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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인터뷰] 가수 趙容弼 - 감동의 雨中 무대, 그 뒤

더키, 2003-10-11 04: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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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집중 인터뷰] 가수 趙容弼 - 감동의 雨中 무대, 그 뒤


『TV를 버리고 무대에서 승부를 걸었다』
  
    
  ●『나는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싫다. 이북의 무슨 인민배우 칭호 같아서 닭살 돋는다』
●『아내가 없다는 것이 슬프기보다 화가 난다』
●『북한에 가서 몇 명 모아놓고 공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 있나』
●『립싱크는 일종의 사기다』
●『대중과 좀 떨어지더라도 클래식을 지향하겠다』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더 많이 알려지면 안 된다』
●『라이벌은 생각하지 않는다』
●『존경하는 가수는 이미자와 패티김』
●『나훈아씨는 나와 장르가 다르다』
● 북측 CD 요청에, 『돈내고 사가라』

金 成 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白 承 俱 月刊朝鮮 기자〈eaglebsk@chosun.com〉
李 相 欣 月刊朝鮮 기자〈hanal@chosun.com〉  
    



국내 공연 사상 최대의 관객 동원
      
  
  
지난 8월30일 저녁, 서울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는 굵은 비가 내렸다. 그곳에서는 슈퍼스타 趙容弼(조용필·52)의 가요계 데뷔 35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더 히스토리」가 준비되고 있었다. 먹구름도, 강한 빗줄기도 「슈퍼 스타」가 발하는 빛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슈퍼 스타의 「빛」아래로 모인 인파는 4만5000여 명. 국내 공연 사상 초유의 기록이 비가 퍼붓는 야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국내 공연 사상 최대의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과 함께 「魂(혼)의 소리가 준 비내리는 세 시간여 동안의 감동」이라는 평을 받았다. 며칠 후인 9월 초, 趙容弼은 18번째 앨범 「오버 더 레인보우」를 내놓았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9월6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소재 녹음실 「Booming」에서 趙容弼씨를 만났다.
  
  ―지난 8월30일 공연 때 비가 많이 와서 힘들었겠습니다.
  
  『공연을 위해 움직이는 조명등 100대를 설치했어요. 그런데 3분의 1이 이미 공연시작 전에 나갔습니다. 이 조명등들은 비를 맞으면 움직여지질 않아요. 조명 쪽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레를 약 2개월간 연습한 무용수들이 있는데 그것도 보여주지 못했어요. 공연 마지막에 헬기가 창공에 떠서 객석 사이에 있는 나를 비추기로 되어 있었는데 비가 많이 와 헬기가 김포에서 이륙하지 못해 결국은 그것도 못했습니다』
  
  ―아쉬움이 많았겠네요.
  
  『그 동안에 연출해 놓았던 것을 거의 못한 아쉬움은 크지만 비올 때의 공연도 그런대로 운치가 있어요』
  
  ―아쉬움 때문에 공연을 한번 더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한번으로 만족해요. 공연은 늘 하는 것이잖아요』
  
  ―대규모 야외 공연하고는 다르잖아요.
  
  『이번 같은 야외 공연은 내년에 또 할 겁니다. 아직 장소는 정하지 못했어요』
  
  이번 공연에서 조용필씨는 지난 1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안진현씨를 그리며 만든 노래를 불렀다. 인터뷰 중 安씨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의 표정은 어두워지곤 했다. 그는 아직도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어디선가 『여보』 하며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아내 安씨를 그리며 만든 노래의 제목은 「珍(진)」이다.
  
  ―「진」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사실 아내에 대한 노래를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영원히 안고 가야 하는 것이잖아요. 가수가 개인의 사정을 노래로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고요. 나는 곡을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어차피 한 곡은 들어가야겠기에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 이태윤씨가 작곡을 해 보겠다고 해서 해보라고 했습니다. 가사는 양인자씨가 썼습니다. 마음 아팠죠』
  
  ―이번 공연에서 다른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요.
  
  『모니터 스피커들이 물에 잠겨 하이음을 들을 수가 없었어요. 「쿵쿵쿵」 하는 베이스 드럼과 베이스 기타 소리만 들리니까 음정과 리듬 잡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무대가 커서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해야 하는데 막상 무대 위를 돌아다녀 보니까 다른 쪽에 있는 모니터 스피커도 다 죽어 있었어요. 할 수 없이 위대한 탄생이 연주하는 반주를 어렴풋이 들으면서 노래를 해야 했어요. 연주하는 곳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소리의 시차로 인해 리듬 맞추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무대 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포기하고 가운데서 노래했어요』
  
  
  『음악의 방향은 클래식 쪽으로…』
  
  ―국민가수라는 호칭은 마음에 드십니까.
  
