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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필신화, 당당한 한국대중예술의 역사 ]
역사는 시간의 누적이다.
이 누적의 두터움은 그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두텁게 하고 단단하게 한다.
이 효과를 알기에 모든 사회는 자랑거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역사가 얼마나 두터운가를 자랑한다.
그렇게 한다.
시간 누적의 소산인 유무형의 산물에 대한 대접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국가보다 푸대접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사회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반만년' 의 역사를 명함으로 내민다.
대중예술 혹은 대중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를 여러가지 작은 역사들의 겹쳐짐이라 할때 대중의 일상적 감수성과
미학 또는 크건 소소하건 대중들의 사연과 밀접히 만나고
또 대중의 그것들을 생산해 내는 대중 예술의 역사의 두터움은 한편으로는 큰 역사를,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 감수성과 미학의 결을 섬세하게 하고 폭을 넓힌다.
그렇기에 예의 두터움과 폭은 대중예술 작품과 예술가들의 수와 비례할 수 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 대중 예술의 역사에 그런 작품과 예술가들을 얼마나 만날 수 있는가라는.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의 대중 예술이 본격적으로 출발한 이후만 따지더라도
작품과 예술가의 수는 아마 대한민국 예비군 숫자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대중예술 작품이나 창작자에도
높낮이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상대적으로 내공이 어느정도 혹은 아주 높은 예술가들의 존재가
대중예술 역사의 질과 높이를 가늠하여 주기 마련이고 대중들의 감수성과
미학의 높낮이 역시 그에 조응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위의 질문에 서면 자꾸만 작아진다.
기억하자면 90년대 이전까지의 대중예술은 천대받고 따돌림 당하던
방외의 예술이었다.
아니 예술이라는 표현이 허락되지 않던 천민부락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 '딴따라'라는 표현이 하나의 애칭이자 어떨때는 자랑의 표시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예전에 그것은 '마당쇠'라는 표현과 단지 사촌간 이었을 뿐이다.
대중 예술가는 그 표현의 굴욕감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민 중에서 난세를 구하는 영웅과 인걸이 종종 나타난다는 신화가 대중예술,
그중 대중음악에도 만들어진다. 온갖 모욕과 푸대접 속에서도
그것을 오히려 대중 예술의 영광을 위한 씨앗불로 삼는 대중음악의 찬연한
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제각기 선별의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신중현, 김추자, 조용필등을 어두운 대중 음악의 창공에 빛나는
샛별로 본다는 말이다.
신중현의 표현대로 그들이야말로 '리얼 뮤지션(Real Musician)'이라
생각한 다는 것이다.
서태지, 김종서를 비롯한 90년대 이후의 수많은 뮤지션들이 문화 산업의 폭발적인
확대 속에서 돈과 명예 그리고 온갖 재산으로 자신의 영토를 넓혀 갔지만
신중현이나 조용필들이 활동했던 때는 그러한 영토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그들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사회적 대우는 물론 마찬가지이고 오직 음악에 대한 '헝그리 정신'이
뱉어내는 패기와 기약 없는 열정많이 그들의 재산일 뿐이었다.
알다시피 대중음악에 있어서 1975년 이후는 암흑의시대였디.
군사 독재 정권의 국민들 군기잡기 정책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었던 것은
대중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던,
그러나 자신의 보호에는 터무니 없이 나약하던 대중 음악이었다.
대마초 흡연 혐의를 계기로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반 까지의 역사는 일거에 학살 당한 것이다.
이장희, 송창식, 신중현, 어니언스 등등은 군사정부가 만행한 마녀 사냥과
분서 갱유에 의해 지하로 쫓겨 가야만 했다.
그 마녀 사냥의 여진위에 조용필이 있었고
그도 마찬가지로 추방당해야 했다.
1976년 부산 음악 다방의 DJ손에서 돌기 시작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태풍은
서서히 북상하면서 전국을 강타했고 남한 전역은 순식산에
그 노래 속에 빠져 들어갓다.
촛불의 마직막 불길이 가장 밝듯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나치게 밝은 빛을 내고는 사그러 들어야만 했다.
사실 처음에 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의적이 아니었다.
청소년기라는 나이가 가지고 있던 이른바 '뽕짝'풍의 노래에 대한 은근한 무시가
작용해서기도 하지만 조용필이란 가수 그 자체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서양의 포코송이나 록 음악의 세례를 막 받기 시작하던 때였고
또 한켠으로는 물론 그 나이의 음악을 보는 눈이 꼭 그 나이 수준의 평균 이상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소위 제도 음악계에서 추방된 조용필을 그래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주간지 광고란에서 뿐이었더.
거기서 조용필은 위대한 밴드 <위대한 탄생>을 거느리고
사보이 호텔 나이트 클럽의'삐끼'가 되어 있었다.
