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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순수하고 열정적인 가수 유승준의 입원이
우리를 안타깝께 만든다.
더구나...
선배를 예우할 줄 알아[어제 오늘 그리고]
라는 음악을 리메이크 했고
그걸 계기로 그들의 팬들(조용필 팬들과 유승준 팬들과의)역시
덩달아서
친밀감과 공감대로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던 중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더욱 안타깝게 한다.
.....
기획사나 메니져들이 문제다.
무리하게 일 처리를 하다보면
부상을 입거나 지쳐 쓰러지게 마련이다.
정말로 스타를 아끼고
오랫동안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라도
스타를 스타이기 이전에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대하고 보살펴 줘야 한다.
...............
때론 정지된 시간도 필요하다.
............
주의의 여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결국 자신을 다스리고 절제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힘이다.
이것 저것 스케줄을 가리지 않고 하다보면
롱런할 수 없다.
.........
다시한번 유승준의 아픔을 위로하며
쾌유해서 밝은 모습 보았으면 한다.
.......
각종 루머와 스켄들 이혼 교통사고등의
시련을 잘 이겨내고...
올해로 33년째 음악 활동하고 있는
한 뮤지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래는 그 내용중 하나가 될것 같아 올려 본다.
..................
[기사/월간중앙] 권태동 기자의 인물탐험<7월호>
.
.< 50세 조용필 그 ‘不滅’의 세가지 이유 >
“아직 인기가 있을 때 한발 물러나는 것, 그것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부터 방송 출연과 음반 내는 횟수를 극도로 자제했죠. 당장의 인기보다 멀리
가야 한다는 자기보호 본능이랄까… .” 국민가수 조용필, ‘정상에서의 롱 런’비밀.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사회가 뒤숭숭하던 1968년 3월초 어느날 이른 아침.
서울 북쪽 정릉의 산비탈에 있는 마당 딸린 단독주택. 현관문이 소리없이 열리는가
싶더니 집안에서 그림자 하나가 잔뜩 발소리를 죽여가며 마당으로 빠져나왔다.
여명에 비친 얼굴로 보아 10대 후반쯤 됐을까. 더벅머리 아래 청년인지 소년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앳된 얼굴의 그는 양손에 몇가지 물건을 들고 있었다.
꽤 값이 나가 보이는 설계용 제도기 세트, 백과사전 등이었다.
그는 집의 대문쪽으로 가지 않고 자기 키만큼 나즈막한 뒤쪽 담벼락으로 걸어갔다.
대문에는 그때만 해도 다른 집에는 없었던 전기장치가 붙어서 문이 열리면 집안에서
경보가 울리도록 돼 있었다.
그가 걸어간 담벼락 바깥쪽에는 미리 약속돼 있는 듯 또래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도기 세트며 백과사전들, 그리고 몇가지 물건이 안에서 밖으로 넘겨졌다.
끝으로 청년이 담벼락 위로 기어올랐다. 뒤쪽에서 삐걱,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세명의 누나 중 둘째누나였다.
눈이 마주쳤지만 청년은 그대로 담을 넘어 친구들과 함께 산 아래 큰길쪽으로
내달렸다.
네 사람은 버스를 잡아타고 청계천 고물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청년은 집에서
들고 나온 물건들을 후다닥 처분했다. 그리고는 종로2가 악기점으로 달려가
전자기타와 소형 앰프를 샀다. 네 사람은 다시 버스를 갈아타며 통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미군부대가 모여 있는 문산쪽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장파리라는 마을이었다. 미군부대가 하나 있고, 그 앞으로 술집과 댄스클럽들이
밀집해 있었다. 거리 한켠에는 그들처럼 클럽에서 연주 일을 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음악밴드 패거리들이 모여 ‘발탁’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사람은 미리 ‘오디션’약속이 돼 있던 클럽‘DMZ’로 갔다. 고교 2학년 때
그룹을 결성해 매주 한차례씩 만나 연주연습을 해온 터였다. 연습한 레퍼토리는
10곡 정도. 이들의 연주를 지켜보던 클럽 지배인은 “일단 며칠 보자”고 했다.
이들은 당장 그날 저녁부터 무대에 투입됐다. 45분 연주하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45분씩, 그렇게 밤 11시가 넘도록 거듭 다섯 스테이지를 연주해야 했다.
통금시간이 다 돼서야 이들은 클럽측이 연주자들을 위해 항시 마련해 놓는
숙소로 돌아왔다. 가출 첫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사흘 동안 똑같은 일과가 되풀이됐다. 그러나 세번째 연주를 마친 날, 클럽 지배인은
이들에게 “안되겠다”고 잘라 말했다. 네 사람도 그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당장 어설픈 연주실력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레퍼토리가 부족했다.
다섯 스테이지를 연주하려면 최소한 20곡 이상의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술집을 찾아온 손님(미군)들은 연주자들의 ‘밑천’을 금방 파악한다.
