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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보다 사랑하는 생명같은 음악


내 나이 이제 38살. 인생의 시련과 고비는 반드시 찾아온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많은 시련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최근 며칠간은 누구나 겪어야 할일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감당키 어려운 일의 연속이었다.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는 팬들의 압력,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괴로움에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값싼 웃음으로 자신을 속여보려하기도 했다.

결국 모든 것은 나와의 싸움이었고 나를 이겨낸 것은 사랑하는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은 나의 생명과도 같다. 음악을 너무도 좋아해서 낯선 길을 걸어왔고, 이렇게 서있으며 온갖 영욕을 안고 살아왔다.

「힘내세요」「건강하세요」「서울, 서울, 서울이 1위래요」

10일 하오 두려움반 설레임반으로 김포공항 게이트를 들어서는 순간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들. 하나는 잃었지만 또 하나는 얻었다는 안도감이 들며 만감이 교차했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감정뿐이다. 아내보다 음악을 더 사랑했다는 것이 변명이라면 변명일까. 모든것은 아내와 음악, 두가지를 한꺼번에 사랑할 수 없었던 나의 인간적 결함에 있다.

앞으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음악이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음악덩어리 자체이기 전에는.

어린시절 기타하나 들고 집을 나와 낯설은 기지촌을 헤맬때 둘째형님이 찾아와 모질게 혼이나고 집으로 다시 들어왔을때 그 형님은 내게 한장의 편지를 주었다.「네가 정말 음악이 좋다면 음악으로 성공해야 한다. 행운을 빈다」는 내용의 편지는 집과 가족을 버리고 거친 가요 바닥으로 뛰어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한 조각 빵, 한잔의 물, 따뜻한 부모님의 품이 아쉽고 그리웠지만 내게는 음악보다 더한 것은 없었다.

70년대말 대마초사건. 20대 나이의 마지막을 호되게 매질했다.

그 사건은 음악때문에 그리된 것이기에 한이 서린 3년간 더욱 음악을 사랑하게 됐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게 됐다. 79년 12월 대마초 가수들의 해금소식이 들리는 순간의 기쁨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딸 심청을 보고싶어 눈을 떴을 때의 그 기분이랄까.

그후의 영광의 나날들. 국내 정상의 무대에도 수차례 서보고 꿈에 그리던 외국무대에 도전이 이어졌다. 마침내 사상, 국경, 이념, 언어를 초월한 중국공연의 행운까지 잡을 수 있었다.

이제 조용히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을 정리해보고 인간으로서 내가 아닌 음악인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해 보고싶다. 음악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살아있는 「혼의 소리」라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중국공연을 준비하던 며칠간 나는 인생에 다시 없을 괴로움을 겪었다. 마치 이 기간은 모진 고문과도 같이 느껴졌다.

19일 예정된 일이긴 했지만 막상 나와 아내 쌍방이 내세운 변호사가 이혼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전화를 집으로부터 받은 순간 왈칵 울음이 솟구쳤다. 일본 신주쿠센튜리 호텔방에 있던 나는 수화기도 내려놓은채 하루종일 멍한상태로 지냈다. 누구에게 말을 할 수도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과연 그것이 내 진심이었는지, 옳았는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21일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있는 공연자료, 테이프, 악보 등을 챙기고 어머니(김남수씨. 79세)에게 인사를 드리고 떠나기 위해서였다.

집에 있는 동안에도 외부출입은 절대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려해도 손이 떨려서 피울수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떠나기 전날인 25일 밤에도 잠을 한숨도 못잤다. 어떻게든 잠을 자보려고 신경안정제를 먹었지만 별효과가 없었다.

26일 아침, 착잡한 심정으로 나의 재산목록 1호인 자료노트, 악보와 중국공연때 부를 예정이었던 중국노래 테이프, 헤드폰등을 휴대용백에 담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에게 「외국에 다녀오겠습니다. 건강하십쇼」하고 인사를 하자 「심경도 편찮을텐데 어딜 또 가려하느냐」면서 손을 꽉잡고 놓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여동생(조종순씨. 34세)이 중국으로 간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그 위험한 델 왜 가냐, 안된다」며 더욱 손을 끌어 당겼다. 마치 아주 헤어지는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더욱 쓸쓸했다.

만류하시는 어머니를 간신히 부리치고 상오 11시 50분 동경행 대한항공 비행기를 탔다. 나는 평소 남은 시간에는 신문을 잘보는데 이날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신문을 펼치면 나올 나의 이혼 기사 내용이 싫었다. 31일 나가사키에서 있을 아시아 뮤직페스티벌과 중국공연때 부를 레퍼토리를 헤드폰으로 들으며 모든것을 다 잊어버리려 했다. 역시 음악이란 신기한 것이 일본동경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교도.도쿄프러덕션(일본의 조용필 전속 프러모션사)의 디렉터 야마모토씨가 나와 「신문에 이혼 기사가 났다. 봤느냐, 사방에서 기자들이 찾고있다」고 말했다. 나는 숙소인 신주쿠 센튜리 하얏트 호텔에 들어가 식사도 방으로 시켜다 먹으며 26일, 27일 이틀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이때 중국공연시 중국의 인기가수 후이닝(서울올림픽 전야제 참가예정)에게 줄 곡 「우정」을 수정하고 마무리했다.

28일은 중국에 같이 들어갈 KBS 예능국 김현숙 부주간과 KBS라디오 박광희 부장이 오는 날이었다. 이틀동안 사람과 만나는 일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으나 이날 아침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보고 싶었다.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누군가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밤 10시께 김현숙, 박광희 두 사람이 도착했고 서로 피곤한 이야기는 피했다. 두 사람도 나의 심경을 충분히 읽은 듯 맥주를 마시며 듣기 즐거운 말만 했다.

31일로 예정된 아시아 뮤직페스티벌을 위해 나가사키로 떠나면서 기분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30일 저녁 숙소인 워싱턴호텔 근처의 중국요리점 (나는 평소 중국요리를 가장 좋아한다)에 가서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나를 알아본 일본팬들이 다가와 사인과 악수를 요구했다. 나가사키까지 내 얼굴이 알려졌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31일 낮 12시 30분 1차 리허설을 끝내고 4시 아시아 뮤직페스티벌이 시작됐다


2] 아시아뮤직페스티벌에서 만리장성까지


31일 나가사키에서 열린 아시아뮤직페스티벌은 이혼문제로 우울해있던 기분을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됐다.

아시아뮤직페스티벌은 일본 NBC TV주최로 이번이 3회째였고 나로서는 첫출연이었다. 공연장은 나가사키 부두에 매어있는 커다란 화물선 위에 특설돼 썰물일때는 부두밑에 내려가있다가 공연시작 시간인 5시께 밀물이되면 관객들이 볼 수 있는 위치로 떠오르는 이색구조였다. 출연진은 나와 일본의 인기가수 사이조 히데키, 홍콩의 신인가수 당이찬이었다.

나는 「모나리자」「아이 러브 수지」「서울, 서울, 서울」을 불렀고 히데키와 당이찬도 자신의 히트곡을 불렀는데 약 5천명의 관객들이 박수치며 따라했고 무척 즐거워했다. 공연이 끝나고 NBC TV에서 감사파티를 베풀었는데 나는 이 자리에서 서울올림픽에 대한 PR을 했고 올림픽때 방송을 통해 많이 듣게될 것이라며 「아리랑」을 불러 보였더니 모두다 따라불렀다. 왠지 코끝이 찡했다.

파티가 끝나고 히데키와 당이찬이 방으로 찾아와 술을 마시자고 했다. 지난해 오사카에서 열렸던 미야조 뮤직 페스티벌에 함께 참가한바 있고 서울올림픽 전야제에도 출연하기로 돼있어 무척 친하게 지내던 히데키가 이날 공연 이야기, 올림픽 전야제 공연 이야기를 하다가 조심스레 나의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히데키는 『유명인이다 보면 그런일이 마음대로 되지않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도 가수 생활 20년을 하다보니 수많은 고초를 겪어왔다. 모두 음악을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고 힘을내라』고 위로했다. 이날 저녁처럼 히데키의 말이 따뜻하고 고맙게 느껴진적은 없었다.

다음날 동경 신주쿠 센추리 하얏트호텔로 돌아온 나는 중국 비자문제로 걱정을 해야했다. 비밀리에 추진돼던 중국공연 계획이 사전보도돼 초청측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것이다. 비자 발급에 차질이 생길것 같다는 연락이 계속 들어왔고 나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됐다.

「어떻게 만들어 놓은 일인데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만일 이 공연이 취소된다면 한국에 돌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가뜩이나 이혼문제로 팬들 볼면목이 없는데 이 일마저 수포로 돌아간다면 나는 현해탄에 빠져 죽는 길밖에 없었다.

중국공연을 81년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84년부터 추진, 4년만에 이루어진 일생일대의 사업이나 다름없었다. 81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뮤직페스티발에 참가했던 나는 아시아 최대국인 중국의 가수가 출연치 않는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고 의아하게 생각됐다. 음악은 국경, 사상, 종교를 초월하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내가 한번 길을 터보자하는 것이었다. 이후 있은 나의 일본측 전속프러덕션 교토도쿄와 일본의 중국창구인 중산연구소를 통해 민간차원으로 꾸준히 추진했고 마침내 「중국국제 우의촉진회」로부터 초청을 받았던 것이었다.

온갖 불길한 생각을 하며 호텔 방안을 왔다갔다하고 있는데 교토도쿄로부터 「비자가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전화를 받는순간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고 혼자 방안에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하고 우선 침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초 예정돼있던 스케줄을 머리속으로 그려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밖에 나가있던 KBS의 김현숙, 박광희씨, 폴리스타(일본의 조용필 전속 프러덕션으로 방송관계 매니지먼트를 담당)의 야마모토이사가 돌아와 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야마모토씨가 「얏타」(「됐다」의 일본어)하고 환호했고, 얼마나 서로의 손을 잡고 흔들며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젠 중국 북경행 비행기에 오르는 일 뿐이었다.

