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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김수미가 쓰는 사람 이야기 [1990年]
20 여년 가요 생활로 세계 무대를 넘보는 아시아 정상의 가수이면서, 또한 그는
이혼에 이은 의사부인과의 스캔들로 차가운 눈초리의 궁지에 몰렸었다. 결국 그
가 돌아갈 곳은 노래를 부르는 무대뿐.
최근 '추억속의 재회'로 조심스레 팬들을 찾고 있는 조용필. 제 노래에 설움 겨
워하는 마흔 한살의 꿈과 회한을 재치 탤런트 김수미가 새벽녘까지 술잔을 나누
며 들어보았다.
내가 연예기자도 아니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같은 동료 얘길 하다 보니 일반 대
중들이 보는 것과는 좀 다른 색깔로 보게된다. 좀더 인간적이고 순수한, 말하자
면 화장하기 전의 피부색깔을 솔직하게 그대로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연예인들
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대중들은 참 예민하면서도 인정이 없고 모두들 엄격한 법
관이다. 냉철한 교통순찰대 경찰처럼 가차 없이 딱지를 뗀다. 내 생각도 이렇지
만 철학 박사인 황필호교수도 어떤 곳에 이런 글을 쓰신걸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대중들은 연예계 스타들을 더 이상 영웅으로 만들지 못한다.' 라고.
조용필이 제 아무리 노랠 잘 해도 그의 수많은 팬들이 없었더라면 오늘 그가 아
시아의 정상에 우뚝 서진 못한다. 다만 우리는, 70세의 피카소가 열여섯살의 어
린 소녀와 맺은 불륜은 환상적인 사랑이라니 격찬해주면서 봉천동 산동네의 6순
넘은 김영감이 별 다방의 미스리에게 안달하면 노망이니 패륜이니 하는 말로 욕
하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엘리자베스테일러가 일곱번째 결혼을 할
때 우리네 많은 사람들은 '참, 난 여자야, 이번엔 몇캐럿짜리 다이어를 받았나'
하며 부러워하고 관대해진다. 물론 거기엔 '외국 거'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들도 문제되겠지만 앞서 얘기한 '전라도 시리즈'처럼 이왕이면 우
리 것을 감싸 주고 우리네 연예인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좀 관대 하게 이해해 줄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게 한다.
우리는, 그러나 연예인, 공인이기 이전에 밥 먹고 똥싸는 인간이다. 샐러리맨들
이 직장에서 얻는 것과 같은 온갖 스트레스, 또는 많은 사람들이 겪고있는 가정
불화 앞에서도 공인 이기에 아파도 신음 소리 크게 못내고 앓는다. 요즘 티비에
비친 조용필의 얼굴은 말이 아니다. 입 언저리와 인중에 양쪽 으로 깊은 주름이
갔고 피부도 좀 처져있다. 가수 생활 25년의 모습이다. 잠깐씩 스쳐가는 방송국
에서 짧은 인사만 나누었을 뿐 맥주잔을 놓고 마주 앉은 것이 몇 년만의 일이다
워낙 바쁜 탓이다. 약속시간 전 그는 생방송 '화요일에 만나요'에서 회색 빛 양
복을 입었던데 방송이 끝난 후 밤색 잠바로 갈아입고 나왔다.
여자를 보면 참 수줍어한다. 소주는 끊었노라며 맥주를 시켰다. 내가 연예 기자
가 아니라서 참 편한 모양이다. 우리는 맥주를 두어병 비우면서 부터 정월달 마
당에 묻어놓은 김장김치 맛처럼 푹 익은 인간적인 얘기로 진입했다.
