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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양수님의 수고로
감사히 잘 읽어보고 있습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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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7년반 동안의 모진 유랑생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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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생각하면 어릴때 나는 무척 불량스러웠던 것 같다. 아버지가 「못된 짓이나 하고 돌아다닌다. 다른 형제들은 그렇지 않은데 너는 대체 어떻게 된 놈이냐」고 항상 야단쳤고「기타사건」이후는 아예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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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국민학교(경기도 화성군 송산국민학교) 때는 말이 없고 수줍음을 잘탔으며 별로 특출한데가 없었던 나였지만 서울에서의 경동중고시절은 망나니 짓을 꽤나 많이 했다. 내가 살던 정릉(청수장근처)은 큰길을 경계로 북쪽동네는 「탁골승방」 남쪽동네는 「본토」(아이들끼리 통하는 용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불렀는데 이는 불량소년 집단의 명칭이기도 했다. 나는「본토」에 속해 있었고 허구한날「탁골승방」아이들과 패싸움을 하지않으면 우리 구역에 들어온 「이방인」을 혼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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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친구가 누구에게 모질게 매를 맞고 온적이 있었다. 나는 때린 당사자들이 다니는 학교를 찾아가 나오는 아이를 붙들고 비명소리도 못지를 정도로 두들겨 패주고 달아났다. 이 일은 그 다음날 라디오 방송에서 「불량학생들이 K고교에 다니는 L군을 때려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라고 보도까지 됐었다. 물론 경찰에 붙잡히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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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지금처럼 작은 체구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이후 거의 자라질 않았으니 끈풀어진 군화를 신고 교복단추 몇개 끄르고 서면 불량스러운 면으론 꽤「폼」이 났었다. 집마당에는 군대 따블백을 구해 매달아놓고 시간만 나면 두들겨댔고 동네에 있던 합기도 도장에도 나가 싸움 실력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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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장에는 합기도 초단짜리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무척 잘난 체를 했었다. 조용히 불러내 그 아이를 흠씬 패줬고 그 다음날부터 도장출입을 그만뒀다. 초단이 그런정도니 합기도를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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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담배를 배운 것도 이 시절이었다. 지금은 중고등학생들 중에도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반수이상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내 나이에 담배는「불량의 극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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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배운 담배가 지금까지 이어져 하루 3갑씩 피워대고 있다. 집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더욱「못된 놈」으로 취급했다.
>
>이러한 악동 노릇들은 모두 하고 싶었던 음악이 주위의 반대에 부딪쳐 못하게 되자 나타난 행동들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음악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만족감도 얻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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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3월 24일 경동고등학교 졸업식날. 다니던 음악학원에서 만나 함께 음악을 하기로 뜻을 모은 네명의 악동들은 면밀히 세워놓았던 가출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둘째형의 독일제 제도기와 백과사전을 트렁크에 담아 몰래 집을 나섰다. 그렇게 밉게 보이던 집안 식구들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떠난다는 것이 가슴아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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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7년반동안의 모진 유랑생활이 이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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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적지는 미군기지가 있는 경기도 파주의 장팔촌이었다. 미군상대의 나이트클럽이 즐비한 거리로 들어서 두리번거리던 우리들은「DMZ」라는 간판의 가게가 그중 만만해보였다. 그집엔 「밴드모집」이라는 광고가 붙어있었고 들어가 주인을 만나자 별다른 말 없이 「한번 해봐」라고 간단히 응락했다. 숙소는 근처 아주머니 혼자서 하는 하숙집으로 정했다. 그날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비틀즈같이 되자」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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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다음날 하루만에 해고를 당해야했다. 그 무대는 한 스테이지가 45분으로 하루 6차례를 뛰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1백곡이상의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연주할 수 있는 레퍼토리는 「컨트리 보이」「아이워나고홈」「상하이 트위스트」등 고작 열댓곡밖에 되지 않았으니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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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부리」라고 불리던 그곳 지배인은 「그 레퍼토리로 어떻게 무대에 서냐」고 나무랐고 미군들과 함께 놀러왔던 양공주들은 「애들이 와서 무슨 연주를 한다는거야」하며 비아냥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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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실의에 빠졌다. 「이게, 현실이구나」 철모르는 아이들이 매정한 「딴따라」 바닥을 몸으로 겪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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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데뷔 무대라 할 수 있는 경기도 파주 기지촌 「DMZ」클럽에서 하루만에 해고를 당한뒤 우리 네악동은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동안 겪었던 자살소동, 불같이 화를 내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그럴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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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가도 못하고 사흘째 하숙집방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DMZ」의 지배인 「딱부리」가 찾아왔다. 