3일 상오 10시 동경 나리타 공항에서 북경행 JAL781편에 몸을 실은 나는 4년만에 공연이 이루어졌다는 기쁨, 한국가수로는 처음으로 사상, 이념을 초월한 역사적 무대를 갖는다는 생각으로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상해시가 나타나고 양자강이 눈에 들어오면서 마치 소풍가는 어린이처럼 웃고 떠들던 나는 한편으론 「정말, 무대에 서는 걸까」「잘해낼 수 있을까」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수 없었다. 최근 세계적인 인기듀오 웸이 북경공연을 가졌을때 중국관객들이 너무 경직돼 있고 호응도 보이지 않아 「중국에는 다시 오지 않겠다」며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기내에는 나의 전속밴드「팩스」, 일본 NHK방송스태프, KBS팀등 우리 「화평우호방중단」일행 외에 중국관광을 가는 일본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내 얼굴을 알아보고 스튜어디스를 통해 사인을 요구해왔다. 「어딜가나 나의 팬들이 있구나」하는 생각에 가끔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광활한 대륙을 가로질러 하오 2시 30분 북경국제공항에 닿았다. 트랩에서 내리자마자 AP교도통신등 수많은 외신기자들이 몰려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고 마이크를 들이댔다. 국내에서도 이렇게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든 적이 없었는데 자그마한 체구에 청바지 차림, 그곳 사람들이 보기에는 묘하기 짝이 없는 내가 대체 누구길래 법석인가 모두들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공항에는 우리를 초청한 「중국국제우의촉진회」의 최화당부주임이 마중을 나와 한국말로 「잘오셨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하며 반겼다. 최화당부주임은 친할아버지같이 인자한 인상에 무척 순박해 보였고 인사말을 하기위해 일부러 우리말을 배웠다는 말에 따뜻한 인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먼나라로만 여겨졌던 중국이 바로 이웃이었구나 하고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최고의 귀빈들에게만 내놓는다는 승용차 링컨컨티낸틀과 벤츠가 나를 위해 대기하고 있어 나에 대한 예우가 대단하다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숙소인 장성호텔까지 가는길은 12차선의 쭉뻗은 넓은 도로가 약40분간 계속 이어졌다. 도로주변 곳곳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한창 건설중이어서 최근 중국이 현대화 물결로 「자고나면 달라진다」는 말을 되새기게끔 했다.

장성호텔엔 하오 4시 30분께 도착했다. 그날밤에는 초청측인 「중국국제우의촉진회」가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나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는 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아시아를 제쳐놓고 서구로만 진출해왔다. 이제 내가 아시아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음악통로를 열게돼 기쁘다』고 말하고 주먹을 마주 잡은채 「셰셰」하는 중국식의 감사의 뜻을 표하자 좌중은 폭소가 터졌다.

다음날,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난 나는 말로만 듣던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약 1시간 30분, 만리장성의 장엄한 모습이 나타났고, 우리 일행은 계단을 따라 하나하나 역사의 유적을 밟아갔다. 성을 오르는 동안 갖고갔던 라디오에서 KBS라디오 국제방송의 아침방송이 명확한 소리로 들렸다. 「한국방송이 나온다」고 누군가 외쳤고 모두들 모여 귀를 기울였다. 만리장성 위에서 우리 방송이 들린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갑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만리장성의 절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만리장성의 경치는 아침이 최고라는 말대로 끝간데없이 이어진 성곽, 밑에 그윽히 깔린 안개, 짙은 숲, 「아, 저 밑으로 몸을 던질까보다」하는 생각이 갑자기 나의 온몸을 휘감았다.

만리장성에서는 「친구여」의 KBS TV 녹화가 있었다. 나는 통기타 하나를 메고 올라가며 계속 「친구여」를 불렀다. 중국의 최고 인기가수로 알려져 있는 후이닝도 이 녹화에 참가했는데 그는 허밍과 「랄랄」로 이어지는 코러스를 집어넣어주었다.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케하는 만리장성의 경관을 바라보며 절로 멜로디가 입에서 나와 메고 있던 통기타로 반주를 넣어보았다. 서울에 돌아가면 「만리장성」을 곡으로 만들어 그 감회를 팬들에게 전하리라.

만리장성을 돌고 내려오니 11시. 새벽 5시부터 산을 올랐으니 무려 6시간의 산행이었던 셈. 그러나 절경에 취해있던 일행은 전혀 지친 표정들이 아니었다.

하오에는 등소평의 딸인 등림(鄧林)이 회장으로 있는 동방미술교류학회에서 우리 일행을 초청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국문화의 깊은 맛을 느낄수 있는 훌륭한 기회였다.

중국전통음악단은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음소절만 골라 선보였고 아크로바트, 마술쇼 등을 보여줬다. 특히 12줄로된 현악기로 연주하는 「호수에 뜨는달」은 음에 심한 진동현상을 보이는 중국음악의 진수였다. 연주기법에는 록기타에서의 밴딩(줄을 끌어올려 음에 변화를 주는 것)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보다 더욱 격렬했고 열정적이어서 무척 놀랐다. 「빛은 동방에서」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 자리가 끝나고 우리는 동방미술교류학회에 준비해간 운보 김기창 화백의 산수화를 선물했고, 이들 역시 학회에서 만든 동양화집을 우리에게 주었다. 말 그대로 동방양국의 미술이 교류되는 의미있는 순간이었다.

밤늦게 숙소로 체조선수 리닝이 찾아온 것은 뜻밖이었다. 86년 아시안게임 당시 내 노래를 들으며 운동연습을 한다는 신문 보도를 본적이 있어 그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으나 막상 온다는 연락을 받고는 깜짝 놀랐다. 리닝은 「조용필씨는 이곳에서도 커다란 인기가 있다」고 전했고 올림픽때 서울에 와서 또 만나자고 했다. 이날밤에는 북경에 살고있는 한국인 성악가 방초선씨에게서도 「잘왔다」는 인사전화가 걸려왔다.



[3] "마침내 해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천안문광장에서 TV 녹화를 했다. 광장은 여의도 광장보다 훨씬 넓은 것 같았고 네모진 블록이 이어져 1백 50만개가 되는데 행사가 있을때 그 사각블록에 한 사람씩 서게돼 있다고해 그들의 사회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은연중 비춰지기도 했다.

광장은 웬 사람들인지 엄청나게 많은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알고보니 모두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이었고 너무 사람이 많아 당초 천안문 모택동초상 바로밑에서 하려했던「서울, 서울, 서울」녹화를 포기해야 했다. 우연히 연변대학에 일어과 교수로 있다는 한국인을 만났는데「서울에서 왔다. 조용필을 아느냐」고 말을 건네자「안다」고 했고「내가 바로 조용필」이라고 말하자 너무 반가워했다. 연변에도「돌아와요, 부산항에」같은 노래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날 저녁에는 주최측에 대한 우리의 감사파티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호텔에 돌아오자 교토도쿄 직원 노자와로부터 「파티가 취소됐다. 북경공연도 취소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져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정치적인 미묘한 상황으로 국영인 북경호텔에서는 공연이 안된다는 것 같았다. 얼마후 노자와로부터 다시 전화가와 북경호텔공연은 취소됐으며 그대신 숙소인 장성호텔을 교섭하고 있는데 안될지도 모르니 너무 기대는 말라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북경호텔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스태프들이 다음날 공연을 위한 무대세팅에 한창이었다.

북경호텔 대연회장에서 무대세팅을 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차마 중지하라는 말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는데 저녁7시께 공연장 섭외를 하고 있던 노자와(교토도쿄직원)로부터 연락이 왔다.

『축하합니다. 장성호텔에서 하도록 허가가 났습니다』

장성호텔은 미국 쉐라톤호텔과 합작하고 있는 민영호텔이라서 막판에 간신히 대관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용필아, 고맙다」고 마음속으로 외친 나는 스태프들에게 「공연장이 바뀌었으니 무대를 뜯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영문을 모르던 스태프들도 그동안의 상황을 알고는 즐겁게 작업에 임했다.

다음날 새벽3시까지 무대를 뜯는 작업을 지켜보고 자리에든 나는 묘한 자신감이 들었다. 고비를 수차례 넘기다보니 「만일 또 공연이 취소되면 천안문 광장에 통기타 메고 혼자 나가서라도 노래를 부르겠다. 광장에서 노래부르는 것까지 못하게 하진 않겠지. 북경에서 노래를 한다는데 의미가 있는거지」하는 오기까지 솟았다.

공연일인 다음날은 상오에 북경역 앞에서 「서울, 서울, 서울」의 TV녹화를 할 예정이었으나 차를 타고 가는도중 폭우가 쏟아졌다. 지나가는 비인줄 알고 기다려봤으나 쉽게 그칠것 같지 않아 차내에서 북경거리를 배경으로 녹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북경시내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읍니다. 비오는 서울거리가 생각납니다」하고 멘트를 달던 나는 문득 이혼한 아내,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 쓸쓸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서울, 서울, 서울」을 부르며 생각을 지워버렸다.

저녁 8시 15분. 공연의 오프닝 행사가 시작됐다. 내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비때문인가.

오프닝의 사회는 북경에 와서 줄곧 내 통역을 담당해 왔던 북경거주 한국인 김정복양이 맡았다. 김양은 올해 나이 18세로 북경 「모란봉밥집」에서 일한다는 예쁘장한 용모의 아가씨였다. 그녀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수 없었으나 오빠가 중국국영 CCTV의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었고 우리나라에 대해 무척 관심을 갖고 있었다.

8시 30분부터 공연이 시작됐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한성(서울)에서 온 조용필입니다. 여러분을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하는 인사를 준비한 메모를 보며 중국어로 말했고 「찐미양」(어때요)하고 덧붙이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첫곡은「정선아리랑」이었고「한오백년」「강원도아리랑」등이 이어졌는데 예상대로 관객들은 반응이 없었다. 내 자신도 공연 시작하면서 객석 양쪽사이드에서 마치 누가 노려보는듯한 느낌을 받아 긴장됐었고 중국노래를 부를때는 가사를 잊어버려 당황하기도 했다.

