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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요즘입니다.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록밴드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가 아닌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가수와 연주인은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서입니다.
필팬들중 다수는 현재의 "위대한 탄생"의 멤버들 이름을 압니다. 더 관심이 많은 분은 개인 프로필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위대한 탄생"은 알지만, 그 멤버들은 잘 모를 겁니다.(최근 tv에 출연한 최희선씨와 이태윤씨는 좀 알지도 모르지만....)
1. 신중현과 엽전들 ------> 엽전들 멤버 아십니까?
2. 사랑과 평화 -------> <울고 싶어라>= 이남이는 알지만 멤버 이름을 아시는 분이 얼마나 될지?
3. 산울림------------------> 3형제로 구성되어 있었다는건 알지 모르지만 "김창완"씨 빼고 두분 이름을 아시는 분은?
4.송골매-------------------> 배철수,구창모씨는 알아도 나머지 멤버 이름은?
5. 작은거인----------------> 김수철씨외에 나머지 멤버는?
6. 윤수일밴드 --------------> 윤수일씨는 아는데 다른 분은?
7. 최헌과 불나비 ------------> 최헌씨는 아는데 나머지 분은?
8.함중아와 무서운 아이들 -----> 함중아씨는 알수 있어도....
9. 넥스트----------------------> 신해철씨외에는?
10. 들국화 --------------------> 전인권씨외에 나머지 멤버는?
11. 윤도현밴드 ----------------> 윤도현씨외에 나머지 멤버는?
12. 시나위 --------------------> 김종서,서태지씨가 이후 가수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신대철씨외에 그 멤버를 알 수 있었을런지?
13. 부활 -----------------------> 이승철씨(다시 결별한 것으로 압니다만)외에 잘해야 김태원씨정도?
이런 문제제기는 대중이 록밴드( 위대한 탄생 포함해서)의 구성원 모두를 알아야만 한다는 의무를 이야기함이 아닙니다. 저역시 모릅니다.아마 앞으로도 계속 모를지도 모릅니다.
이야기 하고 싶은건 연주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에게 "인기"란 없습니다. 매니아 사이에서 "고수"로 인정받는 몇몇분들을 제외하곤 연주인들에게 대중의 시선은 쏠리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음악을 연주하는건 연주인들입니다. 작곡,편곡을 하는 사람이 음악을 만들어내지만, 대중에게 음악을 들려주는건 연주인입니다.
연주인으로서는 대중의 "인기"가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조용필음악의 한 요소인 "위대한 탄생"을 이야기할 때 대중의 시선에서 이야기하느냐, 연주인의 시선에서 이야기하느냐는 생각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트롯이 주쟝르이던 시절에 이런 문제는 더 컸을 겁니다. 작곡/작사자는 알려지지만 배경음을 연주해주던 그 많은 연주인들은 이름이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락을 놓고 보아도, 이미 본바와 같이 대부분의 연주인은 "인기"와는 별 관련이 없는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록뮤지션으로 각광받는 분들이 실상은 작곡/편곡면에서 그리고 보컬을 담당했다는 면에서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지
연주인 누가 록뮤지션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는?> 이런 조사는 있는데, < 우리나라 대중음악에서 가장 기타/베이스/키보드/드럼/건반/트럼펫/바이올린등등 잘 연주하는 연주인은?> 이런 조사는 보질 못했습니다.
이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지 의문입니다.
*ps: 그는 71년에는 '김트리오'라는 그룹을 결성해 활동을 했다.
----> 조용필님 시각에서 보면 "결성해"이지만 김트리오를 결성한 분(김대환)의 시각에서 보면 "무명"인 조용필님을 발탁해서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기타리스트출신의 조용필님이 <돌부항>으로 "인기"를 얻고 3년간의 활동정지후 80년대의 "조용필시대"를 연 점을 당시 연주인으로 활동했던 분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른바 <연주인>과 <가수>의 구도가 그려집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 견해로는 "미꾸라지 용된걸" 시기하는것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김트리오>에서 조용필님의 보컬이 눈에 띄지 못했다면 <돌부항>도 없었고 조용필님 역시 연주인의 길을 걷다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예상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말하고 싶은건, 다수의 조용필폄하쪽은 < 연주인> VS < 대중가수>의 구도만 그려놓고 이야기하지 보컬실력을 쌓아온 "조용필" 에는 촛점을 안 맞춘다는 점입니다. 또 작곡/편곡 실력을 쌓아온 "조용필" 의 노력은 별로 관심을 안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탄생을 결성해서(프로젝트 밴드) 밴드의 방향성과 조화에 대해 고민하고 이끌어간 총감독으로서의 "조용필"에 대한 평가에도 인색합니다.