소주와 오징어를 들고온 「딱부리」는 출연은 안시키되 낮에 연습은 하게 해주겠다면서 「야, 늬들 열심히 해라. 힘내라」며 술을 또 사주었다. 돈이 모자라 밥도 제때 먹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무척 안돼 보였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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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집에 돌아가야 이제 뭘하겠느냐,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곳 건달들과 싸운 일을 기화로 철석같았던 맹세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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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집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연습에 열을 올리고있던 어느날 기지촌의 건달 6~7명이 찾아와 「서울서 왔으면 다냐, 신고를 해야할 것 아니냐, 소주값 좀 내놔라」며 시비를 걸었다. 우리가「돈없다」고 버티자 다자고짜 드럼치던 친구의 얼굴을 한방 갈겼다. 겁에 질린 그 친구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렸고 나머지 셋은 흠씬 얻어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텼다. 「두고보자」며 건달들은 돌아갔으나 이 사건으로 서울에서 우리 멤버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세컨기타, 베이스 기타를 맡던 친구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알고보니 드럼치던 친구가 그때 서울로 곧장 올라가 집으로 연락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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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기타였던 나 혼자남아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결국 둘째형이 찾아왔다. 형은 「공부를 하면서 음악해도 되지 않느냐」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배가 고프니 우선 빵과 우유 좀 사달라」고 해놓고 형이 잠시 나간 사이 근처 야산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집에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형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하숙집 주변을 배회하다가 새벽녘에야 몰래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다 지친 형은 가버린 후였다. 방에는 형이 사다놓은 빵과 우유, 그리고 한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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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가고 싶은 길이라면 데려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네가 택한 길이니 고생이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라」는 편지였다. 빵을 물어뜯으며 편지를 보던 나는 눈물이 왈칵솟았다. 오랜만에 느껴본 핏줄의 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후일담이지만 이때 형은 먹을것을 사다달라고 하고선 도망갈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부모님에게 나를 찾지못했다고 알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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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만들었던 우리팀 멤버들은 찾을 길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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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잘 읽어보고 있습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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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7년반 동안의 모진 유랑생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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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생각하면 어릴때 나는 무척 불량스러웠던 것 같다. 아버지가 「못된 짓이나 하고 돌아다닌다. 다른 형제들은 그렇지 않은데 너는 대체 어떻게 된 놈이냐」고 항상 야단쳤고「기타사건」이후는 아예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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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국민학교(경기도 화성군 송산국민학교) 때는 말이 없고 수줍음을 잘탔으며 별로 특출한데가 없었던 나였지만 서울에서의 경동중고시절은 망나니 짓을 꽤나 많이 했다. 내가 살던 정릉(청수장근처)은 큰길을 경계로 북쪽동네는 「탁골승방」 남쪽동네는 「본토」(아이들끼리 통하는 용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불렀는데 이는 불량소년 집단의 명칭이기도 했다. 나는「본토」에 속해 있었고 허구한날「탁골승방」아이들과 패싸움을 하지않으면 우리 구역에 들어온 「이방인」을 혼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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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친구가 누구에게 모질게 매를 맞고 온적이 있었다. 나는 때린 당사자들이 다니는 학교를 찾아가 나오는 아이를 붙들고 비명소리도 못지를 정도로 두들겨 패주고 달아났다. 이 일은 그 다음날 라디오 방송에서 「불량학생들이 K고교에 다니는 L군을 때려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라고 보도까지 됐었다. 물론 경찰에 붙잡히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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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지금처럼 작은 체구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이후 거의 자라질 않았으니 끈풀어진 군화를 신고 교복단추 몇개 끄르고 서면 불량스러운 면으론 꽤「폼」이 났었다. 집마당에는 군대 따블백을 구해 매달아놓고 시간만 나면 두들겨댔고 동네에 있던 합기도 도장에도 나가 싸움 실력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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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장에는 합기도 초단짜리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무척 잘난 체를 했었다. 조용히 불러내 그 아이를 흠씬 패줬고 그 다음날부터 도장출입을 그만뒀다. 초단이 그런정도니 합기도를 배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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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담배를 배운 것도 이 시절이었다. 지금은 중고등학생들 중에도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반수이상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내 나이에 담배는「불량의 극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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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배운 담배가 지금까지 이어져 하루 3갑씩 피워대고 있다. 