"내가 용필씨 팬인 만큼 국내 무대말고 해외무대도 웬만큼은 알아요. 6천석이나
되는 LA 슈라인 오라토리움 무대에서 해마다 한 번정도 공연하고, 역대 1천만명
이 관람 했다는 디즈니랜드에서의 공연, 그리고 카네기홀 공연, 링컨 센터 공연
그땐 나도 미국여행 중이라 그 공연 봤죠. 그리고 일본가수도 서기 힘들다는 일
본의 무도관 공연, 일본 전역 순회공연... 언젠가 우리집에서 티비를 보는데 일
본티비의 'TV 홍백전'에 나와 인터뷰를 하더라구요. 그때 이미 일본에서 레코드
판매 순위가 3위에 올랐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번 돈 다 어쩌구 돈 문제가 나왔
어요? 또 지난번 신문에서 봤는데 수재의연금 30만원이 뭐예요?"
내가 대답 할 틈도 안주고 쏘아 대자 빨간 스웨터가 눈이 부신, 옆에 앉은 그의
친구 장의식씨가 놀라서 나한테 줄줄이 얘기를한다. "용필이는 돈을 몰라요. 많
이 벌었죠. 그래도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제일 먼저 지체부자유돕기 공연, 소년
소녀 가장돕기 공연을 벌인 사람이예요. 또 독립기념관 건립기금 1억등 말도 다
못하죠." 그러자 용필씨가 입을 열더니 좀 더 솔직하고 현실적인 얘길 했다.
"물난리를 당한 사람들, 안타깝지만 결국엔 그 당사자들의 현실이고 운명입니다
내 능력 닿는 데까지 돕는 것이지 조용필이란 이름 석자때문에 무리하게 어거지
부리기는 싫을 뿐이죠. 내 형편 내 상황대로예요."
그가 89년도 우리나라 연예인 소득 랭킹 1위였다. 그러나 세무서 자료로 알아봤
더니 국내에서 번 돈은 작년 한해동안 여섯번 나간 티비출연료로 2 백만원이 조
금 안 되는 액수였다. 그는 야간 업소 출연도 안 한다. 맥콜이나 과자류등의 CF
도 끝났다. 일체 CF출연도 삼가겠단다. 특히 야간 업소의 출연은 가슴과 혼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데 술잔 부딪히며 '야! 너 그거 언제 갚을래? ' 하며 얘기
하는 그런 관중 앞에선 죽어도 노좋아서, 아니면 안경 자랑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다.
자기의 쇼, 자기 자신을 위
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뿐이다. 아! 이래서 조용필이구나 하고 혀를 찬적이 있
었다. 방송이 끝나고 출연자 모두가 사람발자국 소리에 미꾸라지 모랫속으로 대
가리 파묻고 사라지듯 어디론가 다 없어졌을 때,그는 카메라맨, 조명기사, 오디
오맨, 소품 아저씨들에게까지 일일이 '감사합니다' 고 인사했다.
그의 연예인 철학은 이렇다. "우리는 대중의 스타지 우리끼리 누가 왕초구 누가
스탑니까? 우리는 모두가 아티스트들이고 한 배를 탄 선원입니다." 그러면서 요
즘 후배들이 맘에 안든다며 약간 분개했다.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선배님은 하느님이었습니다. 후배 하나는 몇 년 전만해
도 내가 어려워서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분장실 벽만 보더니, 얼마 전에는 어
깨힘 딱 주고 앉아서 눈인사 합디다. 이런거 정말 싫어요. "
그도 나도 취해 가고 있었다. 그는 10대에는 꿈, 20대에는 시련, 30대에는 도전
40대는 경험이었다고 한다. 인생살이 실수, 실수, 그리고 후회뿐이라고 했다
"결혼 하셔 야죠? 어떤 여자가 좋아요?"
내가 말머리를 돌렸다.