의욕적인 가출이었지만 네 사람은 첫걸음에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
가출 4일째 되던 날 아침. 일행 중 세 사람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담을 넘었던
청년만 혼자 남았다. “대학에 가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면서
‘딴따라짓’에 극력 반대하던 아버지를 피해 집까지 뛰쳐나온 마당에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당장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는 옷 한벌, 기타와 앰프 뿐인
열아홉살 ‘맨발의 청춘’이었다. 그는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12년. 여전히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선 그는 세대 구분 없는 구름같은
팬들을 몰고 다니며 1980년대 한국 가요계를 점령하고 일본 가요계까지 뒤흔드는
거물 가수요, 뮤지션으로 날아올랐다. 바로 조용필이다.
- 첫 무대, 보기좋게 퇴짜맞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그를 ‘국민가수’라고 부른다. 그같은 칭호(?)
를 받는 가수가 몇명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역시 그 칭호가 가장
적절한 이는 조용필이 아닐까 싶다. 두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그가 세대와
음악장르를 초월해 고르고 두터운 팬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무대에 서고 신곡을 내놓으면서 전성기 못지 않게 대중의 인기를
놓치지 않고 이른바 ‘롱런’하는 현역이란 점이다.
세상은 점점 ‘국민가수의 종언시대’로 가고 있다. 이리저리 흩어진 국민의
감정을 파고들어 그것을 공통의 ‘집단감정’으로 이끌어내는 ‘공감시키는 가수’
가 사라져 간다는 얘기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은 지금 위아래로는 ‘한달 간격이라도 세대차이가 난다’고 할 만큼 세대간의
단절과 기호차(嗜好差)가 심하다. 옆으로도 마찬가지다. 설령 같은 세대라고 하더라도
개성에 따라 역시 기호차이가 크다. 한 사람에 하나 꼴로 오디오기기를 갖고 다니며
음악을 듣는 개전(個電)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나만의 감정과 기호를
토대로 한 나만의 문화세계’를 갖게 됐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간의 음악적, 감정적,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게 됐다.
‘서태지와 아이들’ 혹은 그들을 잇는 H.O.T.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고는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그들을 외면하고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한다.
모두를 공감시키기 어려운 시대요, 문화상품의 철저한 개인소비시대인 것이다.
세대간, 또 같은 세대 안에서조차 음악에 대해 갖는 느낌과 기호가 콩가루처럼
흩어져 날린다. 그렇게 흩어져 날리는 국민 개개인의 감정을 하나로 뭉치게 해서
집단적인 감정, 집단적인 애상, 집단적인 감상을 이끌어낼 만한 가수란 웬만해서는
나오기 힘들다. 그런 시대에 조용필은 여전히 세대를 넘고 기호차를 넘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저력과 매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한결같은 평을 받고 있다.
그의 노래들은 전성기 때나 지금이나 10대부터 60대까지 애창된다. 그의 콘서트에
몰리는 사람들의 연령대도(세대별로 팬을 확보하는 게 일반적인 다른 가수들과
달리) 역시 다양하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레퍼토리로 무장하고 세대를 넘나들면서
즐거움과 애상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가수, 그런 가수는 아마 조용필뿐 아닐까
싶은 것이다.
여기에다 그는 50세가 된 지금도 끊임없이 무대에 서고 줄기차게 새 작품들을
창작해 내는 ‘왕성한 현역’이다. 한때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나 지나간 명성에
기대어, 혹은 연륜이나 ‘짬밥’의 권위에 기대어 오늘을 버텨 나가는 ‘빛바랜
고참’이 아니다. 여전히 시퍼렇게 날선 기타 연주력과 힘 그 자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가창력, 거기에다 마르지 않는 창작열과 시간이 지날수록 반질
반질해지는 듯한 음악성을 과시하는 중이다.
대중의 취향이란 흔들리는 갈대 정도가 아니다. 무대에 선 사람에게 환호하고
박수를 보내다가도 어느 순간 싹 등을 돌려버리기 일쑤다. 무대에 선 사람은
88열차를 타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 혹은 들들들들, 혹은 슉 하고 정상에
오를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바닥으로 내리 꽂힐지 알 수 없다. 그 변화무쌍한
대중의 취향에 자신을 맞추거나 때로는 그 취향을 이끌면서 인기를 유지하기란,
농반진반으로 지금 서울에서 개인택시 면허를 받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노릇일
것이다(올해 서울에서 개인택시 면허가 나간 것은 모두 3건, 남은 면허는
8건인데 신청자는 수천 명에 달한다).
그러나 흔히 대중이 연예인들을 버릴 때 하는 말인 “걔두 갔어” 따위의 말은
조용필에게는 겨냥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콘서트는 지금도 미어터지기 일쑤고,
그가 내놓는 작품(신곡이란 표현보다 이제는 이 말이 어울린다)들은 여전히
매스컴의 화제기사다. 그야말로 ‘롱런’, 아니 ‘롱롱런’하고 있는 독보적 존재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고 또 먹으면 질리게 마련이다. 하물며 연예인에
대해서는 변덕밖에 없는 것 같은 대중의 식성(食性)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아사리판’에서 조용필은 여전히 쭉쭉 대중에게 빨아 들여지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어떤 힘이 그를 ‘단거리
스타’가 아닌 ‘마라톤 스타’로 떠 받치는 것일까. 그와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너무 많아서 다 보기도 힘든 그의 기사자료들을 간추려 훑으면서 기자는
그를 지탱해온 저력선(底力線)의 끝자락들을 더듬어 찾아보았다. 어렴풋이
세 가닥이 잡혔다.
