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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 이미 읽어보신 분들 많으실 겁니다.( 미세 게시판에는 2001년 9월에 탈인님이 올리셨군요. 그 글을 다시 퍼서 올립니다.
[리뷰/대담] 조용필 VS 강헌
1997-07-21~23
歌王 조용필
피와 땀이 빚어낸 뜨거운 연대
강 헌 : 당신은 현대 한국 대중음악사 그 자체이다. 드라마틱한 29년의 음악생활을 통해 당신은 동요에서 민요까지, 발라드에서 퓨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대중 음악의 주류 장르의 밑그림을 설계했고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 서구 대중음악에 대한 한국 대중음악의 주도권을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러나 90년대가 열리면서 당신과 당신의 시대가 쌓은 아성은 서서히 무너졌고 새로운 10대는 새로운 우상을 향해 달려 나갔다. 12집 이후 당신은 트로트가 아닌 새로운 성인 취향의 대중음악(Adult Comtemporary)를 지속적으로 개척했지만 이 땅의 성인 계층은 음반 시장을 떠난지 오래였음을 불행하게 증명해 보였다. 특히 15집 이후 이어진 3년간의 침묵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조용필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성급하게 판정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당신은 전시대의 존중할 만한 가치들이 모두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세기말에 신작을 안고 돌아와 80년대의 전성기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성공을 거두었고 자신의 음악적 신념이 헛되지 않았음을 시장의 한가운데서 스스로 증명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3년만의 컴백 앨범인 《eternally》의 〈바람의 노래〉에서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라는, 당신의 오랜 파트너중의 한 명인 작사가 김순곤의 노랫말은 더욱 절실하게 들린다. 당신에게 90년대는 어떤 시간이었고 어떤 시간일 것인가?
조용필 : 아직 우리가 선진국이 아니기 때문에....현대사를 한국전쟁 이후로 보자면 외국 것을 받아들여서 이룬 대중문화의 연혁이 너무 짧고 전체 국민이 문화를 즐기는 풍요로운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수용자 문화가 여전히 허약하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전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TV는 외국의 문화를 직수입하여 소개했고 앞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사전 심의까지 철폐되는 등 젊은이들은 맘대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뿐인가? 장래 희망이 연예인이라는 어린이들이 날로 늘어가고 그 꿈을 위해 유학까지 떠난다.
14집을 발표한 92년 가을 이미 그때는 랩 댄스음악이 모든 것을 휩쓸며 세대교체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갈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한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고독한 러너〉를 쓰면서 겁이 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세계적인 스타도 밀려나는 릴레이 게임이며 스타는 언제나 신인한테 죽는 법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내가 잘한다면 남을 수는 있지 않겠는가, 자기 하기나름이다. 무서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말자.....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강 헌 :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오빠부대의 원조'라거나 '국민가수'라는 보수적인 슈퍼스타의 초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의 저 광활한 음악적 스펙트럼의 뿌리가 록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숱한 앨범과 라이브에서 그것을 증명해왔고, 30주년을 눈앞에 두고 발표한 이번의 신작에서도 〈그대를 사랑해〉와 〈바람의 노래〉,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조용필 특유의 록의 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스타일은 댄스비트에 중독된 90년대 수용자들이 등을 돌린 불운한 문법이 아닌가? 특히 지난 94년 15집의 참패 이후 지천명의 고개를 눈앞에 두고 16집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관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앨범은 트로트가 주를 이룰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조용필 : 나는 록이 좋아서 목소리를 바꾼 사람이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60년대말의 내 목소리는 단순한 미성에 불과했다. 오늘 위대한 탄생과 연습하는데 록의 탁성이 잘 나와서 기분이 좋다. 내년이면 30년, 이제 록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아닌게 아니라 내 주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트로트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고 개중에는 신경질까지 내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고 싶지 않았다. 내년, 98년이면 30년인데, 내가 트로트로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30주년을 눈앞에 두고 나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2,30대 감각의 여러 장르에다 그동안 많이 써두었던 4,50대 취향의 두곡 〈애상〉과 〈일몰〉을 선택했다. 이 두 곡은 성인 취향이 꼭 트로트가 아니라는 것과 트로트라고 해서 모든 것이 뽕짝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강 헌 : 그렇다면 재즈는 어떤가? 당신의 오랜 이력중에 지금은 프리재즈 퍼커션의 달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김대환과 70년대 초에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조용필 : 재즈는 아직도 잘 모른다. 김트리오때 맛도 모르면서 어깨 너머로 조금 배웠다고 할까? 입문도 제대로 못했지만 강태환의 색소폰은 사랑한다. 옛날의 밤무대
밴드는 여러 가지를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쫓겨나니까... 낮에는 조선호텔의 음악살롱,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에서 하루 종일 연주하고 연습했다. 70년대 초반엔 지미 헨드릭스의 디스토션 사운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난 뭘 치든 차분한 것보다 폭발적인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강 헌 : 당신의 음악 인생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밴드'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밴드로 음악을 시작했고 70년대의 대부분의 시간을 업소에서 보냈다. 그리고 당신이 주류의 제왕으로 부상한 80년대부터는 위대한 탄생이 당신과 동행해 왔다. 하지만 80년대의 개방과 함께 한국의
밴드 문화는 잠시 퇴보했다가 언더그라운드의 메탈 붐과 힘입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고, 90년대 들어서는 댄스그룹의 선풍에 밀려 종적을 감추는 듯 하다가 최근의 클럽 붐에 힘입어 다시 확산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넥스트 정도를 제외하면 록 밴드는 아직 주류 시장에 영향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신에게 밴드는 어떤 의미인가?
조용필 : 음악의 테크닉은 결코 악보로만 표현할 수 없다. 뮤지션의 감성과 감정이 부딪칠 때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기만의 사운드를 가지고 가려면 밴드는 필연적이다. 신해철의 경우도 아마 밴드를 꾸리지 않았으면 자신의 음악을 지탱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68년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부터 그들의 기타리스트였고 만들어온 곡들이 또한 밴드의 음악이다. 조용필 하면 위대한 탄생이 떠오르는 것은 나의 음악과 나의 밴드는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 헌 : 무엇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당신을 밴드로 이끌었는가? 사실 한국에서의 밴드는 불행과 일탈의 낙인 같은 것이 아니었는가? 이런 환경에서 밴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성공 이전에 존속하기조차 어렵다. 밑바닥에서 최정상에서 주유하면서 확립된 밴드에 대한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조용필 : 좋으니까! 나는 젊었고 젊음은 좋아하면 하는 것이다. 60년대에 밴드라면 불량배나 양아치를 의미했다. 그래서 밴드라는 말 대신에 그룹사운드나 보컬같은 말로 대신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밴드를 통해 세계적인 뮤지션이 되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우해 무조건 연습을 많이 했다. 매일을 거르지 않고. 밴드는 끝없는 훈련이다. 그것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일어나면 연습장(바로 업소)으로 출근했고, 흔히 나의 무명시절이라고 부르는 70년대 전반의 조용필과 그림자 시절에도 나는 업소에서 최고의 개런티를 받았다. 그리고 돈을 벌면 몽땅 악기와 밴드에 재투자했다. 밴드를 하면서 많이 벌겠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돈은 나중에 버는 것이다. 밴드의 구성원들이 자기 파트에만 힘을 쏟는다면 꼭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한 사람만 잘해서는 안 된다. 하다보면 뒤쳐지거나 게을러지는 이가 꼭 있다. 그럴 때 나는 '빳다'도 불사했다. 밴드는 멈추는 순간 죽는다. 잘해야 될 뿐 아니라 남들이 안 하는 새로운 레파토리를 언제나 만들어야 한다.
강 헌 : 그렇다면 슈퍼밴드의 리더 혹은 아이돌스타로서가 아니라 밴드의 기타리스트 출신으로서 밴드의 구심인 기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당신의 음악은 전체적인 밸런스와 하모니를 중시한다.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트랙에서 조차도 화려한 기타 플레이는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조용필 :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면, 멋만 부리려고 하면 안 된다. 손가락 빨리 돌리는 핑거링으론 기타가 아닌 것이다. 기타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지미 헨드릭스는 말할 것도 없고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나 비틀즈의 조지 헤리슨의 기타는 노래 이상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준다. 그도 아니면 에릭 칼멘의 〈All by myself〉의 기타라도 한번 유심히 들어보라. 기타가 시간 때우기나 기술 자랑이 된다면 그건 아마추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이 땅의 넘버원 기타리스트는 김홍탁이다. 음악은 수학이다. 대책없이 하는 연주를 나는 가장 싫어한다.
강 헌 : 당신이 음악을 시작하던 1968년, 미8군 무대를 거점으로 했던 신중현 사단의 펄시스터즈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고 대학가와 다운타운의 통기타 홀에선 트윈 폴리오와 서유석같은 인물들이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메고 포크의 첫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60년대 서구의 자유주의 문화가 상륙하던 그때 당신은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록 밴드에 청춘을 거는 모험을 감행한다. 무엇이 당신을 기타로 이끌었는가? 그리고 보컬을 맡게 되는 과정을 말해달라.
조용필 : 1968년, 내 나이 열여덟 살, 국민학교 중학교를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공부했다. 그때는 당연히 팝송 일색이었고 〈밤하늘의 트럼펫〉에 감동하기도 했다. 아주 어렸을 때 경기도 화성의 이웃 마을에서 들려오던 하모니카 소리에 반해서 하모니카를 배웠고 또 어느 날은 〈G선상의 아리아〉를 듣고 바이올린을 접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벤처스의 기타 연주와 비틀스의 음악이었다. 나중에 일본에 가보니 거기도 마찬가지로 이 둘의 인기는 여전함을 피부로 느꼈다. 고등학교(경동고)를 마치고 무작정 밴드를 만들어 용주골 기지촌으로 갔지만 나의 첫 밴드라고 할 수 있는 애트킨즈는 3일 만에 끝났고 그 뒤의 파이브 핑거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리곤 고향 집으로 붙잡혀 가서 6개월간 입시공부를 강요당하다가 친구들이 만든 경기도 광주의 이름도 없던 밴드에 합류했다. 기타를 치던 내가 보컬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부수적인 것인데 , 왜냐하면 베이스와 보컬을 맡던 친구가 입대했기 때문이다. 이 이름도 없던 팀에서 71년인가 〈Lead Me On〉을 처음으로 녹음했다. 물론 보컬과 연주가 한 번에 가는 동시녹음으로 말이다.
강 헌 : 로큰롤이 당신의 음악 영토의 드넓은 자양분이라면 진성과 가성, 탁성과 청성을 오가는 카리스마 충만한 당신의 보컬은 그 영토를 빛낸 꽃과 같다. 경쟁자를 허용하지 않는 당신의 보컬이 진정으로 빛나는 것은 그것이 그저 타고난 재능이라거나 시류와 맞아떨어진 사운드 트렌드가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가 독창적으로 제련된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80년 〈창밖의 여자〉, 그리고 91년 〈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보컬은 끝없이 개화한다. 특히 1980년의 컴백에 성공했을 때 70년대 후반의 활동 금지 기간 동안 뼈를 깎는 독공(?)을 거듭했다는 신화아닌 신화가 퍼지기도 했던 당신만의 보컬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조용필 : 벤처스와 비틀스에 매료되어서 음악을 시작했지만 미8군을 전전하면서 많은 음악을 접했다. 주크박스에선 흑인 음악이 많이 나왔는데 슈프림스나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같은 소울과 리듬앤블루스를 만날 수 있었고 당시 미국 백인 음악을 대표했던 몽키스와 C.C.R.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도 많은 이들의 노래를 불렀다. 스티비 원더, 로드 스튜어드, 에어로 스미스, 비지스 등등등이 다양한 사람들의 창법을 흉내내면서 내 것으로 포섭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서가 서서히 완성되지않았나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훨씬 뒤 내가 활동을 금지당했던 시절에 만났다. 깊이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고 고작해야 홍보전의 구걸하는 장면 정도인데, 악보로 옮기며 공부하다가 그 창법의 고-중-저 바이브레이션에 깜짝 놀랐다. 보컬을 본능적으로 타고났다는 흑인 음악도 대개 선율위에서 바이브레이션을 하는 것에 불과한데 우리의 판소리는 팝 음악하고는 갈래가 다른 리듬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뒤흔들어버리지 않는가? 여기서 배운 창법과 꽹과리의 리듬감을 실현해 본 노래가 82년 4집에 수록된 〈자존심〉이다.
