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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부대 몰고 다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조용필
노래 인생 40년…6월 대구공연
나는 조용필이다
조용필(58)의 무대를 본 사람은 몇 차례는 놀랄 각오를 해야 한다. 화려한 무대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히트곡에 놀라고, 환갑을 바라보는 그의 열정에 놀란다. 또 별다른 입담이나 게스트도 없이 3시간 내내 노래만 하는 모습에도 놀란다. 조용필의 무대는 그의 삶과도 닮았다. 다른 곳으로 눈돌리지 않고 한 길만 걸어온 외고집. 또한 무대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들과 하나되는 열정을 끌어내는 것도 그만의 마력이다.
공연을 주관하는 기획사 관계자는 "대구에서 열리는 공연 중에 조용필의 공연만큼 40, 50대 남성들을 움직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주로 여성들이 입장권을 예매하거나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기 마련인데, 조용필의 경우 다르다는 얘기다. 다짜고짜 예매처에 전화를 걸어 "저 형님 팬입니다!"라고 외치거나 "저희 가게 앞에 용필이 형님 현수막을 달 수 있을까요"라며 문의하는 것도 조용필만의 현상이다. 조용필의 노래는 장르를 초월하고, 세대의 벽을 뛰어넘는다. 노래 인생 40년을 지탱해온 그만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올까. 다음달 대구공연을 앞두고 있는 조용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됐다. 질문은 길었고 답변은 짧았다. 행간이 더 넓은 인터뷰. 사실 그가 노래 외에 다른 설명을 한다는 것은 군더더기일지도 모르겠다.
◆음악 이외의 모든 것이 다 유혹
-자신이 ‘조용필’이라는 사실,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뮤지션이라는 사실, 늘 대중 앞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로감을 느낀 적 없습니까?
"데뷔 초기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현실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모든 일에 조심하는 편입니다."
(톱스타의 삶은 피곤하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한 이후, 사람들의 시선은 뗄 수 없는 꼬리표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술도 마시고, 포장마차에서 우동도 먹곤했다. 그러다가 절제하자고 결심했다. 실수하는 모습이나 취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제하며 살다 보니 생활이 됐다"고 밝혔다. 조용필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그가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 그는 "음악 이외의 모든 일들이 다 유혹"이라고 했다.)
-조용필씨 주변에는 가까이 다가서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카리스마에 눌리기도 하고 성격이 까다롭다고도 합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선입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용필과 함께 일하는 이들이 그를 어려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메일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5일 동안 이어진 방송 촬영으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며 인터뷰 요청이 난감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또 공연 포스터 시안이나 문구까지 자기 눈으로 확인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는 공연장 곳곳을 다니며 음향을 점검하고 스태프들의 반복되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큰 사고를 당해서 목소리와 손가락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목소리입니다."
(가수와 기타리스트 중 택일하라는 다소 짓궂은 질문. 답은 가수다. 조용필의 시작은 기타리스트였다. 4인조 밴드 '애트킨즈'를 결성해 미8군에서 밴드활동을 하던 당시 그는 리더로 기타리스트였다. 그러던 중 보컬 겸 베이시스트가 입대를 하면서 보컬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그런 계기가 없었더라도 노래를 불렀을 것이라고 했다. 원래 미성인 그는 록음악에 맞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가혹한 연습을 거듭했다. 심지어 목에서 피가 나면 소금을 먹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치열한 노력 덕분에 가성과 진성, 탁성을 자유자재로 내는 목소리가 완성됐을 것이다. 충북과학대 조동욱 교수는 조용필의 목소리를 분석, "인간의 가청 주파수 '0~2만2천50㎐'대를 자유롭게 오르내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이 어우러진 4부 합창과 같이 듣는 이에게 편안함을 준다"고 주장했다.)
◆내 노래는 아직 진행형
-40년 전 사람들 앞에 섰던 첫무대를 기억하시나요?
"기억이 납니다. 미군 헌병부대의 무대였습니다."
(그가 데뷔한 건 고3이었던 1968년 미8군 클럽 무대였다. 미8군 무대는 1960,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요람이자 등용문이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미8군은 당시 대부분의 가수들이 음악 무대를 시작했던 장소로 통했다. 미8군 무대를 거쳐간 가수들은 대중과 TV 매체가 가장 선호하는 가수로 급부상했다.)
