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팬클럽 미지의 세계 Cho Yongpil Fanclub Mi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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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story 8 & 9

Yang-soo, 2001-07-24 18: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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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첫독집앨범 '돌아와요 부산항에'

당시 을지로 6가의 독신자아파트에 하숙하고 있던
나는 한동안 기타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진 골방신세를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에 빠질대로 빠져있던
그때 무대에 서지못하고 있는 상태는 무척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다. 솔로로 전향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통기타를 두드리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흉내를 내기도 했으나 욕심에는 미치지못했다.

방구석에서 외톨이가 된채 음악을 듣는 시간이 자연
많아졌는데 어느날 미국의 시카고 지역밴드들의
사운드가 귀에 들어왔다. 관악기가 많이 사용된 소위
브라스」밴드였는데 기타, 베이스, 드럼의 통상적인
구성과는 달리 완벽하고 스케일이 큰 멋이 있었다.

이거다」하고 무릎을 친 나는 그날부터
밴드멤버들을 찾기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끌어모으니
트럼본둘, 트럼핏둘,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등
8인조가 됐다. 처음으로 내가 조직한 그룹이었고
이름도 「조용필과 그림자」로 지었다. 그때까지는
남의 그룹에서 도와주는 입장이었지만 비로소 내가 리더로 음악방향을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가슴뿌듯한 순간이었다.

「조용필과 그림자」는 종로 2가에 있었던 「웨스턴」과 동대문 「이스턴」나이트클럽에
나가기 시작했다. 「웨스턴」은 당시 젊은이들사이에 붐을 일으켰던 초저녁 고고클럽으로
「타워」「무겐」등과 함께 서울시내 일류무대 가운데 하나였다.

「웨스턴」에 출연하면서 나는 이장희, 허참 등 연예인을 알게 됐다. 이곳 무대에 통기타
가수로 출연하던 이장희는 그때 「불켜진 창」「너」등으로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었고
이후에도 음악적으로 많은 교류를 했다. 허참은 「웨스턴」의 사회를 보았었는데 성격이
부드럽고 나와 죽이 잘맞아 방송쪽에 진출한후에도 함께 일을 많이 하게된다.

76년 1월 방위병을 제대하면서 나는 킹레코드사의 박성배 사장으로부터 레코드취입 제의를
받게 된다. 이때 만나게된 사람이 국가대표축구선수 이회택이었다. 「조용필과 그림자」가
출연하던 「이스턴」나이트클럽에 자주 놀러오던 이회택이 내 노래가 좋은것 같다고
박성배 사장에게 이야기해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회택씨는 「조용필과 그림자」시절 우리가 일하던 업소 「이스턴」나이트클럽에 자주
놀러오면서 알게됐는데 내 노래를 무척 좋아했고 인간적으로 친동생같이 각별한 정을
보였다.

밤무대 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많이 느끼던 나도 솔직담백한 성격의 그를
「회택이형」이라고 부르며 따랐었다. 비지니스까지 발벗고 나서며 도와주곤하던
이회택씨는 77년 「대마초사건」으로 내가 좌절했을 때도 큰힘이 되어주었다.

당시 이회택씨는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리는 부동의 국가대표축구선수였지만
불같은 성격을 이기지못해 팀과 자주 불화,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였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을까. 머리를 식히러가자는 제의를 그가 했고 우리는 한달에 걸쳐
전국해안을 돌았다.

그는 바닷가에서 낚시를 할때마다 『낚시꾼이 찌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자.
사람은 누구나 슬럼프가 있게 마련이다. 이를 얼마나 잘 이겨나가느냐에 길이 있다』며
나를 격력해주었다. 이말은 이후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때마다 떠올리는 말이기도 했다.

