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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주 작은 조용필
>
>사람 만나는 게 기자의 일이지만 대부분 명사를 만나는 일은 만족보다는 실망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대중연예인들, 특히 스타들의 경우엔 꽉짜인 일정도 일정이지만 이유 없는 거드름이나 자만이 인터뷰를 고역으로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조용필을 처음 만나 것은 1년 반전. 30주년 기념음반을 발표할 즈음이었다. 역시 걱정이 스물스물 피어났다. 중 고교 시절 당시 유행하던 독수리마크의 <세이코>녹음기로 <못찾겠다 꾀꼬리>를 즐겨 듣던 예전의 팬으로서, 그를 만나는 것은 설레임 반, 두려움 반이었는데 실은 두려움이 조금 컸다.
>이유는 없다. 그저 조용필이었기 때문이다.
>작다. 그의 첫 인상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 그 눈매며, 수줍은 듯 웃는 작은 입이며 말투까지 그는 참으로 따스했다. 그 따스함은 이를테면 배우 안성기의 부드러움이나 한석규의 포근함 같은 것과는 달랐다. 그에 대해 따뜻함 한 구석엔 일종의 '연민'같은 느낌이 자리 잡는다. 인생으로 따지고 보면, 특히 성공의 척도로 놓고 볼 때 한 기자가 그에게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일종의 월권이자 직무유기이다.
>그런데 그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를 만난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조용필의 이미지에 속고 있는 것일까. 스타이면서도 끝까지 '내'가 지켜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그런 관리된 이미지에 우리들 모두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작지만 웃을 때 활짝 펴지는 그 숨김없는 소년 같은 미소는 무엇일까. 나이 들어도 여전히 심금(아직도 요즘 사람들 마음 속에 그 옛날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던 마음의 거문고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어만큼 진솔한 단어도 없는 것 같다)을 울리는 그의 그 노래는 무엇이란 말일까. 그러나 이런 말을 그저 상황을 비비꼬아 사고의 유희를 즐기려는 '작태'에 불과하다.
>그의 노래 인생 30년을 반추해본다면.
>조용필은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는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때문에 그의 고향을 부산으로 '확신'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는 않다. 역시 어려서 그는 자신이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년이었다고 회상한다. 어렸을 적 「바위고개」를 어른들 앞에서 부르기도 했으나 잘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서울경동중학시절 「밤하늘의 트럼펫」을 듣고 그는 음악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깊어졌다. 그룹 '벤처스'의 기타 연주에 푹 빠져 그는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일을 벌인 것은 1968년. '망나니' 소리를 들으며 경동고교 재학시절 음악학원에 다이던 그는 4명의 친구들과 가출을 해서 미8군 무대에 오른다.
>서울 영등포 미8군 소속 헌병부대의 무대. 특정 밴드에 속하지도 않았고 그저 이리저리 밴드를 옮겨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당시 미8군 무대는 지금으로 치면 신촌이나 홍대 앞의 언더그라운드 무대처럼 가수를 지망하는 이들의 필수 코스이자 몇 안 되는 무대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불량배를 취급하는 듯한 분위기"였다는 게 그 때를 회상하는 조용필의 설명이다.
>그룹 '애트킨스'를 결성하고 경기도 문산 용주골의 미8군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칼은 오히려 더 날카로울 때가 있는 법인데 바로 조용필의 마음에 있던 음악에 대한 꿈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늘의 그를 예감케한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73년. 이전 그의 생활은 고단했다. 무명의 밴드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러나 이 시절 그는 타국에서 맞는 생일을 축하해 달라는 한 병사의 주문에 「Lead Me On」을 배워 불렀다. 꾹꾹 눌러 소리를 내는 조용필의 소울풍 창법이 일품으로 '당신 생각에 잠못 이루고 이 마음 별을 헤인다'라는 가사로 부려 졌던 노래이다. 블루스, 소울에 각별한 재주를 지닌 조용필의 매력이 드러나는 그의 초기 대표곡. 이런 노래를 부르며 무명가수 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작곡가 황선우씨가 실연한 옛 사랑을 생각하며 만든 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주었다. 그러나 취입 당시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2년 후 재일동포 고향 방문단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님떠난'을 '형제 떠난 부산항에'로 바꾼 이 노래는 전국민의 노래가 됐다. 그러나 벼락 출세에 대한 시샘이었을까. 그는 무명시절이었던 69년 대마초를 피웠다는 혐의로 가수 생활을 중단해야했다. 77년 5월 4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쇼를 갖고 다시 혼자만의 세상 속에 갇혀 버렸다. 그러나 그는 고독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우연히 듣게 된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한오백년」은 그에게 전혀 새로운 음과 발성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흔히 목을 틔운다는 말이 있는데 이 과정은 목을 괴롭혀서라도 더 나은 소리를 갖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신체의 원상태를 유지하려는 본성을 꺾어 버리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명창을 찾아가 폭포수 밑에서 소리를 지르고, 소금을 먹으며 열을 식혔고 그 보다 더한 일도 했다. 이렇게 6개월을 거쳐 그의 목을 비로소 그의 의지를 받아들였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가수가 해금되면서 그는 활동을 재개했다.
