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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광의 나날은 시작됐다
78년 4월 방송을 제외하고는 대마초가수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규제완화조치가 발표됐다. 비온후 먹구름 사이로 작은 빛이 보이는 듯한 희소식이었다.
「옳지, 이제 길이 트이기 시작하는구나」며 부리나케 여기저기서 팀을 모아 명동 「마이하우스」, 북악호텔나이트클럽 등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부산 「동양클럽」에서 함께 일하다 나 때문에 팀이 깨져버린 유재학씨는 이때부터 매니저로 발벗고 나서 일을 도와주었다.
「별볼일 없는 대마초가수」의 매니저를 자청한 그에게 나는 실로 깊은 고마움을 느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가요계에서는 「전설적인 매니저」로 통하는 그의 예리한 눈이 나의 가능성을 점쳤는지 내가 하도 측은해보여 정을 베풀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여하튼 나보다 7살이 더 많고 형보다 더 따르는 그는 기타맨 출신이며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다가 군입대를 했고 제대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다시 입학한 괴짜이다. 그 역시 학생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연주생활을 했고 음악을 안해보려고 별짓을 다해보았지만 결국 음악에 얽매인 몸이다.
나를 키우며 일부 가요매니저들로부터 받은 질시와 못마땅한 가요계 풍토, 건강악화 등을 이유로 84년 한때 내 일에서 손을 뗀적이 있지만 지금은 또다시 나의 귀중한 음악 벗이 돼 주고 있다.
잔뜩 당겼다가 놓은 활시위처럼 나는 미친듯이 음악에 몰두했다. 당시 내 주장으로 우리팀은 합숙을 하며 연습을 했는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새벽 4시에 밤무대가 끝나면 새벽 5시부터 아침식사때까지 연습, 점심식사때까지 취침하고 일어나면 무대에 설때까지 또 연습하는등 남들이 보면 「미친놈」들 같이 스파르타식 강훈을 했다. 이때 연습에 지쳐 멤버가 자꾸나가 구성은 자꾸 바뀌었다.
당시 우리팀은 이름도 정하지않고 무대에 섰는데 우리 가요는 절대 연주하거나 노래하지않는 것이 특색이었다. 내 얼굴을 알아보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신청하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가요를 히트시키는 바람에 내 이름이 알려져 대마초를 피웠다는 사실까지 들춰졌고 음악을 중단해야 했었다는 생각에 이상한 오기가 돋았던 때문이었다.
외국곡만 연주, 노래하는 밴드였지만 스파르타식 훈련 덕분에 「완전한 그룹」으로 뮤지션들 사이에는 잘알려졌었다.
그러나 그 팀은 79년 10.26사태가 터지면서 당분간 활동을 못하게됐고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또다시 혼자가 된 나는 방구석에서 통기타를 두드리며 노래를 연습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노래를 부르다 지쳐 방에 드러누워있는데 여동생 종순이가 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며 「빨리 나와보라」고 소리쳤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연예인에 대한 전면해금조치가 내려진 날이었다. 저녁 7시뉴스 방송에서는 해금되는 연예인 명단이 계속 흘러나왔고 「조용필」 내 이름도 분명 들어있었다. 평소 나를 잘 돌봐주던 부산 MBC의 김양화씨, 광주 MBC의 소수옥씨, KBS의 진필홍씨등 방송관계자들의 축하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대구에 내려가있던 유재학씨도 「내 당장 올라갈께」한마디를 하고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방에 다시 돌아와 불을 끄고 드러누운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시는 아픈 눈물을 흘리지않으리라.
그 소식이 있은후 사흘동안은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 과거를 정리했고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는 의욕에 가슴이 부풀어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머리에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동아방송PD 안평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아방송이 80년 정초부터 새로낼 연속극 「창밖의 여자」주제가를 작곡, 노래해 달라는 느닷없는 요청이었다. 재기의 다시없을 발판으로 생각한 나는 배명숙씨가 작사한 가사를 전화로 받아적고는 방안에 틀어 박혔다.
조용히 기타줄을 퉁기며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나를 잠들게하라」며 중얼거려 보았다. 가슴이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좀처럼 악상이 오선지에 옮겨지질 않았다. 가슴이 뭉클한 순간 음표로 그리려고하면 금세 생각이 흩어지곤 했다. 하루에 식사한끼도 제대로 먹지않으며 계속 기타, 오선지와 씨름한지 닷새가 되던날 밤을 꼬박 새우고 깜빡잠이 들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이어지지 않던 멜로디가 귀에 들어왔다.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후다닥 잠을깬 나는 미친듯이 악상을 옮겨 적었다.