이회택씨와 「25시」의 조갑출씨 소개로 킹레코드사의 박성배 사장을 만나 레코딩제의를
받은 나는 무척 들떴다. 「김트리오」시절 두번의 앨범제작에 참여한 바는 있으나 모두 내
단독이 아니었고 빛도 보지못했던 나는 첫독집앨범이랄수 있는 이 제의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바로 이 앨범에 실려있었다. 「너무
짧아요」「정」「생각이 나네」등 6곡과 함께 수록됐고 이곡은 72년초 「김트리오」시절
아세아레코드에서 취입, 이남이와 함께 통기타를 연주하며 불렀던 곡으로 별반응을 얻지
못해 사장된 곡이어서 당초 기대를 걸지 않았다.
원래 4분의 2박자 「뽕짝」이었던 것을 젊은이들풍의 4분의 4박자로 편곡, 국내 최초의
트롯고고를 시도하는등 애는 썼지만 반응은 좀처럼 오지않았다. 레코드사에는 팔리지않은
레코드판이 되돌아와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고 죄지은 사람모양 눈치만 보던 나는 결국
PR부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직접 PR에 나서기도 했다.

레코드사로부터 판 1백장을 얻어내고는 젊은이들이 잘가는 종로, 명동, 을지로 일대의
새벽다방에 무조건 돌렸다. 당시 새벽다방은 나이트클럽등에서 밤을 지샌 젊은이들이 날이
밝을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모이던 곳으로 크게 유행이었다. 밤무대가 끝나기만하면 판을
들고 새벽다방으로 찾아가 DJ에게 틀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렇게 계속하기를 3개월, 지쳐서 포기하려할 무렵이었다. 밤무대에 서던 어느날
신청곡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들어왔다. 전혀 뜻밖이었고 준비도 안된 상태라 무척
당황했으나 노래와 연주가 시작되자 춤추던 손님들이 모두 따라불렀다.

놀라움과 기쁨이 한데 어울린 나는 다시 판을 듣고 연습, 다음날 밤무대부터 계속 불러댔고
신청회수는 점차 늘어갔다. 그해 여름에는 부산에도 판을 들고 내려가 광복동, 남포동,
서면의 음악다방에 신곡이 나왔다며 2백여장을 뿌렸다. 부산이라는 지명때문인지 효과는
서울보다 더 빨랐다.

때마침 한창이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방문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인기를
더하게 했다. 수십년만에 고국의 땅을 밟는 그들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여러주간지와 월간잡지등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곡이 부산에서부터 인기를 몰고
서울로 북상하고 있다는 기사가 터지는등 이곡의 열풍은 마침내 전국을 휩쓸었다. 각
방송의 가요차트, 신청곡 회수도 1위로 떠올랐다.

곡이 빅히트를 하자 10여명의 다른 가수가 불러보려고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동백아가씨」이후 최대히트라는 평도 나왔다.

어렴풋이나마 인기가 무엇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인기가수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으리라는 기쁨뿐이었다.



[9] 대마초 사건

대마초 사건. 이는 나의 음악 인생을 끝맺게 할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젊은시절을 모질게
매질한 마음아픈 회초리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고
여기저기 방송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밤무대에서의
주가도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76년말에는
TBC라디오의 「노래하는 곳에」라는 쇼프로에
고정출연할 정도로 내 이름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밤무대 무명악사에서 명색이 가수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하면서부터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형편이된 나는
부모님들까지 모시게 됐다. 그동안 사무쳤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쳐왔고 마침 시골에 있던 집안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고있던터라 「부모님을 내가
모시겠다」는 주장이 다른 형제들에게 어렵지않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하숙생활을 청산하고 동부이촌동의 아파트를
장만, 여동생(종순, 34)과 함께 부모님들을 서울로 모셔올 수 있었다. 73년
방위복무때문에 잠시 집에 머물다가 음악에 미쳐 또다시 소리없이 사라졌던 나에 대해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모님들은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는 불효자식이 미덥지않아 서울에
올라오기를 완강히 거절했었다. 둘째형이 나를 집에 데려가려고 찾아오던 정성이상으로
부모님에게 편지도 쓰고 몇번 찾아가기도 한 끝에 간신히 부모님을 모실수 있었다.

나도 이제 자식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 가수로서 첫발을 내디뎠다는 생각등으로
가슴뿌듯한 나날이 게속됐다.