그 이유는 기본 시선이 연주인에게 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연주하는 모든 연주인에게 향해있는건 또 아닙니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대중에게 만족을 준 대중음악인은 <연주인>이든,<대중가수>이든, <작사자>이든, <작곡/편곡자>이든 누구든간에 만족을 준만큼
대중의 관심을 받고 평가를 받으면 좋은 일입니다. 대중음악 발전을 위해서..... 그런데 방법이 틀렸습니다. "조용필"을 폄하해서 이런 것들을 얻어내려 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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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글 내용중에 제가 관심을 지닌 부분이 있어서 좀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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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탄생 역시 ’70년대와는 다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전까지의 밴드에서는 기타가 중심이었던데 반해 위대한 탄생은 키보드가 중심이었다. '단발머리', '촛불', '못찾겠다 꾀꼬리'처럼 키보드의 역할이 극대화된 곡도 적지 않았다. 위대한 탄생이 고정적인 의미의 록 밴드에서 벗어나 있는 데에는 프로젝트 밴드라는 점 외에 이 같은 악기 편성도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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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중현씨계열이 조용필락을 못마땅해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키보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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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기타연주자인 신중현씨음악 매니아들은 키보드를 중시한 연주는 "기계조작"에 의해 화려함으로 대중을 현혹하지만 "정통록"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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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올려주신 내용중 2번의 말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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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중현이 발군의 기타솜씨와 특유의 카리스마로 록 음악의 진수를 보여줬다면 '위대한 탄생' 은 철저히 밴드 지향적인 팀워크를 보여주었던 점이 달랐다.
>조용필의 경우는 곡도 곡이지만 연주력을 어떻게하면 극대화시키는가? 에
>심혈을 기울였던 뮤지션이었다.
>다시 말해서 레코딩 엔지니어의 역할과 수많은 이펙터효과를 적재적소에 이용함으로써 90년대 록의 기수라는 '넥스트'의 신해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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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주자인 신중현씨가 80년 활동규제가 풀린 이후에 뮤직파워를 결성해서 재기를 노렸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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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대중이 조용필음악의 화려한 사운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기타중심의 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신중현음악매니아들은 생각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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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추측입니다. 이런 추측까지 하는 이유는 팬으로 20여년 자리한 저에게 조용필폄하(개인수준이 아닌)는 " 그 이유를" 캐보고 싶은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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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을 빌어 제 이야기를 한 점은 글 내용중에 일부를 발췌해서 글을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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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궁금합니다. 제 추측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실 분들의 글을 기다립니다. 신중현씨를 성토하는 차원이 아니라 조용필음악폄하에 대한 진지한 토론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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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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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가요계의 신화, 한국 대중가요계의 큰 획을 그은 진정한 국민가수, 조용필. 그는 30년이 넘는 자신의 음악 생활을 통해 시대를 초월하면서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으로 대중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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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68년 경동고를 졸업한 후, 음악을 시작했다. 69년 '에드킨스'의 보컬주자로 미군부대 중심으로 활동을 한 그는 71년에는 '김트리오'라는 그룹을 결성해 활동을 했다. 