그 다음날 당장 동아방송으로 달려가 녹음에 들어갔는데 PD 안평선씨와 작사를 한 배명숙씨는 녹음실 밖에서 곡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의 감정이 그들 가슴 가슴에 진하게 가 닿았던 것이리라.
「창밖의 여자」를 들어본 당시 내 전속사인 지구레코드측도 놀라운 곡이라고 흥분하면서 출반을 서둘렀다.
「창밖의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단발머리」「한오백년」「대전블루스」「고추잠자리」「미워 미워 미워」등이 수록됐던 이 앨범은 각각 방송국 인기차트 정상을 정복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조용필 「영광의 나날」이 시작된 것이었다.
[11] 술에 얽힌 이야기
내 인생에서 술을 빼놓고 생활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조용필」에서 술을 떼어놓으면 뭔가 멋이 덜한 느낌이 든다고들 한다. 그만큼 나는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도 많다.
작은 체구에 술은 씨름 선수이상으로 많이 마셔대니 「저러다간 더이상 못버티지」하며 주위에서는 여러 분들이 걱정하곤 하며 또 그렇게 술을 갖다 부으면서도 끄떡없는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물론 최근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일에 술이 일조를 하지않았다고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이혼, 북경공연등 내 인생의 엄청난 사건들이 한순간에 몰려 받은 스트레스와 그 이후에 한시도 쉴틈없이 계속되는 일정에 치였던 때문이지 결코 술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술이 몸을 조금 피곤하게 했을순 있지만 정신은 자꾸만 새롭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 다음으로 술을 좋아한다. 술은 순간 순간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며 사람들과 보다 가까와질수 있게한다. 인간이 발명한 약가운데 가장 부작용이 없는 약이 술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술을 처음 입에 댄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잘 못하셨지만 명절때는 한잔씩 들곤하셨는데 술상머리에 붙어 앉아있는 나에게 「이놈, 너도 한잔 먹어볼래」하고 술을 건네줘 받아먹던 기억이난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애들한테 웬 술을 주냐」며 눈을 흘기셨고 아버지는 「남자는 술을 먹을줄 알아야 된다」며 자꾸 술을 권해 먹고는 취해서(?) 잠들곤했다. 술이 거나해지신 아버지는 「바우고개」를 즐겨불렀고 항상 잠결에 그노래가 귓전을 스쳤다. 내가 지금 술을 잘하는것은 이때의 훈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있는데 반친구가 막걸리 한통을 가지고와 먹자고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몇모금씩 나눠마시고 자다 내려온 일이 있었고 이후 가끔 악동들끼리 모여 「시음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였던가, 시골(경기도 화성)집에 놀러갔었는데 이광남이라고하는 고향친구가 반갑다며 막소주 한되를 들고 찾아와 주거니받거니하며 다마셔버렸고 그대로 인사불성이 돼 사흘동안 꼼짝못하고 누워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나보다 술이 세던지 정신을 못차리는 나를 집에까지 업어다 놓고는 어머니에게 된통 혼이나고 달아났는데 이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들이 못하는짓이 없다. 그렇게 되려면 뭐하러 술은 마셨더냐. 마시려면 잘마셔야지」하며 모질게 꾸지람을 했고 술에 학을 뗀 나는 한동안 술이라는 말도 떠올리기 싫었다.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졸후 집을 나와 기지촌 무명악사로 떠돌때였다. 여기저기서 온갖 수모를 당하던 시절 소주한잔이 유일한 벗이었고 외로움, 괴로움을 잊을수 있는 수단이었다.
「김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던 71년 여름 리더 김대환, 이남이등과 함께 부산해운대백사장에서 소주를 놓고 마시던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마신 술은 소주 12병인데 내 주력(酒歷) 38년에 가장 많이 마셨고 술맛도 기가 막혔다. 당시 김대환은 드러머에서 매니저로 물러나 있었고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 그 자리는 새출발을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이야기와 소주로 밤을 새우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알려지자 「조용필은 모지방 공연에 갔다 소주 한박스를 다 비워버린 일이 있다」「소주됫병을 입도 안떼고 한번에 다마셔버렸다더라」는 과장된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실상 그렇게 많이 마시진 못한다. 아마 그렇다면 위장이 강철로 됐어도 다녹아버렸을 것이고 나는 알콜중독자가 돼도 중증이 됐을것이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잘어울려 항상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밤새도록 마시다보면 술병이 여남은개씩 쌓이는 것을 보게되는 일이 가끔있을뿐이다.