조용필에게는 배고픈 시절이었을 터,
그 배고픔은 끼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변방으로 귀양간 제왕의 쓸쓸함과 외로움에서 오는 것일 터였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조용필의 진가가 오롯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은
1980년 '창밖의 여자' 를 듣고 나서 부터 였다.
3년간의 귀양에서 돌아 온 조용필은 그냥 돌아 온 것이 아니라 복귀 혹은
귀향이라는 단어의 연출이 상상해 낼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연출 하면서
돌아 온 것이었디. 비유컨대 '돌아온 장고'가 기관총을 들고와
자신을 쫓아낸 세상을 제압했다면 '창밖의 여자'를 들고 돌아 온 조용필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세상을 제압한 것이다.
'돌아온 용필'은 달랐다.
깊은 간난이 사람의 깊이를 더해 주듯이 그의 과거의 쓸쓸함과 상처는
그의 음악적 깊이와 폭을 이전과 아주 다르게 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추방의 세월은 그의 음악사에서 대단히 강력한 전환점이 아닐 수 없다.
마치 흑도무림의 독랄한 암수에 크게 다쳐 상처입은 고수가 규화보전 같은 비전을
발견하고 그것을 피터지게 터득한 후 다시 중원에 득의의 몸가집으로 재출현하는
무협지의 스토리와 비견될 만 했다.
'창밖의여자'에서부터 촛불, 미워미워미워, 못찾겠다 꾀꼬리, 단발머리, 눈물의 파티,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대발길이 머무는 곳에, 서울서울서울, Q등에 이르기까지
80년대 조용필 음악의 계보는 80년대 대중 음악 전체의 계보로
확장 될 수 있기도 하다.
80년대의 조용필은 이전과확실히 달랐다.
예리한 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창밖의 여자' 이후
조용필 음악의 이력은 조용히 그러나 자신의 음악적 의도가 분명히 깃들어 잇는
실험과 변화의 과정이었다.
특히나 그의 음악적 안목과 호소력은 성숙의 느낌을 강하게 자아냈다.
좀더 짙게 이야기 하자면 난숙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그 난숙은 단지 '세월의 오래됨' 혹은 '묵은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적 성숙이 항상 작품의 성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양자가 자연스럽게 서로 주고 받는 관계로 안착되어 갔던 것이다.
80년대 당시조용필의 노래에서 다양한 세대가 젖어들어 갔던 요인은
한편으로는 그의 부단한 음악적 변화가 주는 힘으로 인해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성숙함이 깃들어있는 음악적 나이테의 반영때문이었다.
사실 모든 세대가 다 선호하고 열광하는 뮤지션은 없다.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사기다.
조용필의 경우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이변이었다.
그러나 이변의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햇다.
엄밀한 의미에서 조용필의 시대는 80년대를 끝으로 조용히 잦아들어 간다.
풍요와 가벼움의 미학이 밀려오는 90년대,
그것에 어울리는 음악적 감수성에 성장한 이른바 '신세대'들에게
조용필은 점점 '왕년의 가수' 로만 자리잡아 갔다.
영국의 대중예술은 비틀즈의전설이 있었기에 역사가 되었고
미국의 그것은 엘비스의 신화가 있었기에 또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회고하는 역사가 아니다.
지금도 그들의 음악은 살아있는 음악이 되기에 그들의 역사는
현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역사가 되기에 그들 대중예술의 살집은 여전히 두텁고
단단하다.
대중예술 역사의 현재화는 구체적으로 말해
지난 것을 끊임없이 현재로 호출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반구입, 공연장소,
수용자 프로그램의 개발등이 불가피한 최소 경비로 지불되어야 한다.
자동차 한대 글리기 위해서라도 최소경비가 드는 마당에 심지어
역사라는 것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의 경우 아직은 척박하다.
새로운 상품에만 몰려가는 문화산업 생산자들은,
설혹 한때는 신화였을지라도 현재 돈이 안되면,
조용필 같은 뮤지션도 그냥 괄호밖일 뿐이다.
소비에만 탐닉하는 수용자들의 소극성 그리고 대중 예술에 대한 부양이
그들의 몫이라는 자각이 모자란 측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경비 지불에 인색 할 뿐이다.
김추자가 신중현이 그리고 조용필등이 현재의 역사로서 다시 초대될 때만
우리 대중 예술이 명실 상부한 예술의 역사, 문화의 역사가 될 수 있다.
드문드문이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도 그 뿌리와 과정을 온몸으로 증거해온
뮤지션 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뿌리와 과정을 온전히 복원하는 일이다.
조용필 미학의 확인은 그런 작업의 연장선 위에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부언컨대 대중음악사가 당당한 대중예술사로 자리잡기 위해서도 이는 절대로
생략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월간 SEE> 이 성욱 (문화비평가)
역사는 시간의 누적이다.
