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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성과 예술성...그리고 락 >
*** 영화, 소설, 대중음악등 대중에게 상품화해야 한다는 본질을 지닌 대중예술은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창작자도 고민하지만, 창작물을 수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된다.
흔히 통속적인 영화( 3류 영화), 통속소설( 3류소설)이라 칭해지는 작품은 조롱거리가 된다. 그 이유는 영화나 소설이 섹스,폭력등 선정적인 요소에 치중해서 대중의 호응은 받지만, 수용자들의 머리를 비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머리가 빈다>는 의미는 영화나 소설을 읽고 보고 남는게 없다는 말이다. < 남는게 없다>는 말은 삶의 고뇌, 동시대에 대한 고민, 인생에 대한 통찰력등의 지적능력을 계발시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과거 군사독재정권을 겪었던 시대에 우매한 대중(민중)을 계도하지 못하고 우중화시킨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정치적 의식을 자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판단은 누가 하는가? 통속소설,3류영화에 빠져 우매하다면 그러한 우매한 대중이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적능력이 되는 사람, 유식하고 고뇌할 줄 아는 사람이 영화와 소설의 예술성을 판단하게 된다. 판단의 과정 자체가 지적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판단자는 지적 우월감의 과시라는 우물속에 자신을 빠트릴 수 있는 위험성도 지니고 있다. 영화나 소설이 통속적이라해도 감흥을 자극한다는 미학적 측면을 가지는건 예술로서 당연하다. 말하고자 하는건, 순수미학적 요소외에 <생각하게 만든다>는 요소의 예술성 판단에서 지니는 전문성이 영화나 소설에서는 대중음악보다는 강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통속적이다, <생각하게 만든다>의 판단이 획일화된 틀이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예술성이 정권에 대한 저항의 의미까지 내포되어 표출되는 데에는 당시 권력이 이를 허용하느냐, 즉 언론.출판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느냐가 중요한 변수이다. < 할수 있는데 안 하느냐> 와 <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래도 하려면 각오해야 한다>는 다르다. 만들어놓아도 가위질 당해서 대중이 이를 모르면 당시로서는 꽝이다. 독재정권 시절에 반항이 아닌 저항을 한 대중예술인은 위대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위를 비슷하게 맴돌뿐이었으면서도, 시대의 힘을 빌어 덩달아 위대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비겁하다.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 나는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하며 예술의 미학적 측면에 보다 치중했노라고.....>
***
음악에 영화와 소설의 <생각하게 만든다>는 측면의 예술성을 도입해서 판단의 기준을 만들려면, 사운드와 감흥이라는 미학적 요소외에 노랫말을 생각해야 한다. 대중음악은 노랫말을 가수의 음성을 통해( 경음악은 예외지만) 노랫말의 의미를 얼마만큼 잘 전달하느냐로 예술성을 판단할 수 있다. 노랫말은 대단히 통속적이지만 사운드가 죽인다면 미학적인 판단에서는 예술성이 높지만, < 머리가 비게 한다>는 잣대로는 대중적이다.
락의 격렬한 사운드, 젊은이의 에너지 분출이라는 요소로 락이 한국의 정치사에서 < 저항적>이었다고 대충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락이 < 생각하게 한다>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시기가 한국 락의 역사에서 어느 시점부터인지 잘 판단해보아야 한다. 무조건 서구에서의 락의 발전 과정을 그대로 도입해서 락은 <생각하게 하는 > 음악으로서 예술성 판단을 하려 해서는 안된다. 남의 것을 빌려다 내것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도둑놈 심보이다.
***
미학적인 예술성의 판단에서 음악의 사운드와 음악이 주는 감흥( 감성적인 부분)을 나누어 생각해보자.물론, 칼로 무자르듯이 딱 나누어지는건 아니다. 사운드가 죽이면 감흥도 커진다. 이런 요소를 떠나 판단자의 입장에서 나누어 보자는 말이다. 또한 노래부르는 가창자의 능력은 사운드보다도 더 감흥에 중요할 수 있다. 어느 요소를 더 중시하느냐는 판단자의 몫이다. 속성으로 정해져 있는게 아니다.