-1981년 '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요. 물론 영화 출연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만.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했다고 봅니다. 그래도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이 출연한 영화가 있다. '그 사랑 한이 되어.' 당대 톱스타인 유지인과 함께 출연했다. 1981년 2월 5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음악의 불길을 스크린에 옮겼다'고 선전했지만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조용필은 음악 이외의 활동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다른 분야에 완전히 관심을 끈 것은 아니다. 그는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크다"며 "뮤지컬 공연의 프로듀서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음악 정규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곡들을 써내고 불러낸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많은 외국 곡들을 듣고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노래를 들으며 작곡이나 편곡 스타일, 악기 편성, 색깔(tone)들을 끊임없이 뜯어보고 연구했지요."
(그는 늘 새로운 음악에 목말라했다. 유행하는 음악을 늘 먼저 깨쳤고, 외국 뮤지션들의 음악을 거의 외우다시피했다. 지금도 그는 음악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군방송(AFN)을 듣는다. 세계 음악의 경향을 놓치면 자신의 길도 잃어버린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전환점을 1970년대, 80년대, 90년대로 분류했다. "70년대는 음악적 체험과 연구를 거듭했던 시절이었다. 80년대는 그간 쌓아온 체험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노래들을 발표했던 시절이었고, 방송 출연을 중단한 90년대부터는 발표한 노래들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생각한다"고 했다.
항상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면서도 그가 지켜온 원칙은 단순했다. "들어서 좋으면 훌륭한 곡"이고 "대중이 좋아하면 훌륭한 가수"라는 것이다.)
-1992년 방송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공연으로 돌아선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역시 무대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방송 활동의 한계를 느꼈고, 방송에 매달리기에는 너무 힘들고 지쳤었습니다. 하지만 슬럼프가 온다고 해서 음악을 놓고 어디론가 숨지 않았고 항상 자신감을 가졌던 점이 오랜 시간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봅니다."
-곡을 만들 때 주로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작업을 하는 편입니까?
"곡은 주로 집에서 만듭니다. 다양한 음악적 체험을 하기 위해 여러 음악을 많이많이 듣는 편이죠. 그러다 만들고 싶은 음악이 떠오르면 미리 메모를 해두기도 합니다."
-음악적으로 가장 힘들었거나 한계를 느꼈던 때는 언제입니까?
"자주 한계를 느낍니다. 곡이 잘 안나오거나 하면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지요. 하지만 끊임없이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음악으로 살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직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
-음악을 한 이래 최고의 날은 언제였습니까?
"최고의 날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그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그에게 아직 최고의 날이 오지 않았다니.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한 이후 셀 수 없는 히트곡을 냈고, 국내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공연과 일본 골든디스크상 수상, 방송사 선정 최다 '최고인기 가수상' 수상, 단독공연 최다 관객(10만명), 국내 가수 최초로 음반판매량 1천만장을 돌파한 그에게 아직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니. 조용필의 음악적 열정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싶다.
환갑을 바라보는 그다. 기자는 지난 2004년 '딥퍼플'의 대구공연을 본 경험이 있다. 하얗게 백발이 서린 보컬 이언 길런은 여전히 열정적이었지만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세월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느꼈다. 아직 그에게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올 한해 그는 24차례나 대형 공연을 펼친다. 서울 대구 창원 광주 부산 등 국내 공연뿐만 아니라 미국 LA 노키아센터, 뉴욕 라디오시티홀 등 해외 공연 일정도 잡혀 있다. 그는 "훗날 노래 부를 힘이 떨어진다면 미련없이 끝낼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시기는 아직 미정이다.)
-40주년 기념 공연의 제목을 ‘더 히스토리: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굶어서 얼어죽더라도 산 정상으로 오르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모든 이의 꿈과 이상입니다. 특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대중이 갖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곡일 것입니다. 이 점을 관객들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싶었습니다."
조용필은 2011년 대구세계육상대회 홍보대사를 맡았다. 그는 대구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주 편안한 도시"라고 했다. "다른 지역 관객들에 비해 아주 열정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6월 14일 대구스타디움에서 무대에 오른다. 40m 높이의 거대한 영상타워와 80m 너비의 무대 등 엄청난 규모다. 공연 스태프와 안전, 장내 정리 인원까지 합치면 5천200여명이 투입될 예정. 이날 콘서트는 '그리운 날들' '추억의 날들' '도전의 날들' '나눔의 날들' '나의 날들' '동행' 등 6개 주제로 압축된다. 40주년이라는 의미에 맞게 '꿈'과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40곡을 부를 예정이다.