내 주위에는 유난히 술자리가 많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술을 좋아했다.
연예기자 이상벽씨나 개그맨 허참은 평소에 잘어울리는 「주당클럽」멤버들이다. 이상벽씨는 내가 무명밴드에서 뛰던시절 KBS라디오 드라마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러 히트시키자 처음으로 취재를 해갔던 기자였다. 첫인터뷰여서 인상이 깊게 남기도 했고 기자답게 냉철하고 날카로와 보인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정이 먼저 느껴졌다. 업무를 떠나서 나를 무척 걱정해주었고 솔직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원래 홍익대 미술대를 졸업한 미술학도였는데 언젠가 내 심벌마크를 직접 도안해 선물로 보내주는 정성을 보여주기도했다. 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 심벌마크까지 제작해준 그에게 고마와 어쩔줄 몰라했고 그는 『전공이 사장될 것 같아 한번 되살려본 것 뿐이다. 고마우면 술이나 한잔사라』고 껄껄 웃어댔다.
나는 이후 그를 「형님」으로 불렀다. 허참은 74년 내가 「조용필과 그림자」의 리더로 활동할때 종로2가 초저녁 고고클럽 「웨스턴」에 함께 출연하면서 알고 지냈는데 방송에 거의 동시에 진출, 그는 TBC TV 「쇼쇼쇼」의 사회를 맡았고 나는 그 프로에 자주 얼굴을 내밀면서 어울리곤 했다. 마치 입사동기같은 감정에서 서로 자신의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했고 술먹는 취향이 비슷해 자연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서로 말을 놓고 지내며 심한듯한 욕까지 스스럼없이 해댈 수 있는 그와의 술자리는 항상 즐겁기 그지없다.
일이 끝나고 「오늘 한번 뭉칩시다」하고 의기가 투합하면 잘가는 술집은 반포아파트근처의 소주집이다. 주로 해물안주를 파는 술집인데 나를 비롯해 상벽이형, 허참 모두 얼굴이 잘 알려져있어 한동안 그곳에오는 손님들에게 「술공격」을 많이 당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손님들이 「어이, 조용필선생, 내 술 한잔 받으쇼」하고 술을 권하곤 하는데 그도 항상 조금씩이 아니라 맥주잔이나 대접에 그득 따라주고 한사람이 그러면 그 일행 모두가 너도나도 술을 따라주는데 혹 「이제, 그만 됐다고」고 하면 간혹 「건방진 사람, 내 성의를 무시하기냐」며 시비를 거는일도 있었다.
우리 「주당클럽」은 결국 아이디어를 내 「진주집」 한귀퉁이에 칸막이를 세우고 스티로폴을 깔아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주인아주머니도 우리가 나타나면 반가와하긴 하면서도 다른 취객들이 성가시게 굴지않을까 염려하던차에 잘 생각했다며 대찬성했다.
요즘에는 나는 나대로 외국공연이 많고 상벽이형과 허참도 방송프로그램과 밤무대등으로 인해 시간을 맞추기 힘들지만 작년, 재작년만해도 지겹도록 같이 술을 마셔댔다.
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80년초에는 방송이나 공연만 끝나면 소위 룸살롱으로 달려가 술을 마셨다. 지나치게 여자를 좋아해 호스티스가 있는곳에 가야만 술이 넘어간다고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얼굴이 알려지다보니 남이 안보이는 장소에 들어가 편히 술자리를 갖기 위해서였다. 또 공연 주최측이나 방송 관계자들도 일이 끝나면 「알아서」룸살롱으로 데려갔었다.
룸살롱을 많이 드나들다보니 심지어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씨와 내가 룸살롱에 함께 술을 마시러간 일이 있었고 그곳 마담과 호스티스들이 극진히 대접했는데 잘놀고난 후 의당 주어야할 팁을 주지않았다는 것이다. 왈 「한국최고의 코미디언과 가수가 와서 쇼를 보여준거나 마찬가지인데 너희들이 오히려 관람료를 내야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 나가버렸다는 이야기.
