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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005-05-06] 인물탐구 - 영원한 가왕(歌王) - 가수 조용필
2005.05.12 20:02
신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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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날짜 |
영원한 가왕(歌王) - 가수 조용필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붉은 물결과 함께 떠오르는 2002년 6월.
11명의 태극전사와 작은 공 하나에 열광했던 대한민국은 한바탕 꿈속에 빠져있었다.
행복한 꿈들을 만들어냈던 공장은, 전국에 자리잡은 10개의 월드컵 경기장.
그 날이 이후 긴 휴식에 들어갔던 꿈의 공장이 3년 만에 다시 가동을 시작했다.
단 한순간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슈퍼스타 조용필에 의해.
그가 전국 10개 도시의 월드컵 경기장을 돌며 콘서트를 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목표하고 있는 관객은 30만 명.
아무리 2003년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4만여 명의 관객들과 자신의 데뷔 35주년 공연을 멋지게 치러낸
‘조용필’이라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어느덧 이순(耳順)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이....
남들은 삶의 휴식기라고 여기는 시기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시도하는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공연, 그 자체가 새 역사다!
조용필이 직접 기획과 총 연출을 맡은 이번 "Pill %26 Peace" 공연은 지금까지 보았던 공연들과 차원이 다르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형상화한 경기장 내 메인 무대는
비둘기 좌우 날개 폭 84m, 높이 25m, 무대 높이 15m로 규모 면에서 관객을 압도한다.
여기에 5톤 트럭 60대 분량의 최첨단 장비에 동원되는 스태프만도 800여명.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초대형 공연이다.
놀라운 건 규모만이 아니다.
평화를 바라는 그의 기원이 그대로 형상화되는 ‘피기’쇼 등 각종 퍼포먼스와 다양한 영상물,
그리고 특수 조명을 이용한 무대 장치도 그로 인해 시작되는 역사.
물론 또 다른 음악인 조용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조용필과 12년 간 호흡을 맞췄던 ‘위대한 탄생’ 과 무대를 장악하는 조용필 식 카리스마가 여전히 빛을 발하는 가운데,
그가 새롭게 눈을 돌린 음악 장르가 녹아든다.
바로 뮤지컬.
자신의 이름을 건 뮤지컬을 한편 하고 싶다는 바램을 담아 뮤지컬 배우 김소현과 함께 듀엣곡을 부를 예정이다.
이번 공연이 조용필의 음악인생을 담은 한편의 대형 뮤지컬이 되리라는 귀뜸이다.
-최초이자 최고! 한국 가요사의 상징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그의 히트곡들 가운데 한 곡쯤 흥얼거리지 못하는 한국인이 있을까?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름을 알린 후 30여년 간
그는 발표하는 앨범마다 전곡이 히트곡 대열에 이르는 믿을 수 없는 인기를 누렸다.
모든 방송, 공연, 행사, 사람들이 조용필을 원했고 그는 데뷔이후 지금까지 조용필의 시대를 유지했다.
최초의 ‘한류열풍’도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인기 있는 가수라도 한번 출연하기가 어렵다는 일본의 가요 청백전에 4번이나 얼굴을 보인
그가 일본에서 발매한 음반 판매량만 해도 지금까지 600만장에 이른다.
우리 가요사에 오빠부대라는 애칭으로 불린 조직적인 팬클럽도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
- 조용필의 또 다른 이름, 오빠
“조용필” 이라는 이름은 그 자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자,
전국민이 사랑하고 애용하는 고유명사다.
그리고 그 이름은 곧 오빠라는 명사와 등치된다.
어느날 그 자신이 급히 길가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조용필’이라는 명찰을 단 웨이터를 만나서 난감했다거나,
공항에서 자신을 알아본 한 할머니가 다가와 ‘오빠 힘내요’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국민들이 조용필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친숙하게 생각하는지,
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 일생에 걸친 사랑이 시작되다
이렇게 전국민이 사랑하는 가수왕(歌王) 조용필이 음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고교시절,
‘밴처스’의 내한공연을 보고 나서다.