"사람의 일은 자연 발생적이죠. 나 자신도 모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느 여
자와 사랑을 할는지... 결혼요? 이 나이에 결혼생각 없습니다. 인생살이를 여섯
시간이라 잡아 놓으면 이제 두어 시간 남았습니다. 이젠 골프도 시작했고 올 겨
울엔 스키를 배울까 합니다. 운동을 하는 건 더 건강해져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
서가 아니라 늘그막에 부대끼기 싫어서죠. 음악에 미쳐 못한 공부 좀 하려고 서
울에 있는 시간동안 중앙대 대학원엘 나갑니다. "
그가 빈 담배 갑을 구기자 저 멀리 앉아 있던 비서 한 사람이 재빠르게 새 담배
를 갖다 놓는다. 잠시 우리는 우리끼리 어르고 뺨치고 서로 좋은 얘길 했다. 갑
자기 그가 집에 전화를 해 내년에 취입할 노래 테입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테입
을 갖고 왔을 땐 밤 12시가 다 됐다. 그 노랠 심야에 듣겠다고 우리 일행 네 명
은 꿍짝이 맞아 스피커 11개 짜리 오디오가 있는 우리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는 조금 휘청거렸다. 소파가 불편했던지 거실 바닥에 내려 앉았다.
'고향의 향기' 라는 그의 새 노래가 거실의 구석구석 어두운 곳에서부터 흘러나
왔다. 그의 얼굴도 어두워져갔다. 제가 부르는 노래에 제 설움에 빠진 아시아의
대 스타. 거친 머리카락에 윤기 없는 피부의 마흔 한살 남자. 그의 눈가에 얼핏
번지는 눈물을 훔쳐 보고선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다시 맥주병 마개를 땄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혼직후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직접 썼다고 한다. 비
행기 안에서 어느 일본소설을 읽는데 소설의 내용은 어느 일본의 젊은이가 야망
을 품고 도시로 올라와 동경의 빌딩 숲속을 헤매며 온갖 고생 끝에 성공 한다는
내용.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뉴욕으로 미국 연예계의 어려운고지 전쟁
터로 나가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흡사한 소설 속의 주인공을 생각하며, 또 장
마 통에 맘놓고비맞은 이불 보따리처럼 무겁고 축축했던 그때의 심정으로 그 자
리에서 바로 쓴 가사 라고 했다. 우리는 테입을 두번 세번 되돌려 들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한편의 드라마가 내 눈앞에 보인다.
그의 친구 장의식씨가 내일, 아니 오늘 새벽 골프 가야하니 그만 일어서자고 부
추긴다. 그가 이미 취한 목소리로 버틴다.
"아이, 우리 엄마가 자꾸 나가 놀으래애"
나는 안다. 팔순 넘은 노모에게 마흔 넘은 아들이 방구석에 구부러져 있으면 싫
다. 나가 놀아야 손주라도 한번 안아 볼 수 있으니... 그는 내게
"아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한다. "왜? 외국 갔다 오다가 장난감
사올려구요? 딸? 아니면 아들? "
했더니, 그는
"한 일곱 여덟살 된, 이왕이면 아들, 나 내 아들이란 말을 너무나 하고 싶어요"
허리춤 벨트 구멍 조이며 일어나는 그에게 나는 하고 싶은 말 안할 수가 없었다
"용필씨는 한강이나 현해탄에서 놀 송사리가 아니예요. 이젠 태평양으로 나가야
죠. 미국, 유럽 무대 강타해봐요. 그만한 재목이란걸 팬들도 알아 줄거예요. 수
출 많이 해 훈장타는 기업들 못지않게 용필씨도 해외에서 달러, 엔화 많이 벌어
다 노후에 학교 하나 세워, 부모 없는 우리형제들 대통령도 기르고 가수도 키우
고 시인도 만들어 봅시다. 용필씬 아시아의 스타로 끝나기엔 재목이 너무 커요"
그는 취했다. 친구가 허릴 끼자 그는
"아이 놔아, 우리 엄마가 자꾸 나가 놀으래"
하더니 밤늦게 죄송하다며 온 식구들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 그는 새벽 이슬 맞
으며 돌아갔다. 나는 서재로 돌아와 그의 발표안된 노래 테입을 다시 한번 들으
며 험난하고 고달픈 '딴따라'들의 삶을 생각했다.