그러나 그도 잠시, 방송쪽의 물을 먹기 시작한지 약 2개월, 내 인기를 시샘이라도 하듯
「조용필은 대마초가수였다」는 투서가 어디선가 들어왔고 소문은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올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한낱 소문이 아닌 사실이었고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있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대마초를 처음 피운 것은 69년 의정부 기지촌에서 무명밴드 「파이브 핑거스」에서 뛰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멤버들이 기거하던 하숙집 옆방에는 흑인미군 병사가 그곳 양색시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는데 꽤 친하게 지냈었다. 어느날은 무대가 끝나고 돌아오자 담배같은
것을 한푸대 선물이라며 주었다.

대마초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나는 담배의 일종이려니하고 그날밤 무심코 피워댔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두려운 기분마저 들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팠고 얼굴에는 두드러기같은 것이 마구 돋아있었다. 당장 쓰레기통에 처넣고는 옆방
양색시에게 「대체 이게 뭐냐」고 묻자 「하이」(High : 그들사이의 은어였던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피우고 죽는줄 알아 버렸다」고 투덜거리자 그 여자는 「그
귀한걸 왜 버렸느냐」며 펄쩍뛰었다.

이후 두세차례 더한적이 있으나 얼굴에 두드러기가 나는등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 하고
싶어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체질이 예민해 닭고기, 돼지고기, 인삼등을 먹어도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난다.

75년 겨울 대마초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을때 나역시 예외가 될순없었다. 저녁 무대를
끝내고 나오다 사복경찰들에게 끌려간 곳이 남산마약반, 그곳에는 웬만한 악사들은 모두
와있었고 얼굴을 알만한 인기인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몇대 얻어맞고 「69년도에
미군병사가 주는 대마초를 몇번 피운적이 있다」고 털어놓자 곧장 웅암동 정신병원으로
보내졌고 무슨 약인지 알수없는 주사를 맞았다.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마약반으로 가서는
벌금 10만원을 물고는 석방됐었다. 이후 많은 연예인들이 연예활동금지처분을 받았지만
나는 무명악사에 불과해 그런 대우(?)는 받지않았던 것이다.

내가 인기정상의 가수가 되리라고 생각못했던 것처럼 대마초 사건이 커다란 장애물로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못했던 일이었다.

소문이 계속 퍼지면서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은퇴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나는 마침내 「이 상태로는 더이상 끌고 나갈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77년 5월 4일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톱싱어가 되기보다는 음악하는 사람으로 계속 머물기를 바랐습니다』

장충체육관에서 마지막 공연을 끝낸 나는 가요계를 떠난다는 말을 간신히 끄집어냈다.
죽기보다 싫은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 기타하나 메고 집을 나와 기지촌을 헤매며 이룬 10년
공든탑을 허물어 버리다니 말이나 될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때까지도 방송국에서는 내가 대마초가수였다는 소문이
나도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끊임없이 카메라와 마이크앞에 세우기 바빴지만 자격지심에
자꾸만 자신감이 없어져갔고 관객들의 환호가 비난의 소리로 들리곤했다. 나는 더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연예계에는 다시 발을 들여 놓지 않겠습니다. 노래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겠죠. 그동안의
연예활동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으나 내심 음악에 대한 미련은 버릴수 없었다.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하는 생각이었다.

음악을 그만두고 2, 3개월은 지낼만했다. 회택이형(축구선수, 이회택)과 한달 가까이 낚시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니 몸도 가뿐했다.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회택이형의 한친구는 기왕 이렇게 된바에는 취직이나 하라며 자기회사에 내 이름을 올려
놓기까지 했다.

점차 연예인으로 생명이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음악을 못하게
된걸까」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끝난일, 빨리 잊어야지」하며 자신을 채찍질하던 어느날, 77년 여름이었다.
TV드라마를 무심코 보고 있는데 「한오백년」이라는 창이 들렸다. 저녁놀이 깔린 강물을
노저어가는 뱃사공의 영상이 배경에 깔리며 들리는 구성진 가락은 소름이 끼칠정도로 내
가슴을 흔들어댔다. 「바로 저거다」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을 두고 몸만가니 눈물이 나네」의 가사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내 이야기를 하는듯
했다.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의욕이 마구 솟구친 나는 그길로 뛰어나가 레코드가게를
뒤졌다. 「한오백년」이 들어있는 판은 모조리 구했다.