'당신은 저~~~~'하고 떠는 국악적인 프레이즈에 펑키한 서구적 후렴부인 '이 마음은 사랑일까 착각일까?' 결합시켜 본 것이다.
강 헌 :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면서 당신은 인기의 정상에 올라섰지만 그 성공은 이듬해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권하의 70년대 후반을 음악활동을 금지당한 채 당신은 밑바닥의 어둠속으로 추락한다. 많은 음악인들이 좌절했고 이장희와 한 대수처럼 아예 이 땅을 떠나기도 했으며 나아가 음악 생명조차 끝나 버리기도 한 유신 시대였다. 대마초 파동의 전말을 알고 싶다.
조용필 : 집 나온 사람이 어딜 못 갔겠냐마는 부산은 내가 잊을 수 없고 또 사랑하는 낭만의 도시이다. 바다와 항구와 특히 좋아하는 생선이 있으니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날 부산 출신 가수라고 생각하고 있고 유명한 가수를 별로 배출하지 못한 부산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고향사람으로 맞아준다. 김트리오 시절 처음 부산에 공연을 한 후로 그림자 시절에 이르도록 매년 몇 개월씩 부산의 무대에 섰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76년에 취입하기 몇 년전에 이미 통기타 반주로 한번 취입했던 곡이다. 엽전들과 사랑과 평화를 거쳤던 이남이와 같이 녹음했는데 뽕짝으로 불러달라는 제작자의 주문에 창피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다가 〈너무 짧아요〉를 타이틀로 했던 76년 판을 녹음하면서 이 노래를 다시 밴드 스타일로 녹음했는데, 히트라는 것은 만든 사람과는 다른 법이어서 이게 그만 터져버렸다. 그야말로 우연의 히트였다. 그러나 그히트는 나에게 엄청난 불행을 몰고 왔다. 이듬해 대마초 사범으로 걸린 것이다. 너무 약이 올라서 한이 맺혔다. 자기 아들이 대마초를 했다고 그렇게 엄청나게 문화를 탄압한 독재자가 세상에 어디 있나? 나는 그때도 음악을 천직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다. 당시 흔하게 유통되었던 대마초는 불법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그 사건이 있기 몇 년전에 업소에서 한 번 접했다가 얼굴에 심한 알러지가 일어서 기겁을 하고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건 남산의 지하 취조실에선 아무런 참작이 되지 않는다. 무조건 50명씩 불어야 했으니까. 주전자 고문도 치가 떨리지만 붙들려 가자마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벽틈 사이로 밀어 놓고는 무시무시한 각목으로 사정없이 찔러대는데....거기엔 인간이 없었다.
그렇게 당한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고 이 땅을 뜬 사람도 적지 않은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국으로 가기 위해 선배가 경영하던 회사에 비서로 이름만 올려 놓고 갑근세를 내기도 했고(그래야 여권이 나왔으니까), 그도 저도 여의치 않자 밀항까지 생각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시대이다.
강 헌 : 조용필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우리의 뇌리에서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자면 만약 그 파동이 없었더라면 그 활동 금지 기간 중의 절치부심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당신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스매시 히트 이후 트로트와 록 비트를 결합한 그런 스타일의 노래가 역시 야간업소의 밴드 출신의 보컬리스트에 의해 숱하게 쏟아졌고 포크와 로큰롤이 거세당한 70년대 후반의 한국 대중음악을 규정했다. 그 복고의 조류 속에 당신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당시 대중의 보수적인 감수성이나 음반사의 일방적인 요구에 밀려 매너리즘에 빠져버릴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비록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황선우 작사.곡) 당시의 당신이 선호한 것도 아니지만 (A면 첫번째 머릿곡은 당신의 곡인 〈너무 짧아요〉인 것만 보아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탄압에 의한 청년 문화의 몰락과 기성세대 취향의 귀환이라는 당시 음악 문화의 한 상징적인 노래이며 나아가 일본이 꿈꾸는 대동아공영의 이데올로기를 포섭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있을 정도였다.
조용필 : 대마초 파동이 없었더라면 80년대의 나는 없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정말이지 애증이 교차하는 노래이다. 그땐 이 노래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디 공연가면 전부 외국 노래만 불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내 운명을 바꾸어 버린 노래가 아닌가? 3년이 지나 박대통령이 죽고 다시 컴백했을 때 그때서야 이 노래가 좋아졌다. 왜? 미우나 고우나 내 데뷔곡이니까.
이 노래와 일본의 대동아공영을 연결시키는 발상은 한마디로 매스컴이 작위적으로 몰아간 왜곡된 의견이다. 정작 일본에 가봐도 대중들은 국가와 이념을 두고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노래는 재일동포 모국 방문단이 오기 훨씬 전에 킹박의 동생인 박성철과 그림자의 멤버들이 새벽 다방을 돌면서 판을 돌렸고, 일반 대중들에게 퍼지기 전에 대학가와 다운타운의 음악다방 및 고고장에서 이미 유명해진 곡이다. 부산에서부터 대중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도 부산에 3일 초청공연 간 김에 50여 군데에 음반을 돌리면서부터이고, 일본에서 또한 몇 년에 걸쳐 언더그라운드에서 알려지다 음반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이 노래가 먹힌 이유는 2/4박자의 전형적인 뽕작이 아닌 4/4박자의 고고 리듬에 있다고 본다.
이미 그때 일본에서도 2/4의 엔카는 구식이라고 별로 팔리지 않기 시작할 때였다.
강 헌 : 그리하여 마침내 80년대가 열리고 광주의 비극과 더불어 조용필 1인 제국시대가 열린다. 당신이 자신의 디스크그라피에서 데뷔앨범으로 간주하는 1980년의 앨범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즉 앞면의 머릿곡인 〈창밖의 여자〉와 뒷면의 머릿곡인 〈단발머리〉는 80년대 한국의 주류 대중음악이 어떤 질서로 흘러나갈 것인지를 그대로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앨범은 한해를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음반 시장의 밀리언 시대를 열어 젖혔고 드디어 10대들이 음악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예광탄이기도 했다. 과연 이 앨범의 무엇이 한 나라의 음악 질서를 재편시켰다고 생각하는가?
조용필 : 1980년 그때, 나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 대중들의 깊은 마음속엔 형언하지 못할 숱한 갈망들이 있었다.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는 모두 70의 막바지에 만든 곡이다. 전자가 과거와 기존의 세대들의 갈망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이제부터 시작하는 미래와 다음 세대의 갈망을 담으려고 했다. 〈창밖의 여자〉를 그래픽으로 보자. 이 노래는 세 개의 산봉우리의 굴곡이 있다. 첫번째 산을 넘을때 이것이 정상인가 하면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면 험난한 산이 또 하나 맞아 선다. 이에 비하면 〈단발머리〉는 하나로 가는 음악이다. 그러나 그냥 가는데 나무가 무수히 많다. 나는 16마디에서 A-B-A로 반복하는 당시 우리 대중음악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한 테마에서 코드만 바뀌어 진행하는 그런 시도들을 자유롭게 하고 싶었다. 내가 첫 앨범으로 간주하는 80년 앨범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원하고 있었음을 절감할 수 있었고, 이제는 마음대로 만들고 펼쳐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80년대초만 해도 생악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나는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악이나 〈단발머리〉에서 사용한 메이저 세븐같은 당시로선 낯선 코드를 과감하게 썼다. 하지만 그것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말에 이르는 10년간의 음악 훈련의 축적물일 뿐이다. 내 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의 이면엔 음악까지 장악하고 있는 통행금지 시대에 대한 분노가 암시적으로 들어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이 갇혀 있었다. 로큰롤도 몰래 듣다시피 했던 그때.
강 헌 : 그리고 그해 가을 '미국 카네기 홀 공연 기념'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두번째 앨범이 발표되었고 전작의 여세를 몰아 이 앨범 또한 성공행진을 이어가지만 어딘가 모르게 졸속의 냄새가 짙었다. 그러나 이듬해 나온 세 번째 앨범은 그야말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사자후와 같은 앨범으로 조용필 1인제국의 결정적인 방점을 찍은 앨범이다. 이 앨범은 동요 (〈오빠생각〉)와 민요(〈강원도 아리랑〉)를 아우르는 한편으로 〈미워 미워 미워〉(정풍송 작곡)와 당신이 작곡한 〈일편단심 민들레야〉같은 트로트 넘버가 전반부에 포진하고 〈여와 남〉과 〈고추잠자리〉같은 '조용필 류'라고 불러 마땅한 록 넘버를 후반부에 배치하여 갈라지는 모든 세대의 기호를 통합하려는 야심으로 불타는 앨범이다. 하지만 트로트 레퍼토리는 아무래도 어른 구매자를 겨냥한 음반사의 압력 때문이 아닌가? 트로트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고 싶다. 하지만 밴드의 연주와 테이프 이펙트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고추잠자리〉는 특정 세대의 취향을 뛰어넘어 모든 세대에게 다가가 80년대 최초의 록 넘버가 아닐까 한다. 하나의 앨범안에 트로트와 동행하던 이 시점 당신이 주장하고 싶었던 당신의 록의 슬로건은?
조용필 : 모든 것이 갑자기 바빠졌다. 진정한 의미의 2집 앨범은 내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옳다. 지금도 뭘 녹음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이다. 80년 10월 이희우 선생이 쓴 드라마의 주제가〈축복〉(〈촛불〉)을 불렀는데 이게 또 히트했고 그 곡을 중심으로 부랴부랴 음반이 나왔다. 3집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이산가족 찾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아일보 기자였던 남편과 헤어진 어떤 할머니가 트로트로 만들어달라고 가사를 보내와 만든 곡으로 내가 처음 만든 트로트 곡이기도 하다. 음반사의 보이지 않는 압력?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부르다 보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다 보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트로트에 우리 정서가 담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록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나하고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고추잠자리〉가 모든 세대에 다 먹히지는 않았다. 〈고추잠자리〉를 만들때 나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을 만큼 겪은 서른 한 살이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장 평온했을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수수깡 꺾고 굴렁쇠 굴리고 고추잠자리를 보았을 때가 아니었는지? 따라서 내가 엄마를 부르고 고추잠자리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절규였다. 내가 노래하겠다고 하자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우리 집안이나 독재로 얼룩졌던 우리 사회나 얼마나 보수적인가? 엄마와 고추잠자리를 찾았을 때 나는 나의 자유를 만끽했고, 그 힘이 4집의 〈못찾겠다 꾀꼬리〉로 이어졌다. 분노가 자신감으로 확장되었다고 할까? 이 노래는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밀어버린 곡이다. '등꾸따가 등꾸따가'로 나가는 흥분의 리듬을 먼저 설정했고, 첫 대목의 버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주 건방지게 불렀는데 그것은 나는 당돌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같았다.
강 헌 : 개인적으로 82년의 네번째 앨범은 90년대의 13집과 더불어 당신의 디스크그라피에서 가장 빛나는 고갱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주류 록의 이정표를 세운 〈못찾겠다 꾀꼬리〉가 도전적인 서두를 열면 B면엔 아직도 그 독창성의 흥분이 다하지 않은 한국적 퓨젼 〈자존심〉과 장대한 스케일의 발라드 〈비련〉이 뒤를 받치고 있다. 〈비련〉의 첫 소절, '기도하는~' 다음의 짧은 휴지부에서 어김없이 터져나왔던 소녀들의 비명과 환성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고 귀에 쟁쟁하다. 이와 같은 걸작들의 사이엔 특유의 팝 트로트〈꽃바람〉과 당신의 첫 창작 동요인 〈난 아니야〉와 민요메들리 등이 포진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트랙은 〈못찾겠다 꾀꼬리〉바로 뒤에 놓인 유장한 템포로 설정된 비감 어린 애가(哀歌)〈생명〉인데 , 이 노래는 당신의 디스크그라피를 통틀어보더라도 극히 보기 드문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굴절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용필 : 그렇다. 그것은 명백히 광주의 학살에 대한 분노를 담은 곡이다. 나는 체질적으로 정치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수감중에 교도소 개구멍에서 내 노래를 듣고 이 놈이 어떤 놈인지 궁금해했다는 김지하 씨도 만난 적도 있고, 그런 인연 중에 내가 어머니라고 불렀던 전옥숙 여사와 같이 노래를 만들었다.