교육자 집안에서 ‘딴따라’ 가 나오는 것에 반대한 아버지가 아무리 대노하고,
막아서도 음악에 대한 그의 꿈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입시학원 대신 기지촌을 드나들며 음악을 접했고 언더밴드를 전전하며 기타를 배웠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10여 년 간 수많은 밴드를 전전한 그는 그만큼 많은 시련을 겪었다.
큰형에게 잡혀 집으로 끌려가 음악을 접은 것도 여러 번 ...
겨우 이름을 얻어갈 무렵엔 연예계를 휩쓴 대마초 파동에 걸려 활동 금지의 시련을 맛보기도 했다.
- 피를 토해 얻은 득음
고된 시련이 이어진 10년 세월.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쉬지 않고 연마해 제 2의 음악인생을 열어 제낀 것이다.
그는 어느날 ‘한오백 년’을 우연히 듣고는 그야말로 피나는 발성연습에 들어갔다.
반년 가까이 전국 각지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수차례 피를 토한 끝에 3옥타브 5음계까지 음폭을 넓혔고
진성에 탁성 가성까지 겸비하여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창법을 개발했다.
타고난 미성을 탁성으로 바꾸면서 그의 음악도 모습을 달리한다.
다른 사람들이 락이면 락, 발라드면 발라드 각 장르 안에서 음악을 만드는 것도 쩔쩔매던 시절에 이미 방대한 퓨전을 행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쩡쩡한 퓨전과 크로스오버가 남발될 때부터 그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완벽한 퓨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영향을 받은 서구음악에 한국의 정서와 음악을 접목하여
완전 새로운 장르 ‘조용필 식’장르를 구축했다는 평을 듣는다.
- 음악이 좋다! 젊음이 좋다!
그 후 다시 25년...
그는 어느덧 쉰 여섯이라는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청춘이다.
한쉬도 쉬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배우고 자신을 담금질한다.
40년 가까이 부른 노래도 매일 연습을 한다.
팀과의 연습이 없는 날에는 반주테이프를 틀고 집에서 연습하거나 하다못해 노래방이라도 간다.
머리든 감각이든 목이든 쓰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지만 단 한번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그의 실험들은 모두 이런 자기 연마의 결과다.
- 나에게 붙여진 수식어가 너무 많다
조용필과 관련된 기사와 방송을 보다보면,
그를 표현하는 수식어가 정말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가수’부터 ‘가왕(歌王)’ ‘민족혼을 노래하는 가수’ ‘작은거인’ ‘슈퍼스타’....거기에 ‘최고의’ ‘최상의’ 등의
부사가 붙으면서 그의 이름은 그야말로 긴 문장이 된다.
37년간 들어온 이 수식어들에 익숙해 질만도 한데, 그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그냥 인기가수 하나면 충분한데 왜 그렇게 앞에 형용사 부사를 많이 붙이는지. 저는 음악이 내 삶이고 전부인 가수예요“
그 자신의 말대로 조용필은 가수다.
다만 그는 완전히 아마추어 수준이던 우리 가요계에서 독보적으로 세련되게 시대를 앞서간 음악을 선보인 가수다.
지금도 어떠한 행보를 하든 우리 가요사에 새 획을 긋는 놀라운 실험과 도전을 내놓는 가수다.
그게 가수 조용필이다.
프로필
1950년 경기도 화성 출생
학력 : 서울 경동고 졸
데뷔 : 1974년 조용필과 그림자 결성
앨범 : 1980년 1집 발표, 2004년 까지 18집 발표
비정규 앨범 포함 30장이 넘는 앨범 발표
대표곡 :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모나리자 여행을 떠나요 등 다수
보유 기록 : 국내 최초 단일 앨범 100만 장 돌파 (1980)
국내 최초 앨범 총판매량 1000만장 돌파 (1994)
국내 대중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80)
국내 대중가요사 최초 팬클럽 창단
한국 대중가수 일본 판매량 최다 (6백만장 - 비공식 8백만장)
국내 대중가수 최초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 공연 (1999년~현재까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붉은 물결과 함께 떠오르는 2002년 6월.
