 물과 소금을 준비하고, 피와 눈물, 그리고 기침과 가래를 토하며 목 떨판의 실험을 반복했어요. 몇 년 동안 이런 실험과 독학을 반복하는 가운데 이젠 가성과 진성, 탁성을 구사하게 되었죠. 따라서 목이 쉬어도 청음으로 노래하게 되었고 목이 쉬지 않고도 쉰 소리로 노래할 수 있게 되었죠. 한오백년 대전블루스의 탁성은 사실 이런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70년대 중반 대마초 연예인 규제의 시련을 딛고 재기한 가수 주의 하나로 최근 사랑과 平和의 구속으로 재연된 연예인의 환각제 흡연사범에 대한 솔직한 느낌은?
- 한마디로 너무도 철없는 짓을 다시 저지른 그들에게 경악을 금할 수 없어요. 75년 12월 대마초 연예인 규제로 활동이 금지됐던 연예인들의 대부분은 환각제 흡연의 범죄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외래문화의 찌꺼기를 순전히 호기심에서 한 두 번 피워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거에요.
피나는 노력없이 음악을 마약의 힘으로 창조해야 한다면, 그 음악은 음악으로서의 진가를 잃는 거로 볼 수 밖에 없어요.
사랑과 평화의 동료 연예인들이 하루빨리 새 사람이 돼서 돌아오기를 바랄뿐입니다.
자신의 음악정 섭렵과정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 고교(서울 京東高)를 졸업한 뒤 컨트리 & 웨스턴 음악을 전공하는 C & W 그룹 애트킨즈(Atkins)를 조직하여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했어요. 그러나 당시에 제임즈 브라운, 윌슨 페케트의 흑인 가수들과 포 시즌즈, 비틀즈 등 백인 그룹에 심취해 소울음악으로 전향했지요.
이때가 70년이었는데 당시 어느 클럽에서 노래를 하던 중, 손님이 찾아왔어요. 한때 申重鉉씨의 그룹에서 드럼을 담당하던 金大煥씨죠. 김씨는 저의 노래인「나를 인도해 주세요」(Lead Me On)를 지나는 길에 듣고, 오리지널 음반으로 착각했다는 거였어요. 김씨는 저와 김씨 자신 그리고 이진(현KBS 제2라디오 DJ)등과 4인조를 조직하자고 약속하고 준비했지만 李眞씨의 사정으로 金트리오란 3인조로 출발했죠. 저는 기타와 베이스를 치며 본격적인 노래를 시작했어요. 애드 포의 서정길씨, 지금은 불교조각가로 연예계를 떠난 김대환씨, 25時의 조갑출씨 등은 모두 저를 도와준 잊을 수 없는 선배들이에요. 74년 그림자를 조직했고, 대마초가수 해금과 함께 그림자를 위대한 탄생으로 개명했어요. 현재는 그룹을 해산시키고 노래와 작 편곡에만 전념 중입니다.
가장 친한 선배나 친구들은?
- 제가 연예활동을 중단하고 있을 때 후원해 준 축구선수 李會澤씨는 의형이나 다름없고, 친구는 TV탤런트 柳將鉉, 후배론 복서 朴贊希 등을 꼽을 수 있어요.
3. 스타탄생
각고의 수련이 수퍼스타로
80년 TBC 세계가요제 최고의 영예인 그랑프리 FRE-MO(前「모잠비크」解放戰線)의 의장의 딸 슈디양에게로 돌아갔다.
모스크바와 미국에서 발레를 전공한 슈디양은 가수 데뷔 3년 만에 디스코풍의 참가곡「사랑의 절정」(Ecstasy)를 불러 상금 미화 1만 달러가 붙은 그랑프리를 차지, 세계가요계의 새로운 신데렐라가 되었다.
11월 23일 저녁 6시 30분부터 3시간에 걸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벌어진 결선에서 한국의 조용필은 황금같은 히트송「창밖의 여자」(The Lady Out side Looking In)로 상금 미화 5천 달러의 금상을 차지했다.
1980년에「주간中央」이 제정, 연예기자들이 주는 우리들의 스타賞 2관왕을 차지한 조요필군의 작곡실력은 잘 알려진 사실.
조군의 작곡법은 약간 남다른 데가 있다.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떠오르면 스타일을 정립, 우선 가사부터 정리한 뒤 멜로디는 최후로 손을 댄다. 이때는 아무도 방에 들여놓지 않은 채 혼자 좌선하는 선사처럼 정좌해 좋아하는 담배도 끈채 곡의 아이디어 발굴에 정신을 집중시킨다.