하나는 프로페셔널다운 탄탄한 음악실력, 두번째는 음악활동의 대중성과 작품성
두 가지를 동시에 아우른다는 전략, 세번째는 얼핏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치밀하고 치열한 자기관리다. 이런 생각들을 대충 정리한
다음, 오는 6월23일 대전 엑스포공원에서 갖게 될 ‘6·25 50주년 기념
특별콘서트’를 위해 다섯 달만에 미국 집에서 한국 집으로 돌아온 그를 만났다.
언론에서는 심심찮게 그를 ‘천부적 뮤지션’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용필은 결코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시골,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에서 나고 열 다섯살까지 그 곳에서
사는 동안 그가 음악과 맺은 인연이 있다면 일곱 살때 하모니카를 불었던 것이
전부다.
이미 50줄에 들어선 부친이 원체 보수적이고 완고해서 집안 분위기상 무슨 가수가
되겠느니 음악을 하겠느니 하는 생각은 하기도 어려웠고 하지도 않았다.
송산초등학교를 나와 부친이 다른 두 사람과 공동 설립한 송산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2학년 1학기 중간에 서울 경동중학교로 전학했다. 이때도 노래나 음악과의
인연은 없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음악과 접할 기회는 다른 아이들보다 많았다.
염전도 갖고 있고 배도 소유했을 만큼 유복한 환경이었던 덕분에 집에는 당시
시골에서는 희귀했던 제니스 라디오와 축음기가 있었고, 그것을 통해 용필은
이런저런 노래와 음악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적극적으로 음악쪽으로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시기는 경동고에 들어간
직후. 비틀즈 열풍이 한창일 때였다. 서울에 올라와 보니 이미 대학에 다니던 형들
(용필은 3남4녀 중 여섯째)이 기타를 갖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 정릉에 집을
짓고는 자식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면 모두 서울로 올려보냈다. 그리고는 어머니와
함께 정릉 집, 화성 집을 오가며 지냈다. 정릉 집에 있으면서 용필은 자연스럽게
기타를 만지게 됐고, 조금씩 음악의 세계로 다가갔다.
“가수가 돼야겠다, 기타리스트가 돼야겠다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 또래
누구나 그렇듯 딩강딩강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하는 게 재미있잖아요. 기타를 썩
잘 친 것도, 노래를 잘 부른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재미있으니까 틈나면 기타를
잡은 거죠.”
고2 때 알음알음 음악 친구들을 만나게 됐다. 기타를 치는 친구, 드럼을 치는 친구,
베이스를 하는 친구 등 대충 그룹을 결성해도 될 성 싶었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매주 한차례씩 ‘유료 밴드 연습실’을 드나들며 연주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장차 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역시 없었다. 공부하는 것보다 연주 연습이 훨씬
재미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아버지가 노상 꾸지람을 했지만 이들
4명의 연습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조용필의 기타 연습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노래는? 그가 정식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가 어떻게 가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목소리를 텄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무명 밴드 시절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장파리에서의 사흘’을 보내고 혼자 남은 그는 DMZ클럽
지배인의 주선으로 마침 기타리스트가 빠져 있던 무명의 다른 그룹에 합류했다.
그룹은 파주 용주골에 마련된 숙소 겸 연습실에서 지냈다. 용필은 한달 동안
이 그룹에 섞여 피나는 맹연습을 계속했다.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오로지 음악 듣는
일과 기타 치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운좋게도 그는 다시 아는 사람을 통해 의정부
미군기지 안에서 밴드 활동을 벌이던 그룹 ‘파이브 핑거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본격적인 밴드활동은 이때 부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룹에서도 보컬(노래 담당)은
아니었다. 퍼스트 기타 주자였다. 의정부에서 밴드활동을 하는 동안 어깨 너머로
따라부르기를 계속하면서 노래도 제법 할 줄 알게 됐지만 여전히 가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의정부에서의 6개월 뒤, 그러니까 1969년 중반쯤
‘파이브 핑거스’는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밤낮으로 연주해야 했다.
낮에는 당시 미도파백화점 5층에 있던 유명한 음악감상실인 ‘미도파살롱’에서
두시간 가량, 그리고 밤에는 이태원으로 넘어가 나이트클럽에서 두시간 가량
연주했다. 겹치기 출연이었다. 1970년 중반까지 이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기타 연주 실력은 이미 프로다운 경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이제 음악활동을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해봤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 학교에나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따금 형들에게는 전화를 했는데 집에서는 저의 대학 편입학
문제를 놓고 이리저리 알아보던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그룹에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돌아갔죠.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며칠 후 가출해 그때 들어갔으니
1년 반쯤 지난 다음이죠?”
