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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용 필

ypc스타, 2004-04-13 22: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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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필

슈퍼 스타 조용필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가수다. 록, 트로트, 포크, 발라드, 댄스, 퓨전, 동요, 민요 등 35년 간 모든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며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 작은 거인이다. 국내 무대를 평정한 그는 '20세기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이다.
그는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의 넉넉한 농가에서 부친 조경구씨와 모친 김남숙씨의 3남 4녀 중 여섯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 둥글둥글 성격이 좋아 '풀빵'으로 불렸다. 송산초등학교에 다니던 10살 때 뒤늦게 찾아온 홍역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을뻔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외국 팝송이 좋았던그는 연주 그룹 벤쳐스와 비틀스 음악에 반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2 때 서울 정릉으로 이사를 해 경동중학에 들어갔다. 훗날 국민 배우가 된안성기는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 경동고에 진학하면서 공부보다는 더욱음악에 빠져 었다. 3학년 때는 서소문의 대한일보 13층 스카이 라운지에서대타로 무대에 설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가출을 했다. 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길바랬던 부모님이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 음악을 좋아하는 동네친구 3명과 동대문 근처에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월세 방을 얻어 그룹 '애트킨스'를 결성했다. 석 달 동안 열심히 연습했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해문산의 용주골로 갔다.

이 시절의 1년은 흑인 병사와 양공주들이 던져주는 팁으로 생활하는 가혹한 시절이었다. 팀 해체 후 1969년 와해 직전의 화양 소속 그룹 '화이브휭거스'에 리드 기타로 들어가 파주군 장파리의 DMZ클럽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당시 주 레퍼토리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의 히트곡들. 하숙방과 업소에서 라디오나 음반을 통해 들은 노래의 선율을 도화지에다 건반을 그려가며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업소로 찾아온 가족들에게 끌려 고향 화성에서 반년동안 원치 않는 대입준비를 하며 잠시 음악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또 다시 가출을 시도, 경기도 광주의 한 클럽의 무명 하우스 밴드에 잠시 합류했다. 이때 보컬을 맡은 친구가 입대를 해 대타로 노래를 불렀다. 생일을 맞은 한 미군 병사가바비 블랜드의 "Lead Me On"음반을 건네며 노래를 신청해왔다.

"밤새 음반을 듣고 연습해서 다음날 그 곡을 연주해 줬어요. 너무 좋아하더군요" 가수로서의 첫발이었다. 미8군 시절 조용필은 백인, 흑인, 라틴계병사의 서로 다른 취향에 맞춰 소울, 리듬&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의 레퍼토리들을 접했다. 광주 클럽 활동 이후 서울로 올라와 국제호텔의 레인보우, 조선호텔의 투모로우 등지에서 활동을 했다.

1970년 드러머 김대환, 기타ㆍ건반 최이철과 함께 록 그룹 ‘김 트리오’를 결성했다. 당시는 지미 헨드릭스를 비롯, 3인조 록 그룹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1971년 5월 시민회관에서 열린 '선데이 서울컵 그룹 사운드 경연 대회'. 이변이 벌어졌다.

"길 잃은 철새"와, "Unchained Melody"를 부른 김 트리오의 조용필은 he6, 키보이스 등 정상의 그룹 싱어들을 제치고 가수왕의 영예를 안았다. 이에 TBC방송 신광철 PD는 '패티 킴의 스페셜 쇼'에 그를 김정호와 동반 게스트로 출연 시키는 파격적인 대접을 했다.

가창력을 인정받은 조용필에게 음반제작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71년,최초로 그의 육성 노래 4곡이 담겨 있는 데뷔음반 <뮤지칼 사랑의 일기/사랑의 자장가-오스카>가 발매되었다. 이때는 조영필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또한 김트리오의 유일한 독집도 아세아에서 나왔다. 이 음반은 최근에서야존재 여부가 알려졌다. 색소폰 강태환. 건반 김종화가 참여했고 조용필은평범하게 기타만 연주했다.

1972년 첫 독집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아세아>가 나왔다. 흥미로운것은 이 음반에 통기타 두 대로 연주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조용필버전이 수록되어있다는 것.76년 히트곡 버전과는 달리 "돌아왔다 부산항에/그리운 내 형제여"부분이"돌아와요 부산항에/ 보고픈 내 님아"로 가사가 달리 녹음되어 있다. 아마도 76년 재녹음 당시는제일동포들의 고향 방문 물꼬가 트인지라 그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 된 듯 싶다. "솔직히 이 시기의 음반들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내가 이런 음반들을 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제작자가 주문해 떠밀려 했다. 직접 신경을 쓴 80년 이후 음반부터가 진짜 내 음악이다"김 트리오가 해체되면서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조갑출과 25시'에 잠시 합류해 부산을 주무대로 극동 호텔 등지에서 일했다. 1974년, 옛 음악 친구들을 모아 7인조 브라스밴드 '조용필과 그림자'를 결성, 동대문 이스턴 호텔을 주무대로 활동하며 당시 유행하던 팝 그룹 ‘시카고’의 음악을 선보였다.