가장 빨리 만든 곡은 20분이 걸린「촛불」, 제일 오래걸리고 힘이 들었던 작품은「女와 男」으로 최종 마무리 단계에서 20일이 소요됐다.
대부분의 노래를 직접 작곡하는 그는「남의 곡을 대할 때에는 마치 별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어색해, 이해하고 소화시키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린다」는 것. 그는 남의 곡으론「미워 미워 미워」(정풍송작곡)와「잊혀진 사랑」(김희갑곡) 등을 불렀고, 대부분의 곡은 직접 만든다.
가성을 통한 고음, 탁성, 진성 등을 번갈아 내기 위한 그의 성대 개발을 위한 객혈의 트레이닝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경동고를 졸업, 미8군 부대에 기타를 메고 뛰어들며 그가 밟아온 유행음악 섭렵의 발자취를 다시 거슬러 가보자.
조군이 난생 처음으로 섰던 무대는 영등포 지역에 있던 미8군 MP부대.
당시 그는 컨트리음악 그룹인 애트킨즈에서「디트로이트 시티」,「믈 스키너 블루스」,「호랑이 꼬리를 잡은 사나이」등 컨트리곡의 화음과 유니슨을 맡으며 연주와 노래를 시작했다. 그 뒤 그룹 파이브 핑거즈 시절에는 제임즈 브라운, 윌슨 피케트, 템테이션즈 등의 흑인 음악을 접하며 기타연주로 벤취즈에 심취하기도 했다.
본격 로크음악은 70년 재즈 드러머인 김대환씨와 함께 만든 金트리오에서였고, 이 때부터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72년, 그룹 25時에서 계속 로크음악을 다루던 그는 74년 방위병 근무에서 제대하고는 6년 만에 처음으로 독립, 7인조 조용필과 그림자를 창단하여 이른바 시카고사운드를 시도했다.
76년「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히트 이후 77년 대마초연예인 규제에 연루됨으로써 첫 번째 자기 그룹인 그림자를 해산시키고 원점으로 되돌아왔으나, 이 시기가 수퍼스타 조용필을 키운 작고의 수련기간으로 기록된다.
그는 이 공백기를 이론과 실기의 집중수련기간으로 승화시켰다.
77년 가을 그는 다시 부산에 내려가 그림자를 재건했고, 이때 만난 가수겸 베이스 주자 유재학이 오늘의 매니저다.「마이웨이」등 스탠더드가요에 뛰어났던 유재학은 얼마 뒤 무대에서 내려와 다시 뭉친 그림자 재건의 뒷일을 떠맡기 시작했다.
79년 말의 대마초연예인 규제 해금과 동시에 고난기간의 운명을 함께 해온 그룹 그림자의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80년 1월부터 위대한 탄생으로 첫발을 내디딘 조용필의 지구전속 첫LP는 잘 알려진「창밖의 여자」.
그러나 실제로 그가 키워왔던 히트레코드의 꿈과 음반 취입의 역사는 71년으로 거슬러올라가고, 그동안에 오스카에서 국제, 대한, 킹, 오아시스 등 6∼7개사에서 취입해 두었던 디스크그라피를 총 정리해 보면 무려 LP 7장, 총 수록곡 29곡에 달한다.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디스크 출반의 숨겨진 역사를 들춰보면-.
제 1 집(71년 봄 오스카출반 사랑의 자장가 등), 제 2 집(71년 겨울 오아시스출반 길잃은 새 등), 제 3 집(72년 국제프로출반 82년 大星리바이블, 내마음 속의 그림자 등), 제 4 집(76년 킹출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제 5 집(77년 킹출반 님이여 등), 제 6 집(77년 大韓출반 새들의 합창) 등으로 이어진다.
80년 지구전속 기념 LP로 제 4 탄까지 발표한 현재 조용필 레코드 앨범은 총 12장, 발표곡은 100곡에 이른다.
수퍼 스타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듯이 피와 땀, 눈물의 결과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듯 하다.
오늘날도 그는 침실에서 조차 FM과 워크맨의 이어폰을 낀 채 잠을 청할 정도로 음악 속에 파묻혀 산다.
또 78년 대한극장에서의 리사이틀, 80년 봄 뉴욕 카네기홀 공연, 80년 가을 세종문화회관 추석 리사이틀, 81년 봄 잠실 체육관 신체장애자를 위한 자선공연에 이어 82년 4월 3일 조군은 일본 히비야에서 일본 문화방송이 주최하는 아시아 뮤직포름 대축제에 초청되어 필리핀의 프레디 아귈라, 일본의 사이조 히데끼(西條秀樹)등 아시아의 톱가수들과 경합을 벌였다.