부모님이 계신 정릉 집이나 화성 집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차마 아버지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정릉에서 가까운 삼선동 누님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며칠 있으려는데 그를 알고 있던 한 무명 밴드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타리스트가 사고가 났으니 1주일만 그 자리를 맡아 달라는 얘기였다. 경기도
광주에 주둔하던 미8군 기지앞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던 그룹이었다.
‘까짓것 1주일 쯤이야’하고 합류했는데, 그것이 곧 ‘영원한 가수로의 길’로
들어선 계기였다. 그리고 그가 노래를 본격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그룹 시절부터였다.
“1971년 봄인가?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던 친구가 보컬을 담당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입대영장이 나온 거예요. 멤버들 가운데 그 자리를 메울 다른 사람도
없었고 또 밖에서 보컬을 구해 오자니 입맛대로 구하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그래서 제가 맡게 된 거였죠. 그 친구의 입대를 며칠 앞두고 그가 부르던
레퍼토리를 열심히 연습해가며 인수인계 받았죠. 바로 그때부터 노래까지 같이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말하자면 스물한살 때부터 연주와 노래를 병행한 연습 겸 무대활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도 겹치기 출연이었다. 낮에는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지하의
음악살롱에서 연주하고 밤에는 광주로 내려가 클럽 연주를 이어갔다.
어느 곳이나 그렇듯 클럽에서 마련해 놓은 숙소에서 그룹 동료들과 합숙하며
7∼8개월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의 연습량은 엄청났다. 밤에 숙소로 돌아와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 음악살롱 연주 때까지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에
용필이 한 일은 딱 두가지. 갖가지 음악을 들으면서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을
악보에 옮겨 적는 일, 그러니까 채보(採譜·이것을 속어로는 ‘딴다’라고 한다)
와 노래·연주 연습이었다.
소리를 어떻게 ‘따야’하는지, 또 발성은 어떻게 하고 기타 연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 앉아서 혹은 혼자 서서 스스로 모든
것을 궁리하고 생각하고 해결해 나갔다. 품위있게 뭘 배우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곧바로 무대 위에 올라 ‘현실’그리고 ‘현장’과 부닥쳤다.
제대로 못하면 떨어져 나가는 수 밖에 없는 치열한 현실이요, 현장이었다.
보컬을 맡아 소리를 질러대다 보니 목소리가 눈꼽만큼씩 트이기 시작했고
미세하게 음역(音域)도 넓어져 갔다.
“그런 걸 본인이 어떻게 인식하겠어요.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더라, 전에는 음을
내기가 좀 어려운 부분이 웬지 좀 편해졌다, 이런 느낌은 가졌어도 목소리가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어요.”
그것은 문학수업으로 치면 ‘습작’의 연속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노래와 연주도
곧 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음악살롱과 클럽 연주로 압축되는 조용필의 ‘습작’
기간은 사실상 1980년 그가 ‘창밖의 여자’를 내놓기 직전까지 계속됐다고
볼 수 있다. 1969년 처음 그룹사운드 활동을 시작한 이후부터 따져 무려
12년이란 세월이다.
광주 미8군클럽 연주생활을 하던 조용필은 1971년 현재 타악기 연주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대환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나중에 그룹 ‘사랑과 평화’로 이름을
얻은 최이철과 함께 유명한 ‘김트리오’를 결성, 리더인 김씨의 주선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활동했다. 부산에 내려가기 직전 당시 주간지 “선데이서울”
이 주최한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김트리오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룹은 부산 동아백화점 4층의 고급 나이트
클럽을 중으로 광복동과 서면의 음악살롱까지 활발한 연주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차에 조용필에게도 신체검사 영장이 나왔다.
- 질리지 않는 ‘마라톤 스타’
이미 한해전 그는 한 차례 신체검사를 받았었다. “군대 3년 갔다오면 손가락이
썩는다”는 속설이 연주자들에게 퍼져 있던 터여서 그는 군입대를 피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으로 몸무게를 48kg 아래로 줄였다. 그렇지만 병무행정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1년뒤 다시’판정이 나왔다. 두번째 신체검사에는
무대책(?)으로 임했다. 뜻밖에 1년짜리 방위 판정이 나왔다. 그 시기는 방위
제도가 막 생겨난 시기여서 ‘웬만하면’ 방위로 빠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용필 자신은 왜 방위 판정을 받았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때서야 시골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972년 봄이었으니 가출하고 꼭 3년만이었죠.
어머니에게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집에 들렀던 것인데 마침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가고 안 계시더군요. 그때도 아버지 얼굴은 못 뵈었죠. 소사(지금 경기도 역곡)
훈련소에 가서 현역병들에게 죽어라 하고 기합같은 3주훈련을 마치고 군생활을
했죠. 마침 제 병무서류가 분실되는 바람에 중간에 붕 떠서 부산으로, 서울로
왔다갔다 하다가 1년을 보냈죠.”