네번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나오면서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는 멜로디라는듯 한두사람이 따라불렀고 노래가 끝날무렵에는 모두 박수를 치며 따라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잘안보이던 객석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약 1천 8백명의 관객들이었는데 누구누구인지는 몰라도 일본관광객이 많다는 AP통신의 보도와는 달리 대부분 중국인들이었다.

「친구여」는 중국의 인기가수 후이닝(서울올림픽 전야제 참가예정)과 함께 듀엣으로 불렀고 특별히 작곡한 노래 「우정」을 후이닝에게 선사했다. 「서울, 서울, 서울」을 마지막으로 공연이 끝을 맺자 관객들은 「앙코르」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쳤다. 앙코르를 받으려했으나 스태프와 무대감독까지 다 들어와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다시 나가 인사만 했다. 또다시 박수가 계속나와 그칠줄 몰랐다.

무대뒤로 돌아와 넥타이를 풀고 음료수를 들이켰다.

「마침내 해냈다.」 음료수는 너무나 시원했다.

4박5일간 중국에서 지내면서 만난 우리교포들은 동족이라는데서 오는 친밀감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으로 수십년간 떨어져있다 상봉한다는 생각으로 더욱 애틋한 정이 깃들었다.

줄곧 나를 따라다니며 통역을 맡았던 18세소녀 김정복양은 처음 만날때부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감격해 했고 천안문광장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 교포들도 내가 조용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눈물까지 흘렸다. 내 노래는 홍콩과 일본을 통해 복사테이프가 많이 들어가 있었고, 방송에서도 자주 방송되고 있어 얼굴은 몰라도 「조용필」 이름석자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음악은 사상, 인종, 국경을 초월하는 만국어임에 틀림없음을 새삼 실감한 현장이었다.

김정복양은 처음 만났을때 「모란봉밥점에서 복무하는 김정복올쎄다」하는 생소하게 들리는 억양이 섬뜩하기까지했고 우리에 관한 정보, 지식을 너무 잘알고 있어 「감시원이 아닌가」 내심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가 서울을 무척 동경하고 있고 나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안한 마음을 금치못했다. 「조선생님의 노래는 너무 아름답다」며 특유의 평안도 억양이 섞인 감탄사를 연발하던 그녀에게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시로 내가 지니고 듣던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했다. 「조선생님의 노래는 너무 좋아하지만 요즘은 카세트가 고장나 듣지 못하고 있다」는 그녀의 푸념섞인 말이 그렇게 솔직, 순박하게 느껴질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양은 카세트를 받아들고는 한동안 어쩔줄 몰라했다. 그녀에게는 살아오는동안 가장 귀중한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용필선생의 노래를 듣다보면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네다. 노래를 들을때마다 왜 우리 민족이 둘로 나뉘어야했는가. 한쪽은 조선생의 노래를 듣고 즐거워할 수 있지만 또 한쪽은 그럴수 없다는 사실을 도무지 알수가 없습네다」

떠나기전날 공연이 끝나고 호텔방에서 자축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불현듯 꺼낸 그녀의 말은 우리들을 가슴아프게 했다. 떠나는 날 그녀는 울었다. 숙소인 장성호텔 현관에서 작별을 하고서 스태프들과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다가 울음을 그치지않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안스러워 다시 호텔로 차를 돌려와 공항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김양은 서울올림픽 때는 꼭 불러달라고 신신당부했고 우리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서울에 돌아온 후인 지난 13일에도 중국국영 CCTV아나운서로 있는 그녀의 오빠가 국제전화를 해 「잘 도착했습네까. 동생이 올림픽때 서울에 갈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고 전화를 바꿔든 김양은 「서울을 꼭 보고싶다」고 울먹였다. 그녀의 눈물은 민족분단의 아픔이 분명하리라.

북경거주 한국인성악가 방초선여사를 만날수 있었던것도 큰 기쁨이었다. 방여사는 지난 6월 내한, 미스 서울올림픽 선발대회에 게스트로 참가했고 국립극장 공연을 가진 바있다. 그녀도 나의 팬이어서 당시 무척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만날수 있게 됐다며 반가워했다. 6일 공연이 끝나고 남편(중국인 성악가), 아들, 며느리, 딸과 함께 찾아온 그녀는 「서울에 갈 예정이 없느냐」는 내 물음에 「가곤 싶은데 갈수 있을는지」하며 두손을 꼭잡았다. 여고 2학년이라는 딸에게는 카세트테이프, 볼펜을 선물하고 사인을 해줬다. 그 꼬마아가씨는 내 테이프를 안가진 것이 없다고 했다.

떠나는 날은 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렸다. 큰일을 끝냈을 때의 허탈감, 짧은 기간이었지만 깊은정을 나눈 우리 교포들을 남기고 가야한다는 안타까움이 겹쳐 모두들 착잡한 표정들이었다.

북경국제공항에서 홍콩행 비행기좌석에 깊이 몸을 누인 나는 밀려드는 피로감에 꿈도없는 잠에 바져들었다. 8~9일 홍콩 TVB TV 주최 88 미스 홍콩선발대회 참석, 홍콩 라디오 인터뷰등을 끝내고 당초 예정돼 있던 동남아 순회공연은 모두 취소해 버렸다. 나는 탈진상태에 빠져있었고 하루빨리 서울거리가 보고싶었다



[4] 음악을 하게된 결정적인 계기


나는 시련이 닥칠때마다 지난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음악을 만나 갖은 고초를 겪으며 때로는 음악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려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어떤 일이 다가와도 견뎌낼 수 있었다.

인생의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던 최근,「어떻게 이루어 놓은 음악인데 예서 쓰러질수는 없다」며 자신을 모질게 채찍질했다. 사랑까지 떠나보내야 했던 음악, 나는 이제 그를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맹랑한 생각을 했었는지 알 수 없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그 일은 나를 음악으로 더욱 가깝게 끌어들인 계기가 됐다.

아버지(조경구씨.86년 작고)는 기타를 만지던 나를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상당히 완고한 편이었고 당시 분위기는 기타를 친다는 것이 불량하게 보여질 정도였다. 「기타 못치면 간첩(?)」취급받는 요즘과는 다른 시절이었다. 「못된 놈들이나 하는짓」이라며 몰아세우던 아버지는 어느날 기타를 부숴버렸다.

아버지가 하도 원망스러워 「내게는 기타가 가장 중요하다. 다시 기타를 사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 막노동을 해서라도 기타를 사겠다」고 대들었고 더욱 화가난 아버지는「공부는 안하고 기타에 미치더니 버르장머리마저 고약해졌다」며 매를 때렸다. 태어나서 아버지에게 그토록 많이 맞아보기도 처음이었다. 맞고나니 온몸이 욱신욱신했고 얼굴이 퉁퉁부었다. 그러나 더욱 아팠던 것은 마음이었다. 목숨보다 중한 기타를 부숴버리다니 나는 죽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방법은 신경안정제 다량복용. 그무렵 신경안정제 세코날을 수십알씩 먹고 자살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었고 순간 그방법이 떠올랐다.

세코날의 치사량은 40알이었는데 이를 한거번에 파는 약국은 없었다. 한 약국에서 두알씩 약을 사 20군데를 도니 40알이 됐다. 40알을 꿀꺽 삼키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집앞에서 죽어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리자는 못된 생각이었다. 현기증이 나며 집대문이 보이는 순간 나는 쓰러졌고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집에서 기르던 개「메리」가 짖어대 사람들을 불렀다고 했다. 나에게는 재생의 은인인 셈이다.

2주일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나는 그 후유증으로 한달간 학교를 휴학하고 집에서 지냈다. 자살에 실패한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나는 자꾸만 안으로 움추러들었고 그럴수록 음악에 대한 집념은 강해져갔다. 사실 그전까지는 기타를 쳐도 프로뮤지션이 되겠다는 생각은 안했으나 이 사건이후「오기가 생겨서라도 프로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됐다.

나는 그 난리를 치르고 나서도 아버지에게 기타를 사달라고 애원했고, 아버지는「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는 기타치는 꼴 못본다」며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부모님들은 내가 법과대학에 진학해 고시를 보고 검사나 판사가 되길 바랐다. 자살미수사건이후 아예 입을 다물어버린 나를 보고 부모님들은 마음을 잡았구나 하며 안심을 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집을 빠져나갈 계획을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부모님들이 「공부 열심히해서 검사가 돼야지」할 때마다 「검사위에 도사, 도사위에 악사」라며 당시 유행하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영어, 수학 단과반 학원에 다니라고 준 돈에서 쪼개 종로3가에 있던 세광음악학원에 등록했고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악동 4명을 만났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가출한다」고 뜻을 모은 우리는 행동지침까지 정하는등 면밀한 계획을 짰다. 「악기는 각자 준비할 것, 용돈은 되도록 많이 얻어 저축해 놓을 것, 그래도 부족하면 팔수있는 물건을 집에서 갖고 나올 것」등이 우리의 행동지침이었다.

목숨까지 던지며 지키고 싶었던 음악, 사랑도 버려야했던 음악, 무엇이 나를 그토록 미치도록 만들었는지.

음악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속에 흐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일곱살 되던 해 가을, 달빛이 무척밝았던 날 밤 멀리서 들려오던 하모니카의 선율은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음악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고 음악과의 첫만남이었다.