그후 79년에는 '위대한 탄생'을 조직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75년 최고의 히트곡이자 전국민가요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대마초사건에 휘말려 잠시 가요계를 떠나게 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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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그는 80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인 '창밖의 여자'로 어마어마한 판매고와 인기를 누리게 되고, 1집 수록곡 중 '단발머리'와 '한오백년', 2집 '촛불',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3집의 '미워미워미워', '고추잠자리' 등의 연이은 히트를 거두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는 81년 7월 '카네기홀 초청공연'을 비롯해 82년에는 '일본 NHK 리사이틀홀공연', '미국 11개 도시 순회공연' 등으로 활동영역을 일본과 미국으로 넓히게 된다. 82년 4집에서는 '못찾겠다 꾀꼬리'와 '비련'이 최고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국내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그의 인기는 멈출줄 몰랐고 국내에서 뿐 아니라 매년 일본과 미국 순회공연을 해 일본에서는 한국가수로서 최고 인기 가수 1위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그는 86년 말 "더 이상 가수왕에 오르지 않겠다"는 자진 반납 선언,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88년 5월 Part I, II의 형식으로 10집을 발표, '서울 서울 서울'과 '큐(Q)'로 인기를 모았고 90년 12집 '추억속의 재회', 91년에는 꿈이라는 테마로 발표한 13집 '꿈', 92년 14집 '고독한 러너', '이별의 인사' 등의 히트곡을 내놓았고, 94년 15집 '남겨진 자의 고독'을 발표하였다. 97년 3년 만에 내놓은 16집은 YS의 심정을 토로한 가사를 담고 있다고 해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타이틀곡인 '바람의 노래'와 신세대풍의 '판도라의 상자', 성인 취향의 '애상' 등으로 구성돼 모든 장르를 망라한 배려가 돋보인 음반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98년 데뷔 30주년을 맞은 그는 [조용필 30주년 기념음반 Part 1]을 발표, 음악 생활 30년을 총정리하기도 했다.(베스트 앨범은 Part3까지 발매되었다.) 그가 발표한 정규 앨범은 17장(지금까지 음반 판매량은 대략 1500만장에 다다른다). 그는 트로트에서 스탠다드 팝, 로큰롤, 록, 민요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구, 발전시키면서 카리스마를 가진 보컬과 완벽한 자기 관리로 꾸준한 음악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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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은 '최초'라는 기록을 지닌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이기도 하다. 80년대 초반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일본 등 해외공연에 나서 후배 가수들에게 해외진출의 물꼬를 터주었음은 물론이고 81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82년 일본 각지에서 여러차례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88년엔 베이징에서 공연한 첫 한국 대중음악인이 됐고, 92년엔 외국인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예술공연장인 '일본 아오야마 극장' 무대에 서는 기록을 남겼다. 1999년 12월엔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대중음악인으로는 처음으로 콘서트를 열어 최고의 무대를 선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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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는 영원한 가객 조용필, 장르와 장르가 뒤섞여 처음 들어본 희귀한 사운드들이 속출하고 있는 이 시대에 조용필의 '단발머리'나 '고추잠자리'는 지금 들어도 시대에 뒤떨어지지않는 명곡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그의 음악 정신과 노력, 뜨거운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tube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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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한마디로 조용필의 시대였다. ’80년 드라마 주제곡 '창밖의 여자' 히트로 시작해 그 해만 1,2집에서 '단발머리', '촛불'이 연속 히트했다. 이어 '미워미워미워', '고추잠자리', '일편 단심 민들레야'(이상 3집 ’81년), '못찾겠다 꾀꼬리', '비련'(4집 ’82년), '친구여'(5집 ’83년), '어제, 오늘, 그리고',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이상 7집 ’85년),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8집 ’85년),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9집 ’87년), '서울서울서울', '모나리자'(이상 10집 ’88년), 'Q'(11집 ’89년)에 이르기까지 히트곡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굵은 글씨로 된 제목은 자작곡)
>>비슷한 노래는 많지 않았다. 가요는 물론 민요도 즐겨 불렀다. 때문에 조용필을 어떤 음악인이라고 규정하기란 힘들다. 조용필의 말을 빌면 그저 외국 것과 우리 것을 접목한 음악이다. 하지만 근간은 록이다. 트로트인 '허공'이나 '미워미워미워' 같은 곡도 악기 편성은 록의 규범을 따르고 있으며 '어제 오늘 그리고', '그대여', '미지의 세계', '아시아의 불꽃', '여행을 떠나요', '모나리자'처럼 명백한 록 넘버도 적지 않다. 조용필이 위대한 탄생이 없는 조용필 음악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위대한 탄생 역시 록 밴드의 틀을 갖추고 있다.
>>조용필의 음악적 출발점과 여정을 알고 나면 조용필과 록의 관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조용필은 69년 3인조 록 밴드 애트킨스로 음악을 시작했고 얼마 뒤에는 파이브 핑거스의 기타리스트로 미 8군 무대를 전전했다. 이 때 부른 노래들은 거의 외국 록이었다. ’70년에는 후일 신중현과 엽전들, 사랑과 평화를 거치는 이남이, 드러머 김대환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했다. ’72년 25시에 이어 ’75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의 이름으로 발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빅 히트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의 전형적인 트로트와 비교하면 록적인 요소가 가미돼 있었다. 하지만 조용필은 ’76년 대마초로 활동이 묶였고 ’79년 12월 규제가 풀리자 위대한 탄생을 결성했다. “록 밴드에서 리드 기타로 음악을 시작한 내가 음악을 다시 할 수 있게 되면서 밴드부터 조직한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 조용필(53)의 얘기다.
