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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문화코드
“옛날의 노랫말,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최근 [비틀즈 시집]이라는 책이 나왔더군요.
비틀즈가 시도 썼냐구요?
그건 아니고,
비틀즈 노래의 가사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죽 훑어보니 비틀즈는 다양한 주제를 쉽고 간결한 말로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유치하거나 천박하지는 않았습니다.
잘 만든 ‘대중’ 음악이란 그런 것이겠지요.
한국 대중가요에도 명 가사가 많습니다.
그런 노랫말들은 늘 대중의 기억 한 켠에서 돌고 있어 언제든 전축 바늘만 올려놓으면 흘러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시대의 정서를 잘 포착했고,
문학성도 있었습니다.
좀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이 노래 모르시는 분,
아마 없을 겁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 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호둘기를 꺾어 불던 그 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 1934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전우야 잘 자라, 연도 미상)
어떻습니까.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을 뿐더러 표현력과 서정성 모두 뛰어나지요?
개인의 심정을 그림 그리듯,
집단의 모습과 심리를 사진 찍듯 대중의 언어로 옮겨놓았습니다.
저는 호둘기가 뭔지도 모르지만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장면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가곡이나 클래식은 따라올 수 없는 대중가요의 힘을 보여주는 노래들이지요.
자,
그럼 오늘날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지난 해 하반기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이효리의 [10 Minutes]입니다.
Just One 10Minutes 내 것이 되는 시간
순진한 내숭에 속아 우는 남자들
Baby 다른 매력에 흔들리고 있잖아
용기내 봐 다가와 날 가질 수도 있잖아
어느 늦은 밤 혼자 들어선 곳
춤추는 사람들 그 속에 그녀와 너
왠지 끌리는 널 갖고 싶어져
그녀가 자릴 비운 그 10분 안에
지루했던 순간이 날 보는 순간 달라졌어 (I'm telling you )
오래된 연인 그게 아니던 중요한 사실은 넌 내게 더 끌리는 것 …(중략)
나이트클럽 같은 곳에서 다른 여자의 남자를 10분 안에 뺏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세태라면 이 노래 역시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고는 할 수 있겠네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못한 채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을 보내다 결국 한 평생 다 갔다는 내용의 70년대 송창식의 노래
[맨 처음 고백]과 비교해보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노래,
앞서가는 감각을 보여주는지는 모르겠는데,
단순하게 직설적입니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고 있다는 느낌이지요.
읽어보면 입에 착 붙는 말의 리듬도 잘 생기지 않습니다.
추임새로 쓰는 영어도 듣기 좋지는 않네요.
다음은 최근 인기를 끌었던 채연의 [위험한 연출]입니다.
난 몰랐었어 난 궁금했어
니 핸드폰에 찍힌 여자 전화번호
너 없을 때 난 걸어봤었지
너와 어떤 관계인지 난 알고싶어
난 몰랐었어 기가 막혔어
나보고 되레 누구냐며 물어봤지
애인이라며 1년 됐다며
언제부터 널 만났냐며 다그쳤지
한참을 멍하니 움직일 수 없었어
너를 믿었는데 사랑했었는데
너는 사랑 갖고 장난쳤니
이젠 널 잊을래 이젠 널 떠날래
너무도 화가 나 울 수 조차 없어
너의 그 변명도 너의 그 거짓도
너무나 완벽해 배우보다 더
니가 연출하고 니가 주인공한
그런 드라마에 난 출연 안 할래
이젠 나를 빼줘
이젠 날 잊어줘 내가 널 편하게 떠나 줄테니
라라랄라라라랄라라라라 그래도 추억으로 남겠지 (…중략)
좋게 얘기하면 편안하게 들으라고 쓴 가사라 하겠고,
나쁘게 얘기하면 게으른 작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 출연 운운한 비유도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실컷 상대를 욕해놓고,
‘너무도 화가 나 울 수조차 없다’면서 갑자기
‘라라랄라라… 그래도 추억으로 남겠지’라니,
이건 뭔가요?
80년대 조용필의 노래 [그 겨울의 찻집]을 한번 들어보시죠.
사랑 노래도 나름입니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어떻습니까.
짧은 가사로도 사랑에 빠진 이의 행동과 심정을 잘 풀어내고 있지요.
적절한 어휘와 비유로, 또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같은 문장에서는 더없이 적확하게,
창자(唱者)의 심정을 짚어냅니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요즘 노랫말들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천박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물론 요즘 노래라고 다 그렇지는 않죠.
CF 배경음악으로 쓰여 인기를 끌었던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같은 노래를 한 번 볼까요.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이 되고
조그맣던 너의 하얀 손 위에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의 약속이 되어 (…중략)
노랫말 예쁘죠?
그런데 그게 문제입니다.
예쁜 말들을 죄다 모아놓긴 했는데,
전체를 듣고 나면 가슴에 남는 말이 없습니다.
고민의 깊이,
사랑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가사,
리듬은 입 밖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데,
가사는 입 안에서 맴돌다 사라집니다.
대중가요의 가사는 세태를 반영하고,
한 개인의 역사를 구분짓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10대 때 좋아한 노래, 20대 때 좋아한 노래, 그리고 30대 때 좋아한 노래….
이런 식으로요.
일단 30대 중반이 넘어버리면 더 이상 최신 인기곡으로 노래방 레퍼토리를 업데이트 하기가 힘들어지지요.
자신의 18번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노래인가요?
쉬운 노래,
가사가 맘에 들어오는 노래 아닌가요?
요즘 인기 유행가들,
가사 외우기 진짜 힘듭니다.
외우고 싶은 가사도 없지만요.
그 옛날의 노랫말이 그립습니다.
요즘도 가끔 귀가 솔깃해지는 가사가 있긴 합니다.
예를 들면 자두의 [김밥] 같은 노래입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랑을 생활 속에서 흔히 겪는 일을 통해 코믹하게,
적절한 비유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는 가사는 아니지만 괜찮은 소품이라고 봅니다.
몇 십년 동안 서로 달리 살아온 우리
달라도 한참 달라 너무 피곤해
영화도 나는 멜로, 너는 액션
난 피자, 너는 순두부
그래도 우린 하나 통한 게 있어. 김밥
김밥을 좋아하잖아
언제나 김과 밥은 붙어 산다고 너무나 부러워했지.
잘 말아줘 잘 눌러줘
밥알이 김에 달라붙는 것처럼 너에게 붙어있을래
날 안아줘 날 안아줘
옆구리 터져버린 저 김밥처럼 내 가슴 터질 때까지
예전에 김밥 속에 단무지 하나 요샌
김치에 치즈 참치가
세상이 변하니까 김밥도 변해
우리의 사랑도 변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세상이 우릴 갈라 놓을 때까지 영원히 사랑할거야
끝까지 붙어 있을래
출처 ☞http://sbspr.sbs.co.kr/magazine/mag_Read.jhtml?start=11&yearmm=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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