노래 인생 40년…6월 대구공연
나는 조용필이다
조용필(58)의 무대를 본 사람은 몇 차례는 놀랄 각오를 해야 한다. 화려한 무대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히트곡에 놀라고, 환갑을 바라보는 그의 열정에 놀란다. 또 별다른 입담이나 게스트도 없이 3시간 내내 노래만 하는 모습에도 놀란다. 조용필의 무대는 그의 삶과도 닮았다. 다른 곳으로 눈돌리지 않고 한 길만 걸어온 외고집. 또한 무대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들과 하나되는 열정을 끌어내는 것도 그만의 마력이다.
공연을 주관하는 기획사 관계자는 "대구에서 열리는 공연 중에 조용필의 공연만큼 40, 50대 남성들을 움직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주로 여성들이 입장권을 예매하거나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기 마련인데, 조용필의 경우 다르다는 얘기다. 다짜고짜 예매처에 전화를 걸어 "저 형님 팬입니다!"라고 외치거나 "저희 가게 앞에 용필이 형님 현수막을 달 수 있을까요"라며 문의하는 것도 조용필만의 현상이다. 조용필의 노래는 장르를 초월하고, 세대의 벽을 뛰어넘는다. 노래 인생 40년을 지탱해온 그만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올까. 다음달 대구공연을 앞두고 있는 조용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됐다. 질문은 길었고 답변은 짧았다. 행간이 더 넓은 인터뷰. 사실 그가 노래 외에 다른 설명을 한다는 것은 군더더기일지도 모르겠다.
◆음악 이외의 모든 것이 다 유혹
-자신이 ‘조용필’이라는 사실,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뮤지션이라는 사실, 늘 대중 앞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로감을 느낀 적 없습니까?
"데뷔 초기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현실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모든 일에 조심하는 편입니다."
(톱스타의 삶은 피곤하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한 이후, 사람들의 시선은 뗄 수 없는 꼬리표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술도 마시고, 포장마차에서 우동도 먹곤했다. 그러다가 절제하자고 결심했다. 실수하는 모습이나 취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제하며 살다 보니 생활이 됐다"고 밝혔다. 조용필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그가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 그는 "음악 이외의 모든 일들이 다 유혹"이라고 했다.)
-조용필씨 주변에는 가까이 다가서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카리스마에 눌리기도 하고 성격이 까다롭다고도 합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선입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용필과 함께 일하는 이들이 그를 어려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메일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5일 동안 이어진 방송 촬영으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며 인터뷰 요청이 난감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또 공연 포스터 시안이나 문구까지 자기 눈으로 확인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는 공연장 곳곳을 다니며 음향을 점검하고 스태프들의 반복되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큰 사고를 당해서 목소리와 손가락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목소리입니다."
(가수와 기타리스트 중 택일하라는 다소 짓궂은 질문. 답은 가수다. 조용필의 시작은 기타리스트였다. 4인조 밴드 '애트킨즈'를 결성해 미8군에서 밴드활동을 하던 당시 그는 리더로 기타리스트였다. 그러던 중 보컬 겸 베이시스트가 입대를 하면서 보컬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그런 계기가 없었더라도 노래를 불렀을 것이라고 했다. 원래 미성인 그는 록음악에 맞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가혹한 연습을 거듭했다. 심지어 목에서 피가 나면 소금을 먹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치열한 노력 덕분에 가성과 진성, 탁성을 자유자재로 내는 목소리가 완성됐을 것이다. 충북과학대 조동욱 교수는 조용필의 목소리를 분석, "인간의 가청 주파수 '0~2만2천50㎐'대를 자유롭게 오르내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이 어우러진 4부 합창과 같이 듣는 이에게 편안함을 준다"고 주장했다.)
◆내 노래는 아직 진행형
-40년 전 사람들 앞에 섰던 첫무대를 기억하시나요?
"기억이 납니다. 미군 헌병부대의 무대였습니다."
(그가 데뷔한 건 고3이었던 1968년 미8군 클럽 무대였다. 미8군 무대는 1960,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요람이자 등용문이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미8군은 당시 대부분의 가수들이 음악 무대를 시작했던 장소로 통했다. 미8군 무대를 거쳐간 가수들은 대중과 TV 매체가 가장 선호하는 가수로 급부상했다.)