>동아방송 새 드라마 「창밖의 여자」를 시작으로 그는 미 서부지역의 최고 무대인 L.A 슈라인 오디토리엄, 그리고 미국 최고의 명성을 지닌 뉴욕 카네기홀의 무대에 섰다. 그리고 동아와 보니 「창밖의 여자」가 가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방송활동 보다는 딴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밴드조직은 그의 꿈이었다. 정상의 멤버들과 호흡을 맞춰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소리의 조건을 만드는 일은 뮤지션으로서의 당연한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그야말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촛불」 「단발머리」같은 다양한 사운드가 연주되는 새 음반은 그들 밴드가 있기에 가능했다. 관악기를 배제하고 신서사이저 같은 건반악기만을 사용한 사운드는 당시 청소년들에게 뭔가 새로운 소리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5년 연속 방송사의 가수왕 타이틀이 그에게 안겨진 것은 다름 아닌 그 소리의 신선함 때문이다. 자신이 누누이 밝혔듯 자신의 소리의 근본은 '록'에 있었지만 그것을 다듬은 것은 바로 이름없는 무명가수 시절의 고독과 한 맺힌 한국적 정서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그 때의 애창곡은 「창밖의 여자」「그겨울의 찻집」「큐」등 애잔한 곡들이다. 그러다 노래방에 가서 한 번 폼을 잡을라치면 어김없이 나오는 노래가 「킬리만자로의 표범」. 푸른빛 도시 정서에 어울리는 노래이다. 그러나 그의 노래 세계는 가만 따지고 보면 더욱 다양한 색채를 지닌다. 4집에 담겨있던 '대지여 춤춰라 바다여 웃어라'라는 가사가 인상적인 비감한 노래 「생명」은 80년 광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분노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올림픽으로 들뜬 분위기와 희망을 얘기하는 「서울 서울 서울」은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가장 아름답게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뜨는 해는 반드시 기우는 법. 30, 40대 들에게 조용필은 여전히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이지만 TV를 통해 재현되는 1999년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그는 이제 뒷전이다. 그러나 그는 "부담을 덜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음악 이야기를 할 때 빼고는 세상 그 무엇에도 연연해 하지 않는 것 같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때문에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억지로 꾸며대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서는 그의 마음은 어떨까. 역시 그답게 흥분하지 않는다. 후배가수들이 자랑스러워 하겠다는 말에 "아마 후배들은 이런 무대를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그답게 답했다.
>대중음악인에게는 그간 넘지 못할 벽이었다. 성격이 판이한 이미자. 패티김이 꼭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수생활에 회의를 느꼈을 때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세종문화회관 공연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에 열광하다가 갑자기 '그래도 어차피 당신은 딴따라 아니냐'며 안면을 바꾸는 세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제 조용필이 괜히 조용필일까. 그는 이미 차곡차곡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무대에 올려질 노래들을 관현악 반주에 맞게 하나씩 하나씩 편곡해서 그간 들어왔던 곡과는 분위기를 달리 할 생각이다.
