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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고국을 향한 향수
조용필은 참으로 많은 히트곡을 냈다.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미워미워미워> <창밖의 여자> 등등.
그러나 그중에서도 조용필을 얘기하는데 빼놓을수 없는 노래는 역시
<돌아와요 부산항에> 다.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작곡)는 1982년도에 태어났다.
이노래는 조용필의 다른 노래가 그렇듯 '작은거인'의 혼이 담긴,
강한 생명력을 부여 받은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의 우수성을 단순히 조용필이라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적 음악성을 지닌 한 가수의 재능만으로
그 공적을 돌릴수는 없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제목이 말해주듯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아직까지도 우리 와는 툭까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아니지만
이노래가 히트되기전 시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1983년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모국 방문이 줄을 이으면서
일본은 한발 우리곁에 다가왔다.
강제로 이국땅에 끌려갔다 죽음을 눈앞에둔 나이에 몇십년만에 부산항에 도착한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목놓아 불렀다.
여기에 5공화국이 정책적으로 대일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를
가로막은 둑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1984년 9월 2박3일간 우리나라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방문했다.
두나라 정상의 만남은 양국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 하고 한일 관계사에
새 장을 여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 됐다.
그러나 이 '역사적 의의' 를 앞세워 대통령의 방일을 전후해 우리네 언론은 전례없이
일본 특집으로 도배를 했다.
KBS에선 위성중계까지 해가며 '일본을 바로 알자'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부의 활동을 홍보하는데
TV보도는 아부성이 얼마나 두드러졌으면 국민당에서 비난 성명을 내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정부의 대일본 문호개방은 우리땅에 일본문화를 한꺼번에 몰고오는 결과를 낳았다
'아키도리' 니 '삿포로 우동' 이니 '로바다야키' 같은 일본 음식점이 부산을 통해 상륙,
거센바람을 일으키며 북상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는 그중에서도 이른바 '가라오케'의 바람을 가장 많이 탔다.
밴드없이 카세트테이프 반주로 노래를 부르는 가라오케는 1983년 이후
전국 유흥업소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초창기 가아오케에 수록된 노래는 대부분 흘러간 노래들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는 옛날 노래는 아니지만 사뭇 복고취향의 트롯리듬의 노래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84년 이선희가 <J에게>를 내놓기 전만해도 당시 가수들이 발표한 곡이라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을 비롯한 <건곤감리청홍백>등 건전가요뿐이었으니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라이벌이 전혀없는 가라오케의 독불장군일 수밖에 없었다.
가라오케엔 우리나라 노래보다 일본 노래가 더 많아 한동안
일본 여가수 이츠와 하유미가 부른 <고히 비토요>가 마음대로 불릴 때
일본엔 그보다 더 엄청난 위세를 떨치는 우리 가요가 있었다.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이성애의 <가슴아프게>의 뒤를 이어 일본시장에 진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을 일본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1983년 NHK주관으로 전국순회공연을 돌면서 동양의 홀리오이글레시아스 `조요삐루'(조용필)는
1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팬들을 확보하며 '엔카열도' 를 뒤흔들었다.
후원회가 결성되고 팬클럽이 만들어졌다.
조용필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일본 젊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싱글 음반 <돌아와요 부산 항에>는 일본에서만 1백만장 이상 팔려나갔다.
일본 가수치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지 않은 가수가 없을 정도였다.
레코드제작사들은 일본 가수를 동안, 유사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마구 찍어내기도 했다.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열풍에 '정치적 해석'을 덧붙인다는 것은 가수에게
미안한 일이기도하다.
적어도 '노래 하나하나가 사람을 짜릿하게 감동시키는 촌철살인적 것'이라고
일본 유수언론이 극찬한 수퍼스타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된데에는
1983년, 그리고 이후의 한일 관계의 급변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수 없다는게
가요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이기도 하다.
[2]
본격적인 10대들의 우상이 등장한 것은 1980년대일 것이다.
총칼을 앞세워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는 그동안 유신체제 아래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활동을 규제했던 많은 가수들을 풀어주었다.
이때 등장한 가수가 바로 조용필이다.
대마초 파동으로 숨죽여 지냈던 조용필은 10대 우상이 필요한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세련된 무대매너와 절제되면서도 폭발적인 가창력, 듣는 이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감정 표현이 여타 가수들과는 일단 격이 달랐다.
여기에 대마초 흡연으로 활동이 규제되었던 점이 후광처럼 암암리에 작용했으며
대중매체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몫을 담당했다는 것이 가요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어쨌든 조용필은 시대적인 상황에 맞는 타이밍과 사회 분위기
그리고 가수로서의 자질을 갖춰 10대들의 우상으로써 우뚝 솟아올랐다.
... 조용필도 한국의 록필드에서 빼놓아선 안될 사람이다.
76 년 자비로 발표한 데뷔앨범에 수록된 공전의 스매쉬 히트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제일동포 모국방문과 맞물려 당시로는 상상도 못할 100만장(플래티늄)의
신기원을 이루기도 했는데 록음악으로 시작 해서 트롯으로 명성을 얻은 케이스지만
이후 발표된 앨범은 최고의 세션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탄생' 의 탄탄한 연주력으로
높은 완성도를 지녔다고 평가 받고 있다.
MBC의 본격 재즈 프로그램인 '일요 예술무대'의 사회자 겸 재즈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김광민', 사랑과 평화를 거쳐서 버클리출신 뮤지션들과 슈퍼밴드를 결성했고
삐삐밴드의 제작일도 맡고 있는 베이시스트 '송홍섭',
요절한뒤 더 유명해지면서 설명이 필요없어진 기타리스트 '유재하'등이
위대한 탄생을 이끌었던 면면들이다.
하지만 신중현이 발군의 기타솜씨와 특유의 카리스마로 록 음악의 진수를 보여줬다면
'위대한 탄생' 은 철저히 밴드 지향적인 팀워크를 보여주었던 점이 달랐다.
조용필의 경우는 곡도 곡이지만 연주력을 어떻게하면 극대화시키는가? 에
심혈을 기울였던 뮤지션이었다.
다시 말해서 레코딩 엔지니어의 역할과 수많은 이펙터효과를 적재적소에 이용함으로써
90년대 록의 기수라는 '넥스트'의 신해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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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댓글
하얀모래
2003-04-17 23:2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