>>조용필의 노래는 어딘지 전 시대와는 느낌이 달랐다. 듣는 이의 마음으로 불쑥 파고들어 오래도록 잡고 놓지 않는 목소리도 그랬지만 곡 자체도 달랐다. 조용필은 “내 노래 중에서도 특히 자작곡들은 리듬과 코드가 ’70년대와 다른 ’80년대 외국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노랫말도 마찬가지였다. '단발머리'나 '고추잠자리', '못찾겠다 꾀꼬리' 같은 곡은 몇 년 전의 산울림 못지 않은 파격이었다. 그 역시 신중현과 마찬가지로 비음과 격음, 경음이 많은 우리말은 록과 어울리기 힘들어 '모나리자'나 '여행을 떠나요' 같은 곡은 노랫말을 만드는데 특히 애를 먹었다.
>>위대한 탄생도 처음에는 일반적인 록 밴드로 출발했다. 초기 멤버는 조용필이 미8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검은 나비 출신의 드러머로 현재까지 남아있는이건태와 곽경욱(기타), 김택환(베이스), 김청산(키보드). 하나같이 내로라 하는 실력파 연주자들이었다. 조용필은 보컬을 하며 틈틈이 기타도 쳤다. 하지만 보컬을 중시하는 가요계 풍토에서 조용필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자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 밴드로 점차 그 형태가 바뀌었다. 멤버들은 조용필과 작업하면서 레코딩 세션 맨으로도 활동했다. 덕분에 유난히 멤버 교체가 잦아 최이철을 비롯해 이호준, 박강호, 송홍섭, 유재하, 배수연, 유영선, 김희현 등 여러 명이 들락거렸다. ’88년 조용필이 일본에 진출하며 해체했다 ’93년 재결성된 위대한 탄생은 현재 이건태와 최헌의 불나비 등을 두루 거친 최희선(기타), 부활의 창단 멤버였던 이태윤(베이스), 송골매의 후기 멤버였던 이종욱(키보드), 다섯 손가락 출신의 최태완(피아노)의 라인 업으로 최고들이 모인 팀이라는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위대한 탄생 역시 ’70년대와는 다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전까지의 밴드에서는 기타가 중심이었던데 반해 위대한 탄생은 키보드가 중심이었다. '단발머리', '촛불', '못찾겠다 꾀꼬리'처럼 키보드의 역할이 극대화된 곡도 적지 않았다. 위대한 탄생이 고정적인 의미의 록 밴드에서 벗어나 있는 데에는 프로젝트 밴드라는 점 외에 이 같은 악기 편성도 한 몫 한다. 조용필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에서는 시카고 같은 밴드가 현을 강조한 데 이어 키보드의 중요성이 커졌다. 키보드에 일찌감치 주목한 위대한 탄생은 덕분에 전보다 무게가 실린, 색다른 사운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기타의 단선적인 힘에 비하면 키보드는 부드럽고 폭이 넓었으며 풍부했다. 조용필의 다채로운 보컬을 저마다 다른 색깔로 뒷받침한 위대한 탄생의 연주는 한국 대중 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다. 밴드의 사운드에 대한 고집도 방송 관계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인 조용필 못지 않았다.
>>확실히 '뿅뿅'대는 일렉트릭 드럼과 남성 보컬의 틀을 깬 '단발머리' 같은 곡은 악기와 보컬이 한 팀으로 움직이는 밴드 출신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음악은 형식적으로는 달랐지만 역할과 의미에 있어서는 전 시대의 기타 중심의 록과 다를 바 없었다. 조용필의 음악은 ’80년대의 다양한 젊음들 사이에 거의 유일한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특히 '오빠부대'의 원조로서 이제 막 소비력을 가지게 된 10대들에 대한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교복이 없어지고 머리를 기를 수 있게 되고 칼라 TV와 프로 스포츠 등 인위적인 '충격'에 의해 전시대에 없던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억눌려 있었다. 조용필이 음반보다는 콘서트를 염두에 두고 조직했다고 할 정도였던 위대한 탄생과의 공연은 그들에게 일종의 '젊음의 축제'였다. 가수의 이름을 부르며 비명을 질러대는 수만 관중도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공연장을 찾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체감과 충만감 역시 그 시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은 ’80년대라는 시대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기에 한국 록 혹은 한국 대중음악을 넘어서는 문화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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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music 2003년 02월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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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op.tubemusic.com/musiccd/artist/artist_bio.asp?artistid=09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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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록밴드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가 아닌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가수와 연주인은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서입니다.