  『저는 그런 소리 듣기 싫어요. 마치 이북의 인민배우 같은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뭐랄까 닭살 돋는 느낌 같기도 하고…』
  
  ―그럼 어떤 가수로 불렸으면 하나요.
  
  『호칭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조용필 하면 조용필 자체가 가슴에 남는 그런 가수가 되는 것이죠』
  
  ―18집 앨범(오버 더 레인보우)이 거의 5년 만에 나왔습니다. 5년이란 시간을 두고 앨범을 낸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그 동안 무대공연에만 신경을 썼어요. 미국에 가서 무대공연에 대해 여러 가지를 보고 연구도 했습니다. 앨범을 내야지 하면서도 무대공연에 더 신경을 쓰다 보니 늦어진 것이죠』
  
  ―이번에 낸 앨범이 클래식을 지향했고, 앞으로 음악도 클래식을 지향하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조용필씨가 1996년 月刊朝鮮과 한 인터뷰에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차이를 옷차림에 비유한 대목이 나옵니다. 당시 조용필씨는 클래식은 정장이고 대중음악은 컬러풀한 옷차림이어서 대중에게 오픈되어 있다고 했는데요. 앞으로 클래식을 지향하겠다는 말은 대중을 의식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가수가 앨범을 내서 그것이 히트하는 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이 있습니다. 대중과의 거리감이 무서워서 하고 싶은 음악 쪽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음악인으로서 가치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단번에 방향을 확 틀 수는 없겠지만 차츰차츰 클래식 쪽으로 가려고 해요』
  
  ―대중들이 클래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을까요.
  
  『10년 전의 클래식과 요즘의 클래식은 분명히 많이 변했습니다. 클래식이 대중쪽으로 다가오고 대중들도 클래식 쪽으로 다가 가고 있어요. 뮤지컬 등을 통해서 클래식 음악이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더 흐르면 대중들도 클래식에 아주 가까이 다가갈 것 같아요. 보세요. 요즘 뮤지컬 히트곡이 많잖아요. 뮤지컬 공연도 많은데 그것을 즐기는 대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뮤지컬과 대중들이 자연스럽게 친해질 거예요』
  
  ―TV 출연은 왜 안 하십니까.
  
  『1980년대는 많이 출연했죠. 당시는 앨범 홍보차원도 있었고, 자신의 위치를 계속 이어가는 데는 막강한 힘을 가진 TV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TV에 자주 나가다 보면 「나란 무엇인가」를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요즘은 제가 나갈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없잖아요. 게임 프로그램이나 말로 하는 오락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런데 가수가 자꾸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더 많이 알려지면 안 되죠.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TV 출연을 중단하고 무대공연 쪽으로 나가기로 했어요. 1990년대 초반부터 TV 출연량을 줄이고 무대공연을 늘려 나가기 시작했는데 현실은 정말 힘들더라구요』
  
  
  『기계로 만든 노래는 사기』
  
  ―무대공연에 오는 사람이 많지 않던가요.
  
  『대중가요를 듣기 위해 모이는 사람이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TV에 나오지 않게 되자 「이제 조용필은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무대공연에 끝까지 도전하기로 하고 공연 쪽으로 완전히 치우쳤습니다. 1998년경이 되자 무대공연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처음 몇 년은 정말 많이 고생했죠』
  
  ―대중스타가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경험 아닙니까.
  
  『맞습니다. 스타와 대중을 가깝게 해 주는 것이 TV의 역할인데 저는 TV가 할 역할을 무대가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대공연을 시작한 것입니다. 무대공연은 시간이 필요해요. 올해 5년째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매우 성공적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조용필 하면 무대인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 동안 시도해 왔던 것을 그래도 빨리 이루었다고 봅니다』
  
  ―조용필씨는 무대를 중요시하니까 립싱크(Lip sync: 입만 벌려 노래하는 시늉을 하는 것)를 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립싱크를 하거나 기계가 만들어주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들을 가수라고 부를 수 있는지요.
  