나는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군송사면 쌍정리에서 염전업을 하는 부모님의 3남4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어릴때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자라던 시절이 6.25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고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 놀이를 하다보면 딱지에 그려져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가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바우고개」를 동네 사람들 앞에서 가끔 부른적은 있으나 노래를 잘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수줍음을 잘타 남의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고 일곱살때 홍역을 잘못앓아 후유증으로 시력이 악화 지금도 왼쪽눈은 잘 안보인다.오랫동안 병원을 다니느라 학교를 쉬기도 했다. 화성군 송산중학교 2학년때 서울 경동중학교로 전학할때까지는 음악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음악과의 두번째 만남은 맹인가수 레이 찰슨의 「당신에 대한 사랑 멈출수없어」(I Can't Stop Loving You)로 이뤄졌다. 중3 여름방학때 고향마을의 바닷가 제방둑을 거닐다 최동욱씨가 진행하던 라디오프로「3시의 다이알」에서 흘러나오던 이 노래를 우연히 들었는데 레이 찰슨의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가 너무 감동적으로 들려 이후 나를 팝음악광으로 만들었다. 또 하나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니니 로서의 「밤하늘의 트럼핏」이었다. 이 곡을 들으며 트럼핏의 음색에 얼마나 반했는지 트럼핏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재미있는 일은 훗날 86년 동경가요제에서 장본인 니니 로서를 만났던 것이다. 이때 니니 로서는 대히트곡 「친구여」를 받아 레코딩까지 했다. 「어렸을때 당신의 음악을 듣고 감동해 음악을 시작했다.」고 밝히자 니니 로서는 「이제는 당신이 나를 감동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G선상의 아리아」도 바이얼린을 배우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게할만큼 좋아했던 곡이다.

기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당시 유행하던 벤처스의 영향이었다. 내한공연을 하던 벤처스의 「상하이 트위스트」「파이프라인」「불독」등을 연주하는 모습은 강렬한 충격이었다. 하느님의 손가락이 있다면 바로 그들의 기타연주하는 손가락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집에는 둘째형(조영일씨·45세, 당시 한양대공대재학)이 치던 고물 통기타가 하나있었는데 벤처스의 레코드를 들으며 똑같이 따볼려고 꽤나 애를 썼었다. 형은 기타줄 끊어진다고 기타를 못만지게 했고 아버지도 탐탁찮게 여겨 언제나 집뒷산에 올라가 연습했다. 「상하이 트위스트」「파이프라인」「불독」등 이때 연습하던 곡들은 고등학교 3학년때 서소문 대한일보건물 13층 스카이라운지에서의 내 첫무대와 나중에 기지촌 무대에서 주요한 레퍼토리로 쓰인 의미있는 곡들이다.

그때까지 별다른 취미나 특기가 없던 나는 하루종일 기타를 끼고 살았다. 싫증을 잘내 뭐하나 끝까지 하는 일이 별로 없었던 내가 그토록 기타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 자신도 놀랐던 일이었다. 내게 음악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했다.

부모님들도 하루이틀 붙들고 있다 그만 두겠지하고 가만 놔뒀지만 사태가 심각(?)한 것을 느끼고 야단을 치다가 아버지가 기타까지 부숴버리기에 이른 것이다.

이 일은 오히려 내게 더욱 자극을 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출을 하게 만들었고 아마추어에서 프로세계에 뛰어들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5] 7년반 동안의 모진 유랑생활 시작


지금 생각하면 어릴때 나는 무척 불량스러웠던 것 같다. 아버지가 「못된 짓이나 하고 돌아다닌다. 다른 형제들은 그렇지 않은데 너는 대체 어떻게 된 놈이냐」고 항상 야단쳤고「기타사건」이후는 아예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당했다.

시골국민학교(경기도 화성군 송산국민학교) 때는 말이 없고 수줍음을 잘탔으며 별로 특출한데가 없었던 나였지만 서울에서의 경동중고시절은 망나니 짓을 꽤나 많이 했다. 내가 살던 정릉(청수장근처)은 큰길을 경계로 북쪽동네는 「탁골승방」 남쪽동네는 「본토」(아이들끼리 통하는 용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불렀는데 이는 불량소년 집단의 명칭이기도 했다. 나는「본토」에 속해 있었고 허구한날「탁골승방」아이들과 패싸움을 하지않으면 우리 구역에 들어온 「이방인」을 혼내주었다.

한번은 친구가 누구에게 모질게 매를 맞고 온적이 있었다. 나는 때린 당사자들이 다니는 학교를 찾아가 나오는 아이를 붙들고 비명소리도 못지를 정도로 두들겨 패주고 달아났다. 이 일은 그 다음날 라디오 방송에서 「불량학생들이 K고교에 다니는 L군을 때려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라고 보도까지 됐었다. 물론 경찰에 붙잡히진 않았다.

그때 나는 지금처럼 작은 체구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이후 거의 자라질 않았으니 끈풀어진 군화를 신고 교복단추 몇개 끄르고 서면 불량스러운 면으론 꽤「폼」이 났었다. 집마당에는 군대 따블백을 구해 매달아놓고 시간만 나면 두들겨댔고 동네에 있던 합기도 도장에도 나가 싸움 실력을 길렀다.

당시 도장에는 합기도 초단짜리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무척 잘난 체를 했었다. 조용히 불러내 그 아이를 흠씬 패줬고 그 다음날부터 도장출입을 그만뒀다. 초단이 그런정도니 합기도를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담배를 배운 것도 이 시절이었다. 지금은 중고등학생들 중에도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반수이상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내 나이에 담배는「불량의 극치」였다.

이때 배운 담배가 지금까지 이어져 하루 3갑씩 피워대고 있다. 집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더욱「못된 놈」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악동 노릇들은 모두 하고 싶었던 음악이 주위의 반대에 부딪쳐 못하게 되자 나타난 행동들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음악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만족감도 얻을수 없었다.

1968년 3월 24일 경동고등학교 졸업식날. 다니던 음악학원에서 만나 함께 음악을 하기로 뜻을 모은 네명의 악동들은 면밀히 세워놓았던 가출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둘째형의 독일제 제도기와 백과사전을 트렁크에 담아 몰래 집을 나섰다. 그렇게 밉게 보이던 집안 식구들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떠난다는 것이 가슴아프게 느껴졌다.

이후 7년반동안의 모진 유랑생활이 이어졌으니.

우리의 목적지는 미군기지가 있는 경기도 파주의 장팔촌이었다. 미군상대의 나이트클럽이 즐비한 거리로 들어서 두리번거리던 우리들은「DMZ」라는 간판의 가게가 그중 만만해보였다. 그집엔 「밴드모집」이라는 광고가 붙어있었고 들어가 주인을 만나자 별다른 말 없이 「한번 해봐」라고 간단히 응락했다. 숙소는 근처 아주머니 혼자서 하는 하숙집으로 정했다. 그날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비틀즈같이 되자」며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하루만에 해고를 당해야했다. 그 무대는 한 스테이지가 45분으로 하루 6차례를 뛰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1백곡이상의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연주할 수 있는 레퍼토리는 「컨트리 보이」「아이워나고홈」「상하이 트위스트」등 고작 열댓곡밖에 되지 않았으니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딱부리」라고 불리던 그곳 지배인은 「그 레퍼토리로 어떻게 무대에 서냐」고 나무랐고 미군들과 함께 놀러왔던 양공주들은 「애들이 와서 무슨 연주를 한다는거야」하며 비아냥 거렸다.

우리들은 실의에 빠졌다. 「이게, 현실이구나」 철모르는 아이들이 매정한 「딴따라」 바닥을 몸으로 겪기 시작한 것이다.

프로데뷔 무대라 할 수 있는 경기도 파주 기지촌 「DMZ」클럽에서 하루만에 해고를 당한뒤 우리 네악동은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동안 겪었던 자살소동, 불같이 화를 내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그럴수도 없었다.

오도가도 못하고 사흘째 하숙집방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DMZ」의 지배인 「딱부리」가 찾아왔다. 소주와 오징어를 들고온 「딱부리」는 출연은 안시키되 낮에 연습은 하게 해주겠다면서 「야, 늬들 열심히 해라. 힘내라」며 술을 또 사주었다. 돈이 모자라 밥도 제때 먹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무척 안돼 보였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집에 돌아가야 이제 뭘하겠느냐,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곳 건달들과 싸운 일을 기화로 철석같았던 맹세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하숙집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연습에 열을 올리고있던 어느날 기지촌의 건달 6~7명이 찾아와 「서울서 왔으면 다냐, 신고를 해야할 것 아니냐, 소주값 좀 내놔라」며 시비를 걸었다. 우리가「돈없다」고 버티자 다자고짜 드럼치던 친구의 얼굴을 한방 갈겼다. 겁에 질린 그 친구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렸고 나머지 셋은 흠씬 얻어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텼다. 「두고보자」며 건달들은 돌아갔으나 이 사건으로 서울에서 우리 멤버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세컨기타, 베이스 기타를 맡던 친구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알고보니 드럼치던 친구가 그때 서울로 곧장 올라가 집으로 연락해준 것이다.

리드기타였던 나 혼자남아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결국 둘째형이 찾아왔다. 형은 「공부를 하면서 음악해도 되지 않느냐」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배가 고프니 우선 빵과 우유 좀 사달라」고 해놓고 형이 잠시 나간 사이 근처 야산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집에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형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하숙집 주변을 배회하다가 새벽녘에야 몰래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다 지친 형은 가버린 후였다. 방에는 형이 사다놓은 빵과 우유, 그리고 한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다.

「그토록 가고 싶은 길이라면 데려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네가 택한 길이니 고생이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라」는 편지였다. 빵을 물어뜯으며 편지를 보던 나는 눈물이 왈칵솟았다. 오랜만에 느껴본 핏줄의 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후일담이지만 이때 형은 먹을것을 사다달라고 하고선 도망갈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부모님에게 나를 찾지못했다고 알렸다 한다.

어렵게 만들었던 우리팀 멤버들은 찾을 길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6] 뿌리칠수 없는 음악의 유혹


외톨이가 된 나는 기타하나 둘러메고 다시 기지촌을 헤매기 시작했다. 내 실력에 맞는 만만한 업소를 찾아다니다보니 문산근처 용주골까지 흘러 들어갔다. 이리기웃, 저리기웃하며 수십집을 돌아다녔을까.

저녁무렵 「파라다이스」라는 미군상대 클럽이 눈에 띄었고 연습하는 밴드를 보니 기타, 베이스, 드럼뿐이었고 연주가 엉망이었다.