〈생명〉은 내 나름대로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4집에 실린 그 노래는 몇 번에 걸쳐 수정 지시를 받아 고쳐야 했기 때문에 원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 헌 : 이 〈생명〉이 묘사하는 어두움의 반대편에 아름다운 동요〈난 아니야〉가 놓여 있다. 당신은 이미 3집에서〈오빠생각〉을 녹음했고 4집에서도 역시 〈따오기〉를 추가로 수록했는데 , 당신이 만든 〈난 아니야〉는 산울림의 창작 동요와 더불어 아동 세대는 물론 어른 세대까지도 아우른 현대 한국 동요사의 걸작편이다. 무엇이 이 노래를 만들게 했는가?
조용필 : 나무, 꽃, 농촌, 고향과 더불어 동심은 내 상상력의 원천이다. 나는 아이가 없고 또 앞으로도 없을 터이지만 어린이를 만나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그당시엔 어린이 드라마까지 한 적이 있다. 나는 성격상 도시의 복잡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 두 식구인데다가 그나마 외국의 일 때문에 집을 비울 때가 많아 시골에서 살려는 꿈이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동심의 순수함은 나에겐 언제나 자연과 같은 것이다.
강 헌 : 이미 이때 당신은 한국의 대중음악을 완전히 장악했고, 독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 사람, 혹은 한 팀에 의한 지배는 일천한 우리 대중음악사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일로 남을 것이다. 이 시기의 활동만으로 당신은 영원한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나는 당신이라는 구심점에 의해 한국대중음악의 주류계열이 예술적인 광휘를 획득했고, 그 빛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언더그라운드의 중흥이라는 타자적 관계가 생산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4집의 목표와 80 언더그라운드 씬에 대한 입장을 얘기해 달라.
조용필 : 4집의 음악적 목표는 그룹의 음악이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스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 록 밴드가 얼마나 나왔나? 나는 희망을 만들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다른 밴드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다른 밴드와 차이가 심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노력했는데......8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 다시 말해 통금이 해제되고 컬러TV시대가 개막되었을 때 10대의 갈구는 무한하게 늘어났지만 이 땅의 음악은 다양하지 않았다. 나는 비디오적인 요소는 거의 없는, 10대의 아이돌스타가 될 만한 현대적인 카리스마와 스타로서의 끼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라는 음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리듬을 열어놓았고 하나의 노래속에 드라마를 불어 넣었다. 이것은 결코 내 개인의 성과가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언더그라운드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 넓어지는구나, 자유로워지는구나, 선택의 폭이 불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무척 기뻤다. 나도 바로 그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므로.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조화로운 발전, 그것이야말로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바람직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강 헌 : 당신이 주류의 정상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의 타락한 매너리즘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근거는 라이브에 대한 당신의 애착이 아닐까? 당신은 정상에서 무명까지, 기지촌의 무대에서 일본과 미국의 공연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퇴조가 시작된 90년대에 이르러서도 라이브에 대한 애정을 한번도 저 버리지 않았다. 15집이 발표되었던 94년 12월, 나는 90년대의 스타들이 한번쯤은 섰을 코엑스의 대서양관에서 당신이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밀리고 밀린 형국에서 과연 이런 대형공연에 여전히 관객들이 몰릴 것인지의 여부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운드였다. 주지하다시피 5천명 내외를 수용할 수 있는 그 공간은 장방형인데다 벽과 천장이 온통 콘크리트여서 제대로 된 소리를 연출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한마디로 대중음악 공연장 하나 변변히 없는 한국 공연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장소이다. 나는 추운 겨울날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든 성인관객들에게도 감동했지만 당신과 밴드의 스태프가 만들어내는 사운드에 결정적으로 사로잡혔다. 그곳에서 뭉개지고 찢어지는 소리만을 들었던 나에게 그날의 공연은 너무나 신선한 경험이었고, 歌王은 아직 하야하지 않았음을 새삼 일깨워준 기억이 새롭다. 라이브 문화의 발전과 성숙없이 대중음악의 미래는 없지 않은가?
조용필 : 나는 80년대에 컴백에 성공한 뒤에도 공연에 온 신경을 쏟았다. 몇 사람이 연합해서 벌이는 리사이틀 문화에서 단독으로 펼치는 콘서트 문화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 것을 5년 연속 방송사의 가수왕 타이틀을 딴 것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공연의 기억은 끝이 없다. 그중에서도 나의 고향이나 진배없는 부산의 해운대에서 81년부터 93년까지 세 차례 열렸던 백사장의 콘서트, 그리고 일본 부도캉 체육관에서의 솔로 콘서트, 그리고 최근 고려대에서 열렸던 '자유'콘서트 등등. 86년에서 87년 1년간 148회의 공연을 강행하기도 했다.
콘서트는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음향과 조명의 노하우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나는 기자재와 스태프 가릴 것 없이 공연에 모든 것을 투자해왔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공연이 여느 콘서트와 다른 것은 이 오랜 노력의 결과라고 자부한다. 코엑스의 대서양 홀에서 할 때도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다 스피커를 아예 바닥으로 주욱 깔아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하울링을 맞받아쳐서 잡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콘서트는 진흥기금이다 뭐다 해서 거의 다 뺏기니까 잘해야 본전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우리 대중들은 음악을 좋아하지만 직접 체험의 비중이 너무 낮다 보니 콘서트에 임하는 의식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하다. 중앙이 이러니 지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예 공간 자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연전에 포항시의 초청을 받아 포철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할 때다. 워낙 보수적인 분위기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스타디움을 채운 어른들이 공연의 반이 끝나갈 때까지 미동도 않는데다 시선은 무대가 아니라 무대 앞 왼쪽의, 10대 20대들이 일어서서 열광하는 쪽만 향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선 같이 호흡하는 공연문화가 만들어질리 만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난 6월의 자유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한 호흡으로 어우러진, 오랜만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낌없는 젊음의 힘만이 공연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내쳐 말하자면 한 나라를 운영하는 관리들이 문화를 등지고 살게끔 만든다. 이어령씨가 문화부 장관을 할 때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도 했지만 장관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재벌쪽은? 눈앞의 돈 벌려고 음반 사업에 뛰어들지 말고 그 돈 좀 제대로 된 문화사업에 투자하면 안 되나?
강 헌 : 다시 디스코그래피로 돌아가자. 83년의 5집의 분위기는 매우 독특하다. 〈나는 너 좋아〉같은 10대 취향의 로큰롤이 A면의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긴 하지만 어두운 톤의 재킷 디자인이 암시하는 것처럼〈한강〉과〈황진이〉같은 두터우며 전통적인 이디엄이 축이 되는 노래들이 앞 뒷면을 장식하고 있다. 트로트가 아니면서, 그리고 회고적인 민요의 틀도 아니면서 현대 한국의 음악 정서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욕이 엿보이는 이 앨범의 콘셉트는 무엇이었는가?
조용필 : 김순곤에게 한강의 역사를 한번 파헤쳐보자고 한 것은 우리가 매일 보고 지나치면서도 이 강의 거대함을 못 느끼고 산다는 생각이 들면서 노래로 한번짚고 넘어가보고 싶어서였다. 물론 〈제3한강교〉같은 노래도 이미 있었지만, 음악적으로 한강 그 자체를 인식해보고자 했다. 이런 컨셉트를 바탕으로 후주는 앞으로 몇 만년 뒤에도 흐를 한강의 소리 없는 울음의 이펙트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황진이〉는 드라마 주제가인데 , 판소리적인 멜로디라인을 응용하여 강렬한 리듬을 만들고 거기에 소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나는 톤을 중요시한다. 정신차릴 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밤에 혼자 스튜디오에 앉아 이펙트들을 연구했다. 사운드에 대한 나의 철학은 리듬을 바탕으로 쌓인 각 악기 파트의 연주와 멜로디가 하나의 메세지로 종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 더빙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톤을 많이 알아야 하는 건 그래야만 이 모든 과정에서 끝없는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이틀 곡을 뒤로 미루고 〈산유화〉와 〈한강〉, 그리고 뒷면의 〈황진이〉등을 앞으로 내세운 건 앞면 톱에 타이틀 곡을 놓아야 하는 관습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다.
강 헌 : A면의 마지막 트랙엔 당신의 클래식 중의 하나인 〈친구여〉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는 광범한 세대의 계층,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이른바 애창곡의 첫머리를 언제나 차지하곤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노래부터 트로트밖엔 가진 것이 없는 이 땅의 성인 세대에게 새로운 음악 취향을 제공하기 위한 당신의 기나긴 노력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래의 생명은 길다지만 지금 여기의 상황은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다. 대중음악은 의례 그런 것이거니 하고 넘어가는 선입관이 지배적인데 이와 같은 소모적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조용필 : 노래는 그 시대의 역사와 추억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로 우리의 노래는 애인과 고향을 꼽아 왔다. 그런데 왜 친구에 대한 노래는 거의 없는가? 그것은 아마도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가 옆을 돌아볼 틈이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나는 위대한 탄새의 건반주자 이호준과 '친구'라는 화두를 놓고 씨름했다. 슬프고 애상적인 것도 아니고 〈잘살아보세〉류의 건전가요도 아니면서 어떤 정신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이 노래는 장르의 문법이 없다. 그러나 이 노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처음부터 확신이 섰다. 즉 이 노래는 '친구'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수용자의 나이와 스타일을 초월할 수 있는 노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말이다. 실제로 이 노래는 공식석상에서도 창피해하지 않고 많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런 계열의 노래가 9집의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와 13집의 〈꿈〉이다. 쑥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만든 노래중의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길게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이 인터뷰가 있은 지 한달 후 MBC의 아침 토크 프로그램에 나온 신한국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자신의 애창곡으로 〈친구여〉를 쑥스러운 표정으로 첫 몇 소절을 부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타이틀 곡이 뜨는 것보다 앨범 전체가 뜰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 곡 보고 사람들은 앨범을 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90년대는 너무 얄팍하다. 예술성과 스타성을 겸비한 극히 일부의 젊은 아티스트만이 몇 집까지 계속해서 내는 반면에 지금처럼 한번 반짝하고 소모품처럼 어린 스타들이 하루 아침에 물갈이 된다면 이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제작자의 임무가 막중하다고 본다. 얼굴과 춤만 볼 것이 아니라 음악성을 보고 픽업해서 지속적으로 뒷받쳐주어야 하는데 눈앞의 이익이 모두를 망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강 헌 : 하지만 84년의 6집은 완성도에 있어서 산만할 뿐만 아니라 〈정의 마음〉을 제외한 거개의 노래가 다른 작곡가로부터 받아 채움으로써 당신과 위대한 탄생의 아이덴티티를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앨범이 아닌가?
조용필 : 그렇다. 2집이 그러했듯이 6집 역시 살인적인 스케줄과 1년에 앨범 하나이상을 내어야 하는 음반사의 관행에 시간이 버텨내지 못 했다. 그것은 85년 상반기 7집의 폭발 이후 연이어 하반기에 나온 8집도 마찬가지이다. 이러다간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압박감 아래서 다른 사람의 곡으로 6집을 만들 때 이미 7집의 곡을 쓰고 있었고 ,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를 건너뛰는 징검다리 배팅이랄까 , 비즈니스의 룰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당시의 위대한 탄생에 유재하 , 김광민 , 정원영 같은 젊은 친구들이 쟁쟁하게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7집의 수록곡 〈사랑하기 때문에〉를 만든 유재하는 당시 한양대 음대 재학중이었는데, 미국 순회 공연을 앞두고 학장의 허가가 안나 도중하차했다. 지금도 나는 저 친구들 때문에 내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강 헌 : 7집으로 당신은 명실상부한 제왕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 앨범은 풍부하고 성숙한 감정이입이 실현된 발라드 〈눈물로 보이는 그대〉로 시작하지만 로큰롤의 열기가 앨범 전반을 관통한다. 한마디로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조용필 록의 비등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30대 중반에 다다른 당신에게 로큰롤은 어떤 것이었는가?
조용필 : 미국에서는 두번째 박자에 턱이 앞으로 나오면 히트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 느낌이 모든 록의 기본이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 80년대 초중반 나의 음악에 열광하던 이 땅의 10대들은 록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세대에게 록의 대중적인 모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죽을 때 나의 음악은 이것이다라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의 음악이 그저 흘러가는 소모품이 되고 싶지는 않다. 〈창밖의 여자〉와〈비련〉같은 발라드까지 강렬한 파워를 내뿜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노래의 근원에 록의 에너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록이 좋다, 젊음이 좋다, 이 시대를 음악으로 얘기하고 싶다. 그것의 불만, 흥미, 거짓, 사랑을 얘기하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시대의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와〈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같은 노래를 만들 때 나는 더 이상 젊지는 않았지만 난 젊음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폭력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 분노만 얘기해서는 안 된다. 폭력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서태지나 신해철, 강산에 같은 90년대의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대범함과 자유분방한 표현력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좀 건방지게 말한다면 90년대의 음악이 획기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템포 120의 강렬한 로큰롤만이 아니라 이제는 한국의 젊은 힘을 통일시킬 장르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가 원망할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반인 법이다.