일부 설익은 연예인들이 술집에 가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모르나 나는 결코 이런 일이 없었고 인기에 금이 갈지도 모르는 행동은 할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큰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생각할 일이 많은 최근에는 여자가 나오는 술집은 잘안가게 된다. 여자들에 신경을 쓰다보면 대화가 끊어지기 쉽고 깊은 생각에 빠지기 어렵기때문이다. 내 음악의 많은 부분은 술에 젖어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명악사시절, 무대에 오르기전 초조감을 달래기위해, 일이 끝난후 피로를 풀기위해 마시던 술은 언제부터인가 악상을 떠올리는데도 도움을 주고있다.
방에 혼자 앉아 브랜디를 홀짝홀짝 마시며 음악에 관한 구상을 하는것이 요즘에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공연관계로 외국에 나가면 내가 술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 사람들은 고급술을 선물했고 술선물이 없을때는 공항면세점에서 브랜디를 사와 집에는 술끊어질날이 없었는데 이를 계속 비우다보니 특히 브랜디를 아주 입맛을 붙인것이다.
새로운 곡을 준비할 때는 습관처럼 브랜디술잔이 손에 들리워져 있었고 순간순간 묘한 아이디어가 반짝이곤 한다.
최근곡 「한강」의 경우도 술을 마시다가 한강이 개발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리되면 옛날 한강은 사라지는셈 아니냐」는 아쉬운감이 들어 바로 작곡에 들어갔었고 「1987년 서울」도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전옥숙(全玉淑)여사(시네텔서울대표)와의 술자리에서 지난해의 민주화 열기와 아픈 상처들은 잊을수 없는 시간들이라며 열을 올리다가 악상이 떠올라 만들어보았고 전여사가 작사를 맡아 주었던 곡이다.
전여사는 80년 KBS 진필홍PD를 통해 연락이 와 저항시인 김지하(金芝河)씨와 함께 전씨가 경여하던 카페 「기러기」(여의도)에서 처음 만나 알게됐는데 문학, 음악, 미술, 철학 등 모든면에서 대선배로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않는 분이다.
전여사는 지난 75년부터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에 소개하는 문학계간지 「한국문예」를 출간하는등 일본어에 능하고 최근 MBC TV 6.25특집극 「캄푸치아 그 지옥의 기록」을 비롯한 MBC TV 「베스트셀러극장」 KBS TV 「TV문학관」등 드라마제작과 용평팝페스티벌을 기획하는등 특히 대중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있는데 나의 일본진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일본가수 다니무라 신지에게 선사한 내 노래 「생명」(生命)의 역사(譯詞)를 해주었고 84년 KBS와 아사히TV공동제작 「한일선상토론」비디오물에는 나를 게스트 싱어로 밀어주었다.
김지하(金芝河)씨와도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긴급조치와 계엄법 위반으로 복역하다 80년 형집행 정지로 출감했을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김지하씨는 감옥에 있을때 쥐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내 노래들을 즐겼는데 「한풀이」를 하는듯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 밖으로 나가면 꼭 만나보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는 면에서 나와 공통점이 있었고 판소리에도 일가견이 있어 처음 만났을때부터 마음이 잘맞았다.
80년초 한동안은 상당히 자주만나 술자리를 가졌는데 사상, 정치문제이야기는 하지않았고 주로 술과 여자이야기였다. 김지하씨가 원주에 있을때 집으로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그는 항상 하얀모시옷을 입고 난초를 그리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까지 계속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술을 들며 『어떤면에서 우리들은 광대이다.
조금씩 형태는 다르지만 바닥을 흐르는 맥은 같다』며 남다른 친밀감을 보였다. 우리는 판소리를 토대로해 그의 노랫말을 가사로 옮겨적는 작업을 시도한적도 있었는데 주변의 복잡한문제, 건강상태등으로 인해 중단해야했다. 요즘은 전남 해남에서 글을 쓰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주변환경이 정리되고 시간이 나는대로 한번 찾아가볼 작정이다.
술에 얽힌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건강만은 걱정말라는 말은 팬들에게 꼭하고 싶다. 술은 분명 내게 힘을 주었으면 주었지 해를 끼치지않았다. 어느때 전남 광주에 지방공연을 가서 그곳분들이 어떻게 술을 계속 먹였는지 술에 만취해 혀가 꼬부라진 상태로 무대에 섰는데 제대로 노래가 안돼 「앗따, 광주술인심이 너무 좋아 이리됐응게, 이해해주쇼」하고는 공연을 계속하자 더욱 환호하던 팬들이 기억난다.