사운드를 판단하는 데에는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여기에서의 사운드란 사운드를 통해 전달하는 표현까지 포함한 것이다. 방황하는 마음의 표현같은 것 말이다. ) 듣고 느낌은 있는데 어떻게 해서 좋은 것인지를 이야기하려면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즉, 판단자는 그런 면에서 유식한 사람이다.( 다른 분야의 뛰어난 석학도 사운드를 분석해내는 영역에서는 무식한 사람이다) 하지만, 감흥을 이야기하는데에는 음악 지식이 많이 요구되지 않는다. 느낌을 글로 풀어내면 된다. < 듣고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지친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 희망이 느껴진다.> 이 정도의 표현으로도 충분히 예술성 판단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음악의 예술성판단에서 전문적인 지적능력이 요구되는 부분은 사운드 측면이라는 말은 듣는 사람이 느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글로 풀어낼 수 없다는 부분에서 지적능력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즉, 사운드가 죽이는지 안 죽이는지 음악을 듣는 사람도 느낌은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노랫말을 분석해내는 데에도, 음악에서의 지적 능력이 많이 요구되지 않는다. 음악은 잘 몰라도 노랫말의 의미를 분석해서 < 머리를 비게 하는지>, <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판단해낼 수 있다. 물론,노랫말의 의미를 분석해내는데에도 지적 능력은 요구되지만, 영화나 소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요구된다. 노랫말이 매우 매우 함축적이라면 대중은 알 길이 없다. 대중이 모르고 아는 사람만 아는 노랫말은 별 의미없다. 노랫말이 대중을 <생각하게 만들어야> 노랫말이 지니는 예술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생각이란 < 이게 도대체 뭔 말일까?>를 고민하는 생각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대중음악에서의 예술성 판단은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대단히 통속적인 우매한 대중의 영역을 떠나(영화나 소설의 수용자가 무식하다는 말이 아니다. 판단자의 시각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적능력의 판단자에게 일임되는 정도가 질적으로 다르다.
***
과거,6,70년대에는 비교적 생활이 여유로운 도회지의 젊은 지식인들은 외국대중음악이나 국내 대중음악을 선택적으로 들을 수도 있었지만, 동시대의 여유롭지 못한 기성세대나 젊은이들은 한마디로 < 배고픔 자체를 해결해야만 했다 >. 여유롭게 대중음악을 선택적으로 즐기던 시대는 80년대에나 가능해진 것이다. 6,70년대의 무식하고 배고픈 이들은 <트롯>으로 위안을 삼아도 그것이 <무식한 음악>이라는 고민은 없었다. 동시대에 <락과 포크>를 즐기며 지적 우월감을 느끼던 이들은 그 이후 어떻게 변했을까? 그 지적 우월감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저항!이 아니다)으로 젊음의 낭만을 찾던 이들은 이후 어떻게 대한민국을 변화시켰을까? 지금 힙합으로 반항하는 10대들의 반항 대상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
<대중적으로 성공한 음악은 음악성이 떨어진다 > 이 말은 대중음악의 음악성과 대중성을 연결지어 논하는 잘못된 말장난이다. 대중음악의 음악성 판단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감흥과 사운드의 미학적 요소이든, <생각하게 만든다>는 노랫말의 측면이든 대중이 판단해낼 수 있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강하다. <무식한 대중>이 <음악성 없는 통속음악>에 열광한다는 판단은 < 대중적인 외면>을 받는 음악인들과 그 지지자들의 < 자기 푸념>의 속성이 강하다. 음악성이 있어서 대중적으로 실패하는게 아니다. 음악성이 높아도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고, 음악성이 낮아도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외국의 <유명 아티스트>라고 대단한 추앙을 받는 사람들이 < 대중적>으로 실패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명 아티스트>의 앨범판매량, 콘서트에서의 성공은 숭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정작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가수>에게는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이중 잣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 음악성과 대중성>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운드를 느낌이 아닌 말로 분석해낼 수 있다는 지적능력을 앞세워 <자신이 좋아하는 또는 만들어내는 음악>을 외면하는 <대중>을 <우매하다>로 몰아부치며 < 자기만족>을 향유하는 <패배자>들이다. <음악성>은 <음악자체로> <대중에게> 평가받을 수 있다. < 음악성이 뛰어난 좋은 음악>은 <마케팅>이 잘되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대중가수나 그 지지자들이 <록뮤지션>이니 <아티스트>니 하는 말을 쏟아내면서 <대중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열정으로 <마케팅시스템>을 고민하고 그걸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없이 맨날 앉아서 음악성 운운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 대중에게 끌려가지도 않겠지만, 그 위에 군림하지도 않겠다>는 자세가 당연한 대중음악인의 자세이다.
*** 영화, 소설, 대중음악등 대중에게 상품화해야 한다는 본질을 지닌 대중예술은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창작자도 고민하지만, 창작물을 수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된다.
