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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인생 40년의 진면목 담았다
42년전 강원도 원주에 6살배기 사내애가 살고 있었다. 머리가 좋 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보다 2년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아 이는 어느날 친구 집에서 통기타 하나를 발견한다. 고사리손으로 기타줄을 퉁겨보던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기타를 만든다고 온 집안을 들쑤셔놓았다. 기타리스트 김광석(48)의 기타를 향한 외 골수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아이는 본격적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 법관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이는 고집스레 기 타를 쳤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룹을 만들고 원주 가톨릭회관에서 정식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집안에 있는 모든 기타를 박살냈고 아이는 가출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가출 은 반복됐다. 실력을 인정받아 미8군 무대에서 연주했지만 경기도 부평 친구집에 얹혀 살던 시절은 노숙자와 다름없었다. 미군 장 교 파티에 불려다니고 기지촌 클럽에서 연주를 했지만 수입은 변 변치 않았다. 어느날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는 그 처참한 몰골에 대성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는 기타를 놓을 줄 몰랐다. 그는 70 년대 전설적인 록밴드였던 ‘히-파이브(HE-5)’의 기타리스트가 된다. 그리고 밴드 ‘들국화’의 객원멤버로 함께 공연하기 시작 한다. 그때가 그의 나이 21세였다. 다른 가수들의 음반 작업에 기타 세션맨으로 나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10년전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기타를 치는 걸 인정하 지 않으셨어요. 그런데도 왜 포기를 하지 않았냐고요? 다른 이유 가 있겠어요? 기타를 사랑했기 때문이죠.”
대중은 그를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 가수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치 고 그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다.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40 00여장의 음반에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어떤 가수들과 일했냐 고 묻자 “어떤 가수와 일하지 않았냐고 묻는 게 더 쉬울 것”이 라고 말한다. 나훈아, 하춘화, 조용필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그에게 기타 빚을 졌다. “40세가 될 때까지 너무나 바쁘게 살았어요. 하루에 음반 1장꼴 로 기타 연주를 해줬으니까요. 언젠가는 보름동안 잠 한숨 못잔 적도 있었어요. 거의 미친 짓이었죠.”
그는 29세가 되던 해 음주가무가 허용되지 않는 유일한 날인 현 충일에 약혼식을 했다. 음주가무를 즐길 수 없는 유일한 날인 현 충일을 택한 것이다.
정말 바빴던 탓이었다. 바쁘다보니 수입이 늘었다. 24세때부터 월수입 500만원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재테크만 잘 했어도 지금 떼부자가 됐을 것”이란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은 커져갔다. “다른 사람 음악만 돕다보니 정작 내 음악을 못하고 있다는 자 책감이 들었어요. 내가 이러려고 죽자살자 기타만 쳤던가 하는 후회같은거요. 내 음악적 색깔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생 겼죠.”
지난 95년 그는 기타를 잡은 지 30여년만에 집을 팔아 첫 앨범을 냈다. 그리고 2년동안 각지를 돌며 콘서트도 가졌다. 하지만 지 난 세월동안 너무 무리한 탓이었을까. 그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 가진 상태였다. 2001년 갑상선기능항진증이란 진단을 받고 병원 에 4차례나 입원했다.
“지금은 다 나았어요. 오랜만에 휴식시간을 가졌고 음악을 다시 시작했죠.” 김광석은 재도전에 나섰다. 최근 2번째 앨범 ‘비밀’을 발표한 것이다. 앨범에는 각기 다른 색깔의 기타 연주가 CD 4장에 담겨 있다. 국내에서나 외국에서나 기타 연주로만 된 CD 4장은 전무 후무한 일이다. 그는 앨범에서 록, 재즈, 보사노바, 탱고는 물론 클래식 연주까지 아울렀다. 40년 기타 인생이 깃든, 소장가치가 충분한 ‘예술작품’이다. 우리 가요계에 이만한 성과물도 없을 듯 싶다.가수 장사익이 그의 연주에 대해 ‘최고’라고 치켜세울 만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설명은 당황스럽다. 대놓고 자랑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성과물을 가차없이 깎아내린다. 세션을 오 래한 탓에 ‘객관적인’눈을 갖게 됐기 때문.