필팬들중 다수는 현재의 "위대한 탄생"의 멤버들 이름을 압니다. 더 관심이 많은 분은 개인 프로필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위대한 탄생"은 알지만, 그 멤버들은 잘 모를 겁니다.(최근 tv에 출연한 최희선씨와 이태윤씨는 좀 알지도 모르지만....)
1. 신중현과 엽전들 ------> 엽전들 멤버 아십니까?
2. 사랑과 평화 -------> <울고 싶어라>= 이남이는 알지만 멤버 이름을 아시는 분이 얼마나 될지?
3. 산울림------------------> 3형제로 구성되어 있었다는건 알지 모르지만 "김창완"씨 빼고 두분 이름을 아시는 분은?
4.송골매-------------------> 배철수,구창모씨는 알아도 나머지 멤버 이름은?
5. 작은거인----------------> 김수철씨외에 나머지 멤버는?
6. 윤수일밴드 --------------> 윤수일씨는 아는데 다른 분은?
7. 최헌과 불나비 ------------> 최헌씨는 아는데 나머지 분은?
8.함중아와 무서운 아이들 -----> 함중아씨는 알수 있어도....
9. 넥스트----------------------> 신해철씨외에는?
10. 들국화 --------------------> 전인권씨외에 나머지 멤버는?
11. 윤도현밴드 ----------------> 윤도현씨외에 나머지 멤버는?
12. 시나위 --------------------> 김종서,서태지씨가 이후 가수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신대철씨외에 그 멤버를 알 수 있었을런지?
13. 부활 -----------------------> 이승철씨(다시 결별한 것으로 압니다만)외에 잘해야 김태원씨정도?
이런 문제제기는 대중이 록밴드( 위대한 탄생 포함해서)의 구성원 모두를 알아야만 한다는 의무를 이야기함이 아닙니다. 저역시 모릅니다.아마 앞으로도 계속 모를지도 모릅니다.
이야기 하고 싶은건 연주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에게 "인기"란 없습니다. 매니아 사이에서 "고수"로 인정받는 몇몇분들을 제외하곤 연주인들에게 대중의 시선은 쏠리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음악을 연주하는건 연주인들입니다. 작곡,편곡을 하는 사람이 음악을 만들어내지만, 대중에게 음악을 들려주는건 연주인입니다.
연주인으로서는 대중의 "인기"가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조용필음악의 한 요소인 "위대한 탄생"을 이야기할 때 대중의 시선에서 이야기하느냐, 연주인의 시선에서 이야기하느냐는 생각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트롯이 주쟝르이던 시절에 이런 문제는 더 컸을 겁니다. 작곡/작사자는 알려지지만 배경음을 연주해주던 그 많은 연주인들은 이름이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락을 놓고 보아도, 이미 본바와 같이 대부분의 연주인은 "인기"와는 별 관련이 없는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록뮤지션으로 각광받는 분들이 실상은 작곡/편곡면에서 그리고 보컬을 담당했다는 면에서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지
연주인 누가 록뮤지션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는?> 이런 조사는 있는데, < 우리나라 대중음악에서 가장 기타/베이스/키보드/드럼/건반/트럼펫/바이올린등등 잘 연주하는 연주인은?> 이런 조사는 보질 못했습니다.
이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지 의문입니다.
*ps: 그는 71년에는 '김트리오'라는 그룹을 결성해 활동을 했다.
----> 조용필님 시각에서 보면 "결성해"이지만 김트리오를 결성한 분(김대환)의 시각에서 보면 "무명"인 조용필님을 발탁해서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기타리스트출신의 조용필님이 <돌부항>으로 "인기"를 얻고 3년간의 활동정지후 80년대의 "조용필시대"를 연 점을 당시 연주인으로 활동했던 분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른바 <연주인>과 <가수>의 구도가 그려집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 견해로는 "미꾸라지 용된걸" 시기하는것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김트리오>에서 조용필님의 보컬이 눈에 띄지 못했다면 <돌부항>도 없었고 조용필님 역시 연주인의 길을 걷다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예상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말하고 싶은건, 다수의 조용필폄하쪽은 < 연주인> VS < 대중가수>의 구도만 그려놓고 이야기하지 보컬실력을 쌓아온 "조용필" 에는 촛점을 안 맞춘다는 점입니다. 또 작곡/편곡 실력을 쌓아온 "조용필" 의 노력은 별로 관심을 안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탄생을 결성해서(프로젝트 밴드) 밴드의 방향성과 조화에 대해 고민하고 이끌어간 총감독으로서의 "조용필"에 대한 평가에도 인색합니다.