강 헌 : 그리고 당신은 활동 무대를 국내를 벗어나 일본으로 진출한다. 물론 이전에도 이성애와 계은숙을 비롯하여 일본 시장에 뛰어든 음악인이 없진 않았지만 아예 일본화 되지 않고 당대의 정상급 스타가 일본 시장에 독자적인 뿌리를 내린 예는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신이 일본에게 준 것, 그리고 일본이 당신에게 준 것은?
조용필 : 82년인가, 일본 문화방송이 개국 30주년 기념으로 한국, 중국, 일본, 홍콩, 필리핀, 태국의 음악인을 초청하여 아시아 뮤직 포럼이라는 30시간짜리 콘서트를 기획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25분 정도를 맡았는데 그 공연 이후 유독 나를 찍은 것 같다. 그리하여 83년 NHK홀부터 시작한 3개 도시 콘서트, 84년 홍콩의 알란 탐과 일본의 다니무라 신지와 고라쿠엔 구장에서 가졌던 팍스 뮤지카로 이어지며 활동이 확장되었다. 처음 일본에 진출할 때만 해도 나이 많은 세대를 제외하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모르는 상황에 적잖이 놀랐다. 말도 못하는 놈이 건너가서 최선을 다해 활동했고 5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야 주는 골든디스크를 세 장 받았다. 일본은 나에게 대범함을 가지게 했고 조그만 나를 크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은 나에게 돈을 벌어준 곳이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그 당시 한국에선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있을리 만무했고 (그래서 12집 이전의 앨범 판권은 지구레코드가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형편이다.) , 그나마 87년부터 프로덕션 체제로 바뀌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국내의 밤무대도 거의 뛰지 않았던 관계로 그나마 들어 오는 돈은 위대한 탄생에 투자하기도 바빴다. 그러니 내 개인의 수익은 일본 말곤 어디서 나왔겠나? 오히려 인기가 떨어졌다는 90년대에 콘서트 위주로 가면서 80년대보다 수입이 늘었을 정도이니 한마디로 나는 한국 음반산업의 희생타나 다름없다.
강 헌 : 7집과 같은 해 이어 나온 8집은 7집과는 전혀 다른 세대, 곧 성인 계층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타이틀 곡인 〈허공〉이 그렇고 아직도 노래자랑이나 주부가요열창 같은 데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양인자 , 김희갑 콤비에 의한 〈그 겨울의 찻집〉과〈바람이 전하는 말〉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젊은 층의 시선을 끈 것은 역시 이 콤비에 의한 , 음악모노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이 노래는 노래운동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풍자한 〈군림한자로의 고독〉으로 개사해서 당시 노찾사에서 활동하고 있던, 당신의 동향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안치환이 불러 대학가와 소극장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80년대 들어 처음 한 해를 거르고 9집이 발표되었다. 이 87년 앨범부터 피로감이 확연히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론 7집의 열기대신 앞에 언급한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같은 초연한 템포의 어덜트 컨템포러리가 장식하고는 있지만 〈청춘시대〉의 기타프레이즈 표절과 〈마도요〉의 제목 시비로 얼룩지기도 했다. 20주년을 목전에 둔 87년은 77년 활동 금지 이후 당신의 음악 이력에서 처음 맞은 위기의 시간이 아니었는가?
조용필 : 그 노래가 개사되어서 불렀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8집은 한마디로 성인세대에 대한 서비스다. 이 세대의 호응은 좋았지만 밑 세대가 많이 떨어져 나갔음을 당시의 콘서트 때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삶에 대한 확신을 노래한 것이다. 확신이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 운동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투쟁은 외로운 것이다. 하려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한때 투쟁했다 그만두면 안 한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도 동연배가 아닐까 하는데, 김민기가 대단하고 멋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투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7년, 9집을 발표할 때 나는 개인적인 불행과 맞물려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했다. 쉬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란 인간은 뭐냐? 회의가 회의를 물고 맴돌았다. 그런 가운데 〈청춘시대〉의 기타 솔로가 잉베이 맘스틴의 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타를 맡았던 당시의 멤버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 노래의 홍보를 그만 두었다. 가장 힘든 시기였다.
강 헌 : 87년은 나라 전체를 보더라도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은 20주년을 기념하는 1988년 , 10집 파트Ⅰ과 파트Ⅱ 앨범을 발표하며 불굴의 의지를 내보인다.〈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의 담담함이 열정적으로 비약한〈Q〉부터〈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모노드라마를 아예 19분30초의 장편 드라마로 확장시킨〈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까지 성인취향으로 꾸민 파트Ⅱ 앨범의 전곡을 양인자, 김희갑 콤비에게 맡겨 8집보다 훨씬 뛰어난 집중력을 과시하는 한편으로 당신이 전곡의 작곡을 맡은 파트Ⅰ 앨범은 7집의 에너지를 다시 불러 일으킨다. 특히 A면의 머릿곡인 〈서울 , 서울 , 서울〉이 올림픽 개최의 들뜬 분위기와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동시에 B면의〈서울 1987년〉은 4집의〈생명〉의 뒤를 이어(작사도 똑같이 전옥숙이다) 고통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다. 이 기묘한 대비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조용필 : 1987년을 잊을 수 없다. 나 개인이 힘든 것은 나 혼자 버티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데 온 나라까지 힘든 건 견디기 어려웠다. 전국이 연기뿐인데 이 전쟁터에서 누가 국민이고 누가 정부인가? 처음에 잘못한 자는 분명 있는데 나중에는 누가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싸움판이 이어졌다. 우리 모두의 패배이다. 이 배는 엎어진 배다. 〈생명〉을 작사했던 전옥숙여사와 토론하며〈서울 1987년〉을 만들었다. 이 노래는 후렴부에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코러스를 처음으로 쓴 곡이기도 하다. 그 코러스를 '민중의 소리'로 상정한 나는 스튜디오에서 제 멋대로 맘대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전체적으로 그곡은 맥박 소리를 형상화한 리듬과 템포가 말이 안 될 정도로 들쭉날쭉한데 그것은 어지러운 세상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의도이다. 이 노래에 이어지는〈회색빛 도시〉의 가사는 MBC 라디오의 안혜란PD가 쓴 것이다. 방송 마치고 술 먹으면서 이 도시의 빌딩은 왜 다들 회색이냐? 이게 무엇을 말하는 건가? 색깔은 희망이고 꿈인데 우리가 보아야 하는것이 왜 몽땅 회색뿐이냐? 뭐 이런 식으로 목소리를 높였더니 그는 형, 왜 나한테 그래? 하고 빠져나간다. 그래서 가사를 한번 써보라고 즉석에서 부탁했다.〈고추잠자리〉와〈못 찾겠다 꾀꼬리〉를 쓴 김순곤이나 앞에 말한 전옥숙 여사와 안혜란PD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나는 전문적인 작사가에게는 거의 가사를 맡기지 않고 그때그때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파트너와 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김순곤은〈고추잠자리〉이후에 전문가가 되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양인자, 김희갑 두분의 인연이 맺어지는 데 기여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음악 생활 20주년을 기념하는 10집의 파트Ⅱ 앨범은 그 콤비에게 맡기고 싶었고, 그 나머지 시간을 90년대를 맞이할 준비에 착수했다. 91년의 〈꿈〉도 이미 그때 만들어놓은 작품이다.〈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은 70년대에 블라인드 페이스의 〈Do What You Like〉를 했던 기억을 상기하며 희갑이 형과 음악 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결과물이다.
강 헌 : 두 장의 10집을 끝으로 당신은 소속사로부터 벗어났다. 60년대에 음악을 시작한 당신이 90년대에 와서야 음반사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1990년의 12집의〈추억속의 재회〉를 차트 톱으로 올려놓으며 그 동안의 축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이 12집과 후기의 최대 걸작 13집《The Dreams》는 당신이 슈퍼스타에서 마에스트로로 옷을 갈아입는 충실하고 가득한 음향의 향연이다. 어느덧 불혹의 고개를 넘은 당신의 음악적 과제는 어떤 것으로 설정했는가?
조용필 : 90... 무엇보다도 80년대의 옷을 벗어야 했다. 하물며 톤까지도. 12집 〈추억속의 재회〉부터 사운드가 강렬하고 무거워졌으며(특히 13집의 B면이 그렇다) 무엇보다 진지해졌다. 대중의 반응에 사로잡히지 않고 록을 바탕으로 서양의 클래식적인 요소, 중국의 민속 악기(14집〈이별의 인사〉에서 쓴 二湖), 라틴 계열의 퓨젼 리듬을 다양하게 접목해 본 것이다. 80년대엔 사실 탁성도 그리 많이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음반사로부터 독립도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가득 찬 소리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의 분위기는 14집 홍보를 할 때 피부로 느꼈다. 〈슬픈 베아트리체〉에 이어 〈고독한 러너〉를 내보냈는데 92년 가을의 모든 채널은 랩 댄스뮤직으로 몰려갔고 그 노래는 제목처럼 더이상 힘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위대한 탄생에게 거개의 트랙을 맡겨본 후속 앨범 15집까지 최악의 실패를 기록했다고 해서 나는 슬퍼하거나 노할 까닭이 없었다. 역사는 지나고 나서야 역사다.
조용필이, 서태지가, 신해철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나는 끝까지 도전하고자 했고 앞으로도 도전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강 헌 : 당신이 언급한 대로 92년부터 모든 시선은 비주얼한 이미지로 몰려갔다. 청각의 거장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고 당신은 가장 힘든 고비를 맞았다. 15집 이후 의욕적으로 시작한 뮤지컬 작업마저 불발로 끝나면서 당신의 지지자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뮤지컬에 대한 관심, 그리고 슬럼프를 넘어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듣고 싶다.
조용필 : 뮤지컬은 내 필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가면 틈만 나면 뮤지컬을 보았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거미 여인의 키스〉는 돈을 주고 번역한 대
본을 보면서 아홉 번을 관람한 적도 있다. 내년 30주년 활동을 벌인 뒤 뮤지컬은 3년 정도의 시간을 집중해서 다시 도전할 것이다. 밀릴 때는 철저히 밀려야 한다. 이 말은 슬럼프 조차도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다간 앞으로 고꾸라진다. 아예 내 손으로 내 구덩이를 판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모든 폭풍이 지나고 난 뒤 그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가 중요하다. 자신만만하게 쓰러져야만 자신감 있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강 헌 : 한국 록의 여명기를 일군 신중현에 대한 헌정 앨범이 발표되고 산울림이 결성 20주년을 기념하여 6년 만에 13집을 발표한 것과 더불어 당신의 3년 만의 신작 16집이 판매고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은 97년 시즌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16집에서 당신은 13집을 공동으로 프로듀스했던 키보드주자 톰 킨과 다시 해후했으며 오케스트라의 편곡이 필요한 노래는 제러미 러복을 파트너로 삼았다. 80년 컴백 이후 당신의 앨범에서 키보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당신이 겨냥한 이번 앨범의 기조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내년의 30주년 기념 앨범은 어떤 컨셉트로 임할 것인가?
조용필 : 나는 기타만큼이나 키보드의 웅장하고 화려한 세계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냥 달리는 심플한 록보다는 핑크 플로이드 같은 사운드 메시지가 충만한 록을 좋아한다. 톰 킨은 13집에서 신선한 경험을 안겨준 인물로, LA에서 내가 머물던 플로리다로 날라와 2박3일 간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면서 준비해 간 6곡의 미팅을 마쳤다. 오케스트레이션이 필요한 나머지 곡을 맡은 제러미 러복은 영국 출신으로 아주 비싼 65세의 베테랑이다. 이번 16집의 핵심은 무리를 하지 않는 것, 가장 중용적인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승부를 내는 것은 내년의 30주년 17집이라고 보았고 , 따라서 히트를 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내년의 앨범에선 나는 16집과는 다른 전략의, 30년 전의 초심으로 달려간 음악을 선보일 것이다. 즉 내 나름대로 록을 정리할 것이며 슬로우곡 또한 그 기조에서 정리할 것이다.
진정한 록은 무엇인가?
나는 다시 이 질문에 도전하려고 한다. 록은 떠드는 것이냐, 얘기해야 하는 것이냐, 함께 나누는 것이냐?