연주자로서 다행이었던 것은 군생활을 하면서도 오후 5시에 ‘퇴근’한 뒤
계속해서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입대전 ‘김트리오’가 해체되는
바람에 용필은 ‘25시’라는 그룹에 들어가 활동했다. 제도권으로 진입할 기회도
가졌다. 처음 노래를 취입한 것이다. 드라마 주제곡이었는데, 부산에서 제법
히트하고 다시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은 노래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중적 인기나 명성은 얻지 못하고 ‘습작’
기간이 이어졌다.
“제 이름으로 된 그룹을 처음 가지게 됐는데 그게 바로 ‘조용필과 그림자’
였습니다. 1973년 말이었을 겁니다. 친구들이 내 그룹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건데 다운타운을 시작으로 1974년부터 조금씩
이름을 얻었어요. 처음에는 부산에서 활동하다 74년에 서울로 올라왔죠. 그리고
그해 봄 서울에 전세 아파트를 얻고 비로소 아버님과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왔죠.
아버지하고는 그때 6년만에 다시 만난 거예요.”
‘조용필과 그림자’로 다운타운을 누비던 시절 취입한 곡이 바로 그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1975년 10월 킹레코드사가 내놓은 이 음반은
조용필 독집은 아니었다. 앞면은 조용필, 뒷면은 당시 인기그룹 영사운드의
노래들로 짜여 있었다. 앞면의 타이틀곡은 ‘너무 짧아요’였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저 앨범에 섞여 있는 노래였다.
재일동포들의 잇따른 한국 방문과 맞물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에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었고 삽시간에 국민 애창곡처럼 확산됐다. 자연스럽게
‘조용필과 그림자’도 유명 그룹이 되고 바빠졌다. 흔한 말처럼 ‘탁 뜬’것이었다.
그러면서 조용필 자신도 무명 시절과는 천지차이인 꿈같은 스타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가지 못했다. 1977년 5월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 터졌다.
“1969년에 미군클럽 연주생활을 할 때 미군들이 숙소에 대마초를 갖고 놀러왔을
때 처음 한번, 그리고 나중에 이태원에 있을 때 역시 미군들이 갖고 놀러온 것을
다시 한번 피워봤는데 그게 문제가 됐어요. 처음에 한번 피워보니까 나는 전혀 안
맞더라고요. 팔뚝에 왕방울같은 혹이 여러개 생기고, 토하고, 그래서 관뒀죠.
나중에 이태원에서 다시 한번 해보니까 역시 안 맞아요. 그런데 그때 1969년,
70년만 해도 대마초 같은 것은 규제하는 법도 없을 때거든요. 나는 도저히 안
맞아서 그렇게 한번씩 해보고는 안한 거고. 그게 왜 나중에 문제가 됐는지 알아
봤더니, 일단 검사한테 가면 무조건 ‘네가 아는 놈 50명을 써라’하는 거예요.
이유가 없어요. 무조건 50명을 채워야 되는 거예요. 저는 은평구에 있던 무슨
병원인가 하는 데 가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풀려났는데 추징금이라고 달랑
250원이 나왔어요. 그런 일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엄청난 일로 터져나간 겁니다.
뭐 어떡해요. 이제 끝났구나 싶었죠.”
- 習作과 實戰, 12년을 단련하다
활동금지를 당하는 바람에 그는 무대에 설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난 뒤
그는 노래 제목처럼 부산으로 돌아가 다시 그룹 활동을 재개했다. 1977년 5월부터
대마초가수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79년 12월까지 그는 은둔한 뮤지션으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음악생활을 해나갔다. 이 30개월은 그에게는 암흑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시기가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정말 답답했죠. 꽤 오랫동안 연습기를 거쳐 실력도 어느 정도 쌓았고,
또 노래도 빵 떴는데 정작 가수생활을 못하게 됐으니…. 솔직히 희망은 없었지만
그래도 노래와 음악공부는 쉴 수 없었어요.”
그 동안의 기사 스크랩을 훑어보면 이 시기에 그는 창(唱)을 접하고 판소리를
연습하는 등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목소리를 완전히 트이게 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좀 과장된 얘기다. 10년 동안의 부단한 연습과 ‘현장실습’을
거치면서 그의 목소리는 이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1978년에 민요를 처음 접했고 거기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지
제 불만이 목소리가 너무 미성(美聲)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록(rock)에
미성은 안 어울리거든요. 소리가 탁해야 돼요. 왜 그 허스키하다는 말 있잖아요.
될 수 있는 대로 그쪽으로 목소리가 개발돼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좀 부족했어요.
그래서 판소리 흉내를 좀 많이 내면서 목소리를 다듬어 봤어요. 특히 ‘춘향가’
중에서 이도령이 서울에서 내려와 구걸하는 장면을 수백 번 불렀죠. 그렇지만
창이나 판소리 공부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또 그때 목소리가 트인 것도
아닙니다. 그전에 음악살롱과 클럽에서 무명 밴드활동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목소리를 거칠게 만들고 또 다듬고 한 결과죠.”
