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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용필은 가출했을까…한국 팝의 고고학 1960,1970
신중현의 ‘미인’이 금지곡으로 지정된 이유를 아는가. ‘가왕’이라 불리는 조용필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에 서기 위해 가출까지 불사한 사연은. 미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음악전문가들이 심사하는 오디션을 통과해야 미8군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가.
‘한국 팝의 고고학 1960,1970’(한길아트·전 2권)은 60∼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발굴’해 기록한 책이다. 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등 3명이 4년여의 공을 들여 완성했다.
저자는 “한국 팝이란 영·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 대중음악을 말한다”면서 “책에 밝힌 사실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발굴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고고학’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고고학’에 걸맞게 1960년대 이후 일간지와 대중주간지,가요전문지를 두루 섭렵했고 수많은 가수와 작곡 편곡자,음반사 관계자들의 증언을 취합해 산재해 있던 한국 팝의 역사를 ‘한국 팝의 탄생과 혁명’ ‘한국 포크와 록,그 절정과 분화’ 등 2권으로 나눠 정리했다.
책을 펼치면 800여컷의 사진자료를 비롯해 500여개의 각주,음악인 70여명과의 심층취재를 통해 정리한 41건의 인터뷰 등 풍성한 자료가 눈을 즐겁게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에 서기 위해 가출을 했다가 고 김대환을 만나 대중음악계에 입문했다는 조용필의 개인사와 최근 탤런트로 맹활약 중인 김창완의 ‘산울림’ 시절 모습을 엿볼 수 있다.
DJ 배철수가 ‘활주로’ ‘송골매’ 등으로 활동하면서 ‘젊음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한 이야기,가수 이남이가 고교 시절 몸담은 밴드에서 세컨드기타를 연주한 사람이 영화배우 이영하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신중현의 ‘미인’이 금지곡이 된 이유가 (진짜 이유야 어쨌든 심의 관계자가 밝힌 이유는) ‘가사를 퇴폐적으로 바꾸어 부르는 사람이 많아서’였다는 사실은 한편의 코미디다.
이와 함께 비틀스의 영향으로 시작된 4인조 남성밴드의 전성 시기,신중현이 이끈 1960년대 말의 팝 혁명,긴급조치와 대마초 파동,정권에 밉보여 앨범 판매금지 또는 활동정지를 당한 김민기 한대수 서유석 등의 이야기나 MBC 대학가요제,TBC 해변가요제 등을 통한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붐 등 굵직한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김미현 mihkim@sportstoday.co.kr
[경향신문] [연예]한국팝의 풍경화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 희미한 옛추억이 풀린다/조용한 다방에서 뮤직을 들으며 가만히 부른다/흘러간 옛님을 부르누나 부르누나/새빨간 장미향기 끝에 흘러간 옛 노래 그립다/알시에이 전축에서 울리는 멜로디/청춘은 가고 상처만 남아 부르스에 나는 간다/새빨간 장미향기 끝에 흘러간 옛 노래 그립다.
940년대. 이난영은 특유의 콧소리로 ‘다방의 푸른 꿈’을 불렀다. 한국전쟁 때 사망한 남편 김해송이 만든 노래. 놀랍게도 재즈풍이다. 식민지의 센티멘털리즘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곁으로 불쑥 찾아온 미국의 음악. 그것은 빠른 속도로 우리 음악의 지형을 휘저었다. 그렇게 첫발을 내디딘 한국 팝 음악 60년. 신중현의 소울과 사이키델릭, 한대수와 김민기의 포크가 그 세월 속에 있었다. 고고장과 대학 가요제, 조용필과 이선희의 시대도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시냇물들이 생겨나 흐르면서 한국 팝의 강물을 이뤘다. 그곳에는 낭만과 혼돈이 있었다. 때로는 붉은 핏물이 섞여 흐르기도 했다.
‘뽕촌팝도’는 50년대의 가요 풍경을 대변한다. 시골(村)에선 이른바 ‘뽕끼’ 흐르는 노래가 유행했다. 도시(都)에선 미8군 출신 음악인들이 번안하거나 만든 곡이 인기를 끌었다. ‘노오란 샤쓰 입은 사나이’의 작사·작곡가인 손석우는 이러한 벽을 무너뜨린 최초의 작곡가였다. 패티김과 현미, 윤복희, 최희준 등은 미8군 무대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일반 무대’에서 선보였고, 팝 음악은 맑은 물에 떨어진 붉은 잉크 한 방울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64∼67년은 이른바 ‘팝 혁명’의 씨앗이 배태된 시기였다. 미8군 초창기 악단 편성이었던 10명 이상의 풀밴드는 비틀스를 닮은 4∼5인조 록밴드로 ‘진화’했다. 그 중심에는 신중현이라는 ‘작은 거인’이 버티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그룹 사운드’ 중 하나인 애드 포를 이끌었던 그의 손길 아래서 훗날의 펄 시스터스, 김추자, 김정미 등 마력적인 목소리들이 다듬어졌다.