78년 4월 방송을 제외하고는 대마초가수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규제완화조치가 발표됐다. 비온후 먹구름 사이로 작은 빛이 보이는 듯한 희소식이었다.
「옳지, 이제 길이 트이기 시작하는구나」며 부리나케 여기저기서 팀을 모아 명동 「마이하우스」, 북악호텔나이트클럽 등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부산 「동양클럽」에서 함께 일하다 나 때문에 팀이 깨져버린 유재학씨는 이때부터 매니저로 발벗고 나서 일을 도와주었다.
「별볼일 없는 대마초가수」의 매니저를 자청한 그에게 나는 실로 깊은 고마움을 느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가요계에서는 「전설적인 매니저」로 통하는 그의 예리한 눈이 나의 가능성을 점쳤는지 내가 하도 측은해보여 정을 베풀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여하튼 나보다 7살이 더 많고 형보다 더 따르는 그는 기타맨 출신이며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다가 군입대를 했고 제대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다시 입학한 괴짜이다. 그 역시 학생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연주생활을 했고 음악을 안해보려고 별짓을 다해보았지만 결국 음악에 얽매인 몸이다.
나를 키우며 일부 가요매니저들로부터 받은 질시와 못마땅한 가요계 풍토, 건강악화 등을 이유로 84년 한때 내 일에서 손을 뗀적이 있지만 지금은 또다시 나의 귀중한 음악 벗이 돼 주고 있다.
잔뜩 당겼다가 놓은 활시위처럼 나는 미친듯이 음악에 몰두했다. 당시 내 주장으로 우리팀은 합숙을 하며 연습을 했는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새벽 4시에 밤무대가 끝나면 새벽 5시부터 아침식사때까지 연습, 점심식사때까지 취침하고 일어나면 무대에 설때까지 또 연습하는등 남들이 보면 「미친놈」들 같이 스파르타식 강훈을 했다. 이때 연습에 지쳐 멤버가 자꾸나가 구성은 자꾸 바뀌었다.
당시 우리팀은 이름도 정하지않고 무대에 섰는데 우리 가요는 절대 연주하거나 노래하지않는 것이 특색이었다. 내 얼굴을 알아보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신청하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가요를 히트시키는 바람에 내 이름이 알려져 대마초를 피웠다는 사실까지 들춰졌고 음악을 중단해야 했었다는 생각에 이상한 오기가 돋았던 때문이었다.
외국곡만 연주, 노래하는 밴드였지만 스파르타식 훈련 덕분에 「완전한 그룹」으로 뮤지션들 사이에는 잘알려졌었다.
그러나 그 팀은 79년 10.26사태가 터지면서 당분간 활동을 못하게됐고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또다시 혼자가 된 나는 방구석에서 통기타를 두드리며 노래를 연습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노래를 부르다 지쳐 방에 드러누워있는데 여동생 종순이가 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며 「빨리 나와보라」고 소리쳤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연예인에 대한 전면해금조치가 내려진 날이었다. 저녁 7시뉴스 방송에서는 해금되는 연예인 명단이 계속 흘러나왔고 「조용필」 내 이름도 분명 들어있었다. 평소 나를 잘 돌봐주던 부산 MBC의 김양화씨, 광주 MBC의 소수옥씨, KBS의 진필홍씨등 방송관계자들의 축하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대구에 내려가있던 유재학씨도 「내 당장 올라갈께」한마디를 하고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방에 다시 돌아와 불을 끄고 드러누운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시는 아픈 눈물을 흘리지않으리라.
그 소식이 있은후 사흘동안은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 과거를 정리했고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는 의욕에 가슴이 부풀어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머리에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동아방송PD 안평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아방송이 80년 정초부터 새로낼 연속극 「창밖의 여자」주제가를 작곡, 노래해 달라는 느닷없는 요청이었다. 재기의 다시없을 발판으로 생각한 나는 배명숙씨가 작사한 가사를 전화로 받아적고는 방안에 틀어 박혔다.
조용히 기타줄을 퉁기며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나를 잠들게하라」며 중얼거려 보았다. 가슴이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좀처럼 악상이 오선지에 옮겨지질 않았다. 가슴이 뭉클한 순간 음표로 그리려고하면 금세 생각이 흩어지곤 했다. 하루에 식사한끼도 제대로 먹지않으며 계속 기타, 오선지와 씨름한지 닷새가 되던날 밤을 꼬박 새우고 깜빡잠이 들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이어지지 않던 멜로디가 귀에 들어왔다.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후다닥 잠을깬 나는 미친듯이 악상을 옮겨 적었다.