오랫동안 세션을 하다보니 생긴 습관이다. 아무리 연주를 잘해도 음악과 어울리지 않으면 녹음과정에서 사라지는 게 세션의 세계 다. “이번 앨범은 그저 학습에 불과해요. 이미 제 기억에서 지워졌 어요. 다음 앨범 만드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저는 대 중이 이해하고 좋아하는 ‘소리’를 연주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 렇다고 인기에 신경 쓰는 것은 절대 아니죠. 인기에 흔들리다보 면 ‘좋은 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인기에는 결코 연연하지 않 습니다. 인기란 ‘좋은소리’를 내는데 방해만 될 뿐이거든요.” 김광석은 오는 7월1~2일 서울 충정로 문화일보홀에서 공연할 예 정이다. 02-3701-5757 이승형기자 lsh@munhwa.co.kr
42년전 강원도 원주에 6살배기 사내애가 살고 있었다. 머리가 좋 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보다 2년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아 이는 어느날 친구 집에서 통기타 하나를 발견한다. 고사리손으로 기타줄을 퉁겨보던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기타를 만든다고 온 집안을 들쑤셔놓았다. 기타리스트 김광석(48)의 기타를 향한 외 골수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아이는 본격적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 법관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이는 고집스레 기 타를 쳤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룹을 만들고 원주 가톨릭회관에서 정식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집안에 있는 모든 기타를 박살냈고 아이는 가출했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가출 은 반복됐다. 실력을 인정받아 미8군 무대에서 연주했지만 경기도 부평 친구집에 얹혀 살던 시절은 노숙자와 다름없었다. 미군 장 교 파티에 불려다니고 기지촌 클럽에서 연주를 했지만 수입은 변 변치 않았다. 어느날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는 그 처참한 몰골에 대성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는 기타를 놓을 줄 몰랐다. 그는 70 년대 전설적인 록밴드였던 ‘히-파이브(HE-5)’의 기타리스트가 된다. 그리고 밴드 ‘들국화’의 객원멤버로 함께 공연하기 시작 한다. 그때가 그의 나이 21세였다. 다른 가수들의 음반 작업에 기타 세션맨으로 나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10년전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기타를 치는 걸 인정하 지 않으셨어요. 그런데도 왜 포기를 하지 않았냐고요? 다른 이유 가 있겠어요? 기타를 사랑했기 때문이죠.”
대중은 그를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 가수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치 고 그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다.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40 00여장의 음반에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어떤 가수들과 일했냐 고 묻자 “어떤 가수와 일하지 않았냐고 묻는 게 더 쉬울 것”이 라고 말한다. 나훈아, 하춘화, 조용필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그에게 기타 빚을 졌다. “40세가 될 때까지 너무나 바쁘게 살았어요. 하루에 음반 1장꼴 로 기타 연주를 해줬으니까요. 언젠가는 보름동안 잠 한숨 못잔 적도 있었어요. 거의 미친 짓이었죠.”
그는 29세가 되던 해 음주가무가 허용되지 않는 유일한 날인 현 충일에 약혼식을 했다. 음주가무를 즐길 수 없는 유일한 날인 현 충일을 택한 것이다.
정말 바빴던 탓이었다. 바쁘다보니 수입이 늘었다. 24세때부터 월수입 500만원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재테크만 잘 했어도 지금 떼부자가 됐을 것”이란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은 커져갔다. “다른 사람 음악만 돕다보니 정작 내 음악을 못하고 있다는 자 책감이 들었어요. 내가 이러려고 죽자살자 기타만 쳤던가 하는 후회같은거요. 내 음악적 색깔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생 겼죠.”
지난 95년 그는 기타를 잡은 지 30여년만에 집을 팔아 첫 앨범을 냈다. 그리고 2년동안 각지를 돌며 콘서트도 가졌다. 하지만 지 난 세월동안 너무 무리한 탓이었을까. 그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 가진 상태였다. 2001년 갑상선기능항진증이란 진단을 받고 병원 에 4차례나 입원했다.
“지금은 다 나았어요. 오랜만에 휴식시간을 가졌고 음악을 다시 시작했죠.” 김광석은 재도전에 나섰다. 최근 2번째 앨범 ‘비밀’을 발표한 것이다. 앨범에는 각기 다른 색깔의 기타 연주가 CD 4장에 담겨 있다. 국내에서나 외국에서나 기타 연주로만 된 CD 4장은 전무 후무한 일이다. 그는 앨범에서 록, 재즈, 보사노바, 탱고는 물론 클래식 연주까지 아울렀다. 40년 기타 인생이 깃든, 소장가치가 충분한 ‘예술작품’이다. 우리 가요계에 이만한 성과물도 없을 듯 싶다.가수 장사익이 그의 연주에 대해 ‘최고’라고 치켜세울 만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설명은 당황스럽다. 대놓고 자랑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성과물을 가차없이 깎아내린다. 세션을 오 래한 탓에 ‘객관적인’눈을 갖게 됐기 때문.
오랫동안 세션을 하다보니 생긴 습관이다. 아무리 연주를 잘해도 음악과 어울리지 않으면 녹음과정에서 사라지는 게 세션의 세계 다. “이번 앨범은 그저 학습에 불과해요. 이미 제 기억에서 지워졌 어요. 다음 앨범 만드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저는 대 중이 이해하고 좋아하는 ‘소리’를 연주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 렇다고 인기에 신경 쓰는 것은 절대 아니죠. 인기에 흔들리다보 면 ‘좋은 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인기에는 결코 연연하지 않 습니다. 인기란 ‘좋은소리’를 내는데 방해만 될 뿐이거든요.” 김광석은 오는 7월1~2일 서울 충정로 문화일보홀에서 공연할 예 정이다. 02-3701-5757 이승형기자 lsh@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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