그 이유는 기본 시선이 연주인에게 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연주하는 모든 연주인에게 향해있는건 또 아닙니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대중에게 만족을 준 대중음악인은 <연주인>이든,<대중가수>이든, <작사자>이든, <작곡/편곡자>이든 누구든간에 만족을 준만큼
대중의 관심을 받고 평가를 받으면 좋은 일입니다. 대중음악 발전을 위해서..... 그런데 방법이 틀렸습니다. "조용필"을 폄하해서 이런 것들을 얻어내려 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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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글 내용중에 제가 관심을 지닌 부분이 있어서 좀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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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탄생 역시 ’70년대와는 다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전까지의 밴드에서는 기타가 중심이었던데 반해 위대한 탄생은 키보드가 중심이었다. '단발머리', '촛불', '못찾겠다 꾀꼬리'처럼 키보드의 역할이 극대화된 곡도 적지 않았다. 위대한 탄생이 고정적인 의미의 록 밴드에서 벗어나 있는 데에는 프로젝트 밴드라는 점 외에 이 같은 악기 편성도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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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중현씨계열이 조용필락을 못마땅해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키보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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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기타연주자인 신중현씨음악 매니아들은 키보드를 중시한 연주는 "기계조작"에 의해 화려함으로 대중을 현혹하지만 "정통록"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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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올려주신 내용중 2번의 말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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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중현이 발군의 기타솜씨와 특유의 카리스마로 록 음악의 진수를 보여줬다면 '위대한 탄생' 은 철저히 밴드 지향적인 팀워크를 보여주었던 점이 달랐다.
>조용필의 경우는 곡도 곡이지만 연주력을 어떻게하면 극대화시키는가? 에
>심혈을 기울였던 뮤지션이었다.
>다시 말해서 레코딩 엔지니어의 역할과 수많은 이펙터효과를 적재적소에 이용함으로써 90년대 록의 기수라는 '넥스트'의 신해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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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주자인 신중현씨가 80년 활동규제가 풀린 이후에 뮤직파워를 결성해서 재기를 노렸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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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대중이 조용필음악의 화려한 사운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기타중심의 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신중현음악매니아들은 생각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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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추측입니다. 이런 추측까지 하는 이유는 팬으로 20여년 자리한 저에게 조용필폄하(개인수준이 아닌)는 " 그 이유를" 캐보고 싶은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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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을 빌어 제 이야기를 한 점은 글 내용중에 일부를 발췌해서 글을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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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궁금합니다. 제 추측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실 분들의 글을 기다립니다. 신중현씨를 성토하는 차원이 아니라 조용필음악폄하에 대한 진지한 토론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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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가요계의 신화, 한국 대중가요계의 큰 획을 그은 진정한 국민가수, 조용필. 그는 30년이 넘는 자신의 음악 생활을 통해 시대를 초월하면서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으로 대중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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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68년 경동고를 졸업한 후, 음악을 시작했다. 69년 '에드킨스'의 보컬주자로 미군부대 중심으로 활동을 한 그는 71년에는 '김트리오'라는 그룹을 결성해 활동을 했다. 