  『디지털 시대가 온 것이죠. 지금 모든 음악이 기계로 만들어지고, 노래를 못해도 오토튜닝 기법을 이용하면 완벽하게 노래 부른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가 없어졌어요. 음반을 들어보면 다들 기가 막히게 노래를 잘해요. 저는 이러한 것이 변해 가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렇지는 않죠. 기계로 만든 목소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일본과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全세계적인 흐름인데 우리나라 제작자만 하지 않을 수도 없잖아요. 요즘은 대중의 귀가 굉장히 첨단화되어 있어요. 웬만한 노래는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기계가 그런 부분을 채워주는 디지털 시대가 온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가수라는 상품을 두고 「맛이 있다, 없다」라고 평가하기보다 그 상품이 어떻게 포장이 되어 있는가를 보는 단계에 와 있다고 봅니다. 무대를 지향하는 主流 가수들과 최근의 디지털화된 가수들이 분리되고 있어요. 관객들이 선택하는 것이죠』
  
  ―공연 중에 관객에게 말씀을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예, 저는 공연할 때 말을 잘 안 해요. 이번에도 두 시간 반 동안 공연하면서 한 번 이야기했습니다. 관객이 노래 들으러 온 것이지 가수 이야기 들으러 온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가수는 자신의 공연에 개그쇼라는 것을 포함한다고 들었습니다. 음악적 요소만 가지고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 코미디 혹은 기타 여러 가지 기능을 섞어서 하는 것이죠. 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에 승부를 걸고 콘서트하면 손님이 없고, 웃기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하면 손님이 오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제 관객이 선택하는 것이죠』
  
  
  지금까지 190여 곡 취입
  
  ―18집까지 나왔는데 총 몇 곡이나 부르셨습니까.
  
  『앨범 당 열 곡 정도 되니까 거의 190곡 정도 부른 셈이네요』
  
  ―그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가 있습니까.
  
  『글쎄요. 다 애착이 가죠. 그건 참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꿈」이라는 노래는 어떠세요. 예전에 「꿈」이라는 노래를 특히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요.
  
  『글쎄요. 애착이 가는 노래를 하나 꼭 집어 내서 이야기할 수가 없네요.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그렇게 보면 의미심장한 노래입니다. 「꿈」은 미국에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제가 직접 곡을 만들었어요. 작사도 비행기 안에서 했고요. 당시 노래를 만들면서 이 노래의 타이틀은 「꿈」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농촌에 젊은이가 없어서 농사를 못 짓는다, 젊은이들이 전부 도시로 몰려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도 농촌 출신이라 도시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면서 이 곡을 만들었어요. 여러 가지 의미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든 것입니다』
  
  ―다른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좋아하는 노래가 있나요.
  
  『유감스럽게도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어요. 저는 주로 음악 채널을 통해서 노래를 듣는데 듣다가 좋으면 CD를 구해서 들어요. 그 동안은 뮤지컬 쪽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음악을 골고루 듣기 위해 미국에 한번 가면 음반을 50여 개씩 사서 가지고 오곤 합니다. 이것을 들으면서 연구할 필요가 있는 곡은 악보를 분석했어요. 그 동안 이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국내 가수의 노래를 들을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요즘 젊은 가수들의 노래는 들어 보았습니까.
  
  『차에서 이동할 때 듣기는 듣지만 제가 음악을 듣는 채널이 고정돼 있는 편입니다』
  
  ―조용필씨가 부른 노래 중에 「사나이 결심」이란 노래는 사연이 있습니다. 全斗煥 前 대통령이 盧泰愚 前 대통령을 자신의 후계자로 연회 지명하는 자리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全대통령이 그 노래를 좋아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당시 경호처장을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각하가 그 노래를 무지하게 좋아한다」고 했어요. 노래를 보니까 가사가 남자답고 개성이 있었습니다. 스태프들에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는데 전부 다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새롭게 편곡을 해서 부른 것입니다』
  
  
  『라이벌은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가수가 있습니까.
  
  『그런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하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요』
  
  ―국내 가수 중에 존경하는 가수는요.
  
  『이미자씨와 패티김씨는 훌륭하신 분이죠』
  
  ―나훈아씨는 어떠세요.
  
  『음악방향이 다르잖아요』
  
  ―이미자씨나 패티김씨 하고도 음악적 방향에서 유사성은 없는 것 같은데요.
  
  『없죠. 그러나 이미자씨는 개인적으로 뵌 적도 많고, 노래를 굉장히 곱게 불러요. 트로트이면서도 정직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주 멋있어요. 이미자씨와 패티김씨는 여자가수의 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분이 있어서 참 좋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그냥 주부에 머무르거나 노래를 그만두지 않고 아직도 공연을 하고 있잖아요. 이런 것은 우리의 자랑거리죠』
  
  ―그럼 좋아하는 가수를 이미자씨라고 해도 되나요.
  