집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더욱「못된 놈」으로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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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악동 노릇들은 모두 하고 싶었던 음악이 주위의 반대에 부딪쳐 못하게 되자 나타난 행동들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음악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만족감도 얻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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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3월 24일 경동고등학교 졸업식날. 다니던 음악학원에서 만나 함께 음악을 하기로 뜻을 모은 네명의 악동들은 면밀히 세워놓았던 가출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둘째형의 독일제 제도기와 백과사전을 트렁크에 담아 몰래 집을 나섰다. 그렇게 밉게 보이던 집안 식구들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떠난다는 것이 가슴아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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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7년반동안의 모진 유랑생활이 이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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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적지는 미군기지가 있는 경기도 파주의 장팔촌이었다. 미군상대의 나이트클럽이 즐비한 거리로 들어서 두리번거리던 우리들은「DMZ」라는 간판의 가게가 그중 만만해보였다. 그집엔 「밴드모집」이라는 광고가 붙어있었고 들어가 주인을 만나자 별다른 말 없이 「한번 해봐」라고 간단히 응락했다. 숙소는 근처 아주머니 혼자서 하는 하숙집으로 정했다. 그날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비틀즈같이 되자」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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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다음날 하루만에 해고를 당해야했다. 그 무대는 한 스테이지가 45분으로 하루 6차례를 뛰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1백곡이상의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연주할 수 있는 레퍼토리는 「컨트리 보이」「아이워나고홈」「상하이 트위스트」등 고작 열댓곡밖에 되지 않았으니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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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부리」라고 불리던 그곳 지배인은 「그 레퍼토리로 어떻게 무대에 서냐」고 나무랐고 미군들과 함께 놀러왔던 양공주들은 「애들이 와서 무슨 연주를 한다는거야」하며 비아냥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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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실의에 빠졌다. 「이게, 현실이구나」 철모르는 아이들이 매정한 「딴따라」 바닥을 몸으로 겪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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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데뷔 무대라 할 수 있는 경기도 파주 기지촌 「DMZ」클럽에서 하루만에 해고를 당한뒤 우리 네악동은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동안 겪었던 자살소동, 불같이 화를 내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그럴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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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가도 못하고 사흘째 하숙집방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DMZ」의 지배인 「딱부리」가 찾아왔다. 소주와 오징어를 들고온 「딱부리」는 출연은 안시키되 낮에 연습은 하게 해주겠다면서 「야, 늬들 열심히 해라. 힘내라」며 술을 또 사주었다. 돈이 모자라 밥도 제때 먹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무척 안돼 보였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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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집에 돌아가야 이제 뭘하겠느냐,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곳 건달들과 싸운 일을 기화로 철석같았던 맹세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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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집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연습에 열을 올리고있던 어느날 기지촌의 건달 6~7명이 찾아와 「서울서 왔으면 다냐, 신고를 해야할 것 아니냐, 소주값 좀 내놔라」며 시비를 걸었다. 우리가「돈없다」고 버티자 다자고짜 드럼치던 친구의 얼굴을 한방 갈겼다. 겁에 질린 그 친구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렸고 나머지 셋은 흠씬 얻어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텼다. 「두고보자」며 건달들은 돌아갔으나 이 사건으로 서울에서 우리 멤버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세컨기타, 베이스 기타를 맡던 친구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알고보니 드럼치던 친구가 그때 서울로 곧장 올라가 집으로 연락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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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기타였던 나 혼자남아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결국 둘째형이 찾아왔다. 형은 「공부를 하면서 음악해도 되지 않느냐」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배가 고프니 우선 빵과 우유 좀 사달라」고 해놓고 형이 잠시 나간 사이 근처 야산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집에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형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하숙집 주변을 배회하다가 새벽녘에야 몰래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다 지친 형은 가버린 후였다. 방에는 형이 사다놓은 빵과 우유, 그리고 한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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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가고 싶은 길이라면 데려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네가 택한 길이니 고생이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라」는 편지였다. 빵을 물어뜯으며 편지를 보던 나는 눈물이 왈칵솟았다. 오랜만에 느껴본 핏줄의 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후일담이지만 이때 형은 먹을것을 사다달라고 하고선 도망갈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부모님에게 나를 찾지못했다고 알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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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만들었던 우리팀 멤버들은 찾을 길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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