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록·민요 등 모든 음악 장르 섭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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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청년 문화라는 이름으로 그 맹아를 드러냈던 한국의 세대 문화는 1980년대 들어 이른바 ‘10대 문화’라는 이름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에 힘입은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한국의 10대들은 드디어 자신들만의 문화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하이틴 여고생들의 문화, 이른바 ‘오빠 부대’ 문화였던 것이다. 조용필은 이 문화를 최초로 지배하면서 1980년대 한국 대중 음악계의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후 일련의 앨범들을 통해 리듬 앤드 블루스에서 로큰롤, 식민지 시대 이후의 한국 대중 음악의 주류 장르인 트로트와 한국전쟁 이후 자리 잡은 스탠더드 팝, 나아가 민요와 동요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섭렵해냄으로써 10대 취향과 성인 취향의 대중 음악 질서를 완성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초기 작품인 3집 앨범(1981년)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로 시작하는 A면의 트로트 넘버들은 아직도 시장의 다수를 차지하던 20대 후반 이후 세대를 적극적으로 유인해냈고, 한국 록의 기념비적인 넘버들인 <여와 남> <고추잠자리> 등이 자리 잡고 있는 B면은 새롭게 떠오르는 10대와 20대 초반 대중에게 새롭고 충격적인 음악적 경험을 제공했다.
<어제 그리고 오늘> <미지의 세계> <아시아의 불꽃> <여행을 떠나요> 등 폭발적으로 발산되는 ‘청년 조용필’의 에너지로 충만한 7집 앨범과,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양인자-김희갑 콤비와의 조화를 통해 침묵하고 있던 성인들을 움직이게 한, 성인 음악 문화 구축의 이정표가 되는 8집 앨범의 절묘한 커플링 역시 음악 문화의 통합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분열이 아니었다. 그는 두 세대에게 두 가지 음악적 경험을 동시에 공유하게 했던 유일한 음악가였으며 이러한 사실에 바로 그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조용필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그가 서양 대중 음악에 일방적으로 기울어 있던 음반 시장과 매스 미디어의 주도권을 한국 대중 음악이 쥐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세계 대중 음악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반역의 기적’이었다.
조용필 이전 시대만 해도 한국 대중 음악계, 특히 방송 분야는 여전히 서양 대중 음악이 지배하고 있었다. 8 대 2에 달하던 ‘서양 팝 대 한국 대중 음악’의 시장 점유율을 일거에 역전시킨 아티스트가 바로 조용필이었다. 음악 양식의 측면뿐만 아니라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조용필의 음악은 한국 대중 음악의 진정한 독립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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