대마초 사건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에게 득이 됐다.
“그때 ‘돌아와요 부산항에’ 한곡으로 떴으면 아마 한두해 스타로 붕 떴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끝나고 말았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30개월 동안 뒤로 물러나
제 자신도 돌아보고 음악 에너지도 속으로 꽉꽉 충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교 졸업후 1970년대 중반까지 그는 늘 노래를 하고 기타를 연주했다.
음악 속에서 음악만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듯 그에게는 ‘선생님’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을 혼자 했다. 지도하는 사람도 감독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스스로 치열하고 피터지게 ‘습작’을 거듭해야 했다. ‘못하면 떨어져
나가야 하는’뜨거운 현장, 바로 무대 위에 항상 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은 그를 힘있는 가창력과 단단한 연주자로 만들어갔다. 그 실력이
1970년대 중반 한차례 빛을 볼 기회가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한차례
정상으로 질주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도 일순 좌절됐다. 밖으로 터져나오려던
에너지가 거듭 안으로, 안으로 축적돼 갔던 것이다.
제도권내 음악교육과 동떨어져 혼자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악보를 그리고
작품을 궁리하고 한 것 또한 그에게는 엄청난 재산이 됐다. 그는 기존의
트로트도 아니고 그때 한창 유행하던 포크계열도 아닌, 그렇다고 정확하게
‘록’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개척했다.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노래들 말고 그가 직접 만든 노래들이 갖는 독창성은 바로
그런 혼자만의 습작 과정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천부적 재능은 없었다. 흔히 ‘미8군 무명시절’로만 표현하고 넘겨버리기 일쑤인
그 시기는 오늘의 조용필을 있게 한 습작의 시간이고 에너지의 축적기였다. 12년
동안 무대 위에서 열창하고 연주하고, 또 무대 아래서는 끊임없이 연습하고 하는
동안 그는 소위 ‘노래의 도사’가 돼갔다. 남들은 몇년 동안 한번 내기도 힘든
독집 앨범을 1980년대 내내 매년 한 차례씩(어떤 때는 두 차례나) 쏟아냈던 것,
또 남들은 1년에 한번 하기도 힘든 라이브 콘서트를 적게는 40회에서 많게는
100회까지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오랫동안 쌓았던 파워 덕분이었다.
종이가 단단하게 뭉쳐져 당구공이 되는 것처럼, 안으로 눌리고 쌓인 음악실력과
에너지는 1980년대를 명실공히 조용필의 시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습작기간’에 쌓인 음악실력과 에너지는 어디까지나 기본 바탕이다.
그것만으로는 역시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한계가 있다. 탄탄한 음악성과 실력을
갖춘 많은 가수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중적 인기를 쫓으려다 보면 이번에는 자신의 컬러,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가수들은 갈등한다. 무엇을 좇을 것이냐.
조용필은 어땠을까.
“음악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하면 됩니다. 음악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은 있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가수가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과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도 다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만의 음악세계도 키워
나가고 또 대중이 원하는 음악도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죠. 이 노래는
천박해서 부를 수 없다거나, 또 나는 이런 음악만 추구하기 때문에 저것은 할
수 없다는 태도를 저는 처음 그룹활동을 할 때부터 경계했어요.”
이에 대한 모범 사례로 조용필은 세 사람의 뮤지션을 든다.
“프랭크 시내트라는 어떤 쪽으로 노래했습니까? 어떤 장르라고 단정하기
어렵잖아요. 어떤 때는 아주 고상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노래를 부르다가도
또 어떤 때는 너무나 대중적이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탭 댄스까지
했잖아요. 엘비스 프레슬리는 또 어떻습니까. 자기의 음악세계를 고집했습니까.
로큰롤을 축으로 삼으면서 대중이 원하는 노래는 다 소화해 들려줬어요.
소울이면 소울, 록이면 록, 댄스곡이면 댄스곡. 비틀스도 그렇죠? 일반인들이
듣기에 별로 가슴에 와 닿지도 않는 자기 색깔의 음악도 하지만 그러다 갑자기
‘예스터데이-’하면서 대중의 가슴을 축축하게 적셔줍니다. 진정한 대중
음악인의 자세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죠.”
조용필의 팬층은 두텁기로 정평이 났다. 세대를 넘어 그의 노래는 애창된다.