각 방송국의 크고 작은 시상행사에서 거둬들인 트로피는 모두 1백 30개나 된다.
요즘엔 REO 스피드웨건,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가장 많이 즐겨듣는 그룹으로 손꼽았다. 「인기는 열심히 음악을 하다보면 자연히 따르는 부산물로 보고 있어요」라는 게 본인의 설명이다.
3남 4녀 중 3남인 그의 가족 전부 미국이민길에 올랐으며 조용필만이 유일한 고국 잔류파로 70대의 뉴욕의 부모들을 거꾸로 서울로 초빙해 살고 있다.
노래를 위한 스태미너를 위해 하루 5끼씩 자주 식사를 하는 그는 싫어하는 음식으론「개고기와 닭고기」, 좋아하는 음식은「생선찌개」를 든다.
4. 조용필 열풍
카네기홀을 장식한 「돌아와요 뉴욕항에」
조용필의 컴백 기념 앨범「창밖의 여자」가 출반 3개월 만에 20만장의 판매기록을 세워, 불황으로 찌든 음반가의 이변으로 등장했다.
「창밖의 여자」는 조용필이「돌아와요 부산항에」이후 4년의 공백기를 거쳐 지구레코드에서 출반한 전속기념 음반이다.
지구는 조군이 활동을 중단했던 지난 76년, 1천만원의 예비전속금을 지급했고, 그가 활동을 다시 시작한 금년 초 다시 1천만원과 레코드 로열 승용차 등 도합 3천만원을 지급하여 음반업계의 라이벌메이커들을 놀라게 했었다.
그러나 막상 조용필 음반의 뚜껑이 열리자 이 앨범에선 무려 4곡의 수록곡이 동시에 히트되어 라이벌메이커들은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6월에 접어들어 조용필의 레코드는 전 가요 레코드 판매량의 80%를 점유했기 때문이다.
현재 각 방송국의 라디오 인기가요 차트에는 조용필의「창밖의 여자」와「단발머리」가 동시에 선두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방 살롱가에서는 민요「한오백년」과 옛 가요의 리바이블 곡인「대전 블루스」가 인기 폭발 중이다.
음반가 불황 중에 들이닥친 조용필 열풍에 대해 가요전문가 들의 의견은 각기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조용필은 노래를 잘 하는 가수」라는 너무도 평범한 원인분석에는 입을 모은다.
그동안 가요계에선「노래보다는 외모나 춤, 스캔들 등 가요외적 풍조가 있었으며 팬들은 단순히 노래를 잘할 줄 아는 가수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분석이다.
조용필은 많은 대마초가수들과는 달리 활동을 중단하던 기간에도 가장 연습을 강화해 왔고, 디스코 로크는 물론 민요에까지 레퍼터리를 늘려왔었다.
그는 지난 11일 도미공연에 올라 7월 9일에는 뉴욕의 카네기 메인 홀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공연을 갖고 실황 음반과 비디오 필름도 제작, 국내 방송국으로 공수까지 했었다.
조용필의 뉴욕거주 가족들이 배우자 후보생으로 작년도 서울에 파견했던 재미교포미녀 엘레나 박양과의 재회여부는 아직 미지수, 박양은 단신 서울을 찾아와 조군에게 구애했으나 소득없이 돌아가「돌아와요 뉴욕항에」를 불러왔었다.
5. 영화출연
러브신 거부로 발칵 뒤집힌 촬영장
개런티 2천만원으로 영화계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조용필군이 유지인양과의 키스신을 거부하여 또 한 번 화제를 낳았다.
지난 80년 11월 5일 경기도 동두천에서 크랭크 인 된「그사랑 한이되어」촬영장. 조군과 李亨杓 감독간에 때아닌 삿대질과 함께 언성이 높아졌다. 어이없게도 조군이 예쁜이 배우 유지인양과의 키스를 거부한 것이다.
시나리오에는 유양과 한 번의 베드신과 또 두 번의 키스신이 나온다. 조군은 자신이 여고생들에게 특히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을 내세워 이 모든 러브신 촬영을 거부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유양만 묘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여배우가 키스 신을 거부한 적은 과거에 종종 있었으나 남자 배우가 거부한 것은 우리나라 영화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요즈음의 영화가는 이 사건을 놓고 쑥덕공론이 한창이다.