그 날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 세계여성 '90년 11월호 중에서 -
[기사] 김수미가 쓰는 사람 이야기 [1990年]
20 여년 가요 생활로 세계 무대를 넘보는 아시아 정상의 가수이면서, 또한 그는
이혼에 이은 의사부인과의 스캔들로 차가운 눈초리의 궁지에 몰렸었다. 결국 그
가 돌아갈 곳은 노래를 부르는 무대뿐.
최근 '추억속의 재회'로 조심스레 팬들을 찾고 있는 조용필. 제 노래에 설움 겨
워하는 마흔 한살의 꿈과 회한을 재치 탤런트 김수미가 새벽녘까지 술잔을 나누
며 들어보았다.
내가 연예기자도 아니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같은 동료 얘길 하다 보니 일반 대
중들이 보는 것과는 좀 다른 색깔로 보게된다. 좀더 인간적이고 순수한, 말하자
면 화장하기 전의 피부색깔을 솔직하게 그대로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연예인들
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대중들은 참 예민하면서도 인정이 없고 모두들 엄격한 법
관이다. 냉철한 교통순찰대 경찰처럼 가차 없이 딱지를 뗀다. 내 생각도 이렇지
만 철학 박사인 황필호교수도 어떤 곳에 이런 글을 쓰신걸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대중들은 연예계 스타들을 더 이상 영웅으로 만들지 못한다.' 라고.
조용필이 제 아무리 노랠 잘 해도 그의 수많은 팬들이 없었더라면 오늘 그가 아
시아의 정상에 우뚝 서진 못한다. 다만 우리는, 70세의 피카소가 열여섯살의 어
린 소녀와 맺은 불륜은 환상적인 사랑이라니 격찬해주면서 봉천동 산동네의 6순
넘은 김영감이 별 다방의 미스리에게 안달하면 노망이니 패륜이니 하는 말로 욕
하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엘리자베스테일러가 일곱번째 결혼을 할
때 우리네 많은 사람들은 '참, 난 여자야, 이번엔 몇캐럿짜리 다이어를 받았나'
하며 부러워하고 관대해진다. 물론 거기엔 '외국 거'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들도 문제되겠지만 앞서 얘기한 '전라도 시리즈'처럼 이왕이면 우
리 것을 감싸 주고 우리네 연예인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좀 관대 하게 이해해 줄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게 한다.
우리는, 그러나 연예인, 공인이기 이전에 밥 먹고 똥싸는 인간이다. 샐러리맨들
이 직장에서 얻는 것과 같은 온갖 스트레스, 또는 많은 사람들이 겪고있는 가정
불화 앞에서도 공인 이기에 아파도 신음 소리 크게 못내고 앓는다. 요즘 티비에
비친 조용필의 얼굴은 말이 아니다. 입 언저리와 인중에 양쪽 으로 깊은 주름이
갔고 피부도 좀 처져있다. 가수 생활 25년의 모습이다. 잠깐씩 스쳐가는 방송국
에서 짧은 인사만 나누었을 뿐 맥주잔을 놓고 마주 앉은 것이 몇 년만의 일이다
워낙 바쁜 탓이다. 약속시간 전 그는 생방송 '화요일에 만나요'에서 회색 빛 양
복을 입었던데 방송이 끝난 후 밤색 잠바로 갈아입고 나왔다.
여자를 보면 참 수줍어한다. 소주는 끊었노라며 맥주를 시켰다. 내가 연예 기자
가 아니라서 참 편한 모양이다. 우리는 맥주를 두어병 비우면서 부터 정월달 마
당에 묻어놓은 김장김치 맛처럼 푹 익은 인간적인 얘기로 진입했다.