흔히 통속적인 영화( 3류 영화), 통속소설( 3류소설)이라 칭해지는 작품은 조롱거리가 된다. 그 이유는 영화나 소설이 섹스,폭력등 선정적인 요소에 치중해서 대중의 호응은 받지만, 수용자들의 머리를 비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머리가 빈다>는 의미는 영화나 소설을 읽고 보고 남는게 없다는 말이다. < 남는게 없다>는 말은 삶의 고뇌, 동시대에 대한 고민, 인생에 대한 통찰력등의 지적능력을 계발시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과거 군사독재정권을 겪었던 시대에 우매한 대중(민중)을 계도하지 못하고 우중화시킨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정치적 의식을 자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판단은 누가 하는가? 통속소설,3류영화에 빠져 우매하다면 그러한 우매한 대중이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적능력이 되는 사람, 유식하고 고뇌할 줄 아는 사람이 영화와 소설의 예술성을 판단하게 된다. 판단의 과정 자체가 지적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판단자는 지적 우월감의 과시라는 우물속에 자신을 빠트릴 수 있는 위험성도 지니고 있다. 영화나 소설이 통속적이라해도 감흥을 자극한다는 미학적 측면을 가지는건 예술로서 당연하다. 말하고자 하는건, 순수미학적 요소외에 <생각하게 만든다>는 요소의 예술성 판단에서 지니는 전문성이 영화나 소설에서는 대중음악보다는 강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통속적이다, <생각하게 만든다>의 판단이 획일화된 틀이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예술성이 정권에 대한 저항의 의미까지 내포되어 표출되는 데에는 당시 권력이 이를 허용하느냐, 즉 언론.출판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느냐가 중요한 변수이다. < 할수 있는데 안 하느냐> 와 <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래도 하려면 각오해야 한다>는 다르다. 만들어놓아도 가위질 당해서 대중이 이를 모르면 당시로서는 꽝이다. 독재정권 시절에 반항이 아닌 저항을 한 대중예술인은 위대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위를 비슷하게 맴돌뿐이었으면서도, 시대의 힘을 빌어 덩달아 위대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비겁하다.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 나는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하며 예술의 미학적 측면에 보다 치중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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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영화와 소설의 <생각하게 만든다>는 측면의 예술성을 도입해서 판단의 기준을 만들려면, 사운드와 감흥이라는 미학적 요소외에 노랫말을 생각해야 한다. 대중음악은 노랫말을 가수의 음성을 통해( 경음악은 예외지만) 노랫말의 의미를 얼마만큼 잘 전달하느냐로 예술성을 판단할 수 있다. 노랫말은 대단히 통속적이지만 사운드가 죽인다면 미학적인 판단에서는 예술성이 높지만, < 머리가 비게 한다>는 잣대로는 대중적이다.
락의 격렬한 사운드, 젊은이의 에너지 분출이라는 요소로 락이 한국의 정치사에서 < 저항적>이었다고 대충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락이 < 생각하게 한다>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시기가 한국 락의 역사에서 어느 시점부터인지 잘 판단해보아야 한다. 무조건 서구에서의 락의 발전 과정을 그대로 도입해서 락은 <생각하게 하는 > 음악으로서 예술성 판단을 하려 해서는 안된다. 남의 것을 빌려다 내것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도둑놈 심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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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인 예술성의 판단에서 음악의 사운드와 음악이 주는 감흥( 감성적인 부분)을 나누어 생각해보자.물론, 칼로 무자르듯이 딱 나누어지는건 아니다. 사운드가 죽이면 감흥도 커진다. 이런 요소를 떠나 판단자의 입장에서 나누어 보자는 말이다. 또한 노래부르는 가창자의 능력은 사운드보다도 더 감흥에 중요할 수 있다. 어느 요소를 더 중시하느냐는 판단자의 몫이다. 속성으로 정해져 있는게 아니다.