그것은 조용필 자신이 일찍부터 겨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생활을
해오는 동안 스스로 장르의 한계를 두지 않았다고 말한다. “팬은 두텁게
가져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트로트·록·
민요·소울·발라드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른다. 자기만의 음악적 색깔을
지켜나가면서 대중적인 노래도 마다하지 않는 것도 팬들의 다양한 취향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음악·노래는 정서를 담는 것 말고도 가수가 살아가는 사회상, 또 가수가
살아가는 사회의 역사성까지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순수한
낭만가요 말고도 상징적이고 의식적인 노래들도 많이 만들고 불렀어요. ‘서울
서울 서울’이라든가 ‘미지의 세계’ 또는 ‘한강’이나 ‘꿈’‘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노래들이 그런 것이죠. 조용필의 음악은 그 무엇에도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을 추구해온 셈입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겨울의
찻집’도 부르고 ‘서울 서울 서울’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음악활동을 해나가든 그것은 그의 마음대로다. 옳다 그르다를
따질 수 없다. 어쨌든 그런 ‘폭넓은’ 생각으로 만들어낸 노래들이 대부분 크게
히트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대중음악의 전 장르를 끌어안으면서도
‘조용필의 음악적 컬러’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 일찍 피는 꽃은 일찍 진다
국내 학계에서 처음으로 대중가수에 대한 체계적 연구, 곧 ‘조용필학’
(Choyongpilogy)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그의 음악적 컬러가 그만큼
뚜렷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전북대 국문과 김익두 교수는 지난해 음악학·
미학·문학·연극학자 및 대중문화 평론가 등으로 ‘조용필 연구모임’ 을
구성했다. 이미 그는 조용필 음악을 분석한 논문 ‘한국적인 사랑과 한,
그리고 희망의 당시대적 표현의 길’을 발표했다. 김교수는 “문자중심
고급문화에서 오디오·비디오 위주의 대중문화로 문화의 주축이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이를 외면해 왔다” 고 지적하고 “가요는 대중문화의
핵심이며, 조용필은 그 가요의 중심이란 판단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고 말한다. 또 “조용필은 단순한 음악현상이 아니라 동시대 사회상을
집약한 상징이므로 인문사회과학의 학제간 연구가 필수적” 이라고 강조한다.
탄탄한 실력, 그리고 대중성을 흠뻑 머금으면서도 자기 색깔을 놓치지 않는다는
여러 가지 요소는 조용필의 노래를 인기정상으로, 그리고 조용필 자신을 정상의
가수로 밀어올리는 저력이었다. 더욱이 그는 오디오(라디오)의 시대에서 비디오
(TV시대)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인기를 얻었고, 흑백시대에서 컬러시대로
넘어가던 사회환경의 덕도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갖춰졌다고 해도,
그래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보장’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롱런’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대중의 취향과 식성은 죽 끓듯 변한다. 뜨거울 때는 뜨거운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차갑게 얼어붙어 버린다. 그래서 무대에 선 사람들은 백이면
백, 인기는 거품이요, 구름이요, 안개같은 것이라고 (결국) 말하게 된다.
그런데 조용필은 어떤가. 그는 시들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는 ‘현역’으로
꼽히면서 그 명성에 걸맞은 ‘현재진행형인 인기’를 여전히 구가하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롱런’하고 있다. 그것도 이제는 흔들림이 거의 없어 보이는
아주 탄탄대로를-. 더이상 젊은 오빠도, 요즘 10대들이 열광하는 댄스가수도
아닌 그의 롱런 비결은 무엇인가. 먼저 그가 생각하는 비결을 직접 들어보자.
“비결이 따로 없어요. 또 그런 것을 무슨 전략적으로 따져 어떻게 하고 한 것도
아니고. 다만 ‘내가 오래가지는 못한다’는 생각은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인기라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잖아요? 또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원해도 이미 물리적으로 맛이 가게 돼 있어요. 정상을
지키고 인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쇳덩이처럼 짓누르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하거든요. 이미 정상에 오른 순간부터 그래서 지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각종 방송 프로그램이다, 행사다 해서 초(秒) 단위로
쫓아다니다 보면 자기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망가져 버립니다. 어떤 인기인이
됐든, 그 과정은 벗어날 수 없어요. 인기가 곧 가수 자신을 먹어치우고 해치는
꼴이지요.”
“대중이 설사 저를 미치도록 좋아하고 저에게 열광한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선배들의 경험을 보면서 알고 있었어요. 제가 매일 TV에
얼굴을 비치고 한 노래 또 하고 또 하고 그래 봐요. 순식간에 식상해져요.
또 실제로 한없이 ‘인기가 몰아대는 현실’에 쫓겨가는 제 자신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보호막이랄까 탈출구가 있었어요.
1980년대 내내 제가 1주일에 두번씩 비행기를 탔어요. 일본이죠.
절반은 일본에서, 절반은 한국에서 지냈던 셈이에요. 페이스 조절이었죠.
조용필이가 어째 안보인다는 얘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면 돌아와 방송
활동을 좀 하고, 질릴 때가 됐다 싶으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하는 거예요. 딱히 그런 작전이 있었다기보다 솔직히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싶어요.”
우리 사회에 10대 중심의 댄스가요 열풍(엄밀하게 말하면 방송이 일제히
거기에 집중하면서 생겨난 현상일 수 있을 것이다)이 몰아닥치면서 조용필이
방송에서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밀려난 것 아니냐는 얘기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전략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 조용필이 처음 털어놓는 얘기.