>조용필은 작다. 그러나 큰 것을 극복하는 것은 더 큰 것이 아니라 한없이 작은 것임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팬들은 그의 작품을 보러 극장에 간다. 그 작은 몸집에서 그 큰 노래가 나오는 것을, 그래서 그 작은 관중마저 커짐을 느낀다. 오페라극장. 이 극장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그의 노래와 그를 사랑하는 팬들이 있다면. 이제 작은 이들이 모여 한 번 큰판을 만들어 보자. 이제 작은 이들의 반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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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한국일보 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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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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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만나는 게 기자의 일이지만 대부분 명사를 만나는 일은 만족보다는 실망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대중연예인들, 특히 스타들의 경우엔 꽉짜인 일정도 일정이지만 이유 없는 거드름이나 자만이 인터뷰를 고역으로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조용필을 처음 만나 것은 1년 반전. 30주년 기념음반을 발표할 즈음이었다. 역시 걱정이 스물스물 피어났다. 중 고교 시절 당시 유행하던 독수리마크의 <세이코>녹음기로 <못찾겠다 꾀꼬리>를 즐겨 듣던 예전의 팬으로서, 그를 만나는 것은 설레임 반, 두려움 반이었는데 실은 두려움이 조금 컸다.
>이유는 없다. 그저 조용필이었기 때문이다.
>작다. 그의 첫 인상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 그 눈매며, 수줍은 듯 웃는 작은 입이며 말투까지 그는 참으로 따스했다. 그 따스함은 이를테면 배우 안성기의 부드러움이나 한석규의 포근함 같은 것과는 달랐다. 그에 대해 따뜻함 한 구석엔 일종의 '연민'같은 느낌이 자리 잡는다. 인생으로 따지고 보면, 특히 성공의 척도로 놓고 볼 때 한 기자가 그에게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일종의 월권이자 직무유기이다.
>그런데 그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를 만난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조용필의 이미지에 속고 있는 것일까. 스타이면서도 끝까지 '내'가 지켜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그런 관리된 이미지에 우리들 모두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작지만 웃을 때 활짝 펴지는 그 숨김없는 소년 같은 미소는 무엇일까. 나이 들어도 여전히 심금(아직도 요즘 사람들 마음 속에 그 옛날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던 마음의 거문고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어만큼 진솔한 단어도 없는 것 같다)을 울리는 그의 그 노래는 무엇이란 말일까. 그러나 이런 말을 그저 상황을 비비꼬아 사고의 유희를 즐기려는 '작태'에 불과하다.
>그의 노래 인생 30년을 반추해본다면.
>조용필은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는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때문에 그의 고향을 부산으로 '확신'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는 않다. 역시 어려서 그는 자신이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년이었다고 회상한다. 어렸을 적 「바위고개」를 어른들 앞에서 부르기도 했으나 잘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서울경동중학시절 「밤하늘의 트럼펫」을 듣고 그는 음악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깊어졌다. 그룹 '벤처스'의 기타 연주에 푹 빠져 그는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일을 벌인 것은 1968년. '망나니' 소리를 들으며 경동고교 재학시절 음악학원에 다이던 그는 4명의 친구들과 가출을 해서 미8군 무대에 오른다.
>서울 영등포 미8군 소속 헌병부대의 무대. 특정 밴드에 속하지도 않았고 그저 이리저리 밴드를 옮겨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당시 미8군 무대는 지금으로 치면 신촌이나 홍대 앞의 언더그라운드 무대처럼 가수를 지망하는 이들의 필수 코스이자 몇 안 되는 무대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불량배를 취급하는 듯한 분위기"였다는 게 그 때를 회상하는 조용필의 설명이다.
>그룹 '애트킨스'를 결성하고 경기도 문산 용주골의 미8군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칼은 오히려 더 날카로울 때가 있는 법인데 바로 조용필의 마음에 있던 음악에 대한 꿈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늘의 그를 예감케한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73년. 이전 그의 생활은 고단했다. 무명의 밴드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러나 이 시절 그는 타국에서 맞는 생일을 축하해 달라는 한 병사의 주문에 「Lead Me On」을 배워 불렀다. 꾹꾹 눌러 소리를 내는 조용필의 소울풍 창법이 일품으로 '당신 생각에 잠못 이루고 이 마음 별을 헤인다'라는 가사로 부려 졌던 노래이다. 블루스, 소울에 각별한 재주를 지닌 조용필의 매력이 드러나는 그의 초기 대표곡. 이런 노래를 부르며 무명가수 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작곡가 황선우씨가 실연한 옛 사랑을 생각하며 만든 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주었다. 그러나 취입 당시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2년 후 재일동포 고향 방문단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님떠난'을 '형제 떠난 부산항에'로 바꾼 이 노래는 전국민의 노래가 됐다. 그러나 벼락 출세에 대한 시샘이었을까. 그는 무명시절이었던 69년 대마초를 피웠다는 혐의로 가수 생활을 중단해야했다. 77년 5월 4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쇼를 갖고 다시 혼자만의 세상 속에 갇혀 버렸다. 그러나 그는 고독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우연히 듣게 된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한오백년」은 그에게 전혀 새로운 음과 발성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흔히 목을 틔운다는 말이 있는데 이 과정은 목을 괴롭혀서라도 더 나은 소리를 갖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신체의 원상태를 유지하려는 본성을 꺾어 버리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명창을 찾아가 폭포수 밑에서 소리를 지르고, 소금을 먹으며 열을 식혔고 그 보다 더한 일도 했다. 이렇게 6개월을 거쳐 그의 목을 비로소 그의 의지를 받아들였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가수가 해금되면서 그는 활동을 재개했다.