11명의 태극전사와 작은 공 하나에 열광했던 대한민국은 한바탕 꿈속에 빠져있었다.
행복한 꿈들을 만들어냈던 공장은, 전국에 자리잡은 10개의 월드컵 경기장.
그 날이 이후 긴 휴식에 들어갔던 꿈의 공장이 3년 만에 다시 가동을 시작했다.
단 한순간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슈퍼스타 조용필에 의해.
그가 전국 10개 도시의 월드컵 경기장을 돌며 콘서트를 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목표하고 있는 관객은 30만 명.
아무리 2003년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4만여 명의 관객들과 자신의 데뷔 35주년 공연을 멋지게 치러낸
‘조용필’이라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어느덧 이순(耳順)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이....
남들은 삶의 휴식기라고 여기는 시기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시도하는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공연, 그 자체가 새 역사다!
조용필이 직접 기획과 총 연출을 맡은 이번 "Pill %26 Peace" 공연은 지금까지 보았던 공연들과 차원이 다르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형상화한 경기장 내 메인 무대는
비둘기 좌우 날개 폭 84m, 높이 25m, 무대 높이 15m로 규모 면에서 관객을 압도한다.
여기에 5톤 트럭 60대 분량의 최첨단 장비에 동원되는 스태프만도 800여명.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초대형 공연이다.
놀라운 건 규모만이 아니다.
평화를 바라는 그의 기원이 그대로 형상화되는 ‘피기’쇼 등 각종 퍼포먼스와 다양한 영상물,
그리고 특수 조명을 이용한 무대 장치도 그로 인해 시작되는 역사.
물론 또 다른 음악인 조용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조용필과 12년 간 호흡을 맞췄던 ‘위대한 탄생’ 과 무대를 장악하는 조용필 식 카리스마가 여전히 빛을 발하는 가운데,
그가 새롭게 눈을 돌린 음악 장르가 녹아든다.
바로 뮤지컬.
자신의 이름을 건 뮤지컬을 한편 하고 싶다는 바램을 담아 뮤지컬 배우 김소현과 함께 듀엣곡을 부를 예정이다.
이번 공연이 조용필의 음악인생을 담은 한편의 대형 뮤지컬이 되리라는 귀뜸이다.
-최초이자 최고! 한국 가요사의 상징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그의 히트곡들 가운데 한 곡쯤 흥얼거리지 못하는 한국인이 있을까?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름을 알린 후 30여년 간
그는 발표하는 앨범마다 전곡이 히트곡 대열에 이르는 믿을 수 없는 인기를 누렸다.
모든 방송, 공연, 행사, 사람들이 조용필을 원했고 그는 데뷔이후 지금까지 조용필의 시대를 유지했다.
최초의 ‘한류열풍’도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인기 있는 가수라도 한번 출연하기가 어렵다는 일본의 가요 청백전에 4번이나 얼굴을 보인
그가 일본에서 발매한 음반 판매량만 해도 지금까지 600만장에 이른다.
우리 가요사에 오빠부대라는 애칭으로 불린 조직적인 팬클럽도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
- 조용필의 또 다른 이름, 오빠
“조용필” 이라는 이름은 그 자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자,
전국민이 사랑하고 애용하는 고유명사다.
그리고 그 이름은 곧 오빠라는 명사와 등치된다.
어느날 그 자신이 급히 길가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조용필’이라는 명찰을 단 웨이터를 만나서 난감했다거나,
공항에서 자신을 알아본 한 할머니가 다가와 ‘오빠 힘내요’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국민들이 조용필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친숙하게 생각하는지,
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 일생에 걸친 사랑이 시작되다
이렇게 전국민이 사랑하는 가수왕(歌王) 조용필이 음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고교시절,
‘밴처스’의 내한공연을 보고 나서다.