한오백년」판을 갖고 집에 들어간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뼈를 깎는 발성연습에
들어갔다. 내가 갈길은 죽도록 노래를 불러대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고나면 목만 쉬고 바라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집에서는
안되겠다싶어 내장산, 속리산, 대전 동학사, 범어사 등 명산대천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판소리하는 사람들이 폭포수 밑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났던 것이었다.

조금씩 비슷한 목소리가 나오자 진도 아리랑, 성주풀이, 흥부전까지 시도해보았다. 탁성을
내려다보면 목과 목젖이 계속 부딪쳐 간지럽기 짝이없었고 그래도 참고 하다가는 뱃속에
있는 것이 다쏟아져 나왔다. 토하고 토하다 나중에는 아예 양동이를 갖다놓고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를 질러댔다. 토할것마저 없어지자 목에서는 피가 터져나왔다.

목이 부어 침도 못삼킬정도가 됐어도 달걀을 계속 먹어가며 참았다. 어느날은 목소리가
아예 나오질 않아 벙어리가 돼버리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수도승같은
고행을 계속하길 6개월쯤, 탁성을 내도 목이 간지럽지도 않고 구역질이 나오지도 않았다.
목이 트인 것이었다.

과거 밴드시절 그렇게 불러보려해도 되지않던 전형적인 허스키보이스 로드 스튜어트의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고 흥부전의 한토막인 「흥부가 놀부에게 구걸하는 장면」같은
창은 「판소리 원단」보다도 더 멋들어지게 부를수 있었다. 흥부전의 이 대목은
「대마초가수해금」후 첫컴백쇼를 열었을때 자랑스럽게 불렀던 곡이기도 하다.

대마초사건으로 겪어야 했던 「창살없는 감옥」은 오히려 더없는 음악수련 기간이 된
셈이다. 그 일이 없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만족하며 지냈다면 지금쯤 가요계에서
사라졌을는지도 모른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대마초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한순간의 슬픔이 영원한
슬픔이 되진 않는다. 많은 괴로움, 슬픔이 승화되면 그보다 몇배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

목소리가 시원하게 트이면서 무대에 오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솟았다. 내가 돈을
주고서라도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게 그때 심정이었다.

77년 가을 답답한 마음에 부산에 내려갔다가 「동양클럽」이라는 나이트클럽에 놀러갔는데
부산에서 음악활동을 하던시절 알게된 그곳 사장이 「좋은팀이 있는데 한번 같이
해보겠느냐」고 권유했다. 「은퇴까지 선언하고 나온 내가 무슨 낯으로 무대에
서겠느냐」고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그냥 조금 도와주는 것뿐인데 어떠냐」며 계속
부추겼다. 내심으론 그의 말이 반갑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잠시만 해보겠다」고 말하자 마산에서 활동하는 팀의 리더라는 사람을 소개 받았는데
그가 바로 내 평생 음악의 동반자가 된 유재학씨였다. 「열심히 한번 해봅시다」라며
특유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건네던 그의 인상은 인연이 닿으려고 해서 그랬는지
딴따라」답지 않게 무척 점잖아 보였고 푸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후 보름동안 예의 「조용필과 그림자」이름을 내걸고 유재학(베이스기타)씨의 팀과 함께
무대에 섰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업소에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도 오랜만에 서는 무대라 신바람이 났으나 타업소에서 「대마초가수가
영업한다」고 경찰에 알리는 바람에 동양클럽은 1개월간 영업정지까지 당했고 나는 당장
쫓겨나 서울로 올라오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올라온 후에도 이리기웃 저리기웃 거리며 몇번 무대에 설순 있었으나 곧 발각돼
수모를 당하거나 손님들의 따가운 눈총이 견디기 힘들어 자진해서 무대를 내려오기도 했다.
지루한 장마비처럼 대마초로 인한 속죄기간은 아무리 기다려도 끝이나질 않았다. 나중에는
내가 다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리라는 기대감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마치 도사가 된 기분으로 방안에서 비지스, 오제이스, 로드 스튜어트 등의 탁성과 가성을
기타를 치며 불러댔다. 노래를 부르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또 노래를 불렀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나는 하루하루 노래 부르는 기쁨으로 살아갈 뿐이다」며 계속 뇌까렸다. 당시 나 자
신을 이기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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