“제가 1980년대 중반부터 매년 계속해서 ‘방송 출연은 이제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밝혀왔던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저는 대중이 저를 식상해 할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방송출연에 선을
그어야겠다고 죽 생각했어요. 1990년대 들어 나이와 관록 같은 것도 의식
되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스스로 방송 출연을 자제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내가 알아서 비켜나야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정말 힘겨운 결단이었습니다. 눈앞의 인기를 놓고 알아서
물러난다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 실천하다 보니 처음
얼마 동안 팬들이 저를 싹 잊어가는데 미치도록 괴롭더구라고요. 당장 나서고
싶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오래 가려면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곡과 음반 발표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쏟아내 봐야 저를 망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첫째, 물리적으로 제가
힘들어 그럴 수가 없어요. 둘째, 대중은 금방 ‘또 냈대’라면서 외면합니다.
인기를 얻었던 가수가 판을 내놓고 실패 소리를 들으면 그것은 곧
‘너 가수생활 끝났다’는 신호예요. 그때부터 2년, 아니 3년에 하나쯤 앨범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다고 해서 숨어 지냈다가는 그의 말처럼 ‘끝장’이다. 방송 출연과 신곡
발표를 자제해 가면서 그는 팬들과의 ‘스킨십’을 시작했다. 바로 라이브
콘서트였다. “1980년대 방송으로 대했던 팬들을 90년대에 전부 콘서트로
대면했다”고 할 만큼 조용필은 역동적인 라이브 무대를 열어 나갔다.
조용필의 기획사 YPC의 김헌 이사는 그런 조용필의 강행군을 가리켜
“곁에서 보면 정말 무리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고 기억한다. 평균 1주일에
한번 꼴로 콘서트를 강행했다. 1997년과 98년에는 사흘에 한번 꼴이었다.
“체력과 목소리가 받쳐 주드냐”는 질문에 조용필은 “노래를 할 수록 힘이
난다”고만 대답했다. ‘만들어진’음악적 재능에 비해 열정은 타고난 것일까?
참고 삼아 얘기하면 그는 따로 체력단련을 하지 않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못내 궁금하다.
스스로 TV화면에서 물러나고 노래를 양산(量産)하지 않는 대신 팬들과
페이스-투-페이스(face-to-face)로 만나온 결과는 어떤가. 그것은 2000년대에
들어선 지금 그에게 전성기 때 못지않은 끊임없는 인기와 명성을 안겨주고 있다.
방송은 방송대로 그를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스페셜’‘빅쇼’
‘특집’이란 이름을 붙여 그 자신만의 스테이지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른바 ‘관록 관리’를 위해 조용필은 가려서 출연하고 있다. 국가차원의
문화행사에 조용필은 잊혀지지 않고 초대된다. 그의 콘서트는 여전히 만원
사례이고 표를 못구한 팬들이 사무실로 협박전화를 걸어올 정도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 “대중가수에게 장르란 없다”
1994년 동갑내기 재미교포 사업가 안진현씨와 결혼한 뒤 가정적 안정을 찾은
것도 그의 롱런을 뒷받침하는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한다. 안씨는 결혼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미국 워싱턴에서 웨덜리사를 경영하고 있다. 메릴랜드의
자택에서는 부부 두 사람만 조용히 살고 있다. 조용필은 자택 지하실에 작은
음악실을 만들어 놓고 많은 시간을 거기서 보낸다. 고래요, 골초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거의 마시지도 피우지도 않는다고 자랑이다. 겨울이면 부부동반으로
골프를 치러 나가지만 그밖에는 한인타운에도 얼굴을 비치는 법 없이 거의
집안에서 지낸다는 얘기다. 남편의 이번 대전콘서트 참관을 위해 부인 안씨는
지난 6월15일 남편보다 나흘 늦게 입국했다.
누군가 인생은 마라톤 이라고 했다. 마라톤에 나서려면 달리기 실력과 폐활량을
갖춰야 한다. 또 내리막이든 오르막이든 정해진 길이라면 달려야 한다.
끝까지 달리기 위해서는 페이스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그 모든 것이 갖춰졌을
때 마라톤이든 음악이든 인생이든 ‘롱런’과 ‘승리’가 가능할 것이다.
1970년대 장기간의 습작으로 축적된 조용필의 음악적 에너지는 80년대 그를
가요계의 정상으로 밀어올렸다. 정상의 자리에 내내 머무르던 80년대의 절묘한
자기관리는 팬들로 하여금 조용필이라는 상품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90년대의 자기 절제와 페이스 조절은 가수 조용필의 ‘롱런’을
보장해 주고 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허점’이 있었다면 2000년대 지금의
조용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기자가 그에게 항상 ‘안타깝게’생각했던 점을 묻는 것으로 일단 얘기를 맺었다.
─ 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지켜왔지만 음악이라는 ‘일’만 하고 지내왔다는
점에서 평범한 저로서는 어딘가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애도 좋고 취미
생활도 좋고 다른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그렇게 한가지 일만 하면서 살아온 게
억울하지 않습니까?
“지나올 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지금 돌이켜 보니 아무래도
억울한 점들이 있기는 있어요. 하지만 그게 팔자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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