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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오공훈(aura508@unitel.co.kr)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켠에 ‘조용필’에 대한, 아스라하나 쉽게 지워지지 않는 추억 한가지쯤은 있지 않을지. 필자의 경우, 조용필을 정의짓는 키워드는 묘하게도 ‘지긋지긋함’이었다. 극악스러운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시류’에 영합하는 히트곡을 끊임없이 내놓던 1980년대의 조용필이란, (그 당시에는 ‘절대순수’의 경지에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록음악에 경도 되었던 나에게는 일종의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조용필만 나이를 든 게 아니다. 1993년 경, 우연한 기회에 보았던 그의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접하며, 내 머릿속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일세를 풍미한 ‘스타’를 넘어선, 어쩌면 한국에서는 ‘진정함’의 영역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대중예술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조용필 음악 세계의 위대함은 그가 남긴(물론 여기엔 ‘현재진행형’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무수한 곡들의 대다수가, 당대의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품고있는 정서에 충실하면서 음악적 성취도 또한 빼어나게 유지되고 있는 것. 그의 전성시절 몹시도 어렸던 나는, 이 ‘완벽’에 가까운 노래들이 ‘시류영합적’이라는 (그때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했을) 혐의를 성급하게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것은 세월의 더께를 맛보아야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하지만 조용필의 위대함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감하고는 있었어도, 언제부턴가 그는 일종의 ‘전설’의 영역 속에 가라앉아 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게 사실이다. 그게 언제부터였던가 헤아려본다. 대략 1990년대 중반 이후, 서태지가 대한민국을 한바탕 들었다 놓은 후 이 세상의 ‘가요’란, ‘아이들’이 스테이지를 온통 휘저으며 말초신경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댄스 곡, 아니면 인위적인 감정의 고양을 목적으로 총력전을 펼치는 발라드, 딱 이 두 개만 남고만 듯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사실상 당시 대중예술계에는 ‘명퇴’가 진행 중이었다. 젊거나 싱싱한 매력을 뿜어낼 수 없으면 미사리나 밤무대로 ‘퇴출’되고 마는 냉혹한 현실이, IMF가 덮치기 전 이른바 ‘거품’의 시대에도 이 나라의 스테이지를 휩쓸고 있었다.
이러한 ‘물갈이’의 와중에서, 조용필의 입지는 불안해 보였던 게 사실이었다. ‘신곡=히트곡’이어야만 하는 가요시장의 거두절미한 게임의 원동력이자 규칙이, 거장이라 해서 ‘치외법권’을 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가수들처럼 밤무대를 전전하며 ‘가요무대’를 기웃거리기엔, ‘예술가’로서의 조용필이 성취한 위상과는 대단한 어색함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그가 이렇다할 음반이나 방송활동 없이 ‘일정 규모 이상’의 공연에만 역점을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은(이는 나훈아와 더불어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사실 조용필이 처한 일종의 ‘딜레마’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4만5천명이라는 기록적인 관중이 몰려든 8월 30일 잠실주경기장 공연(음악인생 35주년을 기념하는 ‘The History' 공연)은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해야함이 옳다. 그 관중들은 과연 무엇을 보려 폭우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기장에 나타났을까? ‘추억의 명곡’을 변함없이 열창하는 ‘영원한 오빠’의 사자후를? 아니면 함께 늙어가는 자신들의 사그라져 버린 청춘을 기념하려는 찰나의 이벤트를?
5년만에 야심적으로 등장한 새 음반 'Over The Rainbow'를 들으면서도, 엇비슷한 감정이 든다. 장대한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치밀한 구성과 편곡으로 ‘대작’의 풍모를 물씬 풍기는 'Over The Rainbow'는, 21세기를 맞아 결코 ‘위인’의 위상에만 머물기를 거부하는 조용필의 ‘영원한 현역’의 의지가 가득 빛을 뿜는 음반이다.
[Over The Rainbow]가 담고있는 주된 음악 스타일은 크게 세 가지. 음반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수미쌍관’의 치밀함을 보여주는 ‘태양의 눈’과 ‘꿈의 아리랑’은, 곡의 구성으로 보나 대규모 코러스의 위용으로 보나 ‘웅장함’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노래들이다. 이른바 ‘오페라틱 록’이라 불릴 수 있는 장르의 음악이다. ‘도시의 Opera' 역시 오페라틱 록의 범주라 할 수 있겠는데, 섬세한 오케스트레이션까지 가미되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극적 긴장감에 이완 작용을 더해준다. 두 번째 스타일로는 예전 ‘여행을 떠나요’를 연상시키는 미디엄 템포의 록 넘버들. 사회적 메시지가 돋보이는 ‘一聲’이나, 여성 코러스로 시작되어 비트가 있는 발라드로 변화되어 가는 ‘With'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 음반의 ‘백미(또는 압권)’는 역시 조용필 특유의 절절한 가창력이 막힘 없이 분출되는 발라드. ‘오늘도’, ‘꽃이여’, ‘그 또한 내 삶인데’, ‘珍’, ‘내일을 위해’ 등은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애절함과 애잔함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성숙한’ 노래들이다. 특히 ‘珍’은 가슴 사무치는 한의 정서가 일체의 과장됨 없이 마음속에 스며들게 하는, 21세기 조용필의 첫 ‘대표곡’이라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명곡’이다.
[Over The Rainbow]가 오늘날 판을 치는 ‘공산품’ 스타일의 주류 가요 음반과 얼마나 격을 달리하는지는 명백하다. ‘과거’ 속에 안주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거장들의 다소 안쓰러운 행보와 비교하자면, 조용필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보자면 조용필의 도전과 집념이란 사실, 더 이상 이룰 게 없어진 최정상에 오른 이(즉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고고한 여유의 산물 아닐까. 'Over The Rainbow' 음반 전체를 휘감는, 때로는 지나치다는 느낌마저 들게 만드는 그 자신만만함이란, 사실 에둘러 표현된 ‘윤택함’으로 비롯됨이 아닐까. 조용필이 지닌 천부적인 재능과, 그 재능을 열과 성을 다해 풀어내려는 노력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또한 공들여 만들어진 노래 하나 하나에 배어나는 완성도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어도, 이 마음가짐의 대부분은 사실 어느새 깊숙이 형성된 무의식적 ‘예우’의 차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심정은 어찌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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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상원님 화이팅,조용필화이팅........... |
1999-10-23 | 9340 | ||
1 |
안녕하세요 |
1999-10-23 | 9527 |
7 댓글
rorita
2003-09-26 23:14:29
...
2003-09-26 23:23:35
...
2003-09-26 23:26:27
찍사
2003-09-26 23:50:16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라고 합니다. ^^;;
target=_blank>http://home.naver.com/phishead
위 사이트는 이분 홈페이지 입니다.
...
2003-09-26 23:53:27
...
2003-09-27 00:02:18
각시탈
2003-09-27 02:34:52
그기 보시면 weiv editor 명단에 윗 글 필자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