그 다음날 당장 동아방송으로 달려가 녹음에 들어갔는데 PD 안평선씨와 작사를 한 배명숙씨는 녹음실 밖에서 곡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의 감정이 그들 가슴 가슴에 진하게 가 닿았던 것이리라.
「창밖의 여자」를 들어본 당시 내 전속사인 지구레코드측도 놀라운 곡이라고 흥분하면서 출반을 서둘렀다.
「창밖의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단발머리」「한오백년」「대전블루스」「고추잠자리」「미워 미워 미워」등이 수록됐던 이 앨범은 각각 방송국 인기차트 정상을 정복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조용필 「영광의 나날」이 시작된 것이었다.
[11] 술에 얽힌 이야기
내 인생에서 술을 빼놓고 생활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조용필」에서 술을 떼어놓으면 뭔가 멋이 덜한 느낌이 든다고들 한다. 그만큼 나는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도 많다.
작은 체구에 술은 씨름 선수이상으로 많이 마셔대니 「저러다간 더이상 못버티지」하며 주위에서는 여러 분들이 걱정하곤 하며 또 그렇게 술을 갖다 부으면서도 끄떡없는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물론 최근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일에 술이 일조를 하지않았다고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이혼, 북경공연등 내 인생의 엄청난 사건들이 한순간에 몰려 받은 스트레스와 그 이후에 한시도 쉴틈없이 계속되는 일정에 치였던 때문이지 결코 술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술이 몸을 조금 피곤하게 했을순 있지만 정신은 자꾸만 새롭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 다음으로 술을 좋아한다. 술은 순간 순간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며 사람들과 보다 가까와질수 있게한다. 인간이 발명한 약가운데 가장 부작용이 없는 약이 술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술을 처음 입에 댄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잘 못하셨지만 명절때는 한잔씩 들곤하셨는데 술상머리에 붙어 앉아있는 나에게 「이놈, 너도 한잔 먹어볼래」하고 술을 건네줘 받아먹던 기억이난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애들한테 웬 술을 주냐」며 눈을 흘기셨고 아버지는 「남자는 술을 먹을줄 알아야 된다」며 자꾸 술을 권해 먹고는 취해서(?) 잠들곤했다. 술이 거나해지신 아버지는 「바우고개」를 즐겨불렀고 항상 잠결에 그노래가 귓전을 스쳤다. 내가 지금 술을 잘하는것은 이때의 훈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있는데 반친구가 막걸리 한통을 가지고와 먹자고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몇모금씩 나눠마시고 자다 내려온 일이 있었고 이후 가끔 악동들끼리 모여 「시음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였던가, 시골(경기도 화성)집에 놀러갔었는데 이광남이라고하는 고향친구가 반갑다며 막소주 한되를 들고 찾아와 주거니받거니하며 다마셔버렸고 그대로 인사불성이 돼 사흘동안 꼼짝못하고 누워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나보다 술이 세던지 정신을 못차리는 나를 집에까지 업어다 놓고는 어머니에게 된통 혼이나고 달아났는데 이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들이 못하는짓이 없다. 그렇게 되려면 뭐하러 술은 마셨더냐. 마시려면 잘마셔야지」하며 모질게 꾸지람을 했고 술에 학을 뗀 나는 한동안 술이라는 말도 떠올리기 싫었다.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졸후 집을 나와 기지촌 무명악사로 떠돌때였다. 여기저기서 온갖 수모를 당하던 시절 소주한잔이 유일한 벗이었고 외로움, 괴로움을 잊을수 있는 수단이었다.
「김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던 71년 여름 리더 김대환, 이남이등과 함께 부산해운대백사장에서 소주를 놓고 마시던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마신 술은 소주 12병인데 내 주력(酒歷) 38년에 가장 많이 마셨고 술맛도 기가 막혔다. 당시 김대환은 드러머에서 매니저로 물러나 있었고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 그 자리는 새출발을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이야기와 소주로 밤을 새우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알려지자 「조용필은 모지방 공연에 갔다 소주 한박스를 다 비워버린 일이 있다」「소주됫병을 입도 안떼고 한번에 다마셔버렸다더라」는 과장된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실상 그렇게 많이 마시진 못한다. 아마 그렇다면 위장이 강철로 됐어도 다녹아버렸을 것이고 나는 알콜중독자가 돼도 중증이 됐을것이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잘어울려 항상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밤새도록 마시다보면 술병이 여남은개씩 쌓이는 것을 보게되는 일이 가끔있을뿐이다.