나는 아직 모른다. 만들면서 느껴보고 싶다.
[리뷰/대담] 조용필 VS 강헌
1997-07-21~23
歌王 조용필
피와 땀이 빚어낸 뜨거운 연대
강 헌 : 당신은 현대 한국 대중음악사 그 자체이다. 드라마틱한 29년의 음악생활을 통해 당신은 동요에서 민요까지, 발라드에서 퓨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대중 음악의 주류 장르의 밑그림을 설계했고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 서구 대중음악에 대한 한국 대중음악의 주도권을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러나 90년대가 열리면서 당신과 당신의 시대가 쌓은 아성은 서서히 무너졌고 새로운 10대는 새로운 우상을 향해 달려 나갔다. 12집 이후 당신은 트로트가 아닌 새로운 성인 취향의 대중음악(Adult Comtemporary)를 지속적으로 개척했지만 이 땅의 성인 계층은 음반 시장을 떠난지 오래였음을 불행하게 증명해 보였다. 특히 15집 이후 이어진 3년간의 침묵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조용필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성급하게 판정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당신은 전시대의 존중할 만한 가치들이 모두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세기말에 신작을 안고 돌아와 80년대의 전성기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성공을 거두었고 자신의 음악적 신념이 헛되지 않았음을 시장의 한가운데서 스스로 증명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3년만의 컴백 앨범인 《eternally》의 〈바람의 노래〉에서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라는, 당신의 오랜 파트너중의 한 명인 작사가 김순곤의 노랫말은 더욱 절실하게 들린다. 당신에게 90년대는 어떤 시간이었고 어떤 시간일 것인가?
조용필 : 아직 우리가 선진국이 아니기 때문에....현대사를 한국전쟁 이후로 보자면 외국 것을 받아들여서 이룬 대중문화의 연혁이 너무 짧고 전체 국민이 문화를 즐기는 풍요로운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수용자 문화가 여전히 허약하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전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TV는 외국의 문화를 직수입하여 소개했고 앞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사전 심의까지 철폐되는 등 젊은이들은 맘대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뿐인가? 장래 희망이 연예인이라는 어린이들이 날로 늘어가고 그 꿈을 위해 유학까지 떠난다.
14집을 발표한 92년 가을 이미 그때는 랩 댄스음악이 모든 것을 휩쓸며 세대교체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갈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한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고독한 러너〉를 쓰면서 겁이 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세계적인 스타도 밀려나는 릴레이 게임이며 스타는 언제나 신인한테 죽는 법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내가 잘한다면 남을 수는 있지 않겠는가, 자기 하기나름이다. 무서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말자.....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강 헌 :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오빠부대의 원조'라거나 '국민가수'라는 보수적인 슈퍼스타의 초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의 저 광활한 음악적 스펙트럼의 뿌리가 록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숱한 앨범과 라이브에서 그것을 증명해왔고, 30주년을 눈앞에 두고 발표한 이번의 신작에서도 〈그대를 사랑해〉와 〈바람의 노래〉,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조용필 특유의 록의 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스타일은 댄스비트에 중독된 90년대 수용자들이 등을 돌린 불운한 문법이 아닌가? 특히 지난 94년 15집의 참패 이후 지천명의 고개를 눈앞에 두고 16집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관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앨범은 트로트가 주를 이룰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조용필 : 나는 록이 좋아서 목소리를 바꾼 사람이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60년대말의 내 목소리는 단순한 미성에 불과했다. 오늘 위대한 탄생과 연습하는데 록의 탁성이 잘 나와서 기분이 좋다. 내년이면 30년, 이제 록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아닌게 아니라 내 주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트로트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고 개중에는 신경질까지 내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고 싶지 않았다. 내년, 98년이면 30년인데, 내가 트로트로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30주년을 눈앞에 두고 나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2,30대 감각의 여러 장르에다 그동안 많이 써두었던 4,50대 취향의 두곡 〈애상〉과 〈일몰〉을 선택했다. 이 두 곡은 성인 취향이 꼭 트로트가 아니라는 것과 트로트라고 해서 모든 것이 뽕짝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강 헌 : 그렇다면 재즈는 어떤가? 당신의 오랜 이력중에 지금은 프리재즈 퍼커션의 달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김대환과 70년대 초에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조용필 : 재즈는 아직도 잘 모른다. 김트리오때 맛도 모르면서 어깨 너머로 조금 배웠다고 할까? 입문도 제대로 못했지만 강태환의 색소폰은 사랑한다. 옛날의 밤무대
밴드는 여러 가지를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쫓겨나니까... 낮에는 조선호텔의 음악살롱,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에서 하루 종일 연주하고 연습했다. 70년대 초반엔 지미 헨드릭스의 디스토션 사운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난 뭘 치든 차분한 것보다 폭발적인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강 헌 : 당신의 음악 인생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밴드'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밴드로 음악을 시작했고 70년대의 대부분의 시간을 업소에서 보냈다. 그리고 당신이 주류의 제왕으로 부상한 80년대부터는 위대한 탄생이 당신과 동행해 왔다. 하지만 80년대의 개방과 함께 한국의
밴드 문화는 잠시 퇴보했다가 언더그라운드의 메탈 붐과 힘입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고, 90년대 들어서는 댄스그룹의 선풍에 밀려 종적을 감추는 듯 하다가 최근의 클럽 붐에 힘입어 다시 확산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넥스트 정도를 제외하면 록 밴드는 아직 주류 시장에 영향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신에게 밴드는 어떤 의미인가?
조용필 : 음악의 테크닉은 결코 악보로만 표현할 수 없다. 뮤지션의 감성과 감정이 부딪칠 때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기만의 사운드를 가지고 가려면 밴드는 필연적이다. 신해철의 경우도 아마 밴드를 꾸리지 않았으면 자신의 음악을 지탱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68년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부터 그들의 기타리스트였고 만들어온 곡들이 또한 밴드의 음악이다. 조용필 하면 위대한 탄생이 떠오르는 것은 나의 음악과 나의 밴드는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 헌 : 무엇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당신을 밴드로 이끌었는가? 사실 한국에서의 밴드는 불행과 일탈의 낙인 같은 것이 아니었는가? 이런 환경에서 밴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성공 이전에 존속하기조차 어렵다. 밑바닥에서 최정상에서 주유하면서 확립된 밴드에 대한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조용필 : 좋으니까! 나는 젊었고 젊음은 좋아하면 하는 것이다. 60년대에 밴드라면 불량배나 양아치를 의미했다. 그래서 밴드라는 말 대신에 그룹사운드나 보컬같은 말로 대신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밴드를 통해 세계적인 뮤지션이 되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우해 무조건 연습을 많이 했다. 매일을 거르지 않고. 밴드는 끝없는 훈련이다. 그것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일어나면 연습장(바로 업소)으로 출근했고, 흔히 나의 무명시절이라고 부르는 70년대 전반의 조용필과 그림자 시절에도 나는 업소에서 최고의 개런티를 받았다. 그리고 돈을 벌면 몽땅 악기와 밴드에 재투자했다. 밴드를 하면서 많이 벌겠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돈은 나중에 버는 것이다. 밴드의 구성원들이 자기 파트에만 힘을 쏟는다면 꼭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한 사람만 잘해서는 안 된다. 하다보면 뒤쳐지거나 게을러지는 이가 꼭 있다. 그럴 때 나는 '빳다'도 불사했다. 밴드는 멈추는 순간 죽는다. 잘해야 될 뿐 아니라 남들이 안 하는 새로운 레파토리를 언제나 만들어야 한다.
강 헌 : 그렇다면 슈퍼밴드의 리더 혹은 아이돌스타로서가 아니라 밴드의 기타리스트 출신으로서 밴드의 구심인 기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당신의 음악은 전체적인 밸런스와 하모니를 중시한다.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트랙에서 조차도 화려한 기타 플레이는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조용필 :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면, 멋만 부리려고 하면 안 된다. 손가락 빨리 돌리는 핑거링으론 기타가 아닌 것이다. 기타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지미 헨드릭스는 말할 것도 없고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나 비틀즈의 조지 헤리슨의 기타는 노래 이상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준다. 그도 아니면 에릭 칼멘의 〈All by myself〉의 기타라도 한번 유심히 들어보라. 기타가 시간 때우기나 기술 자랑이 된다면 그건 아마추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이 땅의 넘버원 기타리스트는 김홍탁이다. 음악은 수학이다. 대책없이 하는 연주를 나는 가장 싫어한다.
강 헌 : 당신이 음악을 시작하던 1968년, 미8군 무대를 거점으로 했던 신중현 사단의 펄시스터즈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고 대학가와 다운타운의 통기타 홀에선 트윈 폴리오와 서유석같은 인물들이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메고 포크의 첫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60년대 서구의 자유주의 문화가 상륙하던 그때 당신은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록 밴드에 청춘을 거는 모험을 감행한다. 무엇이 당신을 기타로 이끌었는가? 그리고 보컬을 맡게 되는 과정을 말해달라.
조용필 : 1968년, 내 나이 열여덟 살, 국민학교 중학교를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공부했다. 그때는 당연히 팝송 일색이었고 〈밤하늘의 트럼펫〉에 감동하기도 했다. 아주 어렸을 때 경기도 화성의 이웃 마을에서 들려오던 하모니카 소리에 반해서 하모니카를 배웠고 또 어느 날은 〈G선상의 아리아〉를 듣고 바이올린을 접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벤처스의 기타 연주와 비틀스의 음악이었다. 나중에 일본에 가보니 거기도 마찬가지로 이 둘의 인기는 여전함을 피부로 느꼈다. 고등학교(경동고)를 마치고 무작정 밴드를 만들어 용주골 기지촌으로 갔지만 나의 첫 밴드라고 할 수 있는 애트킨즈는 3일 만에 끝났고 그 뒤의 파이브 핑거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리곤 고향 집으로 붙잡혀 가서 6개월간 입시공부를 강요당하다가 친구들이 만든 경기도 광주의 이름도 없던 밴드에 합류했다. 기타를 치던 내가 보컬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부수적인 것인데 , 왜냐하면 베이스와 보컬을 맡던 친구가 입대했기 때문이다. 이 이름도 없던 팀에서 71년인가 〈Lead Me On〉을 처음으로 녹음했다. 물론 보컬과 연주가 한 번에 가는 동시녹음으로 말이다.
강 헌 : 로큰롤이 당신의 음악 영토의 드넓은 자양분이라면 진성과 가성, 탁성과 청성을 오가는 카리스마 충만한 당신의 보컬은 그 영토를 빛낸 꽃과 같다. 경쟁자를 허용하지 않는 당신의 보컬이 진정으로 빛나는 것은 그것이 그저 타고난 재능이라거나 시류와 맞아떨어진 사운드 트렌드가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가 독창적으로 제련된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80년 〈창밖의 여자〉, 그리고 91년 〈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보컬은 끝없이 개화한다. 특히 1980년의 컴백에 성공했을 때 70년대 후반의 활동 금지 기간 동안 뼈를 깎는 독공(?)을 거듭했다는 신화아닌 신화가 퍼지기도 했던 당신만의 보컬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조용필 : 벤처스와 비틀스에 매료되어서 음악을 시작했지만 미8군을 전전하면서 많은 음악을 접했다. 주크박스에선 흑인 음악이 많이 나왔는데 슈프림스나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같은 소울과 리듬앤블루스를 만날 수 있었고 당시 미국 백인 음악을 대표했던 몽키스와 C.C.R.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도 많은 이들의 노래를 불렀다. 스티비 원더, 로드 스튜어드, 에어로 스미스, 비지스 등등등이 다양한 사람들의 창법을 흉내내면서 내 것으로 포섭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서가 서서히 완성되지않았나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훨씬 뒤 내가 활동을 금지당했던 시절에 만났다. 깊이 있게 공부한 것은 아니고 고작해야 홍보전의 구걸하는 장면 정도인데, 악보로 옮기며 공부하다가 그 창법의 고-중-저 바이브레이션에 깜짝 놀랐다. 보컬을 본능적으로 타고났다는 흑인 음악도 대개 선율위에서 바이브레이션을 하는 것에 불과한데 우리의 판소리는 팝 음악하고는 갈래가 다른 리듬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뒤흔들어버리지 않는가? 여기서 배운 창법과 꽹과리의 리듬감을 실현해 본 노래가 82년 4집에 수록된 〈자존심〉이다.
'당신은 저~~~~'하고 떠는 국악적인 프레이즈에 펑키한 서구적 후렴부인 '이 마음은 사랑일까 착각일까?' 결합시켜 본 것이다.