「파주에서 하다가 팀이 깨져 같이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기타는 자신있다」고 말하자 「첵돌스」라고 부르던 이들 그룹은 고기가 물을 만난듯 나를 보고 기뻐했다. 마침 리드기타 멤버가 군입대로 빠져나가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무대에 서기로 하고 밤새도록 이들이 하던 레퍼토리를 연습해 보았다. 용주골의 음악수준은 파주보다는 좀 처지는듯, 당시 내 실력으로도 비어있는 리드기타포지션을 그럭저럭 메워줄 수 있었다.

간신히 비집고 들어간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기타만 붙잡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도 내 영향을 받아 열심히 연습했다. 6개월쯤 지나자 우리팀은 용주골에서 최고의 팀으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용주골 기지촌의 무명밴드로 떠돌다가 69년초 「파이브 핑거스」에 스카웃돼 미8군무대에 설수 있었다는것은 뮤지션으로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미8군무대는 당시 음악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파이브 핑거스」밴드는 A클라스의 평가를 받고 있는 유명한 팀이었다. (미8군 측은 1년에 한번씩 각단체에 대한 오디션을 실기해 더블A, A, B, C, D로 급수를 매기고 이에 따라 개런티를 정했다)

「파이브 핑거스」는 나까지 5인조로 드럼에 권용남(현재 호주거주) 베이스와 싱어에 김영식, 김중식 쌍동이 형제(현재 청주 모클럽에서 활동) 오르간은 이름은 기억 안나지만 현재는 결혼해 미국으로 간 여자뮤지션이 맡았었다.

의정부로 발령받은 우리팀은 그해말까지 그곳 무대를 돌다가 마침내 실력있는 그룹의 집합장소였던 이태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킹클럽」이라는 그곳 무대에 서면서 내 이름도 뮤지션들 사이에서 꽤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이때 「차밍가이스」라는 팀에서 베이스를 치던 이남이, 「히파이브」의 리더 유상윤, 조경수 등을 사귀게 됐다.

이남이는 나중에 같이 활동하기도 했었고 유상윤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만나는 절친한 음악친구들이다. 유상윤은 현재도 「히파이브」의 리더로 건반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고있고 나의 일본진출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파이브 핑거스」에서 활동한지 1년반쯤 지났을 때였다. 「킹클럽」의 신문광고에 내얼굴이 출연진으로 소개돼 나간것을 보고 둘째형이 업소로 찾아왔다.

내가 파주「장팔촌」하숙집에서 형을 피해 달아난지 2년만의 일이었다.

형은 「이제 너도 할만큼 하지 않았느냐, 부모님이 걱정하시니 집에 돌아가자. 공부 좀 해서 대학에 들어가놓고 음악해도 좋지않냐」며 싫다는 나를 계속 찾아왔다.

「삼고초려」라고 했는데 나같은 놈이 뭐그리 대단한 놈이라고 계속 정을 쏟는 형에게 너무 미안했고 음악에 대한 자신감도 어느 정도 생긴 때라 결국 형의 말을 듣기로 했다.

내 부탁으로 부모님에게는 알리지않고 당시 결혼해 역촌동에 살던 둘째누이(조종남씨.53.71년 도미.뉴욕거주) 집에서 재수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달쯤 지나자 또 손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대하지않았던 공부가 쉽게 될리없었고 음악을 해본 사람은 알지만 한번 깊게 빠지면 음악을 중단하고 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던차에 마침 음악하면서 알게된 박종환(드럼.현재거주불명)이란 친구가 찾아와 자기팀에 기타가 빠져나가 제대로 활동을 못하고 있는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잠시만 도와주기로 하고는 나는 몰래 집을 빠져나와 친구와 함께 경기도 광주의 모클럽으로 가버렸다. 두번째 가출인 셈이었다. 형에게는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나에게 음악의 유혹은 뿌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름도 없었던 그 밴드에서 나는 노래까지 하게 됐다. 「파이브 핑거스」시절, 드러머와 듀엣으로 「프라우드 메리」를 부른적이 있었으나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못해 이후 노래를 하지않았었는데 그 밴드에서 노래하던 베이스가 군에 입대, 잠시 대역으로 나섰던 것이다.

나는「점핑 잭 프레쉬」(Jumping Jack Fresh)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때」(When a Man Loves a Woman) 「아이 필 굿」(I Feel Good)등 소울풍 노래를 주로 불렀는데 어느날 한미군병사가 놀러와 재즈뮤지션 바비 블랜드의 「리드 미 온」(Lead Me On)이라는 노래를 불러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가장 좋아하는 곡인데 다음날인 자신의 생일 축하곡으로 불러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곡은 내가 가수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의미있는 곳이었다.

나중에 「님이여」로 번안해 부른 「리드 미 온」(Lead Me On)은 내가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김대환씨를 만나게 해주었다.

「리드 미 온」은 한미군병사의 생일축하곡으로 불러준 후 내 간판 레퍼토리가 돼 무대에서 빠지는 일이 없었고 손님들의 반응도 좋았다. 짙은 소울의 분위기가 내 목소리의 색깔과 잘맞아 떨어지는 곡이었다.



[7] '김트리오' 시절


경기도 광주의 한클럽에서 무명밴드로 뛰다가 70년말 소공동에 있던 국제호텔 레인보우클럽으로 옮긴 어느날 「리드 미 온」을 연습하고 있는데 김대환씨가 찾아왔다. 김대환씨는 현재 음악을 그만두고 공예작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룹 「애드포」의 드러머로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다녀온 직후였다.

지나다가 「리드 미 온」을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듣고 너무 좋아 와보았다는 그는 즉석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했다. 내 노래를 인정해준 것은 김대환씨가 처음이었고 그정도 실력있는 드러머와 무대에 선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우리는 리더겸 드럼에 김대환, 베이스에 「차밍가이스」에서 활동하던 이남이를 끌어들여 「김트리오」를 출범시켰다. 나중에는 현재 「사랑과 평화」의 리드기타인 최이철도 들어와 함께 활동했다.

「김트리오」시절은 내 실력을 크게 향상시킨 계기가 됐다. 투기타 시스템으로 같이 기타를 치고 번갈아 노래를 했던 최이철에게 나는 항상 실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고 최이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어 서로 지지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특히 김대환씨는 섬뜩할 정도의 집념을 보였다.

그는 60년초 미 8군무대에 설때 드럼연습에 몰두하려고 면도칼로 혀끝을 잘라버리기까지한 지독한 사람이었다. 「인간과는 대화를 않겠다. 드럼하고만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혀를 자르고 창고안으로 드럼을 가지고들어간 그는 개구멍으로 식사를 받아먹으며 1년반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혀끝이 짧으니 말이 잘되지를 않아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도 함께 음악하면서 꽤나 맞았다.

한번은 김대환씨가 큰맘 먹고 당시 국내에는 몇 없는 퍼즈(기타사운드를 변형시키는 전자기기)를 사줘 음악하는 친구들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다 연습시간에 늦은 일이 있었다.

김대환씨는 금싸라기같은 연습시간을 낭비한다며 화가 날대로 나있었다. 연습실입구에서 기다리던 그는 「친구들에게 자랑하느라 늦었다. 죄송하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냅다 한방을 갈겼다. 정신이 아뜩해지며 퍼즈를 안은채 쓰러졌는데 묘하게 기분이 좋아 웃으면서 연습한 기억이 있다. 매의 아픔보다는 나에게 깊은 관심을 쏟고 채찍질 해준 그에 대한 고마움이 컸던 것이다.

모두 「연습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열심이었고 71년 모주간지가 주최한 제1회 보컬그룹경연대회에서는 내가 가수왕상을 받는등 수준급의 밴드로 인정받았으나 음악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71년 우리가 일하던 프린스호텔 나이트클럽에는 프리재즈를 하는 강태환악단이 있었다. 팝이나 록등 비교적 쉬운 연주를 많이 하던 내게 이들의 재즈스케일은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이었다. 나는 연주를 끝내고나서 그들이 노력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어느날 나는 그들의 악보를 몰래빼내 내 오선지에 옮겨놓아야겠다고 맘먹었다.

며칠을 두고 기회를 엿보던 어느날 악보를 놓아둔채 이들이 식사를 하러간 사이 몰래 다가가 열심히 옮겨적기 시작했다. 생전처음보는 「블루 노트 스케일」「인도스케일」등 악보에 심취해 누가 옆에 와있는 것도 알지 못한채 한참 베끼고있는데 「너, 대체 뭐하는 거냐」며 누가 뒷덜미를 낚아챘다. 악보주인인 강태환씨 였다. 호되게 꾸지람당하고 백배사죄하고 돌아선 나는 아쉬운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다 베꼈을텐데」

그러나 강태환씨는 내 음악적인 욕심에 내심 감탄했는데 훗날 그악보를 통째 내게 선사했고 틈틈이 조언도 해주었다. 지금은 잘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 역시 내음악인생에 있어 빼놓을 수없는 사람이라 할수있다.

71년 「김트리오」는 부산으로 내려가 동아데포트 4층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게 된다. 시스템은 김대환을 매니저로 하고 당시 「키보이스」의 드러머를 영입, 나와 최이철이 기타, 이남이가 베이스를 맡은 4인조 밴드였다.

현재 프리재즈로 국제적 명성을 날리고 있는 강태환씨등에게 「청음」(곡을 듣고 채보하는것)을 배웠고 TBC TV에 처음 내 모습을 내놓기도 했다.

그 쇼프로는 지금 MBC제작위원으로 있는 조용호씨가 맡고 있었는데 그로서는 무명인 내게 대단한 선심을 쓴거나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TV에 출연한 나는 첫자작곡 「옛일」을 불렀는데 평소 밤무대에서 관객들을 앞에 놓고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버릇때문에 카메라앞에서 아무것도 들지않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끝까지 꼿꼿이 선채 노래부른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촌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당시 이프로의 담당국장은 현재 중앙일보이사인 황정태씨였는데 조용호PD에게 프로가 끝난후 「뭐, 저런 햇병아리를 연습도 제대로 안시킨채 내보내 프로를 망치느냐」며 화를 냈고 시말서까지 받아냈다고 한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인데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TV출연은 절대 않겠다고 맘먹기도 했다. 내 실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할 때라 잔뜩 바람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나를 한단계 더 올라설 수 있도록 자극을 준 사건이었고 황정태씨나 조용호PD도 이후 나의 방송진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트리오」는 이해 「사랑의 자장가」「하얀모래의 꿈」「님이여」등 6곡이 담긴 앨범을 출반했으나 발매가 되지않아 기념음반으로 남았다.