사운드를 판단하는 데에는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여기에서의 사운드란 사운드를 통해 전달하는 표현까지 포함한 것이다. 방황하는 마음의 표현같은 것 말이다. ) 듣고 느낌은 있는데 어떻게 해서 좋은 것인지를 이야기하려면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즉, 판단자는 그런 면에서 유식한 사람이다.( 다른 분야의 뛰어난 석학도 사운드를 분석해내는 영역에서는 무식한 사람이다) 하지만, 감흥을 이야기하는데에는 음악 지식이 많이 요구되지 않는다. 느낌을 글로 풀어내면 된다. < 듣고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지친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 희망이 느껴진다.> 이 정도의 표현으로도 충분히 예술성 판단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음악의 예술성판단에서 전문적인 지적능력이 요구되는 부분은 사운드 측면이라는 말은 듣는 사람이 느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글로 풀어낼 수 없다는 부분에서 지적능력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즉, 사운드가 죽이는지 안 죽이는지 음악을 듣는 사람도 느낌은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노랫말을 분석해내는 데에도, 음악에서의 지적 능력이 많이 요구되지 않는다. 음악은 잘 몰라도 노랫말의 의미를 분석해서 < 머리를 비게 하는지>, <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판단해낼 수 있다. 물론,노랫말의 의미를 분석해내는데에도 지적 능력은 요구되지만, 영화나 소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요구된다. 노랫말이 매우 매우 함축적이라면 대중은 알 길이 없다. 대중이 모르고 아는 사람만 아는 노랫말은 별 의미없다. 노랫말이 대중을 <생각하게 만들어야> 노랫말이 지니는 예술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생각이란 < 이게 도대체 뭔 말일까?>를 고민하는 생각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대중음악에서의 예술성 판단은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대단히 통속적인 우매한 대중의 영역을 떠나(영화나 소설의 수용자가 무식하다는 말이 아니다. 판단자의 시각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적능력의 판단자에게 일임되는 정도가 질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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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6,70년대에는 비교적 생활이 여유로운 도회지의 젊은 지식인들은 외국대중음악이나 국내 대중음악을 선택적으로 들을 수도 있었지만, 동시대의 여유롭지 못한 기성세대나 젊은이들은 한마디로 < 배고픔 자체를 해결해야만 했다 >. 여유롭게 대중음악을 선택적으로 즐기던 시대는 80년대에나 가능해진 것이다. 6,70년대의 무식하고 배고픈 이들은 <트롯>으로 위안을 삼아도 그것이 <무식한 음악>이라는 고민은 없었다. 동시대에 <락과 포크>를 즐기며 지적 우월감을 느끼던 이들은 그 이후 어떻게 변했을까? 그 지적 우월감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저항!이 아니다)으로 젊음의 낭만을 찾던 이들은 이후 어떻게 대한민국을 변화시켰을까? 지금 힙합으로 반항하는 10대들의 반항 대상이 되어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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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으로 성공한 음악은 음악성이 떨어진다 > 이 말은 대중음악의 음악성과 대중성을 연결지어 논하는 잘못된 말장난이다. 대중음악의 음악성 판단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감흥과 사운드의 미학적 요소이든, <생각하게 만든다>는 노랫말의 측면이든 대중이 판단해낼 수 있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강하다. <무식한 대중>이 <음악성 없는 통속음악>에 열광한다는 판단은 < 대중적인 외면>을 받는 음악인들과 그 지지자들의 < 자기 푸념>의 속성이 강하다. 음악성이 있어서 대중적으로 실패하는게 아니다. 음악성이 높아도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고, 음악성이 낮아도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외국의 <유명 아티스트>라고 대단한 추앙을 받는 사람들이 < 대중적>으로 실패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명 아티스트>의 앨범판매량, 콘서트에서의 성공은 숭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정작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가수>에게는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이중 잣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 음악성과 대중성>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운드를 느낌이 아닌 말로 분석해낼 수 있다는 지적능력을 앞세워 <자신이 좋아하는 또는 만들어내는 음악>을 외면하는 <대중>을 <우매하다>로 몰아부치며 < 자기만족>을 향유하는 <패배자>들이다. <음악성>은 <음악자체로> <대중에게> 평가받을 수 있다. < 음악성이 뛰어난 좋은 음악>은 <마케팅>이 잘되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대중가수나 그 지지자들이 <록뮤지션>이니 <아티스트>니 하는 말을 쏟아내면서 <대중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열정으로 <마케팅시스템>을 고민하고 그걸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없이 맨날 앉아서 음악성 운운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 대중에게 끌려가지도 않겠지만, 그 위에 군림하지도 않겠다>는 자세가 당연한 대중음악인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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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YONGPIL-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대백과사전&악보집 도서 기증13 |
2023-07-10 | 35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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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이 책을 드리면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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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8 | 36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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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신청]가황,조용필을 노래하다-대백과사전/악보집40 |
2022-12-13 | 8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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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 |
1999-10-26 | 747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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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 |
1999-10-26 | 79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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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5 | 7824 | ||
10 |
대화방에 참여 하고 싶었는데 |
1999-10-24 | 799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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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기대가 되네요. |
1999-10-24 | 836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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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킵시다....1 |
1999-10-24 | 9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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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약속을 지킵시다.... |
1999-10-24 | 847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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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4 | 80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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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하는 과정에서 |
1999-10-24 | 8785 | ||
4 |
상준님 죄송합니다..너무 기쁜 나머지. |
1999-10-24 | 10993 | ||
3 |
상원님 화이팅,조용필화이팅...........1 |
1999-10-23 | 11506 | ||
2 |
Re: 상원님 화이팅,조용필화이팅........... |
1999-10-23 | 9340 | ||
1 |
안녕하세요 |
1999-10-23 | 9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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