강 헌 :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면서 당신은 인기의 정상에 올라섰지만 그 성공은 이듬해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권하의 70년대 후반을 음악활동을 금지당한 채 당신은 밑바닥의 어둠속으로 추락한다. 많은 음악인들이 좌절했고 이장희와 한 대수처럼 아예 이 땅을 떠나기도 했으며 나아가 음악 생명조차 끝나 버리기도 한 유신 시대였다. 대마초 파동의 전말을 알고 싶다.
조용필 : 집 나온 사람이 어딜 못 갔겠냐마는 부산은 내가 잊을 수 없고 또 사랑하는 낭만의 도시이다. 바다와 항구와 특히 좋아하는 생선이 있으니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날 부산 출신 가수라고 생각하고 있고 유명한 가수를 별로 배출하지 못한 부산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고향사람으로 맞아준다. 김트리오 시절 처음 부산에 공연을 한 후로 그림자 시절에 이르도록 매년 몇 개월씩 부산의 무대에 섰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76년에 취입하기 몇 년전에 이미 통기타 반주로 한번 취입했던 곡이다. 엽전들과 사랑과 평화를 거쳤던 이남이와 같이 녹음했는데 뽕짝으로 불러달라는 제작자의 주문에 창피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다가 〈너무 짧아요〉를 타이틀로 했던 76년 판을 녹음하면서 이 노래를 다시 밴드 스타일로 녹음했는데, 히트라는 것은 만든 사람과는 다른 법이어서 이게 그만 터져버렸다. 그야말로 우연의 히트였다. 그러나 그히트는 나에게 엄청난 불행을 몰고 왔다. 이듬해 대마초 사범으로 걸린 것이다. 너무 약이 올라서 한이 맺혔다. 자기 아들이 대마초를 했다고 그렇게 엄청나게 문화를 탄압한 독재자가 세상에 어디 있나? 나는 그때도 음악을 천직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다. 당시 흔하게 유통되었던 대마초는 불법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그 사건이 있기 몇 년전에 업소에서 한 번 접했다가 얼굴에 심한 알러지가 일어서 기겁을 하고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건 남산의 지하 취조실에선 아무런 참작이 되지 않는다. 무조건 50명씩 불어야 했으니까. 주전자 고문도 치가 떨리지만 붙들려 가자마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벽틈 사이로 밀어 놓고는 무시무시한 각목으로 사정없이 찔러대는데....거기엔 인간이 없었다.
그렇게 당한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고 이 땅을 뜬 사람도 적지 않은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국으로 가기 위해 선배가 경영하던 회사에 비서로 이름만 올려 놓고 갑근세를 내기도 했고(그래야 여권이 나왔으니까), 그도 저도 여의치 않자 밀항까지 생각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시대이다.
강 헌 : 조용필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우리의 뇌리에서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자면 만약 그 파동이 없었더라면 그 활동 금지 기간 중의 절치부심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당신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스매시 히트 이후 트로트와 록 비트를 결합한 그런 스타일의 노래가 역시 야간업소의 밴드 출신의 보컬리스트에 의해 숱하게 쏟아졌고 포크와 로큰롤이 거세당한 70년대 후반의 한국 대중음악을 규정했다. 그 복고의 조류 속에 당신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당시 대중의 보수적인 감수성이나 음반사의 일방적인 요구에 밀려 매너리즘에 빠져버릴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비록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황선우 작사.곡) 당시의 당신이 선호한 것도 아니지만 (A면 첫번째 머릿곡은 당신의 곡인 〈너무 짧아요〉인 것만 보아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탄압에 의한 청년 문화의 몰락과 기성세대 취향의 귀환이라는 당시 음악 문화의 한 상징적인 노래이며 나아가 일본이 꿈꾸는 대동아공영의 이데올로기를 포섭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있을 정도였다.
조용필 : 대마초 파동이 없었더라면 80년대의 나는 없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정말이지 애증이 교차하는 노래이다. 그땐 이 노래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디 공연가면 전부 외국 노래만 불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내 운명을 바꾸어 버린 노래가 아닌가? 3년이 지나 박대통령이 죽고 다시 컴백했을 때 그때서야 이 노래가 좋아졌다. 왜? 미우나 고우나 내 데뷔곡이니까.
이 노래와 일본의 대동아공영을 연결시키는 발상은 한마디로 매스컴이 작위적으로 몰아간 왜곡된 의견이다. 정작 일본에 가봐도 대중들은 국가와 이념을 두고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노래는 재일동포 모국 방문단이 오기 훨씬 전에 킹박의 동생인 박성철과 그림자의 멤버들이 새벽 다방을 돌면서 판을 돌렸고, 일반 대중들에게 퍼지기 전에 대학가와 다운타운의 음악다방 및 고고장에서 이미 유명해진 곡이다. 부산에서부터 대중적인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도 부산에 3일 초청공연 간 김에 50여 군데에 음반을 돌리면서부터이고, 일본에서 또한 몇 년에 걸쳐 언더그라운드에서 알려지다 음반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이 노래가 먹힌 이유는 2/4박자의 전형적인 뽕작이 아닌 4/4박자의 고고 리듬에 있다고 본다.
이미 그때 일본에서도 2/4의 엔카는 구식이라고 별로 팔리지 않기 시작할 때였다.
강 헌 : 그리하여 마침내 80년대가 열리고 광주의 비극과 더불어 조용필 1인 제국시대가 열린다. 당신이 자신의 디스크그라피에서 데뷔앨범으로 간주하는 1980년의 앨범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즉 앞면의 머릿곡인 〈창밖의 여자〉와 뒷면의 머릿곡인 〈단발머리〉는 80년대 한국의 주류 대중음악이 어떤 질서로 흘러나갈 것인지를 그대로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앨범은 한해를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음반 시장의 밀리언 시대를 열어 젖혔고 드디어 10대들이 음악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예광탄이기도 했다. 과연 이 앨범의 무엇이 한 나라의 음악 질서를 재편시켰다고 생각하는가?
조용필 : 1980년 그때, 나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 대중들의 깊은 마음속엔 형언하지 못할 숱한 갈망들이 있었다.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는 모두 70의 막바지에 만든 곡이다. 전자가 과거와 기존의 세대들의 갈망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이제부터 시작하는 미래와 다음 세대의 갈망을 담으려고 했다. 〈창밖의 여자〉를 그래픽으로 보자. 이 노래는 세 개의 산봉우리의 굴곡이 있다. 첫번째 산을 넘을때 이것이 정상인가 하면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면 험난한 산이 또 하나 맞아 선다. 이에 비하면 〈단발머리〉는 하나로 가는 음악이다. 그러나 그냥 가는데 나무가 무수히 많다. 나는 16마디에서 A-B-A로 반복하는 당시 우리 대중음악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한 테마에서 코드만 바뀌어 진행하는 그런 시도들을 자유롭게 하고 싶었다. 내가 첫 앨범으로 간주하는 80년 앨범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원하고 있었음을 절감할 수 있었고, 이제는 마음대로 만들고 펼쳐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80년대초만 해도 생악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나는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악이나 〈단발머리〉에서 사용한 메이저 세븐같은 당시로선 낯선 코드를 과감하게 썼다. 하지만 그것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말에 이르는 10년간의 음악 훈련의 축적물일 뿐이다. 내 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의 이면엔 음악까지 장악하고 있는 통행금지 시대에 대한 분노가 암시적으로 들어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이 갇혀 있었다. 로큰롤도 몰래 듣다시피 했던 그때.
강 헌 : 그리고 그해 가을 '미국 카네기 홀 공연 기념'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두번째 앨범이 발표되었고 전작의 여세를 몰아 이 앨범 또한 성공행진을 이어가지만 어딘가 모르게 졸속의 냄새가 짙었다. 그러나 이듬해 나온 세 번째 앨범은 그야말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사자후와 같은 앨범으로 조용필 1인제국의 결정적인 방점을 찍은 앨범이다. 이 앨범은 동요 (〈오빠생각〉)와 민요(〈강원도 아리랑〉)를 아우르는 한편으로 〈미워 미워 미워〉(정풍송 작곡)와 당신이 작곡한 〈일편단심 민들레야〉같은 트로트 넘버가 전반부에 포진하고 〈여와 남〉과 〈고추잠자리〉같은 '조용필 류'라고 불러 마땅한 록 넘버를 후반부에 배치하여 갈라지는 모든 세대의 기호를 통합하려는 야심으로 불타는 앨범이다. 하지만 트로트 레퍼토리는 아무래도 어른 구매자를 겨냥한 음반사의 압력 때문이 아닌가? 트로트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고 싶다. 하지만 밴드의 연주와 테이프 이펙트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고추잠자리〉는 특정 세대의 취향을 뛰어넘어 모든 세대에게 다가가 80년대 최초의 록 넘버가 아닐까 한다. 하나의 앨범안에 트로트와 동행하던 이 시점 당신이 주장하고 싶었던 당신의 록의 슬로건은?
조용필 : 모든 것이 갑자기 바빠졌다. 진정한 의미의 2집 앨범은 내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옳다. 지금도 뭘 녹음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이다. 80년 10월 이희우 선생이 쓴 드라마의 주제가〈축복〉(〈촛불〉)을 불렀는데 이게 또 히트했고 그 곡을 중심으로 부랴부랴 음반이 나왔다. 3집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이산가족 찾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아일보 기자였던 남편과 헤어진 어떤 할머니가 트로트로 만들어달라고 가사를 보내와 만든 곡으로 내가 처음 만든 트로트 곡이기도 하다. 음반사의 보이지 않는 압력?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부르다 보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다 보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 트로트에 우리 정서가 담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록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나하고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고추잠자리〉가 모든 세대에 다 먹히지는 않았다. 〈고추잠자리〉를 만들때 나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을 만큼 겪은 서른 한 살이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장 평온했을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수수깡 꺾고 굴렁쇠 굴리고 고추잠자리를 보았을 때가 아니었는지? 따라서 내가 엄마를 부르고 고추잠자리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절규였다. 내가 노래하겠다고 하자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우리 집안이나 독재로 얼룩졌던 우리 사회나 얼마나 보수적인가? 엄마와 고추잠자리를 찾았을 때 나는 나의 자유를 만끽했고, 그 힘이 4집의 〈못찾겠다 꾀꼬리〉로 이어졌다. 분노가 자신감으로 확장되었다고 할까? 이 노래는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밀어버린 곡이다. '등꾸따가 등꾸따가'로 나가는 흥분의 리듬을 먼저 설정했고, 첫 대목의 버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주 건방지게 불렀는데 그것은 나는 당돌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같았다.
강 헌 : 개인적으로 82년의 네번째 앨범은 90년대의 13집과 더불어 당신의 디스크그라피에서 가장 빛나는 고갱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주류 록의 이정표를 세운 〈못찾겠다 꾀꼬리〉가 도전적인 서두를 열면 B면엔 아직도 그 독창성의 흥분이 다하지 않은 한국적 퓨젼 〈자존심〉과 장대한 스케일의 발라드 〈비련〉이 뒤를 받치고 있다. 〈비련〉의 첫 소절, '기도하는~' 다음의 짧은 휴지부에서 어김없이 터져나왔던 소녀들의 비명과 환성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고 귀에 쟁쟁하다. 이와 같은 걸작들의 사이엔 특유의 팝 트로트〈꽃바람〉과 당신의 첫 창작 동요인 〈난 아니야〉와 민요메들리 등이 포진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트랙은 〈못찾겠다 꾀꼬리〉바로 뒤에 놓인 유장한 템포로 설정된 비감 어린 애가(哀歌)〈생명〉인데 , 이 노래는 당신의 디스크그라피를 통틀어보더라도 극히 보기 드문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굴절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용필 : 그렇다. 그것은 명백히 광주의 학살에 대한 분노를 담은 곡이다. 나는 체질적으로 정치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수감중에 교도소 개구멍에서 내 노래를 듣고 이 놈이 어떤 놈인지 궁금해했다는 김지하 씨도 만난 적도 있고, 그런 인연 중에 내가 어머니라고 불렀던 전옥숙 여사와 같이 노래를 만들었다.
〈생명〉은 내 나름대로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4집에 실린 그 노래는 몇 번에 걸쳐 수정 지시를 받아 고쳐야 했기 때문에 원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 헌 : 이 〈생명〉이 묘사하는 어두움의 반대편에 아름다운 동요〈난 아니야〉가 놓여 있다. 당신은 이미 3집에서〈오빠생각〉을 녹음했고 4집에서도 역시 〈따오기〉를 추가로 수록했는데 , 당신이 만든 〈난 아니야〉는 산울림의 창작 동요와 더불어 아동 세대는 물론 어른 세대까지도 아우른 현대 한국 동요사의 걸작편이다. 무엇이 이 노래를 만들게 했는가?