72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명동의 「실버타운」이란 곳에서 활동하던중 「김트리오」는 해체된다. 매니저격으로 있던 김대환씨가 자기길을 찾아간다며 손을 떼자 각자 「자기도취」에 빠져있던 멤버들도 절로 해산이 돼버렸다. 우리의 레퍼토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당신 오늘밤 외로운가요」(Are You Lone some Tonight)와 비지스의 「워즈」(Words)등 컨템퍼러리팝과 호세 펠리치아노의 「비」(Rain)「원스 데어 워즈 어 러브」(Once There Was A Love)등이 있는데 음악취향이 고고풍으로 급선회, 서로 음악이 맞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팀 해체후 「25시」의 리더로 있던 조갑출씨의 제의로 몇개월 부산극동호텔에서 그들과 함께 일하던 나는 73년 방위소집령이 떨어져 잠시 음악활동을 쉬게된다. 이때도 나는 방위영장이 나온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둘째형이 물어물어 업소로 찾아와 이 사실을 알게됐다. 집나간 「탕아」를 세번씩이나 도움을 주기위해 찾아온 둘재형의 고마움은 지금 생각하면 눈물겨운 것이었다.

둘째형은 대학을 마치고 도미, 현재 뉴욕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도 내가 어려울때면 전화를 걸어 격려를 해주곤 한다. 형은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73년 미국으로 건너갈때 큰딸 수지(9)는 남겨두고가 내가 이후 수지가 미국으로 갈때까지 7년간 아버지처럼 키웠다. 미국가서 자리를 잡을때까지 내게 맡겨놓았던 것이다. 정이 들대로 든 수지는 부모들이 뉴욕에서 자리를 잡아 들어오라고 부를때 떨어지기 싫어 나를 떠나기 전날 밤새도록 울었다.

나는 이때 수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이 러브 수지」(I Love Suzi)라는 곡을 작곡했었다. 이곡은 나의 10집앨범에 수록돼있다.

수지는 현재 뉴욕UN스쿨 3학년에 재학중인데 방학때면 놀러와 내 스케줄없는 날이면 항상 같이 있어주며 내 말동무가 되어준다.

「갈곳도 없는데 가자고 졸라대던 수지, 흘러가는 구름보고 눈물흘리던 수지, 아이 러브 수지」 나는 수지같은 딸을 두고 싶다.

둘째형덕분에 「병역기피자」가 되지않고 제시간에 맞춰 방위소집에 응할수 있었던 나는 머리를 빡빡깎고 형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부모님에게 인사는 드려야하지 않겠느냐며 형이 이끌었던 것이다.

부모님을 만난 것은 실로 5년만이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는지 다른곳만 쳐다보셨고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계속 흘렸다. 음악에만 정신이 팔려 집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도 어머니께 큰절을 하는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기지촌에서 건달들에게 매맞고 쫓겨다니던 일,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르던일 등, 집을 떠나 5년동안 겪었던 서러움이 일시에 북받쳐올랐다.

수색의 모부대에서 3주간 훈련을 받은 뒤 나는 본적지인 경기도 화성군에서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빛나는 이등병」 조용필이었다.

내가 가수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장병들의 오락시간만 되면 불려나가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때 많이 불렀던 노래는 KBS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가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김트리오」시절 작곡가 김학송씨가 곡을 줘 부르게 됐던 이 노래는 방송이 나가면서 은근히 인기를 끌어 「조용필」은 몰라도 노래는 꽤 알려져 있었다. 영내 PX에 근무하던 한 현역병장은 경동고등학교 선배인데다 이 노래의 열렬한 팬이어서 나를 해안경비병에서 PX로 끌어다놓기까지 했다.

그해 가을 나는 부산으로 전출을 가게됐는데 임지 발령이 빨리 나질않아 그곳에서 활동하고있던 「조갑출과 25시」와 함께 잠시 일을 하게 됐다. 이후 방위근무를 하면서 저녁때는 밤무대에 서는 생활이 계속됐다. 그러나 내가 서울로 다시 전출해 올무렵 「25시」팀은 멤버간의 불화로 해체됐다.



[8] 첫독집앨범 '돌아와요 부산항에'


당시 을지로 6가의 독신자아파트에 하숙하고 있던 나는 한동안 기타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진 골방신세를 져야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에 빠질대로 빠져있던 그때 무대에 서지못하고 있는 상태는 무척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다. 솔로로 전향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통기타를 두드리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흉내를 내기도 했으나 욕심에는 미치지못했다.

방구석에서 외톨이가 된채 음악을 듣는 시간이 자연 많아졌는데 어느날 미국의 시카고 지역밴드들의 사운드가 귀에 들어왔다. 관악기가 많이 사용된 소위 「브라스」밴드였는데 기타, 베이스, 드럼의 통상적인 구성과는 달리 완벽하고 스케일이 큰 멋이 있었다.

「이거다」하고 무릎을 친 나는 그날부터 밴드멤버들을 찾기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끌어모으니 트럼본둘, 트럼핏둘,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등 8인조가 됐다. 처음으로 내가 조직한 그룹이었고 이름도 「조용필과 그림자」로 지었다. 그때까지는 남의 그룹에서 도와주는 입장이었지만 비로소 내가 리더로 음악방향을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가슴뿌듯한 순간이었다.

「조용필과 그림자」는 종로 2가에 있었던 「웨스턴」과 동대문 「이스턴」나이트클럽에 나가기 시작했다. 「웨스턴」은 당시 젊은이들사이에 붐을 일으켰던 초저녁 고고클럽으로 「타워」「무겐」등과 함께 서울시내 일류무대 가운데 하나였다.

「웨스턴」에 출연하면서 나는 이장희, 허참 등 연예인을 알게 됐다. 이곳 무대에 통기타 가수로 출연하던 이장희는 그때 「불켜진 창」「너」등으로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었고 이후에도 음악적으로 많은 교류를 했다. 허참은 「웨스턴」의 사회를 보았었는데 성격이 부드럽고 나와 죽이 잘맞아 방송쪽에 진출한후에도 함께 일을 많이 하게된다.

76년 1월 방위병을 제대하면서 나는 킹레코드사의 박성배 사장으로부터 레코드취입 제의를 받게 된다. 이때 만나게된 사람이 국가대표축구선수 이회택이었다. 「조용필과 그림자」가 출연하던 「이스턴」나이트클럽에 자주 놀러오던 이회택이 내 노래가 좋은것 같다고 박성배 사장에게 이야기해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회택씨는 「조용필과 그림자」시절 우리가 일하던 업소 「이스턴」나이트클럽에 자주 놀러오면서 알게됐는데 내 노래를 무척 좋아했고 인간적으로 친동생같이 각별한 정을 보였다.

밤무대 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많이 느끼던 나도 솔직담백한 성격의 그를 「회택이형」이라고 부르며 따랐었다. 비지니스까지 발벗고 나서며 도와주곤하던 이회택씨는 77년 「대마초사건」으로 내가 좌절했을 때도 큰힘이 되어주었다.

당시 이회택씨는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리는 부동의 국가대표축구선수였지만 불같은 성격을 이기지못해 팀과 자주 불화,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였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을까. 머리를 식히러가자는 제의를 그가 했고 우리는 한달에 걸쳐 전국해안을 돌았다.

그는 바닷가에서 낚시를 할때마다 『낚시꾼이 찌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자. 사람은 누구나 슬럼프가 있게 마련이다. 이를 얼마나 잘 이겨나가느냐에 길이 있다』며 나를 격력해주었다. 이말은 이후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때마다 떠올리는 말이기도 했다.

이회택씨와 「25시」의 조갑출씨 소개로 킹레코드사의 박성배 사장을 만나 레코딩제의를 받은 나는 무척 들떴다. 「김트리오」시절 두번의 앨범제작에 참여한 바는 있으나 모두 내 단독이 아니었고 빛도 보지못했던 나는 첫독집앨범이랄수 있는 이 제의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바로 이 앨범에 실려있었다. 「너무 짧아요」「정」「생각이 나네」등 6곡과 함께 수록됐고 이곡은 72년초 「김트리오」시절 아세아레코드에서 취입, 이남이와 함께 통기타를 연주하며 불렀던 곡으로 별반응을 얻지 못해 사장된 곡이어서 당초 기대를 걸지 않았다.

원래 4분의 2박자 「뽕짝」이었던 것을 젊은이들풍의 4분의 4박자로 편곡, 국내 최초의 트롯고고를 시도하는등 애는 썼지만 반응은 좀처럼 오지않았다. 레코드사에는 팔리지않은 레코드판이 되돌아와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고 죄지은 사람모양 눈치만 보던 나는 결국 PR부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직접 PR에 나서기도 했다.

레코드사로부터 판 1백장을 얻어내고는 젊은이들이 잘가는 종로, 명동, 을지로 일대의 새벽다방에 무조건 돌렸다. 당시 새벽다방은 나이트클럽등에서 밤을 지샌 젊은이들이 날이 밝을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모이던 곳으로 크게 유행이었다. 밤무대가 끝나기만하면 판을 들고 새벽다방으로 찾아가 DJ에게 틀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렇게 계속하기를 3개월, 지쳐서 포기하려할 무렵이었다. 밤무대에 서던 어느날 신청곡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들어왔다. 전혀 뜻밖이었고 준비도 안된 상태라 무척 당황했으나 노래와 연주가 시작되자 춤추던 손님들이 모두 따라불렀다.