  『이미자씨와 패티김씨죠』
  
  ―月刊朝鮮이 1999년에 20세기 한국 최고의 가수를 조사했을 때 이미자씨와 조용필씨가 1~2위를 다투다가 조용필씨가 1위를 했습니다. 광복 후 한국의 인물 50인을 분야별로 선정했을 때도 가수부분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조용필씨에게 직접 한국 최고의 가수를 한 명 꼽으라면 누굴 꼽을 수 있습니까.
  
  『하하하. 글쎄 가수 입장에서 최고의 가수를 꼽는다는 것은 어렵죠』
  
  ―후배가수는 어떠세요.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는 가수가 없습니다. 연예인이면서 연예인을 잘 몰라요』
  
  ―김건모씨 노래를 들으면 조용필씨가 떠오른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후배 가수들은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김건모, 신승훈, 이승철, 이승환 다 잘하는 가수예요. 여자는 이은미씨가 잘하죠』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가수는 대부분 록(Rock) 가수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실력이 있는 가수들이 노래를 잘 하는 것이 되는 것이군요.
  
  『사실 요즘 랩을 하는 가수들은 언더그라운드 쪽에서 노래를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노래는 아무래도 많이 불러야 합니다. 부르는 것이 연습이니까요』
  
  ―노래방에도 갑니까.
  
  『그럼요』
  
  ―본인 노래도 부르세요.
  
  『자기 노래는 안 하죠.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가 18번입니다』
  
  ―「황성옛터」를 부르는 걸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한 경험이 있는데요.
  
  『「황성옛터」는 옛날 곡이지만 멜로디가 고급스럽습니다』
  
  ―요즘은 그런 노래 안 부르시죠.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님이 꼭 한 번 불러달라고 해서 갑자기 가서 부른 적은 있어요. 그 노래 너무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혹시 노래를 부르기 싫은데 부른 적은 없었습니까.
  
  『부르기 싫다는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35년 동안 노래를 해 오시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그런 적도 없어요. 때로는 그냥 유명인이 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있어요』
  
  
  판소리를 배우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로 탄자니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으셨죠.
  
  『그 훈장이 급이 아주 높은 것이었어요. 탄자니아 한 장관이 공항에서 보여주면 무조건 통과라고 그러데요. 하하하』
  
  ―우리나라에서는 훈장을 받지 못했나요.
  
  『그런 복이 없어요』
  
  ―녹음은 한 번에 끝내신다면서요.
  
  『녹음은 길게 하지 않는 편이에요. 많이 한다고 좋게 나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한때 국악공부를 했고, 지금은 또 클래식 쪽의 음악을 지향하신다고 했는데 자신의 음악을 어떻게 완성해야겠다는 방향을 정해 놓고 하신 건가요.
  
  『그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 분야를 다 해보고 싶었어요. 젊었을 때는 록음악도 했어요. 음악이 변해 가는 것은 하나의 충격이거든요. 어떤 곡을 듣고 충격을 받으면 「저게 뭐야」 하면서 그 곡을 연구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그 곡이 좋아지고 나도 그런 쪽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뮤지컬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이것은 하나의 영화를 무대에 올려 놓은 것이구나」 생각했어요. 배우들도 노래를 잘했어요. 이 모든 것이 참 부러웠죠. 내 자신이 뮤지컬 배우로 활동한다는 것이 아니고 뮤지컬에서 부르는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뮤지컬의 음악 부분과 무대연출에 참여하는 것이죠』
  
  ―자신의 노래를 시기별로 한번 정리해 볼 수 있나요.
  
  『글쎄요. 두서없이 왔기 때문에. 1960년대 말에는 美 8군에 있어서 외국음악만 할 수밖에 없었어요. 1970년대 초반도 마찬가지 상황이었고요. 1970년대 중반 「조용필과 그림자」 시절에는 록음악을 했죠. 그러니 거의 외국 음악이었어요. 그 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알려졌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냥 해본 것이었는데 그것이 뜬 것이죠.
  