이 누적의 두터움은 그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두텁게 하고 단단하게 한다.
이 효과를 알기에 모든 사회는 자랑거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역사가 얼마나 두터운가를 자랑한다.
그렇게 한다.
시간 누적의 소산인 유무형의 산물에 대한 대접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국가보다 푸대접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사회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반만년' 의 역사를 명함으로 내민다.
대중예술 혹은 대중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를 여러가지 작은 역사들의 겹쳐짐이라 할때 대중의 일상적 감수성과
미학 또는 크건 소소하건 대중들의 사연과 밀접히 만나고
또 대중의 그것들을 생산해 내는 대중 예술의 역사의 두터움은 한편으로는 큰 역사를,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 감수성과 미학의 결을 섬세하게 하고 폭을 넓힌다.
그렇기에 예의 두터움과 폭은 대중예술 작품과 예술가들의 수와 비례할 수 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 대중 예술의 역사에 그런 작품과 예술가들을 얼마나 만날 수 있는가라는.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의 대중 예술이 본격적으로 출발한 이후만 따지더라도
작품과 예술가의 수는 아마 대한민국 예비군 숫자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대중예술 작품이나 창작자에도
높낮이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상대적으로 내공이 어느정도 혹은 아주 높은 예술가들의 존재가
대중예술 역사의 질과 높이를 가늠하여 주기 마련이고 대중들의 감수성과
미학의 높낮이 역시 그에 조응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위의 질문에 서면 자꾸만 작아진다.
기억하자면 90년대 이전까지의 대중예술은 천대받고 따돌림 당하던
방외의 예술이었다.
아니 예술이라는 표현이 허락되지 않던 천민부락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 '딴따라'라는 표현이 하나의 애칭이자 어떨때는 자랑의 표시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예전에 그것은 '마당쇠'라는 표현과 단지 사촌간 이었을 뿐이다.
대중 예술가는 그 표현의 굴욕감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민 중에서 난세를 구하는 영웅과 인걸이 종종 나타난다는 신화가 대중예술,
그중 대중음악에도 만들어진다. 온갖 모욕과 푸대접 속에서도
그것을 오히려 대중 예술의 영광을 위한 씨앗불로 삼는 대중음악의 찬연한
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제각기 선별의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신중현, 김추자, 조용필등을 어두운 대중 음악의 창공에 빛나는
샛별로 본다는 말이다.
신중현의 표현대로 그들이야말로 '리얼 뮤지션(Real Musician)'이라
생각한 다는 것이다.
서태지, 김종서를 비롯한 90년대 이후의 수많은 뮤지션들이 문화 산업의 폭발적인
확대 속에서 돈과 명예 그리고 온갖 재산으로 자신의 영토를 넓혀 갔지만
신중현이나 조용필들이 활동했던 때는 그러한 영토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그들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사회적 대우는 물론 마찬가지이고 오직 음악에 대한 '헝그리 정신'이
뱉어내는 패기와 기약 없는 열정많이 그들의 재산일 뿐이었다.
알다시피 대중음악에 있어서 1975년 이후는 암흑의시대였디.
군사 독재 정권의 국민들 군기잡기 정책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었던 것은
대중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던,
그러나 자신의 보호에는 터무니 없이 나약하던 대중 음악이었다.
대마초 흡연 혐의를 계기로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반 까지의 역사는 일거에 학살 당한 것이다.
이장희, 송창식, 신중현, 어니언스 등등은 군사정부가 만행한 마녀 사냥과
분서 갱유에 의해 지하로 쫓겨 가야만 했다.
그 마녀 사냥의 여진위에 조용필이 있었고
그도 마찬가지로 추방당해야 했다.
1976년 부산 음악 다방의 DJ손에서 돌기 시작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태풍은
서서히 북상하면서 전국을 강타했고 남한 전역은 순식산에
그 노래 속에 빠져 들어갓다.
촛불의 마직막 불길이 가장 밝듯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나치게 밝은 빛을 내고는 사그러 들어야만 했다.
사실 처음에 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의적이 아니었다.
청소년기라는 나이가 가지고 있던 이른바 '뽕짝'풍의 노래에 대한 은근한 무시가
작용해서기도 하지만 조용필이란 가수 그 자체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서양의 포코송이나 록 음악의 세례를 막 받기 시작하던 때였고
또 한켠으로는 물론 그 나이의 음악을 보는 눈이 꼭 그 나이 수준의 평균 이상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소위 제도 음악계에서 추방된 조용필을 그래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주간지 광고란에서 뿐이었더.
거기서 조용필은 위대한 밴드 <위대한 탄생>을 거느리고
사보이 호텔 나이트 클럽의'삐끼'가 되어 있었다.