조용필 : 나무, 꽃, 농촌, 고향과 더불어 동심은 내 상상력의 원천이다. 나는 아이가 없고 또 앞으로도 없을 터이지만 어린이를 만나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그당시엔 어린이 드라마까지 한 적이 있다. 나는 성격상 도시의 복잡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 두 식구인데다가 그나마 외국의 일 때문에 집을 비울 때가 많아 시골에서 살려는 꿈이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동심의 순수함은 나에겐 언제나 자연과 같은 것이다.
강 헌 : 이미 이때 당신은 한국의 대중음악을 완전히 장악했고, 독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 사람, 혹은 한 팀에 의한 지배는 일천한 우리 대중음악사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일로 남을 것이다. 이 시기의 활동만으로 당신은 영원한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나는 당신이라는 구심점에 의해 한국대중음악의 주류계열이 예술적인 광휘를 획득했고, 그 빛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언더그라운드의 중흥이라는 타자적 관계가 생산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4집의 목표와 80 언더그라운드 씬에 대한 입장을 얘기해 달라.
조용필 : 4집의 음악적 목표는 그룹의 음악이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스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 록 밴드가 얼마나 나왔나? 나는 희망을 만들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다른 밴드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다른 밴드와 차이가 심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노력했는데......8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 다시 말해 통금이 해제되고 컬러TV시대가 개막되었을 때 10대의 갈구는 무한하게 늘어났지만 이 땅의 음악은 다양하지 않았다. 나는 비디오적인 요소는 거의 없는, 10대의 아이돌스타가 될 만한 현대적인 카리스마와 스타로서의 끼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라는 음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리듬을 열어놓았고 하나의 노래속에 드라마를 불어 넣었다. 이것은 결코 내 개인의 성과가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언더그라운드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 넓어지는구나, 자유로워지는구나, 선택의 폭이 불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무척 기뻤다. 나도 바로 그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므로.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조화로운 발전, 그것이야말로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바람직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강 헌 : 당신이 주류의 정상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의 타락한 매너리즘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근거는 라이브에 대한 당신의 애착이 아닐까? 당신은 정상에서 무명까지, 기지촌의 무대에서 일본과 미국의 공연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퇴조가 시작된 90년대에 이르러서도 라이브에 대한 애정을 한번도 저 버리지 않았다. 15집이 발표되었던 94년 12월, 나는 90년대의 스타들이 한번쯤은 섰을 코엑스의 대서양관에서 당신이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밀리고 밀린 형국에서 과연 이런 대형공연에 여전히 관객들이 몰릴 것인지의 여부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운드였다. 주지하다시피 5천명 내외를 수용할 수 있는 그 공간은 장방형인데다 벽과 천장이 온통 콘크리트여서 제대로 된 소리를 연출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한마디로 대중음악 공연장 하나 변변히 없는 한국 공연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장소이다. 나는 추운 겨울날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든 성인관객들에게도 감동했지만 당신과 밴드의 스태프가 만들어내는 사운드에 결정적으로 사로잡혔다. 그곳에서 뭉개지고 찢어지는 소리만을 들었던 나에게 그날의 공연은 너무나 신선한 경험이었고, 歌王은 아직 하야하지 않았음을 새삼 일깨워준 기억이 새롭다. 라이브 문화의 발전과 성숙없이 대중음악의 미래는 없지 않은가?
조용필 : 나는 80년대에 컴백에 성공한 뒤에도 공연에 온 신경을 쏟았다. 몇 사람이 연합해서 벌이는 리사이틀 문화에서 단독으로 펼치는 콘서트 문화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 것을 5년 연속 방송사의 가수왕 타이틀을 딴 것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공연의 기억은 끝이 없다. 그중에서도 나의 고향이나 진배없는 부산의 해운대에서 81년부터 93년까지 세 차례 열렸던 백사장의 콘서트, 그리고 일본 부도캉 체육관에서의 솔로 콘서트, 그리고 최근 고려대에서 열렸던 '자유'콘서트 등등. 86년에서 87년 1년간 148회의 공연을 강행하기도 했다.
콘서트는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음향과 조명의 노하우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나는 기자재와 스태프 가릴 것 없이 공연에 모든 것을 투자해왔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공연이 여느 콘서트와 다른 것은 이 오랜 노력의 결과라고 자부한다. 코엑스의 대서양 홀에서 할 때도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다 스피커를 아예 바닥으로 주욱 깔아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하울링을 맞받아쳐서 잡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콘서트는 진흥기금이다 뭐다 해서 거의 다 뺏기니까 잘해야 본전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우리 대중들은 음악을 좋아하지만 직접 체험의 비중이 너무 낮다 보니 콘서트에 임하는 의식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하다. 중앙이 이러니 지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예 공간 자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연전에 포항시의 초청을 받아 포철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할 때다. 워낙 보수적인 분위기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스타디움을 채운 어른들이 공연의 반이 끝나갈 때까지 미동도 않는데다 시선은 무대가 아니라 무대 앞 왼쪽의, 10대 20대들이 일어서서 열광하는 쪽만 향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선 같이 호흡하는 공연문화가 만들어질리 만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난 6월의 자유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한 호흡으로 어우러진, 오랜만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낌없는 젊음의 힘만이 공연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내쳐 말하자면 한 나라를 운영하는 관리들이 문화를 등지고 살게끔 만든다. 이어령씨가 문화부 장관을 할 때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도 했지만 장관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재벌쪽은? 눈앞의 돈 벌려고 음반 사업에 뛰어들지 말고 그 돈 좀 제대로 된 문화사업에 투자하면 안 되나?
강 헌 : 다시 디스코그래피로 돌아가자. 83년의 5집의 분위기는 매우 독특하다. 〈나는 너 좋아〉같은 10대 취향의 로큰롤이 A면의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긴 하지만 어두운 톤의 재킷 디자인이 암시하는 것처럼〈한강〉과〈황진이〉같은 두터우며 전통적인 이디엄이 축이 되는 노래들이 앞 뒷면을 장식하고 있다. 트로트가 아니면서, 그리고 회고적인 민요의 틀도 아니면서 현대 한국의 음악 정서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욕이 엿보이는 이 앨범의 콘셉트는 무엇이었는가?
조용필 : 김순곤에게 한강의 역사를 한번 파헤쳐보자고 한 것은 우리가 매일 보고 지나치면서도 이 강의 거대함을 못 느끼고 산다는 생각이 들면서 노래로 한번짚고 넘어가보고 싶어서였다. 물론 〈제3한강교〉같은 노래도 이미 있었지만, 음악적으로 한강 그 자체를 인식해보고자 했다. 이런 컨셉트를 바탕으로 후주는 앞으로 몇 만년 뒤에도 흐를 한강의 소리 없는 울음의 이펙트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황진이〉는 드라마 주제가인데 , 판소리적인 멜로디라인을 응용하여 강렬한 리듬을 만들고 거기에 소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나는 톤을 중요시한다. 정신차릴 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밤에 혼자 스튜디오에 앉아 이펙트들을 연구했다. 사운드에 대한 나의 철학은 리듬을 바탕으로 쌓인 각 악기 파트의 연주와 멜로디가 하나의 메세지로 종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 더빙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톤을 많이 알아야 하는 건 그래야만 이 모든 과정에서 끝없는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이틀 곡을 뒤로 미루고 〈산유화〉와 〈한강〉, 그리고 뒷면의 〈황진이〉등을 앞으로 내세운 건 앞면 톱에 타이틀 곡을 놓아야 하는 관습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다.
강 헌 : A면의 마지막 트랙엔 당신의 클래식 중의 하나인 〈친구여〉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는 광범한 세대의 계층,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이른바 애창곡의 첫머리를 언제나 차지하곤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노래부터 트로트밖엔 가진 것이 없는 이 땅의 성인 세대에게 새로운 음악 취향을 제공하기 위한 당신의 기나긴 노력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래의 생명은 길다지만 지금 여기의 상황은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다. 대중음악은 의례 그런 것이거니 하고 넘어가는 선입관이 지배적인데 이와 같은 소모적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조용필 : 노래는 그 시대의 역사와 추억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로 우리의 노래는 애인과 고향을 꼽아 왔다. 그런데 왜 친구에 대한 노래는 거의 없는가? 그것은 아마도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가 옆을 돌아볼 틈이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나는 위대한 탄새의 건반주자 이호준과 '친구'라는 화두를 놓고 씨름했다. 슬프고 애상적인 것도 아니고 〈잘살아보세〉류의 건전가요도 아니면서 어떤 정신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이 노래는 장르의 문법이 없다. 그러나 이 노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처음부터 확신이 섰다. 즉 이 노래는 '친구'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수용자의 나이와 스타일을 초월할 수 있는 노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말이다. 실제로 이 노래는 공식석상에서도 창피해하지 않고 많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런 계열의 노래가 9집의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와 13집의 〈꿈〉이다. 쑥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만든 노래중의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길게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이 인터뷰가 있은 지 한달 후 MBC의 아침 토크 프로그램에 나온 신한국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자신의 애창곡으로 〈친구여〉를 쑥스러운 표정으로 첫 몇 소절을 부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타이틀 곡이 뜨는 것보다 앨범 전체가 뜰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 곡 보고 사람들은 앨범을 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90년대는 너무 얄팍하다. 예술성과 스타성을 겸비한 극히 일부의 젊은 아티스트만이 몇 집까지 계속해서 내는 반면에 지금처럼 한번 반짝하고 소모품처럼 어린 스타들이 하루 아침에 물갈이 된다면 이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제작자의 임무가 막중하다고 본다. 얼굴과 춤만 볼 것이 아니라 음악성을 보고 픽업해서 지속적으로 뒷받쳐주어야 하는데 눈앞의 이익이 모두를 망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강 헌 : 하지만 84년의 6집은 완성도에 있어서 산만할 뿐만 아니라 〈정의 마음〉을 제외한 거개의 노래가 다른 작곡가로부터 받아 채움으로써 당신과 위대한 탄생의 아이덴티티를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앨범이 아닌가?
조용필 : 그렇다. 2집이 그러했듯이 6집 역시 살인적인 스케줄과 1년에 앨범 하나이상을 내어야 하는 음반사의 관행에 시간이 버텨내지 못 했다. 그것은 85년 상반기 7집의 폭발 이후 연이어 하반기에 나온 8집도 마찬가지이다. 이러다간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압박감 아래서 다른 사람의 곡으로 6집을 만들 때 이미 7집의 곡을 쓰고 있었고 ,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를 건너뛰는 징검다리 배팅이랄까 , 비즈니스의 룰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당시의 위대한 탄생에 유재하 , 김광민 , 정원영 같은 젊은 친구들이 쟁쟁하게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7집의 수록곡 〈사랑하기 때문에〉를 만든 유재하는 당시 한양대 음대 재학중이었는데, 미국 순회 공연을 앞두고 학장의 허가가 안나 도중하차했다. 지금도 나는 저 친구들 때문에 내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강 헌 : 7집으로 당신은 명실상부한 제왕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 앨범은 풍부하고 성숙한 감정이입이 실현된 발라드 〈눈물로 보이는 그대〉로 시작하지만 로큰롤의 열기가 앨범 전반을 관통한다. 한마디로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조용필 록의 비등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30대 중반에 다다른 당신에게 로큰롤은 어떤 것이었는가?
조용필 : 미국에서는 두번째 박자에 턱이 앞으로 나오면 히트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 느낌이 모든 록의 기본이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 80년대 초중반 나의 음악에 열광하던 이 땅의 10대들은 록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세대에게 록의 대중적인 모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죽을 때 나의 음악은 이것이다라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의 음악이 그저 흘러가는 소모품이 되고 싶지는 않다. 〈창밖의 여자〉와〈비련〉같은 발라드까지 강렬한 파워를 내뿜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노래의 근원에 록의 에너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록이 좋다, 젊음이 좋다, 이 시대를 음악으로 얘기하고 싶다. 그것의 불만, 흥미, 거짓, 사랑을 얘기하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시대의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와〈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같은 노래를 만들 때 나는 더 이상 젊지는 않았지만 난 젊음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폭력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 분노만 얘기해서는 안 된다. 폭력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서태지나 신해철, 강산에 같은 90년대의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대범함과 자유분방한 표현력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좀 건방지게 말한다면 90년대의 음악이 획기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템포 120의 강렬한 로큰롤만이 아니라 이제는 한국의 젊은 힘을 통일시킬 장르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가 원망할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반인 법이다.