  그 후 대마초 사건이 있었습니다. 활동을 잠시 쉬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어요. 조상현씨 같은 국악인들을 만나면서 참 저런 목소리도 있구나 생각했어요. 제 목소리가 미성이에요. 지금은 탁성으로 많이 변했지만, 당시에는 목소리가 미성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노래를 못해요. 롤링스톤 같은 음악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이죠. 나에게 맞지 않으니까 그런 노래를 부르면 아주 웃기게 되잖아요. 그래서 판소리를 시작했습니다. 판소리를 들어 보니 완전히 탁성이에요. 「저 소리를 배워야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겠구나」해서 판소리를 시작한 것입니다』
  
  ―「한 오백년」을 그렇게 해서 한 것입니까.
  
  『「한 오백년」 가지고만 안 되겠다 싶어서 흥부전 레코드를 샀어요. 그 중에 구걸장면이 있는데 그것을 악보로 만들어 혼자 연습을 했어요. 가성도 연습했습니다. 그때 비틀즈의 노래가 유행하여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가성이 많이 유행했어요. 그 가성 창법으로 1980년대에 나온 것이 「단발머리」란 노래예요.
  
  1960년대 말에서 1970대 초까지는 많은 음악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것으로 만든 시기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서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창밖의 여자」는 의뢰를 받아서 만든 노래고, 직접 한번 만들어 보자 마음먹고 만든 노래가 「단발머리」, 「촛불」, 「고추잠자리」, 「자존심」 등과 같은 노래였습니다.
  
  그때 저의 작곡이 기존의 작곡가들과는 패턴이 많이 달랐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팝송 청취자와 국내 가요 청취자가 8대 2 혹은 7대 3의 비율이었습니다. 내 노래가 팝송식으로 나온 것이 청소년들에게 강하게 와 닿은 것 같아요. 그때 청소년들이 지금 저를 「오빠」라고 하는 사람들이죠』
  
  
  김지하와 어울린다고 안기부에서 경고 받아
  
  ―시대적인 상황이 음악적 색깔을 변화시키는 데는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당연히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나 사회가 변해서 그렇다기보다 시대에 따라 악기가 바뀌면서 음악의 색깔이 많이 변합니다. 새로운 악기가 나오면 새로운 톤이 나옵니다. 음악의 기술적인 배경이 좋아지니까 색깔이 더 달라지게 됩니다. 이제는 나올 장르가 다 나왔어요.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음악으로 가겠는가를 많이 생각했어요. 그래서 현악기, 즉 클래식 쪽 음악을 자꾸 듣는 것입니다. 이제는 음악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다보니 음악이 재미가 없어져요. 그래서 생악기 쪽으로 자꾸 쏠리게 되죠』
  
  ―클래식 쪽에서 모델로 삼는 음악가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어요. 지난번에 음악 채널에서 멋진 곡이 나오기에 찾아봤더니 뉴욕 필하모니가 연주한 음악이에요. 저는 들어서 괜찮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메모를 합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바로 곡을 채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돼죠. 겸손이 아니라 밖에서 좀 과장되게 알려진 부분도 있어요. 예를 들어 음악을 듣자마자 받아쓰기 하듯 오선지에 곡을 그리는 것은 사실상 힘들어요. 스피드도 그렇게 나오지 않죠. 음악을 부분부분 다시 들으면서 곡을 받아쓰는 것이죠. 연습을 많이 했어요. 1970년대에 도화지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서 곡을 잡는 연습을 했어요. 종이 건반은 소리가 나지 않으니 내가 직접 소리를 내면서 하는 것이죠. 이 건반은 무슨 소리다, 이 건반은 무슨 소리다 하는 것을 한참 동안 연습했어요』
  
  ―직접 다루는 악기는 몇 종류입니까.
  
  『기타하고, 드럼 조금 쳤었고, 피아노 조금 쳤습니다. 피아노는 코드만 아는 정도이지 잘 치는 것은 아니에요』
  
  ―1980년대 민중가요가 한참 나올 때 민중가요 같은 노래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1980년대 내가 한참 활동 중일 때 서울大 학생들이 찾아왔었어요. 김지하씨도 그때 만났죠. 그런데 민중가요라는 것은 학교에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것이었지 나는 그쪽이 아니잖아요. 저는 좋은 음악을 만들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외국의 어느 가수는 무슨 컬러를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나 자신도 그렇게 만들고 싶었죠. 사상 쪽으로는 큰 관심이 없었어요. 하여간 그때 운동권 친구들이 많이 찾아 왔었어요』
  
  ―당시 시대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작곡한 것은 없습니까.
  