그후 79년에는 '위대한 탄생'을 조직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75년 최고의 히트곡이자 전국민가요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대마초사건에 휘말려 잠시 가요계를 떠나게 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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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그는 80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인 '창밖의 여자'로 어마어마한 판매고와 인기를 누리게 되고, 1집 수록곡 중 '단발머리'와 '한오백년', 2집 '촛불',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3집의 '미워미워미워', '고추잠자리' 등의 연이은 히트를 거두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는 81년 7월 '카네기홀 초청공연'을 비롯해 82년에는 '일본 NHK 리사이틀홀공연', '미국 11개 도시 순회공연' 등으로 활동영역을 일본과 미국으로 넓히게 된다. 82년 4집에서는 '못찾겠다 꾀꼬리'와 '비련'이 최고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국내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그의 인기는 멈출줄 몰랐고 국내에서 뿐 아니라 매년 일본과 미국 순회공연을 해 일본에서는 한국가수로서 최고 인기 가수 1위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그는 86년 말 "더 이상 가수왕에 오르지 않겠다"는 자진 반납 선언,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88년 5월 Part I, II의 형식으로 10집을 발표, '서울 서울 서울'과 '큐(Q)'로 인기를 모았고 90년 12집 '추억속의 재회', 91년에는 꿈이라는 테마로 발표한 13집 '꿈', 92년 14집 '고독한 러너', '이별의 인사' 등의 히트곡을 내놓았고, 94년 15집 '남겨진 자의 고독'을 발표하였다. 97년 3년 만에 내놓은 16집은 YS의 심정을 토로한 가사를 담고 있다고 해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타이틀곡인 '바람의 노래'와 신세대풍의 '판도라의 상자', 성인 취향의 '애상' 등으로 구성돼 모든 장르를 망라한 배려가 돋보인 음반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98년 데뷔 30주년을 맞은 그는 [조용필 30주년 기념음반 Part 1]을 발표, 음악 생활 30년을 총정리하기도 했다.(베스트 앨범은 Part3까지 발매되었다.) 그가 발표한 정규 앨범은 17장(지금까지 음반 판매량은 대략 1500만장에 다다른다). 그는 트로트에서 스탠다드 팝, 로큰롤, 록, 민요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구, 발전시키면서 카리스마를 가진 보컬과 완벽한 자기 관리로 꾸준한 음악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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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은 '최초'라는 기록을 지닌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이기도 하다. 80년대 초반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일본 등 해외공연에 나서 후배 가수들에게 해외진출의 물꼬를 터주었음은 물론이고 81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82년 일본 각지에서 여러차례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88년엔 베이징에서 공연한 첫 한국 대중음악인이 됐고, 92년엔 외국인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예술공연장인 '일본 아오야마 극장' 무대에 서는 기록을 남겼다. 1999년 12월엔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대중음악인으로는 처음으로 콘서트를 열어 최고의 무대를 선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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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는 영원한 가객 조용필, 장르와 장르가 뒤섞여 처음 들어본 희귀한 사운드들이 속출하고 있는 이 시대에 조용필의 '단발머리'나 '고추잠자리'는 지금 들어도 시대에 뒤떨어지지않는 명곡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그의 음악 정신과 노력, 뜨거운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tube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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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한마디로 조용필의 시대였다. ’80년 드라마 주제곡 '창밖의 여자' 히트로 시작해 그 해만 1,2집에서 '단발머리', '촛불'이 연속 히트했다. 이어 '미워미워미워', '고추잠자리', '일편 단심 민들레야'(이상 3집 ’81년), '못찾겠다 꾀꼬리', '비련'(4집 ’82년), '친구여'(5집 ’83년), '어제, 오늘, 그리고',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이상 7집 ’85년),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8집 ’85년),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9집 ’87년), '서울서울서울', '모나리자'(이상 10집 ’88년), 'Q'(11집 ’89년)에 이르기까지 히트곡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굵은 글씨로 된 제목은 자작곡)
>>비슷한 노래는 많지 않았다. 가요는 물론 민요도 즐겨 불렀다. 때문에 조용필을 어떤 음악인이라고 규정하기란 힘들다. 조용필의 말을 빌면 그저 외국 것과 우리 것을 접목한 음악이다. 하지만 근간은 록이다. 트로트인 '허공'이나 '미워미워미워' 같은 곡도 악기 편성은 록의 규범을 따르고 있으며 '어제 오늘 그리고', '그대여', '미지의 세계', '아시아의 불꽃', '여행을 떠나요', '모나리자'처럼 명백한 록 넘버도 적지 않다. 조용필이 위대한 탄생이 없는 조용필 음악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위대한 탄생 역시 록 밴드의 틀을 갖추고 있다.
>>조용필의 음악적 출발점과 여정을 알고 나면 조용필과 록의 관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조용필은 69년 3인조 록 밴드 애트킨스로 음악을 시작했고 얼마 뒤에는 파이브 핑거스의 기타리스트로 미 8군 무대를 전전했다. 이 때 부른 노래들은 거의 외국 록이었다. ’70년에는 후일 신중현과 엽전들, 사랑과 평화를 거치는 이남이, 드러머 김대환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했다. ’72년 25시에 이어 ’75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의 이름으로 발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빅 히트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의 전형적인 트로트와 비교하면 록적인 요소가 가미돼 있었다. 하지만 조용필은 ’76년 대마초로 활동이 묶였고 ’79년 12월 규제가 풀리자 위대한 탄생을 결성했다. “록 밴드에서 리드 기타로 음악을 시작한 내가 음악을 다시 할 수 있게 되면서 밴드부터 조직한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 조용필(53)의 얘기다.