여하간 조군의 완강한 러브신 촬영 거부의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나는 나의 결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옷을 벗고 침대에서 여배우와 딩구는 장면이 세상에 나간다면 아무리 스크린 속이라도 꼴불견 아닙니까? 나는 원래가 가수로서 배우이지, 배우로서 가수가 아닙니다. 출연 계약이 취소되는 날이 와도 절대로 러브 신에는 응할 수 없어요.」
조군은 자신의 용모로 봐서 키스 신이다, 베드 신이다, 하고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팬들이 거의 모두가 여고생 들인데 어떻게 그들에게 실망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태프들은 대개 사춘기에 있는 학생들을 팬으로 갖고 있는 조군의 고민도 이해가 간다고 수긍하고 있으나 연출자인 이형표 감독은 또다른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일단 영화에 나온다고 결심이 섰으면 연출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요즈음의 영화속에서 남 녀의 러브 신 하나 없이 관객이 온다고 생각합니까? 조군의 처사는 너무나 가요계만 의식한 나머지 영화라는 특수 예술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요.」
이감독의 분노는 보통이 넘는 것 같다. 결국 크랭크 인 하던 11월 5일은 무사히 넘겼지만 앞으로의 조군과 감독간의 관계가 주목된다. 현재도 이감독은 조군이 러브 신에 응해 주기를 바라지만 조군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감독은 다른 장면에서의 조군 연기에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李감독에 의하면 조군의 연기능력은 천부적이라는 것이다.
한편 조군은 키스 거부와는 달리 이번 영화 데뷔에 대한 집념만은 대단하다. 우선 2천만원을 받은 출연료의 4분의 1이나 되는 5백만원을 의상비에 지출하고 매일 거울앞에서 웃고 화내고 울고 하는 연기연습을 한다고 한다. 또한 영화를 통해 발표될 신곡을 다섯 곡이나 준비할 예정. 이미 히트된「창밖의 여자」와「단발머리」및「돌아와요 부산항에」도 새로운 스타일로 편곡해 선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떠돌아 다니며 노래하는 불우 청년을 그린 것이다. 조군과 유지인양이 사실상의 주인공. 두 사람이 연인으로 나오고 있다. 조군과 유양의 마스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스크린에 나타날 지는 아직 미지수.
1m 62㎝의 유양과 1m 64㎝의 조군의 키가 약간 언밸런스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편 영화에 처음인 조군의 분장을 MBC 탤런트 박근형씨가 맡고 있는 것도 이색적.
여하간 조군이 앞으로 계속 유양과 키스를 거부할 경우 어떠한 방법으로 영화상에서 트릭을 쓸지는 영화계의 관심사다. 한번쯤 해보고 싶어 하는 남자 배우들의 키스 신 소망을 가볍게 거절한 조군의 속셈이 과연 무엇인지 현재로는 궁금할 뿐이다.
한편 조용필군이「그사랑 한이 되어」를 촬영하다가 과로로 졸도, 병원에 입원하는 소동을 빚었다.
조군은 지난 8일 경기도 벽제에서 유지인양과 함께 촬영도중에 그 전날의 밤샘 탓으로 졸도한 것.
그러나 조군은 몇 시간동안 안정을 취한 후 링게르 주사의 덕인지 원기를 회복, 그날로 재 촬영에 임했다. 조군의 이러한 열의에 이형표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6. 이색 팬
웃지못할 이야기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부르면서 조용필의 우리말 가요도 조용필처럼 불러제끼는 파란눈의 미국인 가수.「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촌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인 청년가수가 82년 6월 하이야트호텔에 모습을 비춰 조용필은 물론 KBS-TV의 팝 관계자들, 서울의 보도진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우리 사촌 형 엘비스 프레슬리의 너무도 순수한 인간성, 뛰어난 음악성, 그리고 그 뜨거운 인정이 그가 죽은 뒤 몇몇 보디가드들의 센세이셔널한 폭로 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그 이미지가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가슴 아파요.」
「엘비스」가 남겨 놓고 간 멤피스 엘비스 프레슬리 블루버드가(街)의 저택 그레이슬랜드에서 출발, 미8군에 근무하는 먼 친척을 방문키 위해 내한했다는 이 미국인 청년가수의 말이었다.
「나는 한국 방문 중엔 꼭 만나고 싶은 한국인 가수가 있어요. 바로 조용필씨입니다. 한국의 친척이 보내준 그의 레코드를 듣고 저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엘비스가 서양 대중음악의 최고 천재였다면, 조용필씨는 엘비스도 감탄하는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에요. 서울서 그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저로서는 여간 감격적인 일이 아니었어요.」
자신을 마이클 프레슬리(22)로 소개한 이 미국청년이 조용필을 찾아온 곳은 그가 새로 경영하는 강변회관 나이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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