  『「생명」이란 노래가 그런 쪽에 속합니다. 이 노래는 심의에 걸려서 발표를 못했었습니다. 당시 군정일 때니까 작사자 전옥숙씨에게 인간의 존엄을 표현한 노래를 하나 만들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같이 고민하면서 「생명」이란 노래를 만들었는데 심의에 걸리고 경고도 받았죠. 또 김지하씨와 어울린다고 안기부에서 경고도 받았어요』
  
  ―자신에게 음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삶 자체죠. 전부예요』
  
  ―사별한 부인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요. 없다는 사실이. 꼭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재혼은 못하시겠네요.
  
  『하하하, 이 나이에 무슨 재혼이에요』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은 구체적으로 정해졌나요.
  
  『글쎄 생각만 하고 있어요』
  
  ―마음속으로 키웠으면 하는 사람은 없나요.
  
  『지금은 너무 바빠서 못 하고 있어요. 후계자로 키우려면 어느 정도 타고난 재능을 봐야죠. 가수를 하겠다고 하면 인간 개조를 시켜야 해요. 연습할 노래를 주면서 이 노래는 언제까지 마스터하라고 하는 것이죠. 노래의 키를 잡아서 정해 줍니다. 그렇게 연습시켜야 「하이음」이 좋아지고 「로음」이 좋아져요.
  
  동시에 악기를 가르쳐야 해요. 최소한 악기 세 개를 배워야 하는데 피아노와 기타는 기본이고 현악기 중에서도 하나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 더 추가하면 관악기 중에서도 하나 정도는 해야 하죠. 음악을 어렸을 때부터 알게 해야 해요. 또 연기도 해야 합니다』
  
  ―조용필씨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라고 인정받습니다. 위대한 가수라면 타고난 부분도 있지만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본인은 어느 유형에 속하는 가수라고 보십니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은 내가 타고난 재능이 있는가 하는 것도 잘 모르겠어요. 집안에 음악하던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나 성격이 좀 끈질긴 면이 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못 말리는 성격입니다』
  
  ―외로운 때는 어떻게 합니까. 부인이 생각날 때라든가.
  
  『둘이서 살다가 한 사람이 없는데 당연히 슬프죠. 삶 자체가 비극적인 것같이 돼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사랑 한번 해본 사람이 그이예요. 외롭다는 것보다는 화가 납니다』
  
  ―첫 번째 부인은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서로가 어쩔 수 없었던 비극이죠』
  
  ―돈에 관심이 없나요. 이번 공연 수익금도 삼성병원에 기증했고, 사별한 부인의 재산도 사회에 기증했는데.
  
  『이번 공연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었어요. 그 동안 조용필을 사랑해주었던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공연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연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돈이 없어 병을 못 고치는 사람을 주자고 미리 이야기가 된 것이에요. 좋은 무대 만들어서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보답이니까 이번 무대만큼은 이익 내지 말자고 한 것이죠. 와이프 돈은 제가 가지고 있어서 뭐합니까. 창피하잖아요. 사람이 갔는데, 그 돈 내가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북한에서 공연 제의가 들어오면 할 의향이 있나요.
  
  『그동안 네 번 정도 제의가 왔었어요.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했어요. 1년간 스케줄이 꽉 차 있어요. 몇 개월 후에 할 수 있냐고 제의가 오면 안 되죠. 1년 반 전에 이야기하면 모를까. 매년 하는 것이 정해져 있어서 중간에 움직일 수가 없어요』
  
  
  『북한에서의 공연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북한 공연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는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북한 주민들이 내 노래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고, 또 거기서 몇 명 모아 놓고 공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 있나요. 우리처럼 TV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월드컵 때 그 쪽(북한)에서 제 노래 CD를 요청하더라고요. 50여 장 요청했는데 사가라고 했어요』
  
  ―북한 주민을 위한 노래를 작곡할 의향은 없나요.
  
  『신곡 많지 않나요. 거기서 들으면 내 곡은 전부 신곡인데요. 뭘』
  
  ―남한의 大스타가 북한 주민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면 좋아할 텐데요.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온 북한 여자 응원단원이 현수막 뜯어가는 것을 보고…. 아휴』
  
  ―그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참, 통일되어도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 내내 아내 안진현씨 이야기할 때를 빼고는 작은 체구의 趙容弼씨는 거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감동을 연출했던 잠실 올림픽 경기장 雨中(우중) 무대에서 포효하고, 절규하던 모습도 없었다. 「작은 거인」은 그렇게 조용하게 무대에서의 폭발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출처 : 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old.asp?tnu=200310100043&catecode=H&c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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