-1981년 '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요. 물론 영화 출연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만.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했다고 봅니다. 그래도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이 출연한 영화가 있다. '그 사랑 한이 되어.' 당대 톱스타인 유지인과 함께 출연했다. 1981년 2월 5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음악의 불길을 스크린에 옮겼다'고 선전했지만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조용필은 음악 이외의 활동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다른 분야에 완전히 관심을 끈 것은 아니다. 그는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크다"며 "뮤지컬 공연의 프로듀서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음악 정규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곡들을 써내고 불러낸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많은 외국 곡들을 듣고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노래를 들으며 작곡이나 편곡 스타일, 악기 편성, 색깔(tone)들을 끊임없이 뜯어보고 연구했지요."
(그는 늘 새로운 음악에 목말라했다. 유행하는 음악을 늘 먼저 깨쳤고, 외국 뮤지션들의 음악을 거의 외우다시피했다. 지금도 그는 음악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군방송(AFN)을 듣는다. 세계 음악의 경향을 놓치면 자신의 길도 잃어버린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전환점을 1970년대, 80년대, 90년대로 분류했다. "70년대는 음악적 체험과 연구를 거듭했던 시절이었다. 80년대는 그간 쌓아온 체험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노래들을 발표했던 시절이었고, 방송 출연을 중단한 90년대부터는 발표한 노래들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생각한다"고 했다.
항상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면서도 그가 지켜온 원칙은 단순했다. "들어서 좋으면 훌륭한 곡"이고 "대중이 좋아하면 훌륭한 가수"라는 것이다.)
-1992년 방송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공연으로 돌아선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입니까?
"역시 무대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방송 활동의 한계를 느꼈고, 방송에 매달리기에는 너무 힘들고 지쳤었습니다. 하지만 슬럼프가 온다고 해서 음악을 놓고 어디론가 숨지 않았고 항상 자신감을 가졌던 점이 오랜 시간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봅니다."
-곡을 만들 때 주로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작업을 하는 편입니까?
"곡은 주로 집에서 만듭니다. 다양한 음악적 체험을 하기 위해 여러 음악을 많이많이 듣는 편이죠. 그러다 만들고 싶은 음악이 떠오르면 미리 메모를 해두기도 합니다."
-음악적으로 가장 힘들었거나 한계를 느꼈던 때는 언제입니까?
"자주 한계를 느낍니다. 곡이 잘 안나오거나 하면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지요. 하지만 끊임없이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음악으로 살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직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
-음악을 한 이래 최고의 날은 언제였습니까?
"최고의 날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그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그에게 아직 최고의 날이 오지 않았다니.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한 이후 셀 수 없는 히트곡을 냈고, 국내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공연과 일본 골든디스크상 수상, 방송사 선정 최다 '최고인기 가수상' 수상, 단독공연 최다 관객(10만명), 국내 가수 최초로 음반판매량 1천만장을 돌파한 그에게 아직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니. 조용필의 음악적 열정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싶다.
환갑을 바라보는 그다. 기자는 지난 2004년 '딥퍼플'의 대구공연을 본 경험이 있다. 하얗게 백발이 서린 보컬 이언 길런은 여전히 열정적이었지만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세월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느꼈다. 아직 그에게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올 한해 그는 24차례나 대형 공연을 펼친다. 서울 대구 창원 광주 부산 등 국내 공연뿐만 아니라 미국 LA 노키아센터, 뉴욕 라디오시티홀 등 해외 공연 일정도 잡혀 있다. 그는 "훗날 노래 부를 힘이 떨어진다면 미련없이 끝낼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시기는 아직 미정이다.)
-40주년 기념 공연의 제목을 ‘더 히스토리: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굶어서 얼어죽더라도 산 정상으로 오르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모든 이의 꿈과 이상입니다. 특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대중이 갖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곡일 것입니다. 이 점을 관객들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싶었습니다."
조용필은 2011년 대구세계육상대회 홍보대사를 맡았다. 그는 대구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주 편안한 도시"라고 했다. "다른 지역 관객들에 비해 아주 열정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6월 14일 대구스타디움에서 무대에 오른다. 40m 높이의 거대한 영상타워와 80m 너비의 무대 등 엄청난 규모다. 공연 스태프와 안전, 장내 정리 인원까지 합치면 5천200여명이 투입될 예정. 이날 콘서트는 '그리운 날들' '추억의 날들' '도전의 날들' '나눔의 날들' '나의 날들' '동행' 등 6개 주제로 압축된다. 40주년이라는 의미에 맞게 '꿈'과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40곡을 부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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