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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칭구들] 80년대 조용필 ....

ypc스타, 2004-07-20 02: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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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1980년대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사 면에서 본다면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8일까지 일어났던 사건이 가장 중요한 분기일 것이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12·12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가 이끄는 신군부가 집권했고,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잔인하게 진압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과도기가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에 1970년대 이전의 사건들이 흑백 이미지로 남아 있는 반면,

1980년대 이후의 사건들은 컬러 이미지로 남아 있다.

말하자면 ‘TV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198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

즉, 흑백 TV의 기억이 중요하지 않은 세대를 속칭 ‘영상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즉, 1980년대는 ‘이미지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게 된 시대였다.

1980년대는 12인치의 조그만 흑백 TV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서 보던

1960년대까지의 시대와 20인치 이상의 TV를 리모콘으로 조작하면서 나 홀로 시청하게 된

1990년대 이후의 시대 사이의 과도기였던 셈이다.

이렇게 TV가 엔터테인먼트의 수단으로 중요해지면서

‘시내에 나가야만 놀다 왔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대’는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특징으로 한 가지 현상을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여 프로 스포츠의 시대가 개막된 사건이다.

프로야구는 단지 하나의 스포츠 경기라는 차원을 넘어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프로만이 살아남는다’는 비정한 원리였다.

그래서 1980년대는 살아남은 프로,

그 가운데서도 수퍼스타가 지배한 시대였다.

스포츠의 경우 축구의 차범근, 야구의 선동렬, 농구의 이충희가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수퍼스타의 지배는 스포츠 분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소설가 이문열, 영화배우 안성기, 만화가 이현세, 드라마 작가 김수현, 바둑 기사 조훈현 등등...

이렇게 타의 추종을 불허하면서 ‘판쓸이’를 하듯 문화계의 각 분야를 평정한 사람의 리스트는 매우 길다.

대통령인 전두환은 ‘9시의 수퍼스타’였다!!!.

반정부투쟁을 했던 김영삼과 김대중같은 야당 정치인조차도 한국 정치사상 유례없는 ‘대중정치인’이었다.

1980년대의 수퍼스타 현상에 대한 가장 적절한 송가(頌歌)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일 것이다.

특히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는 구절은

이들 수퍼스타의 ‘고독과 야망’을 절절하게 표현해 준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른 가수야말로 1980년대 모든 분야를 통틀어

최고의 슈퍼스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인물이었다.

다름 아닌 조용필이다.

조용필이야말로 1980년대 문화계의 모든 분야를 통틀어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그 점에서 그는 방금 언급한 1980년대의 두 가지 문화적 특징을 모두 체현한 인물이었다.

간단히 말한다면 그는 ‘TV의 수퍼스타’였고,

복잡하게 말한다면 ‘이미지가 지배한다’와 ‘프로만이 살아남는다’는 철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매우 철저하게.

조용필이 가장 성공한 경우였지만

1980년대 한국의 주류 대중문화는 이 두 개의 철칙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발표된 것은 1985년의 일이지만,

이 노래에 나타나는 정서는 1980년 3월에 발표된 조용필의 공식 데뷔 1집이었다.

많은 사람이 지적하듯 이 앨범에는 발라드도 있고(“창밖의 여자”),

트로트도 있고(“미워 미워 미워”),

댄스도 있다(“단발머리”).

세대별·성별·계층별 안배가 골고루 있는 것이고,

상점에 비유한다면 전문점이라기보다는 백화점이다.

그러고 보면 1980년대는 백화점이 ‘대중화’된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그룹 사운드 출신’이라는 것은 앨범 뒤에 기타를 들고 찍은 사진,

그것도 그룹과 함께 찍은 것이 아니라 혼자 찍은 사진으로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조용필의 노래를 빛내 주었던 그룹 위대한 탄생의 멤버들의 이름들은 앨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음반사(지구레코드)가

‘그룹 사운드 = 퇴폐풍조’라는 박정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피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조용필이 슈퍼스타로 등극한 이유를 대중음악계 내부에서 짚어볼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그에게는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룹 사운드에 국한해서 말할 때 1978~9년 전성기를 누렸던 사랑과평화는 대마초로 활동을 금지당한 상태였고,

‘돌아온 신중현’은 이미 마흔이 넘어 있었다.

산울림은 김창훈과 김창익의 군 복무로 실질적으로 활동을 정지한 상태였고,

송골매는 데뷔 앨범을 발표한 뒤 내홍을 겪고 있었다.

1978년부터 1980년 사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 캠퍼스 그룹들의 아마추어리즘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곤

1980년대의 새로운 프로페셔널리즘에 적응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부지런하게 준비한 슈퍼스타가 날개를 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조용필의 정서나 태도라고 언급한 것은 ‘부지런한 열정’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연하면 ‘부지런한 타성’도 아니고 ‘게으른 열정’도 아니다.

‘갈고 닦은 실력과 내공으로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한다’는 것이 대중예술가 조용필의 태도였다.

아마도 조용필의 노래에 이런저런 이유로 저항감을 가진 사람이라도 막상

그의 노래를 들으면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었을 것이다.

그건 음악적 이유 뿐만 아니라 이런 문화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해도 부지런하게, 열심히, ‘프로’답게 하는 것,

한마디로 ‘잘’ 하는 것이 지고의 가치로 확립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조용필이 노래 하나는 정말 잘 하지 않냐?’라는 식의 대중적 담화 말이다.

출처 = http://www.goodconcert.com/

1 댓글

나 중2학생

2004-07-20 11:11:43

나두 다른것은 몰라두 조용필님이 노래잘하는것은 알지요^^
정말 대한민국최고여요~아니~ 세계최고여요``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진정한가수 아닌가요??그래서 조용필님은 최고의 가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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