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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길로…운명적인 이끌림
[속보, 생활/문화] 2004년 02월 11일 (수) 16:27
◇스물넷 첼리스트 대니얼 리
24살의 청년 대니얼은 ‘철없는 어린애’ 같았다. 무스를 잔뜩 발라 앞머릴 치켜세운 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곧잘 ‘실실’ 웃었다. 게다가 입만 열면 어눌한 한국말로 싱거운 농담을 계속 해댔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존댓말도 할 줄 몰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로 맞먹었다.
하지만 장난기로 똘똘 뭉친 이 ‘귀여운 악동’은 착하기 그지없었다. ‘장난치지마, 진지하게 대답해야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 금세 얼굴을 붉히며 미안해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조금 나아졌나 싶으면 금방 또 장난을 쳤다. 인터뷰 중간에 “나, 화장실 가고 싶어” 하면서 어리광이 잔뜩 밴 목소리로 딴전을 피우기도 했다.
IQ 175. 어릴 때부터 ‘신동’이니, ‘천재’니 하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래서 대니얼은 가끔 신경질이 난다. “난 천재가 아냐. 제발 날 내버려 둬” 하고 소리친 적도 많았다. 그는 “난 정말 둔해.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행동도 정말 느려” 하고 진짜로 느릿느릿 말했다. “만약 내가 천재라면 세상엔 천재가 너무 많은 거야. 미국에 있는 내 친구 토미도 천재고, 기자 아저씨도 아마 천재일 거야. 왜냐고?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아 보이거든. 말도 나보다 몇 배나 잘하잖아.”
그러나 ‘장난꾸러기’ 대니얼은 첼로를 끌어안자 눈빛부터 달라졌다. 1725년 산(産) 카를로 토노니. 흠집이 잔뜩 난 낡은 케이스에서 몸체를 드러낸 그 첼로는, 한마디로 고색창연했다. 애기(愛器)를 끌어안은 대니얼의 두 눈에선 심상치 않은 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 농담과 어리광으로 일관하던 ‘철부지’가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변신하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처럼 짧았다. 진지하고 엄숙한 몰입. 이윽고 대니얼이 힘찬 보잉(활질)을 시작하자, 170㎝가 조금 넘는 자그마한 몸피에선 뭐라 형언키 어려운 기(氣)가 흘렀다. 역시 그는 타고난 첼리스트였다. 그것도 숱한 ‘잔챙이’ 가운데 하나가 아닌, ‘거장’을 꿈꾸는 청년 첼리스트였다.
6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다. 하지만 별 재미가 없었다. 서너 달 만에 그만두고 첼로를 잡았다. 조그마한 ‘꼬마 첼로’였다. ‘띵똥거리는’ 피아노나 ‘깽깽거리는’ 바이올린보다 훨씬 맘에 들었다. “첼로 소리는 꼭 사람 목소리 같잖아.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 화를 낼 수도 있고, 사랑을 속삭일 수도 있어. 난 피아노나 바이올린보다 첼로가 훨씬 좋아.”
7살이 다 되어가던 무렵, 대니얼은 그렇게 첼로와 첫 대면했다. 음역이 넓고 음색도 풍부한 악기. 굵직한 베이스를 표현하다가, 하이 포지션으로 올라가면 바이올린의 E현을 능가하는 날카로운 고음을 뽑아내는 악기. “만약 첼리스트가 안 되었으면 우주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상상력 넘치는 소년에게 첼로는 더없이 좋은 ‘장난감’이었다. 소년은 점점 첼로에 매혹됐다. 그건 ‘운명적인’ 이끌림이었다.
1990년. 첼로를 시작한 지 겨우 3년째. 대니얼은 노스웨스트 챔버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신동 탄생’의 서곡이었다. 1년 뒤에는 시애틀 교향악단과 협연했다. 결과는 대성공. 교향악단의 한 단원이 “이 어린 천재를 그냥 놔둘 수 없다”며 발벗고 나섰다. 그는 대니얼을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소개했다. “이 아이는 정말 대단합니다. 딱 한 곡만 들어봐 주십시오.”
워싱턴, 로스트로포비치의 집. 대니얼은 ‘20세기 첼로의 거장’ 앞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연주했다. 별로 떨리지도 않았다. 너무 어렸던 탓이다. “난 그 할아버지가 누군지 정말 몰랐어. 그냥, 굉장히 못생긴 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주 착한 할아버지였어.”
“다시는 제자를 안 받겠다”고 선언했던 이 거장은 대니얼의 연주를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넌 이제 겨우 11살인데, 내가 15살에 연주했던 차이코프스키보다 더 훌륭하구나”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대신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앞으로 3년 동안 절대 무대에 서지 말 것.” 그것은 ‘천재’의 길을 가지 말고 ‘거장’의 길을 가라는 최초의 가르침이었다. 대니얼은 6년 동안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했다. 20세기 거장의 마지막 제자였다. 하지만 대니얼은 “할아버지 때문에 화날 때가 많았어” 하고 말했다. “숙제를 너무 많이 내줬어. 난 놀고 싶었거든. 스트레스 정말 많이 받았어.”
스승은 꼭 3년이 지난 후 제자에게 클리블랜드 관현악단과 협연하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영국 런던의 위그모어홀에서 프로연주자로서 정식 데뷔 무대를 가졌다. 1998년 데카 레이블에서 첫 앨범 발매, 그리고 2001년엔 뉴욕 링컨센터가 주는 세계적 권위의 ‘에이버리피셔 캐리어그란트상’을 수상했다. 첼리스트 요요마와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이머가 역대 수상자. 한국인 장영주도 이 상을 받았다.
대학은 뉴욕 커티스 음대를 졸업, 지금은 뉴잉글랜드 콘서버토리에서 전문연주자 과정을 밟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대니얼의 연주를 ‘힘있고 풍부한 호소력을 가진 소리’라고 평했고, 음악평론가 로버트 콜린스는 “그의 나이 따위는 잊어버려라. 그의 첼로는 그 이상을 노래한다”고 극찬했다.
‘거장’을 꿈꾸는 ‘귀여운 악동’. 대니얼은 지난 5일 한국에 들어왔다. 네번째 내한공연이다. 1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시작으로 24일까지 전국 6개 도시를 순회한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2번’을 연주한다. 피아노는 로베르토 폴리.
대니얼은 한국음식을 무척 좋아한다. “엄마가 만들어준 갈비찜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올린다. 하지만 꽤 오래 전부터 점심을 안 먹는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다. 그는 “연습해야돼. 하루 두끼만 먹으면 두 시간 더 연습할 수 있어”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난 천재가 아니야. 그래서 연습 정말 많이 해야 돼” 하며 또 능청을 떨었다.
친구들과 있을 때면 재즈 연주도 즐기고, 편곡 실력도 수준급이다. “음악은 뭐든지 다 좋다”며 “장영주, 장한나, 수미조 아줌마, 라디오헤드, 조용필 아저씨…” 하면서 줄줄이 이름을 댔다. 그는 뜻밖에도 조용필의 열성 팬이었다. 1시간 여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대니얼은 ‘조용필 아저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조용필 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진짜로 좋아하거든. 그래서 나도 좋아하게 됐어. 근데 그 아저씨, 우와 목소리 정말 죽이잖아. 꼭 첼로 소리 같아.”
〈글 문학수기자 sachimo@kyunghyang.com〉
〈사진 박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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