강 헌 : 그리고 당신은 활동 무대를 국내를 벗어나 일본으로 진출한다. 물론 이전에도 이성애와 계은숙을 비롯하여 일본 시장에 뛰어든 음악인이 없진 않았지만 아예 일본화 되지 않고 당대의 정상급 스타가 일본 시장에 독자적인 뿌리를 내린 예는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신이 일본에게 준 것, 그리고 일본이 당신에게 준 것은?
조용필 : 82년인가, 일본 문화방송이 개국 30주년 기념으로 한국, 중국, 일본, 홍콩, 필리핀, 태국의 음악인을 초청하여 아시아 뮤직 포럼이라는 30시간짜리 콘서트를 기획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25분 정도를 맡았는데 그 공연 이후 유독 나를 찍은 것 같다. 그리하여 83년 NHK홀부터 시작한 3개 도시 콘서트, 84년 홍콩의 알란 탐과 일본의 다니무라 신지와 고라쿠엔 구장에서 가졌던 팍스 뮤지카로 이어지며 활동이 확장되었다. 처음 일본에 진출할 때만 해도 나이 많은 세대를 제외하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모르는 상황에 적잖이 놀랐다. 말도 못하는 놈이 건너가서 최선을 다해 활동했고 5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야 주는 골든디스크를 세 장 받았다. 일본은 나에게 대범함을 가지게 했고 조그만 나를 크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은 나에게 돈을 벌어준 곳이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그 당시 한국에선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있을리 만무했고 (그래서 12집 이전의 앨범 판권은 지구레코드가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형편이다.) , 그나마 87년부터 프로덕션 체제로 바뀌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국내의 밤무대도 거의 뛰지 않았던 관계로 그나마 들어 오는 돈은 위대한 탄생에 투자하기도 바빴다. 그러니 내 개인의 수익은 일본 말곤 어디서 나왔겠나? 오히려 인기가 떨어졌다는 90년대에 콘서트 위주로 가면서 80년대보다 수입이 늘었을 정도이니 한마디로 나는 한국 음반산업의 희생타나 다름없다.
강 헌 : 7집과 같은 해 이어 나온 8집은 7집과는 전혀 다른 세대, 곧 성인 계층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타이틀 곡인 〈허공〉이 그렇고 아직도 노래자랑이나 주부가요열창 같은 데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양인자 , 김희갑 콤비에 의한 〈그 겨울의 찻집〉과〈바람이 전하는 말〉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젊은 층의 시선을 끈 것은 역시 이 콤비에 의한 , 음악모노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이 노래는 노래운동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풍자한 〈군림한자로의 고독〉으로 개사해서 당시 노찾사에서 활동하고 있던, 당신의 동향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안치환이 불러 대학가와 소극장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80년대 들어 처음 한 해를 거르고 9집이 발표되었다. 이 87년 앨범부터 피로감이 확연히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론 7집의 열기대신 앞에 언급한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같은 초연한 템포의 어덜트 컨템포러리가 장식하고는 있지만 〈청춘시대〉의 기타프레이즈 표절과 〈마도요〉의 제목 시비로 얼룩지기도 했다. 20주년을 목전에 둔 87년은 77년 활동 금지 이후 당신의 음악 이력에서 처음 맞은 위기의 시간이 아니었는가?
조용필 : 그 노래가 개사되어서 불렀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8집은 한마디로 성인세대에 대한 서비스다. 이 세대의 호응은 좋았지만 밑 세대가 많이 떨어져 나갔음을 당시의 콘서트 때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삶에 대한 확신을 노래한 것이다. 확신이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 운동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투쟁은 외로운 것이다. 하려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한때 투쟁했다 그만두면 안 한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도 동연배가 아닐까 하는데, 김민기가 대단하고 멋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투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7년, 9집을 발표할 때 나는 개인적인 불행과 맞물려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했다. 쉬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란 인간은 뭐냐? 회의가 회의를 물고 맴돌았다. 그런 가운데 〈청춘시대〉의 기타 솔로가 잉베이 맘스틴의 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타를 맡았던 당시의 멤버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 노래의 홍보를 그만 두었다. 가장 힘든 시기였다.
강 헌 : 87년은 나라 전체를 보더라도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은 20주년을 기념하는 1988년 , 10집 파트Ⅰ과 파트Ⅱ 앨범을 발표하며 불굴의 의지를 내보인다.〈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의 담담함이 열정적으로 비약한〈Q〉부터〈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모노드라마를 아예 19분30초의 장편 드라마로 확장시킨〈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까지 성인취향으로 꾸민 파트Ⅱ 앨범의 전곡을 양인자, 김희갑 콤비에게 맡겨 8집보다 훨씬 뛰어난 집중력을 과시하는 한편으로 당신이 전곡의 작곡을 맡은 파트Ⅰ 앨범은 7집의 에너지를 다시 불러 일으킨다. 특히 A면의 머릿곡인 〈서울 , 서울 , 서울〉이 올림픽 개최의 들뜬 분위기와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동시에 B면의〈서울 1987년〉은 4집의〈생명〉의 뒤를 이어(작사도 똑같이 전옥숙이다) 고통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다. 이 기묘한 대비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조용필 : 1987년을 잊을 수 없다. 나 개인이 힘든 것은 나 혼자 버티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데 온 나라까지 힘든 건 견디기 어려웠다. 전국이 연기뿐인데 이 전쟁터에서 누가 국민이고 누가 정부인가? 처음에 잘못한 자는 분명 있는데 나중에는 누가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싸움판이 이어졌다. 우리 모두의 패배이다. 이 배는 엎어진 배다. 〈생명〉을 작사했던 전옥숙여사와 토론하며〈서울 1987년〉을 만들었다. 이 노래는 후렴부에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코러스를 처음으로 쓴 곡이기도 하다. 그 코러스를 '민중의 소리'로 상정한 나는 스튜디오에서 제 멋대로 맘대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전체적으로 그곡은 맥박 소리를 형상화한 리듬과 템포가 말이 안 될 정도로 들쭉날쭉한데 그것은 어지러운 세상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의도이다. 이 노래에 이어지는〈회색빛 도시〉의 가사는 MBC 라디오의 안혜란PD가 쓴 것이다. 방송 마치고 술 먹으면서 이 도시의 빌딩은 왜 다들 회색이냐? 이게 무엇을 말하는 건가? 색깔은 희망이고 꿈인데 우리가 보아야 하는것이 왜 몽땅 회색뿐이냐? 뭐 이런 식으로 목소리를 높였더니 그는 형, 왜 나한테 그래? 하고 빠져나간다. 그래서 가사를 한번 써보라고 즉석에서 부탁했다.〈고추잠자리〉와〈못 찾겠다 꾀꼬리〉를 쓴 김순곤이나 앞에 말한 전옥숙 여사와 안혜란PD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나는 전문적인 작사가에게는 거의 가사를 맡기지 않고 그때그때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파트너와 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김순곤은〈고추잠자리〉이후에 전문가가 되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양인자, 김희갑 두분의 인연이 맺어지는 데 기여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음악 생활 20주년을 기념하는 10집의 파트Ⅱ 앨범은 그 콤비에게 맡기고 싶었고, 그 나머지 시간을 90년대를 맞이할 준비에 착수했다. 91년의 〈꿈〉도 이미 그때 만들어놓은 작품이다.〈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은 70년대에 블라인드 페이스의 〈Do What You Like〉를 했던 기억을 상기하며 희갑이 형과 음악 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결과물이다.
강 헌 : 두 장의 10집을 끝으로 당신은 소속사로부터 벗어났다. 60년대에 음악을 시작한 당신이 90년대에 와서야 음반사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1990년의 12집의〈추억속의 재회〉를 차트 톱으로 올려놓으며 그 동안의 축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이 12집과 후기의 최대 걸작 13집《The Dreams》는 당신이 슈퍼스타에서 마에스트로로 옷을 갈아입는 충실하고 가득한 음향의 향연이다. 어느덧 불혹의 고개를 넘은 당신의 음악적 과제는 어떤 것으로 설정했는가?
조용필 : 90... 무엇보다도 80년대의 옷을 벗어야 했다. 하물며 톤까지도. 12집 〈추억속의 재회〉부터 사운드가 강렬하고 무거워졌으며(특히 13집의 B면이 그렇다) 무엇보다 진지해졌다. 대중의 반응에 사로잡히지 않고 록을 바탕으로 서양의 클래식적인 요소, 중국의 민속 악기(14집〈이별의 인사〉에서 쓴 二湖), 라틴 계열의 퓨젼 리듬을 다양하게 접목해 본 것이다. 80년대엔 사실 탁성도 그리 많이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음반사로부터 독립도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가득 찬 소리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의 분위기는 14집 홍보를 할 때 피부로 느꼈다. 〈슬픈 베아트리체〉에 이어 〈고독한 러너〉를 내보냈는데 92년 가을의 모든 채널은 랩 댄스뮤직으로 몰려갔고 그 노래는 제목처럼 더이상 힘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위대한 탄생에게 거개의 트랙을 맡겨본 후속 앨범 15집까지 최악의 실패를 기록했다고 해서 나는 슬퍼하거나 노할 까닭이 없었다. 역사는 지나고 나서야 역사다.
조용필이, 서태지가, 신해철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나는 끝까지 도전하고자 했고 앞으로도 도전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강 헌 : 당신이 언급한 대로 92년부터 모든 시선은 비주얼한 이미지로 몰려갔다. 청각의 거장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고 당신은 가장 힘든 고비를 맞았다. 15집 이후 의욕적으로 시작한 뮤지컬 작업마저 불발로 끝나면서 당신의 지지자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뮤지컬에 대한 관심, 그리고 슬럼프를 넘어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듣고 싶다.
조용필 : 뮤지컬은 내 필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가면 틈만 나면 뮤지컬을 보았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거미 여인의 키스〉는 돈을 주고 번역한 대
본을 보면서 아홉 번을 관람한 적도 있다. 내년 30주년 활동을 벌인 뒤 뮤지컬은 3년 정도의 시간을 집중해서 다시 도전할 것이다. 밀릴 때는 철저히 밀려야 한다. 이 말은 슬럼프 조차도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다간 앞으로 고꾸라진다. 아예 내 손으로 내 구덩이를 판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모든 폭풍이 지나고 난 뒤 그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가 중요하다. 자신만만하게 쓰러져야만 자신감 있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강 헌 : 한국 록의 여명기를 일군 신중현에 대한 헌정 앨범이 발표되고 산울림이 결성 20주년을 기념하여 6년 만에 13집을 발표한 것과 더불어 당신의 3년 만의 신작 16집이 판매고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은 97년 시즌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16집에서 당신은 13집을 공동으로 프로듀스했던 키보드주자 톰 킨과 다시 해후했으며 오케스트라의 편곡이 필요한 노래는 제러미 러복을 파트너로 삼았다. 80년 컴백 이후 당신의 앨범에서 키보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당신이 겨냥한 이번 앨범의 기조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내년의 30주년 기념 앨범은 어떤 컨셉트로 임할 것인가?
조용필 : 나는 기타만큼이나 키보드의 웅장하고 화려한 세계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냥 달리는 심플한 록보다는 핑크 플로이드 같은 사운드 메시지가 충만한 록을 좋아한다. 톰 킨은 13집에서 신선한 경험을 안겨준 인물로, LA에서 내가 머물던 플로리다로 날라와 2박3일 간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면서 준비해 간 6곡의 미팅을 마쳤다. 오케스트레이션이 필요한 나머지 곡을 맡은 제러미 러복은 영국 출신으로 아주 비싼 65세의 베테랑이다. 이번 16집의 핵심은 무리를 하지 않는 것, 가장 중용적인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승부를 내는 것은 내년의 30주년 17집이라고 보았고 , 따라서 히트를 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내년의 앨범에선 나는 16집과는 다른 전략의, 30년 전의 초심으로 달려간 음악을 선보일 것이다. 즉 내 나름대로 록을 정리할 것이며 슬로우곡 또한 그 기조에서 정리할 것이다.
진정한 록은 무엇인가?
나는 다시 이 질문에 도전하려고 한다. 록은 떠드는 것이냐, 얘기해야 하는 것이냐, 함께 나누는 것이냐?
나는 아직 모른다. 만들면서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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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상원님 화이팅,조용필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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