>>조용필의 노래는 어딘지 전 시대와는 느낌이 달랐다. 듣는 이의 마음으로 불쑥 파고들어 오래도록 잡고 놓지 않는 목소리도 그랬지만 곡 자체도 달랐다. 조용필은 “내 노래 중에서도 특히 자작곡들은 리듬과 코드가 ’70년대와 다른 ’80년대 외국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노랫말도 마찬가지였다. '단발머리'나 '고추잠자리', '못찾겠다 꾀꼬리' 같은 곡은 몇 년 전의 산울림 못지 않은 파격이었다. 그 역시 신중현과 마찬가지로 비음과 격음, 경음이 많은 우리말은 록과 어울리기 힘들어 '모나리자'나 '여행을 떠나요' 같은 곡은 노랫말을 만드는데 특히 애를 먹었다.
>>위대한 탄생도 처음에는 일반적인 록 밴드로 출발했다. 초기 멤버는 조용필이 미8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검은 나비 출신의 드러머로 현재까지 남아있는이건태와 곽경욱(기타), 김택환(베이스), 김청산(키보드). 하나같이 내로라 하는 실력파 연주자들이었다. 조용필은 보컬을 하며 틈틈이 기타도 쳤다. 하지만 보컬을 중시하는 가요계 풍토에서 조용필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자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 밴드로 점차 그 형태가 바뀌었다. 멤버들은 조용필과 작업하면서 레코딩 세션 맨으로도 활동했다. 덕분에 유난히 멤버 교체가 잦아 최이철을 비롯해 이호준, 박강호, 송홍섭, 유재하, 배수연, 유영선, 김희현 등 여러 명이 들락거렸다. ’88년 조용필이 일본에 진출하며 해체했다 ’93년 재결성된 위대한 탄생은 현재 이건태와 최헌의 불나비 등을 두루 거친 최희선(기타), 부활의 창단 멤버였던 이태윤(베이스), 송골매의 후기 멤버였던 이종욱(키보드), 다섯 손가락 출신의 최태완(피아노)의 라인 업으로 최고들이 모인 팀이라는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위대한 탄생 역시 ’70년대와는 다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전까지의 밴드에서는 기타가 중심이었던데 반해 위대한 탄생은 키보드가 중심이었다. '단발머리', '촛불', '못찾겠다 꾀꼬리'처럼 키보드의 역할이 극대화된 곡도 적지 않았다. 위대한 탄생이 고정적인 의미의 록 밴드에서 벗어나 있는 데에는 프로젝트 밴드라는 점 외에 이 같은 악기 편성도 한 몫 한다. 조용필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에서는 시카고 같은 밴드가 현을 강조한 데 이어 키보드의 중요성이 커졌다. 키보드에 일찌감치 주목한 위대한 탄생은 덕분에 전보다 무게가 실린, 색다른 사운드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기타의 단선적인 힘에 비하면 키보드는 부드럽고 폭이 넓었으며 풍부했다. 조용필의 다채로운 보컬을 저마다 다른 색깔로 뒷받침한 위대한 탄생의 연주는 한국 대중 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다. 밴드의 사운드에 대한 고집도 방송 관계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인 조용필 못지 않았다.
>>확실히 '뿅뿅'대는 일렉트릭 드럼과 남성 보컬의 틀을 깬 '단발머리' 같은 곡은 악기와 보컬이 한 팀으로 움직이는 밴드 출신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음악은 형식적으로는 달랐지만 역할과 의미에 있어서는 전 시대의 기타 중심의 록과 다를 바 없었다. 조용필의 음악은 ’80년대의 다양한 젊음들 사이에 거의 유일한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특히 '오빠부대'의 원조로서 이제 막 소비력을 가지게 된 10대들에 대한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교복이 없어지고 머리를 기를 수 있게 되고 칼라 TV와 프로 스포츠 등 인위적인 '충격'에 의해 전시대에 없던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억눌려 있었다. 조용필이 음반보다는 콘서트를 염두에 두고 조직했다고 할 정도였던 위대한 탄생과의 공연은 그들에게 일종의 '젊음의 축제'였다. 가수의 이름을 부르며 비명을 질러대는 수만 관중도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공연장을 찾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체감과 충만감 역시 그 시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은 ’80년대라는 시대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기에 한국 록 혹은 한국 대중음악을 넘어서는 문화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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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music 2003년 02월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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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op.tubemusic.com/musiccd/artist/artist_bio.asp?artistid=09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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