내 주위에는 유난히 술자리가 많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술을 좋아했다.
연예기자 이상벽씨나 개그맨 허참은 평소에 잘어울리는 「주당클럽」멤버들이다. 이상벽씨는 내가 무명밴드에서 뛰던시절 KBS라디오 드라마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러 히트시키자 처음으로 취재를 해갔던 기자였다. 첫인터뷰여서 인상이 깊게 남기도 했고 기자답게 냉철하고 날카로와 보인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정이 먼저 느껴졌다. 업무를 떠나서 나를 무척 걱정해주었고 솔직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원래 홍익대 미술대를 졸업한 미술학도였는데 언젠가 내 심벌마크를 직접 도안해 선물로 보내주는 정성을 보여주기도했다. 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 심벌마크까지 제작해준 그에게 고마와 어쩔줄 몰라했고 그는 『전공이 사장될 것 같아 한번 되살려본 것 뿐이다. 고마우면 술이나 한잔사라』고 껄껄 웃어댔다.
나는 이후 그를 「형님」으로 불렀다. 허참은 74년 내가 「조용필과 그림자」의 리더로 활동할때 종로2가 초저녁 고고클럽 「웨스턴」에 함께 출연하면서 알고 지냈는데 방송에 거의 동시에 진출, 그는 TBC TV 「쇼쇼쇼」의 사회를 맡았고 나는 그 프로에 자주 얼굴을 내밀면서 어울리곤 했다. 마치 입사동기같은 감정에서 서로 자신의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했고 술먹는 취향이 비슷해 자연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서로 말을 놓고 지내며 심한듯한 욕까지 스스럼없이 해댈 수 있는 그와의 술자리는 항상 즐겁기 그지없다.
일이 끝나고 「오늘 한번 뭉칩시다」하고 의기가 투합하면 잘가는 술집은 반포아파트근처의 소주집이다. 주로 해물안주를 파는 술집인데 나를 비롯해 상벽이형, 허참 모두 얼굴이 잘 알려져있어 한동안 그곳에오는 손님들에게 「술공격」을 많이 당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손님들이 「어이, 조용필선생, 내 술 한잔 받으쇼」하고 술을 권하곤 하는데 그도 항상 조금씩이 아니라 맥주잔이나 대접에 그득 따라주고 한사람이 그러면 그 일행 모두가 너도나도 술을 따라주는데 혹 「이제, 그만 됐다고」고 하면 간혹 「건방진 사람, 내 성의를 무시하기냐」며 시비를 거는일도 있었다.
우리 「주당클럽」은 결국 아이디어를 내 「진주집」 한귀퉁이에 칸막이를 세우고 스티로폴을 깔아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주인아주머니도 우리가 나타나면 반가와하긴 하면서도 다른 취객들이 성가시게 굴지않을까 염려하던차에 잘 생각했다며 대찬성했다.
요즘에는 나는 나대로 외국공연이 많고 상벽이형과 허참도 방송프로그램과 밤무대등으로 인해 시간을 맞추기 힘들지만 작년, 재작년만해도 지겹도록 같이 술을 마셔댔다.
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80년초에는 방송이나 공연만 끝나면 소위 룸살롱으로 달려가 술을 마셨다. 지나치게 여자를 좋아해 호스티스가 있는곳에 가야만 술이 넘어간다고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얼굴이 알려지다보니 남이 안보이는 장소에 들어가 편히 술자리를 갖기 위해서였다. 또 공연 주최측이나 방송 관계자들도 일이 끝나면 「알아서」룸살롱으로 데려갔었다.
룸살롱을 많이 드나들다보니 심지어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씨와 내가 룸살롱에 함께 술을 마시러간 일이 있었고 그곳 마담과 호스티스들이 극진히 대접했는데 잘놀고난 후 의당 주어야할 팁을 주지않았다는 것이다. 왈 「한국최고의 코미디언과 가수가 와서 쇼를 보여준거나 마찬가지인데 너희들이 오히려 관람료를 내야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 나가버렸다는 이야기.