"내가 용필씨 팬인 만큼 국내 무대말고 해외무대도 웬만큼은 알아요. 6천석이나
되는 LA 슈라인 오라토리움 무대에서 해마다 한 번정도 공연하고, 역대 1천만명
이 관람 했다는 디즈니랜드에서의 공연, 그리고 카네기홀 공연, 링컨 센터 공연
그땐 나도 미국여행 중이라 그 공연 봤죠. 그리고 일본가수도 서기 힘들다는 일
본의 무도관 공연, 일본 전역 순회공연... 언젠가 우리집에서 티비를 보는데 일
본티비의 'TV 홍백전'에 나와 인터뷰를 하더라구요. 그때 이미 일본에서 레코드
판매 순위가 3위에 올랐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번 돈 다 어쩌구 돈 문제가 나왔
어요? 또 지난번 신문에서 봤는데 수재의연금 30만원이 뭐예요?"
내가 대답 할 틈도 안주고 쏘아 대자 빨간 스웨터가 눈이 부신, 옆에 앉은 그의
친구 장의식씨가 놀라서 나한테 줄줄이 얘기를한다. "용필이는 돈을 몰라요. 많
이 벌었죠. 그래도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제일 먼저 지체부자유돕기 공연, 소년
소녀 가장돕기 공연을 벌인 사람이예요. 또 독립기념관 건립기금 1억등 말도 다
못하죠." 그러자 용필씨가 입을 열더니 좀 더 솔직하고 현실적인 얘길 했다.
"물난리를 당한 사람들, 안타깝지만 결국엔 그 당사자들의 현실이고 운명입니다
내 능력 닿는 데까지 돕는 것이지 조용필이란 이름 석자때문에 무리하게 어거지
부리기는 싫을 뿐이죠. 내 형편 내 상황대로예요."
그가 89년도 우리나라 연예인 소득 랭킹 1위였다. 그러나 세무서 자료로 알아봤
더니 국내에서 번 돈은 작년 한해동안 여섯번 나간 티비출연료로 2 백만원이 조
금 안 되는 액수였다. 그는 야간 업소 출연도 안 한다. 맥콜이나 과자류등의 CF
도 끝났다. 일체 CF출연도 삼가겠단다. 특히 야간 업소의 출연은 가슴과 혼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데 술잔 부딪히며 '야! 너 그거 언제 갚을래? ' 하며 얘기
하는 그런 관중 앞에선 죽어도 노좋아서, 아니면 안경 자랑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다.
자기의 쇼, 자기 자신을 위
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뿐이다. 아! 이래서 조용필이구나 하고 혀를 찬적이 있
었다. 방송이 끝나고 출연자 모두가 사람발자국 소리에 미꾸라지 모랫속으로 대
가리 파묻고 사라지듯 어디론가 다 없어졌을 때,그는 카메라맨, 조명기사, 오디
오맨, 소품 아저씨들에게까지 일일이 '감사합니다' 고 인사했다.
그의 연예인 철학은 이렇다. "우리는 대중의 스타지 우리끼리 누가 왕초구 누가
스탑니까? 우리는 모두가 아티스트들이고 한 배를 탄 선원입니다." 그러면서 요
즘 후배들이 맘에 안든다며 약간 분개했다.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선배님은 하느님이었습니다. 후배 하나는 몇 년 전만해
도 내가 어려워서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분장실 벽만 보더니, 얼마 전에는 어
깨힘 딱 주고 앉아서 눈인사 합디다. 이런거 정말 싫어요. "
그도 나도 취해 가고 있었다. 그는 10대에는 꿈, 20대에는 시련, 30대에는 도전
40대는 경험이었다고 한다. 인생살이 실수, 실수, 그리고 후회뿐이라고 했다
"결혼 하셔 야죠? 어떤 여자가 좋아요?"
내가 말머리를 돌렸다.