교육자 집안에서 ‘딴따라’ 가 나오는 것에 반대한 아버지가 아무리 대노하고,
막아서도 음악에 대한 그의 꿈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입시학원 대신 기지촌을 드나들며 음악을 접했고 언더밴드를 전전하며 기타를 배웠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10여 년 간 수많은 밴드를 전전한 그는 그만큼 많은 시련을 겪었다.
큰형에게 잡혀 집으로 끌려가 음악을 접은 것도 여러 번 ...
겨우 이름을 얻어갈 무렵엔 연예계를 휩쓴 대마초 파동에 걸려 활동 금지의 시련을 맛보기도 했다.
- 피를 토해 얻은 득음
고된 시련이 이어진 10년 세월.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쉬지 않고 연마해 제 2의 음악인생을 열어 제낀 것이다.
그는 어느날 ‘한오백 년’을 우연히 듣고는 그야말로 피나는 발성연습에 들어갔다.
반년 가까이 전국 각지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수차례 피를 토한 끝에 3옥타브 5음계까지 음폭을 넓혔고
진성에 탁성 가성까지 겸비하여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창법을 개발했다.
타고난 미성을 탁성으로 바꾸면서 그의 음악도 모습을 달리한다.
다른 사람들이 락이면 락, 발라드면 발라드 각 장르 안에서 음악을 만드는 것도 쩔쩔매던 시절에 이미 방대한 퓨전을 행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쩡쩡한 퓨전과 크로스오버가 남발될 때부터 그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완벽한 퓨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영향을 받은 서구음악에 한국의 정서와 음악을 접목하여
완전 새로운 장르 ‘조용필 식’장르를 구축했다는 평을 듣는다.
- 음악이 좋다! 젊음이 좋다!
그 후 다시 25년...
그는 어느덧 쉰 여섯이라는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청춘이다.
한쉬도 쉬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배우고 자신을 담금질한다.
40년 가까이 부른 노래도 매일 연습을 한다.
팀과의 연습이 없는 날에는 반주테이프를 틀고 집에서 연습하거나 하다못해 노래방이라도 간다.
머리든 감각이든 목이든 쓰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지만 단 한번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그의 실험들은 모두 이런 자기 연마의 결과다.
- 나에게 붙여진 수식어가 너무 많다
조용필과 관련된 기사와 방송을 보다보면,
그를 표현하는 수식어가 정말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가수’부터 ‘가왕(歌王)’ ‘민족혼을 노래하는 가수’ ‘작은거인’ ‘슈퍼스타’....거기에 ‘최고의’ ‘최상의’ 등의
부사가 붙으면서 그의 이름은 그야말로 긴 문장이 된다.
37년간 들어온 이 수식어들에 익숙해 질만도 한데, 그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그냥 인기가수 하나면 충분한데 왜 그렇게 앞에 형용사 부사를 많이 붙이는지. 저는 음악이 내 삶이고 전부인 가수예요“
그 자신의 말대로 조용필은 가수다.
다만 그는 완전히 아마추어 수준이던 우리 가요계에서 독보적으로 세련되게 시대를 앞서간 음악을 선보인 가수다.
지금도 어떠한 행보를 하든 우리 가요사에 새 획을 긋는 놀라운 실험과 도전을 내놓는 가수다.
그게 가수 조용필이다.
프로필
1950년 경기도 화성 출생
학력 : 서울 경동고 졸
데뷔 : 1974년 조용필과 그림자 결성
앨범 : 1980년 1집 발표, 2004년 까지 18집 발표
비정규 앨범 포함 30장이 넘는 앨범 발표
대표곡 :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모나리자 여행을 떠나요 등 다수
보유 기록 : 국내 최초 단일 앨범 100만 장 돌파 (1980)
국내 최초 앨범 총판매량 1000만장 돌파 (1994)
국내 대중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80)
국내 대중가요사 최초 팬클럽 창단
한국 대중가수 일본 판매량 최다 (6백만장 - 비공식 8백만장)
국내 대중가수 최초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 공연 (1999년~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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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랑스러운 오빠^^; 오빠 옆에 가기 위해 노력할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