놀라움과 기쁨이 한데 어울린 나는 다시 판을 듣고 연습, 다음날 밤무대부터 계속 불러댔고 신청회수는 점차 늘어갔다. 그해 여름에는 부산에도 판을 들고 내려가 광복동, 남포동, 서면의 음악다방에 신곡이 나왔다며 2백여장을 뿌렸다. 부산이라는 지명때문인지 효과는 서울보다 더 빨랐다.

때마침 한창이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방문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인기를 더하게 했다. 수십년만에 고국의 땅을 밟는 그들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여러주간지와 월간잡지등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곡이 부산에서부터 인기를 몰고 서울로 북상하고 있다는 기사가 터지는등 이곡의 열풍은 마침내 전국을 휩쓸었다. 각 방송의 가요차트, 신청곡 회수도 1위로 떠올랐다.

곡이 빅히트를 하자 10여명의 다른 가수가 불러보려고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동백아가씨」이후 최대히트라는 평도 나왔다.

어렴풋이나마 인기가 무엇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인기가수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으리라는 기쁨뿐이었다.



[9] 대마초 사건


대마초 사건. 이는 나의 음악 인생을 끝맺게 할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젊은시절을 모질게 매질한 마음아픈 회초리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고 여기저기 방송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밤무대에서의 주가도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76년말에는 TBC라디오의 「노래하는 곳에」라는 쇼프로에 고정출연할 정도로 내 이름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밤무대 무명악사에서 명색이 가수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하면서부터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형편이된 나는 부모님들까지 모시게 됐다. 그동안 사무쳤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쳐왔고 마침 시골에 있던 집안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고있던터라 「부모님을 내가 모시겠다」는 주장이 다른 형제들에게 어렵지않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하숙생활을 청산하고 동부이촌동의 아파트를 전세로 장만, 여동생(종순, 34)과 함께 부모님들을 서울로 모셔올 수 있었다. 73년 방위복무때문에 잠시 집에 머물다가 음악에 미쳐 또다시 소리없이 사라졌던 나에 대해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모님들은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는 불효자식이 미덥지않아 서울에 올라오기를 완강히 거절했었다. 둘째형이 나를 집에 데려가려고 찾아오던 정성이상으로 부모님에게 편지도 쓰고 몇번 찾아가기도 한 끝에 간신히 부모님을 모실수 있었다.

나도 이제 자식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 가수로서 첫발을 내디뎠다는 생각등으로 가슴뿌듯한 나날이 게속됐다.

그러나 그도 잠시, 방송쪽의 물을 먹기 시작한지 약 2개월, 내 인기를 시샘이라도 하듯 「조용필은 대마초가수였다」는 투서가 어디선가 들어왔고 소문은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올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한낱 소문이 아닌 사실이었고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있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대마초를 처음 피운 것은 69년 의정부 기지촌에서 무명밴드 「파이브 핑거스」에서 뛰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멤버들이 기거하던 하숙집 옆방에는 흑인미군 병사가 그곳 양색시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는데 꽤 친하게 지냈었다. 어느날은 무대가 끝나고 돌아오자 담배같은 것을 한푸대 선물이라며 주었다.

대마초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나는 담배의 일종이려니하고 그날밤 무심코 피워댔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두려운 기분마저 들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팠고 얼굴에는 두드러기같은 것이 마구 돋아있었다. 당장 쓰레기통에 처넣고는 옆방 양색시에게 「대체 이게 뭐냐」고 묻자 「하이」(High : 그들사이의 은어였던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피우고 죽는줄 알아 버렸다」고 투덜거리자 그 여자는 「그 귀한걸 왜 버렸느냐」며 펄쩍뛰었다.

이후 두세차례 더한적이 있으나 얼굴에 두드러기가 나는등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 하고 싶어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체질이 예민해 닭고기, 돼지고기, 인삼등을 먹어도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난다.

75년 겨울 대마초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을때 나역시 예외가 될순없었다. 저녁 무대를 끝내고 나오다 사복경찰들에게 끌려간 곳이 남산마약반, 그곳에는 웬만한 악사들은 모두 와있었고 얼굴을 알만한 인기인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몇대 얻어맞고 「69년도에 미군병사가 주는 대마초를 몇번 피운적이 있다」고 털어놓자 곧장 웅암동 정신병원으로 보내졌고 무슨 약인지 알수없는 주사를 맞았다.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마약반으로 가서는 벌금 10만원을 물고는 석방됐었다. 이후 많은 연예인들이 연예활동금지처분을 받았지만 나는 무명악사에 불과해 그런 대우(?)는 받지않았던 것이다.

내가 인기정상의 가수가 되리라고 생각못했던 것처럼 대마초 사건이 커다란 장애물로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못했던 일이었다.

소문이 계속 퍼지면서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은퇴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나는 마침내 「이 상태로는 더이상 끌고 나갈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77년 5월 4일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톱싱어가 되기보다는 음악하는 사람으로 계속 머물기를 바랐습니다』

장충체육관에서 마지막 공연을 끝낸 나는 가요계를 떠난다는 말을 간신히 끄집어냈다. 죽기보다 싫은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 기타하나 메고 집을 나와 기지촌을 헤매며 이룬 10년 공든탑을 허물어 버리다니 말이나 될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때까지도 방송국에서는 내가 대마초가수였다는 소문이 나도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끊임없이 카메라와 마이크앞에 세우기 바빴지만 자격지심에 자꾸만 자신감이 없어져갔고 관객들의 환호가 비난의 소리로 들리곤했다. 나는 더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연예계에는 다시 발을 들여 놓지 않겠습니다. 노래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겠죠. 그동안의 연예활동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으나 내심 음악에 대한 미련은 버릴수 없었다.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하는 생각이었다.

음악을 그만두고 2, 3개월은 지낼만했다. 회택이형(축구선수, 이회택)과 한달 가까이 낚시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니 몸도 가뿐했다.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회택이형의 한친구는 기왕 이렇게 된바에는 취직이나 하라며 자기회사에 내 이름을 올려 놓기까지 했다.

점차 연예인으로 생명이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음악을 못하게 된걸까」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끝난일, 빨리 잊어야지」하며 자신을 채찍질하던 어느날, 77년 여름이었다. TV드라마를 무심코 보고 있는데 「한오백년」이라는 창이 들렸다. 저녁놀이 깔린 강물을 노저어가는 뱃사공의 영상이 배경에 깔리며 들리는 구성진 가락은 소름이 끼칠정도로 내 가슴을 흔들어댔다. 「바로 저거다」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을 두고 몸만가니 눈물이 나네」의 가사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내 이야기를 하는듯 했다.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의욕이 마구 솟구친 나는 그길로 뛰어나가 레코드가게를 뒤졌다. 「한오백년」이 들어있는 판은 모조리 구했다.

「한오백년」판을 갖고 집에 들어간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뼈를 깎는 발성연습에 들어갔다. 내가 갈길은 죽도록 노래를 불러대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고나면 목만 쉬고 바라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집에서는 안되겠다싶어 내장산, 속리산, 대전 동학사, 범어사 등 명산대천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판소리하는 사람들이 폭포수 밑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났던 것이었다.

조금씩 비슷한 목소리가 나오자 진도 아리랑, 성주풀이, 흥부전까지 시도해보았다. 탁성을 내려다보면 목과 목젖이 계속 부딪쳐 간지럽기 짝이없었고 그래도 참고 하다가는 뱃속에 있는 것이 다쏟아져 나왔다. 토하고 토하다 나중에는 아예 양동이를 갖다놓고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를 질러댔다. 토할것마저 없어지자 목에서는 피가 터져나왔다.

목이 부어 침도 못삼킬정도가 됐어도 달걀을 계속 먹어가며 참았다. 어느날은 목소리가 아예 나오질 않아 벙어리가 돼버리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수도승같은 고행을 계속하길 6개월쯤, 탁성을 내도 목이 간지럽지도 않고 구역질이 나오지도 않았다. 목이 트인 것이었다.

과거 밴드시절 그렇게 불러보려해도 되지않던 전형적인 허스키보이스 로드 스튜어트의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고 흥부전의 한토막인 「흥부가 놀부에게 구걸하는 장면」같은 창은 「판소리 원단」보다도 더 멋들어지게 부를수 있었다. 흥부전의 이 대목은 「대마초가수해금」후 첫컴백쇼를 열었을때 자랑스럽게 불렀던 곡이기도 하다.

대마초사건으로 겪어야 했던 「창살없는 감옥」은 오히려 더없는 음악수련 기간이 된 셈이다. 그 일이 없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만족하며 지냈다면 지금쯤 가요계에서 사라졌을는지도 모른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대마초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한순간의 슬픔이 영원한 슬픔이 되진 않는다. 많은 괴로움, 슬픔이 승화되면 그보다 몇배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

목소리가 시원하게 트이면서 무대에 오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솟았다. 내가 돈을 주고서라도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게 그때 심정이었다.

77년 가을 답답한 마음에 부산에 내려갔다가 「동양클럽」이라는 나이트클럽에 놀러갔는데 부산에서 음악활동을 하던시절 알게된 그곳 사장이 「좋은팀이 있는데 한번 같이 해보겠느냐」고 권유했다. 「은퇴까지 선언하고 나온 내가 무슨 낯으로 무대에 서겠느냐」고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그냥 조금 도와주는 것뿐인데 어떠냐」며 계속 부추겼다. 내심으론 그의 말이 반갑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잠시만 해보겠다」고 말하자 마산에서 활동하는 팀의 리더라는 사람을 소개 받았는데 그가 바로 내 평생 음악의 동반자가 된 유재학씨였다. 「열심히 한번 해봅시다」라며 특유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건네던 그의 인상은 인연이 닿으려고 해서 그랬는지 「딴따라」답지 않게 무척 점잖아 보였고 푸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후 보름동안 예의 「조용필과 그림자」이름을 내걸고 유재학(베이스기타)씨의 팀과 함께 무대에 섰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업소에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도 오랜만에 서는 무대라 신바람이 났으나 타업소에서 「대마초가수가 영업한다」고 경찰에 알리는 바람에 동양클럽은 1개월간 영업정지까지 당했고 나는 당장 쫓겨나 서울로 올라오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올라온 후에도 이리기웃 저리기웃 거리며 몇번 무대에 설순 있었으나 곧 발각돼 수모를 당하거나 손님들의 따가운 눈총이 견디기 힘들어 자진해서 무대를 내려오기도 했다. 지루한 장마비처럼 대마초로 인한 속죄기간은 아무리 기다려도 끝이나질 않았다. 나중에는 내가 다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리라는 기대감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마치 도사가 된 기분으로 방안에서 비지스, 오제이스, 로드 스튜어트 등의 탁성과 가성을 기타를 치며 불러댔다. 노래를 부르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또 노래를 불렀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나는 하루하루 노래 부르는 기쁨으로 살아갈 뿐이다」며 계속 뇌까렸다. 당시 나 자신을 이기는 방법이었다.