"사람의 일은 자연 발생적이죠. 나 자신도 모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느 여
자와 사랑을 할는지... 결혼요? 이 나이에 결혼생각 없습니다. 인생살이를 여섯
시간이라 잡아 놓으면 이제 두어 시간 남았습니다. 이젠 골프도 시작했고 올 겨
울엔 스키를 배울까 합니다. 운동을 하는 건 더 건강해져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
서가 아니라 늘그막에 부대끼기 싫어서죠. 음악에 미쳐 못한 공부 좀 하려고 서
울에 있는 시간동안 중앙대 대학원엘 나갑니다. "
그가 빈 담배 갑을 구기자 저 멀리 앉아 있던 비서 한 사람이 재빠르게 새 담배
를 갖다 놓는다. 잠시 우리는 우리끼리 어르고 뺨치고 서로 좋은 얘길 했다. 갑
자기 그가 집에 전화를 해 내년에 취입할 노래 테입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테입
을 갖고 왔을 땐 밤 12시가 다 됐다. 그 노랠 심야에 듣겠다고 우리 일행 네 명
은 꿍짝이 맞아 스피커 11개 짜리 오디오가 있는 우리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는 조금 휘청거렸다. 소파가 불편했던지 거실 바닥에 내려 앉았다.
'고향의 향기' 라는 그의 새 노래가 거실의 구석구석 어두운 곳에서부터 흘러나
왔다. 그의 얼굴도 어두워져갔다. 제가 부르는 노래에 제 설움에 빠진 아시아의
대 스타. 거친 머리카락에 윤기 없는 피부의 마흔 한살 남자. 그의 눈가에 얼핏
번지는 눈물을 훔쳐 보고선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다시 맥주병 마개를 땄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혼직후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직접 썼다고 한다. 비
행기 안에서 어느 일본소설을 읽는데 소설의 내용은 어느 일본의 젊은이가 야망
을 품고 도시로 올라와 동경의 빌딩 숲속을 헤매며 온갖 고생 끝에 성공 한다는
내용.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뉴욕으로 미국 연예계의 어려운고지 전쟁
터로 나가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흡사한 소설 속의 주인공을 생각하며, 또 장
마 통에 맘놓고비맞은 이불 보따리처럼 무겁고 축축했던 그때의 심정으로 그 자
리에서 바로 쓴 가사 라고 했다. 우리는 테입을 두번 세번 되돌려 들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한편의 드라마가 내 눈앞에 보인다.
그의 친구 장의식씨가 내일, 아니 오늘 새벽 골프 가야하니 그만 일어서자고 부
추긴다. 그가 이미 취한 목소리로 버틴다.
"아이, 우리 엄마가 자꾸 나가 놀으래애"
나는 안다. 팔순 넘은 노모에게 마흔 넘은 아들이 방구석에 구부러져 있으면 싫
다. 나가 놀아야 손주라도 한번 안아 볼 수 있으니... 그는 내게
"아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한다. "왜? 외국 갔다 오다가 장난감
사올려구요? 딸? 아니면 아들? "
했더니, 그는
"한 일곱 여덟살 된, 이왕이면 아들, 나 내 아들이란 말을 너무나 하고 싶어요"
허리춤 벨트 구멍 조이며 일어나는 그에게 나는 하고 싶은 말 안할 수가 없었다
"용필씨는 한강이나 현해탄에서 놀 송사리가 아니예요. 이젠 태평양으로 나가야
죠. 미국, 유럽 무대 강타해봐요. 그만한 재목이란걸 팬들도 알아 줄거예요. 수
출 많이 해 훈장타는 기업들 못지않게 용필씨도 해외에서 달러, 엔화 많이 벌어
다 노후에 학교 하나 세워, 부모 없는 우리형제들 대통령도 기르고 가수도 키우
고 시인도 만들어 봅시다. 용필씬 아시아의 스타로 끝나기엔 재목이 너무 커요"
그는 취했다. 친구가 허릴 끼자 그는
"아이 놔아, 우리 엄마가 자꾸 나가 놀으래"
하더니 밤늦게 죄송하다며 온 식구들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 그는 새벽 이슬 맞
으며 돌아갔다. 나는 서재로 돌아와 그의 발표안된 노래 테입을 다시 한번 들으
며 험난하고 고달픈 '딴따라'들의 삶을 생각했다.
그 날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 세계여성 '90년 11월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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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4 | 1099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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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3 | 115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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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3 | 93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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