60년대가 저물어가던 어느 가을날, 남산 드라마센터에 모여든 청중은 장발의 청년이 전대미문의 괴성을 질러대는 모습을 목격했다. 공연 무대에선 향불이 피어올랐고, 시계소리, 징소리가 불협화음을 쏟아내는 기타 연주와 섞였다. 한대수가 선보인 아방가르드 무대. 아니, 저것도 음악인가.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장발괴한’이 보여준 음악의 생명력과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포크와 솔, 사이키델릭과 록이 백가쟁명 하던 한국 팝 음악의 황금기가 열리고 있었다. 음악을 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한 ‘가왕(歌王)’ 조용필은 71년 ‘제3회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가수왕상’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청년문화의 아이콘 이장희, 80년대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 조동진, 의미심장한 가사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던 김민기가 70년대 초에 데뷔했다.
하지만 74∼75년, 가장 뛰어난 대중음악 작가들은 가장 엄혹한 독재정권의 철권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74년 새해 벽두에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됐고, 75년 12월 ‘대마초 연예인들’이 구속됐다. 한대수의 음반은 뚜렷한 이유 없이 방송금지를 당했고, 서유석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3년간 활동정지 당했다. ‘저속과 퇴폐’라는 이유로 한국 팝 음악의 장인들은 기타를 빼앗겼다.
다시 희망의 바람이 불어온 것은 70년대 후반이 돼서였다. 77년 태동한 대학가요제는 80년대 록그룹들의 데뷔 기회를 제공했다. 잠복기에 들어간 신중현 대신 산울림, 샌드 페블스, 활주로, 블랙 테트라 등이 싱그러운 소리를 들려줬다. 70년대의 얼터너티브 신 ‘신촌파’는 이정선, 엄인호, 이주호를 배출했다. 김민기는 양희은과 함께 돌아왔고, 조동진도 사분오열된 포크의 나머지 세력을 모아 ‘지존’으로 등극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 새싹이 돋아나듯, 첫번째 군인 대통령이 쓰러지면서 새 음악이 열리고 있었다.
대중음악 평론가 신현준의 책 ‘한국 팝의 고고학’에 60년대와 70년대를 살았던 ‘열정적인 청년’들의 신명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윤복희와 촌스러운 송창식도 있다. 너무도 생생한 사진과 앨범 재킷이 그 시절 음악다방의 뿌연 담배연기 속으로 안내한다. 오죽하면 책 제목이 고고학(考古學)인가. 고고학자의 심정으로 기록이 없는 나라 한가운데서 발굴해낸 대중음악사가 아름답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신중현의 ‘미인’이 금지곡으로 지정된 이유를 아는가. ‘가왕’이라 불리는 조용필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에 서기 위해 가출까지 불사한 사연은. 미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음악전문가들이 심사하는 오디션을 통과해야 미8군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가.
‘한국 팝의 고고학 1960,1970’(한길아트·전 2권)은 60∼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발굴’해 기록한 책이다. 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등 3명이 4년여의 공을 들여 완성했다.
저자는 “한국 팝이란 영·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 대중음악을 말한다”면서 “책에 밝힌 사실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발굴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고고학’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고고학’에 걸맞게 1960년대 이후 일간지와 대중주간지,가요전문지를 두루 섭렵했고 수많은 가수와 작곡 편곡자,음반사 관계자들의 증언을 취합해 산재해 있던 한국 팝의 역사를 ‘한국 팝의 탄생과 혁명’ ‘한국 포크와 록,그 절정과 분화’ 등 2권으로 나눠 정리했다.
책을 펼치면 800여컷의 사진자료를 비롯해 500여개의 각주,음악인 70여명과의 심층취재를 통해 정리한 41건의 인터뷰 등 풍성한 자료가 눈을 즐겁게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에 서기 위해 가출을 했다가 고 김대환을 만나 대중음악계에 입문했다는 조용필의 개인사와 최근 탤런트로 맹활약 중인 김창완의 ‘산울림’ 시절 모습을 엿볼 수 있다.
DJ 배철수가 ‘활주로’ ‘송골매’ 등으로 활동하면서 ‘젊음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한 이야기,가수 이남이가 고교 시절 몸담은 밴드에서 세컨드기타를 연주한 사람이 영화배우 이영하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신중현의 ‘미인’이 금지곡이 된 이유가 (진짜 이유야 어쨌든 심의 관계자가 밝힌 이유는) ‘가사를 퇴폐적으로 바꾸어 부르는 사람이 많아서’였다는 사실은 한편의 코미디다.
이와 함께 비틀스의 영향으로 시작된 4인조 남성밴드의 전성 시기,신중현이 이끈 1960년대 말의 팝 혁명,긴급조치와 대마초 파동,정권에 밉보여 앨범 판매금지 또는 활동정지를 당한 김민기 한대수 서유석 등의 이야기나 MBC 대학가요제,TBC 해변가요제 등을 통한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붐 등 굵직한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김미현 mihkim@sportstoday.co.kr
[경향신문] [연예]한국팝의 풍경화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 희미한 옛추억이 풀린다/조용한 다방에서 뮤직을 들으며 가만히 부른다/흘러간 옛님을 부르누나 부르누나/새빨간 장미향기 끝에 흘러간 옛 노래 그립다/알시에이 전축에서 울리는 멜로디/청춘은 가고 상처만 남아 부르스에 나는 간다/새빨간 장미향기 끝에 흘러간 옛 노래 그립다.