일부 설익은 연예인들이 술집에 가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모르나 나는 결코 이런 일이 없었고 인기에 금이 갈지도 모르는 행동은 할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큰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생각할 일이 많은 최근에는 여자가 나오는 술집은 잘안가게 된다. 여자들에 신경을 쓰다보면 대화가 끊어지기 쉽고 깊은 생각에 빠지기 어렵기때문이다. 내 음악의 많은 부분은 술에 젖어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명악사시절, 무대에 오르기전 초조감을 달래기위해, 일이 끝난후 피로를 풀기위해 마시던 술은 언제부터인가 악상을 떠올리는데도 도움을 주고있다.
방에 혼자 앉아 브랜디를 홀짝홀짝 마시며 음악에 관한 구상을 하는것이 요즘에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공연관계로 외국에 나가면 내가 술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 사람들은 고급술을 선물했고 술선물이 없을때는 공항면세점에서 브랜디를 사와 집에는 술끊어질날이 없었는데 이를 계속 비우다보니 특히 브랜디를 아주 입맛을 붙인것이다.
새로운 곡을 준비할 때는 습관처럼 브랜디술잔이 손에 들리워져 있었고 순간순간 묘한 아이디어가 반짝이곤 한다.
최근곡 「한강」의 경우도 술을 마시다가 한강이 개발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리되면 옛날 한강은 사라지는셈 아니냐」는 아쉬운감이 들어 바로 작곡에 들어갔었고 「1987년 서울」도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전옥숙(全玉淑)여사(시네텔서울대표)와의 술자리에서 지난해의 민주화 열기와 아픈 상처들은 잊을수 없는 시간들이라며 열을 올리다가 악상이 떠올라 만들어보았고 전여사가 작사를 맡아 주었던 곡이다.
전여사는 80년 KBS 진필홍PD를 통해 연락이 와 저항시인 김지하(金芝河)씨와 함께 전씨가 경여하던 카페 「기러기」(여의도)에서 처음 만나 알게됐는데 문학, 음악, 미술, 철학 등 모든면에서 대선배로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않는 분이다.
전여사는 지난 75년부터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에 소개하는 문학계간지 「한국문예」를 출간하는등 일본어에 능하고 최근 MBC TV 6.25특집극 「캄푸치아 그 지옥의 기록」을 비롯한 MBC TV 「베스트셀러극장」 KBS TV 「TV문학관」등 드라마제작과 용평팝페스티벌을 기획하는등 특히 대중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있는데 나의 일본진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일본가수 다니무라 신지에게 선사한 내 노래 「생명」(生命)의 역사(譯詞)를 해주었고 84년 KBS와 아사히TV공동제작 「한일선상토론」비디오물에는 나를 게스트 싱어로 밀어주었다.
김지하(金芝河)씨와도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긴급조치와 계엄법 위반으로 복역하다 80년 형집행 정지로 출감했을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김지하씨는 감옥에 있을때 쥐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내 노래들을 즐겼는데 「한풀이」를 하는듯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 밖으로 나가면 꼭 만나보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는 면에서 나와 공통점이 있었고 판소리에도 일가견이 있어 처음 만났을때부터 마음이 잘맞았다.
80년초 한동안은 상당히 자주만나 술자리를 가졌는데 사상, 정치문제이야기는 하지않았고 주로 술과 여자이야기였다. 김지하씨가 원주에 있을때 집으로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그는 항상 하얀모시옷을 입고 난초를 그리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까지 계속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술을 들며 『어떤면에서 우리들은 광대이다.
조금씩 형태는 다르지만 바닥을 흐르는 맥은 같다』며 남다른 친밀감을 보였다. 우리는 판소리를 토대로해 그의 노랫말을 가사로 옮겨적는 작업을 시도한적도 있었는데 주변의 복잡한문제, 건강상태등으로 인해 중단해야했다. 요즘은 전남 해남에서 글을 쓰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주변환경이 정리되고 시간이 나는대로 한번 찾아가볼 작정이다.
술에 얽힌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건강만은 걱정말라는 말은 팬들에게 꼭하고 싶다. 술은 분명 내게 힘을 주었으면 주었지 해를 끼치지않았다. 어느때 전남 광주에 지방공연을 가서 그곳분들이 어떻게 술을 계속 먹였는지 술에 만취해 혀가 꼬부라진 상태로 무대에 섰는데 제대로 노래가 안돼 「앗따, 광주술인심이 너무 좋아 이리됐응게, 이해해주쇼」하고는 공연을 계속하자 더욱 환호하던 팬들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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