조용필에게는 배고픈 시절이었을 터,
그 배고픔은 끼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변방으로 귀양간 제왕의 쓸쓸함과 외로움에서 오는 것일 터였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조용필의 진가가 오롯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은
1980년 '창밖의 여자' 를 듣고 나서 부터 였다.
3년간의 귀양에서 돌아 온 조용필은 그냥 돌아 온 것이 아니라 복귀 혹은
귀향이라는 단어의 연출이 상상해 낼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연출 하면서
돌아 온 것이었디. 비유컨대 '돌아온 장고'가 기관총을 들고와
자신을 쫓아낸 세상을 제압했다면 '창밖의 여자'를 들고 돌아 온 조용필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세상을 제압한 것이다.
'돌아온 용필'은 달랐다.
깊은 간난이 사람의 깊이를 더해 주듯이 그의 과거의 쓸쓸함과 상처는
그의 음악적 깊이와 폭을 이전과 아주 다르게 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추방의 세월은 그의 음악사에서 대단히 강력한 전환점이 아닐 수 없다.
마치 흑도무림의 독랄한 암수에 크게 다쳐 상처입은 고수가 규화보전 같은 비전을
발견하고 그것을 피터지게 터득한 후 다시 중원에 득의의 몸가집으로 재출현하는
무협지의 스토리와 비견될 만 했다.
'창밖의여자'에서부터 촛불, 미워미워미워, 못찾겠다 꾀꼬리, 단발머리, 눈물의 파티,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대발길이 머무는 곳에, 서울서울서울, Q등에 이르기까지
80년대 조용필 음악의 계보는 80년대 대중 음악 전체의 계보로
확장 될 수 있기도 하다.
80년대의 조용필은 이전과확실히 달랐다.
예리한 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창밖의 여자' 이후
조용필 음악의 이력은 조용히 그러나 자신의 음악적 의도가 분명히 깃들어 잇는
실험과 변화의 과정이었다.
특히나 그의 음악적 안목과 호소력은 성숙의 느낌을 강하게 자아냈다.
좀더 짙게 이야기 하자면 난숙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그 난숙은 단지 '세월의 오래됨' 혹은 '묵은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적 성숙이 항상 작품의 성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양자가 자연스럽게 서로 주고 받는 관계로 안착되어 갔던 것이다.
80년대 당시조용필의 노래에서 다양한 세대가 젖어들어 갔던 요인은
한편으로는 그의 부단한 음악적 변화가 주는 힘으로 인해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성숙함이 깃들어있는 음악적 나이테의 반영때문이었다.
사실 모든 세대가 다 선호하고 열광하는 뮤지션은 없다.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사기다.
조용필의 경우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이변이었다.
그러나 이변의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햇다.
엄밀한 의미에서 조용필의 시대는 80년대를 끝으로 조용히 잦아들어 간다.
풍요와 가벼움의 미학이 밀려오는 90년대,
그것에 어울리는 음악적 감수성에 성장한 이른바 '신세대'들에게
조용필은 점점 '왕년의 가수' 로만 자리잡아 갔다.
영국의 대중예술은 비틀즈의전설이 있었기에 역사가 되었고
미국의 그것은 엘비스의 신화가 있었기에 또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회고하는 역사가 아니다.
지금도 그들의 음악은 살아있는 음악이 되기에 그들의 역사는
현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역사가 되기에 그들 대중예술의 살집은 여전히 두텁고
단단하다.
대중예술 역사의 현재화는 구체적으로 말해
지난 것을 끊임없이 현재로 호출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반구입, 공연장소,
수용자 프로그램의 개발등이 불가피한 최소 경비로 지불되어야 한다.
자동차 한대 글리기 위해서라도 최소경비가 드는 마당에 심지어
역사라는 것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의 경우 아직은 척박하다.
새로운 상품에만 몰려가는 문화산업 생산자들은,
설혹 한때는 신화였을지라도 현재 돈이 안되면,
조용필 같은 뮤지션도 그냥 괄호밖일 뿐이다.
소비에만 탐닉하는 수용자들의 소극성 그리고 대중 예술에 대한 부양이
그들의 몫이라는 자각이 모자란 측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경비 지불에 인색 할 뿐이다.
김추자가 신중현이 그리고 조용필등이 현재의 역사로서 다시 초대될 때만
우리 대중 예술이 명실 상부한 예술의 역사, 문화의 역사가 될 수 있다.
드문드문이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도 그 뿌리와 과정을 온몸으로 증거해온
뮤지션 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뿌리와 과정을 온전히 복원하는 일이다.
조용필 미학의 확인은 그런 작업의 연장선 위에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부언컨대 대중음악사가 당당한 대중예술사로 자리잡기 위해서도 이는 절대로
생략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월간 SEE> 이 성욱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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