이 시절 조용필은 록 이외에도 트로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킹박의기획으로 발표한 트로트 록 앨범 <조용필/영사운드 너무 짧아요/돌아와요부산항에-서라벌, 1976>는 그에겐 잊지 못할 음반. 조용필은 음반이 100만장이 넘게 팔려 나가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1978년 김성수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 <돌아와요 부산항>이 탄생되었을정도였다. "깜짝 놀랬다. 새벽다방에서 인기가 시작됐는데, 타이틀곡보다오히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신청이 자꾸 들어와 곡을 찾아 다시 연습을했다. 다시는 부르지 않으려 했던 곡이 대표 곡이 되어 버렸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유명세를 탄 조용필은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금지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당시 남산의 지하 취조실에 끌려가 주전자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한 절망감에 이 땅을뜨고 싶었다." 하지만 좌절보다는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목에서 피가 나도록 판소리 공부에 전념했다.
77년 부산에서 '조용필과 그림자'를 재건했다. 79년 말, 해금 소식과 더불어 록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했다. 최초의 라인업은 현재까지 함께 하는 ‘검은 나비’ 출신의 드러머 이건태와 기타 곽경욱, 베이스 김택환,그림자 출신 키보드 김청산. 모두 실력파 연주자들이었다.

리더 조용필은 보컬과 틈틈이 기타도 쳤다. 최이철을 비롯, 이호준 송홍섭 유재하 배수연 유영선 등 유난히 멤버 교체가 잦았지만 트로트에서 발라드ㆍ록ㆍ민요를 아우르는 조용필의 노래를 저마다 다른 색깔의 연주로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세션들의 실력 덕분이었다. 밤무대에서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조용필은 수난을 안겨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의식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 발표한 조용필의 본격적인 1집 음반 <창밖의 여자/단발머리-지구,1980>은 일인 독재 시대를 알리는 힘찬 팡파르였다. 타이틀 곡 '창밖의 여자'는 동아방송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였다. 종횡무진 내닫던 82년어느 날 김청산, 김택환, 곽경욱이 '천하대장군'이란 그룹으로 독립해 튀어 나갔다.

그 자리엔 2기 멤버라 할 수 있는 베이스 송홍섭, 동방의 빛 출신 키보드이호준, 기타 김석규가 들어왔다. 그 해 9월 자서전 '초혼의 노래'를 발간했다. 대중의 기호를 간파한 만능 엔터테이너 조용필은 장르를 넘나드는다양한 어법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4집 <못 찾겠다 꾀꼬리/비련>은 이정표 격의 음반. 특히 '비련'은 일본인작곡가 다니무라 신지와 저작권 시비를 벌이기는 했지만 첫 소절, '기도하는~' 다음에 터져 나왔던 소녀 팬들의 비명소리는 인상적이었다. 몇 번의수정 지시를 맞았지만 광주 학살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노래한 '생명'이란곡도 4집의 수록곡이었다.

또한 7집 <눈물로 보이는 그대>, 13집 은 가장 음악적으로 뛰어난 음반으로 꼽힌다.80년대는 조용필의 독주시대였다. 그의 수상 경력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80월 11월. '창 밖의 여자'로 서울 국제 가요제 금상, '한오백년'으로 열창상 수상은 시작이었다. 80년부터 86년까지 내리 7년 동안 MBC 10대가수왕 수상, KBS 방송가요대상(1980~1985)에 이어 81년 5월에는 '그 사랑한이 되어'로 한국연극영화대상에서 주제가 작곡상을 수상했다.7월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최초로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치렀다. 82년 4월엔 미국 암펙트사로부터 '미워 미워 미워'로 글든릴상을 수상했다. 일본문화방송 개국 30주년 기념 아시아 뮤직 포럼 참가에 이어 5월엔 일본 NHK 리사이틀 홀 단독공연을 벌였다. 일본에서는 3장이나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골든디스크를 기록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국제적으로 넓혔다.조용필은 86년부터 1년 간 무려 148회의 공연을 강행했던 무적함대였다.

일본에도 여러 팬클럽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만큼 슈퍼 스타의 반열에올랐다. 일본에서 발매한 그의 수많은 앨범 때문에 "일본 사람이 되려 했다"는 오해를 살 만큼 그는 일본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에 성공했다.그는 자신의 음악을 삶과 직접적인 연관을 짓기보다는 '아이디어'로 생각한다. "음악이라는 것은 많은 음악을 들으면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아이디어, 영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지 자기 삶이 순탄치 않고, 좀 그렇다 해서 음악에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조용필은 그만의 음악 세계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가수는 하나의 '엔터테이너'이고, '노래 연기자'이다. 가수가 되어 인정을 받으려면 젊은 층에서 노년층 팬들까지 좋아하는 민요도 할 줄 알아야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내 장르로 들어가겠지만…" 매년 가수왕을 독점하던 그는 92년 '꿈'이후부터 TV출연을 자제하면서 인기 최정상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96년 16집 "바람의 노래"가 나올 땐 잠시 TV에 출연했지만그의 모습은 TV에서 사라졌다.1999년 12월 27일,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 MBC라디오 '20세기 한국인의 노래 100곡'프로그램이 한국갤럽을 통해 20세 이상 1천명의 성인과 전문가300명을 대상으로 금세기 최고의 가수와 노래를 조사한 결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선정되었다.1999년 대중음악가로는 처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서 공연을 펼쳐 화제가 되었던 조용필은 2003년까지 5년 동안 매년 전회 매진 기록을 세워왔다. 2002 일본 요코하마 세계여행박람회에 참석한 2,239명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97%인 2천172명이 부산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가수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떠올렸다.지난 8월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4만5,000석을 매진시킨 그의 '히스토리'공연은 한국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업이었다.

올해 10월 20일 고 배호, 황병기 등 37명과 함께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자신의 노래만으로 뮤지컬을 꿈꾸고 있는 조용필이살아 꿈틀거리는 한국 대중 음악의 신화라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출처 ☞http://rd.empas.com/web/rd.tsp/PS=%C1%B6%BF%EB%C7%CA%04%03%031%03%C1%B6%BF%EB%C7%CA/*http://blog.empas.com/ryhunt/read.php?a=275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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