10] 영광의 나날은 시작됐다


78년 4월 방송을 제외하고는 대마초가수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규제완화조치가 발표됐다. 비온후 먹구름 사이로 작은 빛이 보이는 듯한 희소식이었다.

「옳지, 이제 길이 트이기 시작하는구나」며 부리나케 여기저기서 팀을 모아 명동 「마이하우스」, 북악호텔나이트클럽 등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부산 「동양클럽」에서 함께 일하다 나 때문에 팀이 깨져버린 유재학씨는 이때부터 매니저로 발벗고 나서 일을 도와주었다.

「별볼일 없는 대마초가수」의 매니저를 자청한 그에게 나는 실로 깊은 고마움을 느꼈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가요계에서는 「전설적인 매니저」로 통하는 그의 예리한 눈이 나의 가능성을 점쳤는지 내가 하도 측은해보여 정을 베풀었는지 그건 알 수 없다.

여하튼 나보다 7살이 더 많고 형보다 더 따르는 그는 기타맨 출신이며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다가 군입대를 했고 제대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다시 입학한 괴짜이다. 그 역시 학생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연주생활을 했고 음악을 안해보려고 별짓을 다해보았지만 결국 음악에 얽매인 몸이다.

나를 키우며 일부 가요매니저들로부터 받은 질시와 못마땅한 가요계 풍토, 건강악화 등을 이유로 84년 한때 내 일에서 손을 뗀적이 있지만 지금은 또다시 나의 귀중한 음악 벗이 돼 주고 있다.

잔뜩 당겼다가 놓은 활시위처럼 나는 미친듯이 음악에 몰두했다. 당시 내 주장으로 우리팀은 합숙을 하며 연습을 했는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새벽 4시에 밤무대가 끝나면 새벽 5시부터 아침식사때까지 연습, 점심식사때까지 취침하고 일어나면 무대에 설때까지 또 연습하는등 남들이 보면 「미친놈」들 같이 스파르타식 강훈을 했다. 이때 연습에 지쳐 멤버가 자꾸나가 구성은 자꾸 바뀌었다.

당시 우리팀은 이름도 정하지않고 무대에 섰는데 우리 가요는 절대 연주하거나 노래하지않는 것이 특색이었다. 내 얼굴을 알아보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신청하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가요를 히트시키는 바람에 내 이름이 알려져 대마초를 피웠다는 사실까지 들춰졌고 음악을 중단해야 했었다는 생각에 이상한 오기가 돋았던 때문이었다.

외국곡만 연주, 노래하는 밴드였지만 스파르타식 훈련 덕분에 「완전한 그룹」으로 뮤지션들 사이에는 잘알려졌었다.

그러나 그 팀은 79년 10.26사태가 터지면서 당분간 활동을 못하게됐고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또다시 혼자가 된 나는 방구석에서 통기타를 두드리며 노래를 연습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날 노래를 부르다 지쳐 방에 드러누워있는데 여동생 종순이가 방문을 급하게 두드리며 「빨리 나와보라」고 소리쳤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연예인에 대한 전면해금조치가 내려진 날이었다. 저녁 7시뉴스 방송에서는 해금되는 연예인 명단이 계속 흘러나왔고 「조용필」 내 이름도 분명 들어있었다. 평소 나를 잘 돌봐주던 부산 MBC의 김양화씨, 광주 MBC의 소수옥씨, KBS의 진필홍씨등 방송관계자들의 축하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대구에 내려가있던 유재학씨도 「내 당장 올라갈께」한마디를 하고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방에 다시 돌아와 불을 끄고 드러누운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시는 아픈 눈물을 흘리지않으리라.

그 소식이 있은후 사흘동안은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 과거를 정리했고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는 의욕에 가슴이 부풀어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머리에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동아방송PD 안평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아방송이 80년 정초부터 새로낼 연속극 「창밖의 여자」주제가를 작곡, 노래해 달라는 느닷없는 요청이었다. 재기의 다시없을 발판으로 생각한 나는 배명숙씨가 작사한 가사를 전화로 받아적고는 방안에 틀어 박혔다.

조용히 기타줄을 퉁기며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나를 잠들게하라」며 중얼거려 보았다. 가슴이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좀처럼 악상이 오선지에 옮겨지질 않았다. 가슴이 뭉클한 순간 음표로 그리려고하면 금세 생각이 흩어지곤 했다. 하루에 식사한끼도 제대로 먹지않으며 계속 기타, 오선지와 씨름한지 닷새가 되던날 밤을 꼬박 새우고 깜빡잠이 들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이어지지 않던 멜로디가 귀에 들어왔다.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후다닥 잠을깬 나는 미친듯이 악상을 옮겨 적었다.

그 다음날 당장 동아방송으로 달려가 녹음에 들어갔는데 PD 안평선씨와 작사를 한 배명숙씨는 녹음실 밖에서 곡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의 감정이 그들 가슴 가슴에 진하게 가 닿았던 것이리라.

「창밖의 여자」를 들어본 당시 내 전속사인 지구레코드측도 놀라운 곡이라고 흥분하면서 출반을 서둘렀다.

「창밖의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단발머리」「한오백년」「대전블루스」「고추잠자리」「미워 미워 미워」등이 수록됐던 이 앨범은 각각 방송국 인기차트 정상을 정복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조용필 「영광의 나날」이 시작된 것이었다.



[11] 술에 얽힌 이야기


내 인생에서 술을 빼놓고 생활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조용필」에서 술을 떼어놓으면 뭔가 멋이 덜한 느낌이 든다고들 한다. 그만큼 나는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도 많다.

작은 체구에 술은 씨름 선수이상으로 많이 마셔대니 「저러다간 더이상 못버티지」하며 주위에서는 여러 분들이 걱정하곤 하며 또 그렇게 술을 갖다 부으면서도 끄떡없는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물론 최근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일에 술이 일조를 하지않았다고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이혼, 북경공연등 내 인생의 엄청난 사건들이 한순간에 몰려 받은 스트레스와 그 이후에 한시도 쉴틈없이 계속되는 일정에 치였던 때문이지 결코 술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술이 몸을 조금 피곤하게 했을순 있지만 정신은 자꾸만 새롭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 다음으로 술을 좋아한다. 술은 순간 순간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며 사람들과 보다 가까와질수 있게한다. 인간이 발명한 약가운데 가장 부작용이 없는 약이 술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술을 처음 입에 댄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잘 못하셨지만 명절때는 한잔씩 들곤하셨는데 술상머리에 붙어 앉아있는 나에게 「이놈, 너도 한잔 먹어볼래」하고 술을 건네줘 받아먹던 기억이난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애들한테 웬 술을 주냐」며 눈을 흘기셨고 아버지는 「남자는 술을 먹을줄 알아야 된다」며 자꾸 술을 권해 먹고는 취해서(?) 잠들곤했다. 술이 거나해지신 아버지는 「바우고개」를 즐겨불렀고 항상 잠결에 그노래가 귓전을 스쳤다. 내가 지금 술을 잘하는것은 이때의 훈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있는데 반친구가 막걸리 한통을 가지고와 먹자고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몇모금씩 나눠마시고 자다 내려온 일이 있었고 이후 가끔 악동들끼리 모여 「시음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였던가, 시골(경기도 화성)집에 놀러갔었는데 이광남이라고하는 고향친구가 반갑다며 막소주 한되를 들고 찾아와 주거니받거니하며 다마셔버렸고 그대로 인사불성이 돼 사흘동안 꼼짝못하고 누워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나보다 술이 세던지 정신을 못차리는 나를 집에까지 업어다 놓고는 어머니에게 된통 혼이나고 달아났는데 이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들이 못하는짓이 없다. 그렇게 되려면 뭐하러 술은 마셨더냐. 마시려면 잘마셔야지」하며 모질게 꾸지람을 했고 술에 학을 뗀 나는 한동안 술이라는 말도 떠올리기 싫었다.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졸후 집을 나와 기지촌 무명악사로 떠돌때였다. 여기저기서 온갖 수모를 당하던 시절 소주한잔이 유일한 벗이었고 외로움, 괴로움을 잊을수 있는 수단이었다.

「김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던 71년 여름 리더 김대환, 이남이등과 함께 부산해운대백사장에서 소주를 놓고 마시던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마신 술은 소주 12병인데 내 주력(酒歷) 38년에 가장 많이 마셨고 술맛도 기가 막혔다. 당시 김대환은 드러머에서 매니저로 물러나 있었고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 그 자리는 새출발을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이야기와 소주로 밤을 새우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알려지자 「조용필은 모지방 공연에 갔다 소주 한박스를 다 비워버린 일이 있다」「소주됫병을 입도 안떼고 한번에 다마셔버렸다더라」는 과장된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실상 그렇게 많이 마시진 못한다. 아마 그렇다면 위장이 강철로 됐어도 다녹아버렸을 것이고 나는 알콜중독자가 돼도 중증이 됐을것이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잘어울려 항상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밤새도록 마시다보면 술병이 여남은개씩 쌓이는 것을 보게되는 일이 가끔있을뿐이다.

내 주위에는 유난히 술자리가 많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술을 좋아했다.

연예기자 이상벽씨나 개그맨 허참은 평소에 잘어울리는 「주당클럽」멤버들이다. 이상벽씨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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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 2002-09-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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