>동아방송 새 드라마 「창밖의 여자」를 시작으로 그는 미 서부지역의 최고 무대인 L.A 슈라인 오디토리엄, 그리고 미국 최고의 명성을 지닌 뉴욕 카네기홀의 무대에 섰다. 그리고 동아와 보니 「창밖의 여자」가 가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방송활동 보다는 딴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밴드조직은 그의 꿈이었다. 정상의 멤버들과 호흡을 맞춰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소리의 조건을 만드는 일은 뮤지션으로서의 당연한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그야말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촛불」 「단발머리」같은 다양한 사운드가 연주되는 새 음반은 그들 밴드가 있기에 가능했다. 관악기를 배제하고 신서사이저 같은 건반악기만을 사용한 사운드는 당시 청소년들에게 뭔가 새로운 소리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5년 연속 방송사의 가수왕 타이틀이 그에게 안겨진 것은 다름 아닌 그 소리의 신선함 때문이다. 자신이 누누이 밝혔듯 자신의 소리의 근본은 '록'에 있었지만 그것을 다듬은 것은 바로 이름없는 무명가수 시절의 고독과 한 맺힌 한국적 정서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그 때의 애창곡은 「창밖의 여자」「그겨울의 찻집」「큐」등 애잔한 곡들이다. 그러다 노래방에 가서 한 번 폼을 잡을라치면 어김없이 나오는 노래가 「킬리만자로의 표범」. 푸른빛 도시 정서에 어울리는 노래이다. 그러나 그의 노래 세계는 가만 따지고 보면 더욱 다양한 색채를 지닌다. 4집에 담겨있던 '대지여 춤춰라 바다여 웃어라'라는 가사가 인상적인 비감한 노래 「생명」은 80년 광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분노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노래이다. 올림픽으로 들뜬 분위기와 희망을 얘기하는 「서울 서울 서울」은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가장 아름답게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뜨는 해는 반드시 기우는 법. 30, 40대 들에게 조용필은 여전히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이지만 TV를 통해 재현되는 1999년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그는 이제 뒷전이다. 그러나 그는 "부담을 덜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음악 이야기를 할 때 빼고는 세상 그 무엇에도 연연해 하지 않는 것 같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때문에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억지로 꾸며대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서는 그의 마음은 어떨까. 역시 그답게 흥분하지 않는다. 후배가수들이 자랑스러워 하겠다는 말에 "아마 후배들은 이런 무대를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그답게 답했다.
>대중음악인에게는 그간 넘지 못할 벽이었다. 성격이 판이한 이미자. 패티김이 꼭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수생활에 회의를 느꼈을 때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세종문화회관 공연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가수들은 자신의 노래에 열광하다가 갑자기 '그래도 어차피 당신은 딴따라 아니냐'며 안면을 바꾸는 세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제 조용필이 괜히 조용필일까. 그는 이미 차곡차곡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무대에 올려질 노래들을 관현악 반주에 맞게 하나씩 하나씩 편곡해서 그간 들어왔던 곡과는 분위기를 달리 할 생각이다.
>조용필은 작다. 그러나 큰 것을 극복하는 것은 더 큰 것이 아니라 한없이 작은 것임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팬들은 그의 작품을 보러 극장에 간다. 그 작은 몸집에서 그 큰 노래가 나오는 것을, 그래서 그 작은 관중마저 커짐을 느낀다. 오페라극장. 이 극장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그의 노래와 그를 사랑하는 팬들이 있다면. 이제 작은 이들이 모여 한 번 큰판을 만들어 보자. 이제 작은 이들의 반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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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한국일보 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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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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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상원님 화이팅,조용필화이팅........... |
1999-10-23 | 93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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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1999-10-23 | 9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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