940년대. 이난영은 특유의 콧소리로 ‘다방의 푸른 꿈’을 불렀다. 한국전쟁 때 사망한 남편 김해송이 만든 노래. 놀랍게도 재즈풍이다. 식민지의 센티멘털리즘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곁으로 불쑥 찾아온 미국의 음악. 그것은 빠른 속도로 우리 음악의 지형을 휘저었다. 그렇게 첫발을 내디딘 한국 팝 음악 60년. 신중현의 소울과 사이키델릭, 한대수와 김민기의 포크가 그 세월 속에 있었다. 고고장과 대학 가요제, 조용필과 이선희의 시대도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시냇물들이 생겨나 흐르면서 한국 팝의 강물을 이뤘다. 그곳에는 낭만과 혼돈이 있었다. 때로는 붉은 핏물이 섞여 흐르기도 했다.
‘뽕촌팝도’는 50년대의 가요 풍경을 대변한다. 시골(村)에선 이른바 ‘뽕끼’ 흐르는 노래가 유행했다. 도시(都)에선 미8군 출신 음악인들이 번안하거나 만든 곡이 인기를 끌었다. ‘노오란 샤쓰 입은 사나이’의 작사·작곡가인 손석우는 이러한 벽을 무너뜨린 최초의 작곡가였다. 패티김과 현미, 윤복희, 최희준 등은 미8군 무대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일반 무대’에서 선보였고, 팝 음악은 맑은 물에 떨어진 붉은 잉크 한 방울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64∼67년은 이른바 ‘팝 혁명’의 씨앗이 배태된 시기였다. 미8군 초창기 악단 편성이었던 10명 이상의 풀밴드는 비틀스를 닮은 4∼5인조 록밴드로 ‘진화’했다. 그 중심에는 신중현이라는 ‘작은 거인’이 버티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그룹 사운드’ 중 하나인 애드 포를 이끌었던 그의 손길 아래서 훗날의 펄 시스터스, 김추자, 김정미 등 마력적인 목소리들이 다듬어졌다.
60년대가 저물어가던 어느 가을날, 남산 드라마센터에 모여든 청중은 장발의 청년이 전대미문의 괴성을 질러대는 모습을 목격했다. 공연 무대에선 향불이 피어올랐고, 시계소리, 징소리가 불협화음을 쏟아내는 기타 연주와 섞였다. 한대수가 선보인 아방가르드 무대. 아니, 저것도 음악인가.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장발괴한’이 보여준 음악의 생명력과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포크와 솔, 사이키델릭과 록이 백가쟁명 하던 한국 팝 음악의 황금기가 열리고 있었다. 음악을 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한 ‘가왕(歌王)’ 조용필은 71년 ‘제3회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가수왕상’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청년문화의 아이콘 이장희, 80년대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 조동진, 의미심장한 가사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던 김민기가 70년대 초에 데뷔했다.
하지만 74∼75년, 가장 뛰어난 대중음악 작가들은 가장 엄혹한 독재정권의 철권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74년 새해 벽두에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됐고, 75년 12월 ‘대마초 연예인들’이 구속됐다. 한대수의 음반은 뚜렷한 이유 없이 방송금지를 당했고, 서유석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3년간 활동정지 당했다. ‘저속과 퇴폐’라는 이유로 한국 팝 음악의 장인들은 기타를 빼앗겼다.
다시 희망의 바람이 불어온 것은 70년대 후반이 돼서였다. 77년 태동한 대학가요제는 80년대 록그룹들의 데뷔 기회를 제공했다. 잠복기에 들어간 신중현 대신 산울림, 샌드 페블스, 활주로, 블랙 테트라 등이 싱그러운 소리를 들려줬다. 70년대의 얼터너티브 신 ‘신촌파’는 이정선, 엄인호, 이주호를 배출했다. 김민기는 양희은과 함께 돌아왔고, 조동진도 사분오열된 포크의 나머지 세력을 모아 ‘지존’으로 등극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 새싹이 돋아나듯, 첫번째 군인 대통령이 쓰러지면서 새 음악이 열리고 있었다.
대중음악 평론가 신현준의 책 ‘한국 팝의 고고학’에 60년대와 70년대를 살았던 ‘열정적인 청년’들의 신명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윤복희와 촌스러운 송창식도 있다. 너무도 생생한 사진과 앨범 재킷이 그 시절 음악다방의 뿌연 담배연기 속으로 안내한다. 오죽하면 책 제목이 고고학(考古學)인가. 고고학자의 심정으로 기록이 없는 나라 한가운데서 발굴해낸 대중음악사가 아름답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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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스타
2005-05-24 20: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