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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앞둔 해방둥이의 삶과 꿈] 20~30代를 감동시킨 작사가 梁仁子

『한 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가난도 알고 풍요도 아는 우리 해방둥이는 축복받은 세대』

해방둥이인 그녀가 쓴 가사가 20∼30代의 가슴을 뒤흔든다. 40년 전에 쓴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여전히 20代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그 겨울의 찻집」과 같은 노래방 최고의 히트곡 작사가 梁仁子씨가 얘기하는 해방둥이 세대의 감수성

李根美 자유기고가 (gosus@dreamwiz.com)  


랩과 록을 좋아하는 20∼30代가 노래방에서 앞다투어 예약하는 곡이 바로 梁仁子(양인자·59) 작사, 金喜甲(김희갑·68) 작곡의 노래이다. 요즘 세대의 감성을 꽉 잡고 있는 梁仁子씨가 해방둥이로 내년이면 환갑이라니, 전혀 뜻밖이었다. 그녀는 童顔(동안)에다 피부가 놀랄 만큼 깨끗했다.
  
  『환갑이 된다는 게 실감이 안 나고 염치가 없는 거 같아요. 철도 덜 들고 모든 게 미숙한데… 문학평론가 김화영 선생이 「한 인생을 성숙시키는 데 60년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60년이 다 되었는 데도 나는 아직 성숙이 안 된 거 같아요』
  
  유복자인 梁仁子씨는 세 살 때 북한 나진에서 越南(월남)하여 한국전쟁을 체험했고,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했고, 암 수술까지 받았다.
  
  광복 전에 유명을 달리한 분들은 다 독립군인 줄 알았다는 梁仁子씨는 나중에 아버지가 病死(병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며 웃었다.
  
  5년 전 암 수술을 받을 때의 심경이 궁금했다.
  
  『유방암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들어가면서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 정도 살았으면 잘 살았어. 열심히 살았어」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300편의 가사를 쓴 작사가 梁仁子씨는 소설가면서 드라마 작가였다. 1974년에 한국문학으로 등단하여 몇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TV 드라마와 라디오 드라마를 800편 썼다. TV 드라마로는 「제3교실」, 라디오 드라마로는 「김자옥의 사랑의 계절」이 대표작이다.
  
  그녀는 부산여고 1학년 때 「돌아온 미소」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부산여중에 다닐 때 숙제로 낸 소설을 선생님께서 묶어서 내보라고 하셔서 책을 내게 되었지요. 주변에서 나를 「한국의 사강」이라고 불렀어요. 사강은 세상에 눈을 뜨고 작품을 썼지만, 나는 그냥 무지몽매한 얘기를 썼어요. 초등학생들의 우정과 질투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오빠가 그 책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어머니와 오빠, 나 우리 세 식구가 그걸로 밥 먹고 살았지요.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家長이었어요. 그 전에는 어머니가 콩나물을 길러서 팔았던 기억이 있어요』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가난을 뼈아프게 느끼며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이 「돈이 없어서 중학교 못 간다」고 할 때 이해가 안 되었어요. 우리 집에도 돈이 없었지만 나는 중학교에 들어갔거든요. 엄마나, 오빠나 공부를 초등학교에서 중단시킨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비가 안 드는 서울師大를 들어가려고 했지만 지리를 잘 몰라 시험 첫 시간에 지각을 하였고, 결국 낙방했다. 소설책을 냈으니 장학금을 줄 거라는 기대로 지원한 학교가 바로 서라벌 예술대학이다. 서라벌藝大 문예창작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등록금은 해결했으나, 차비가 없어서 마포 종점에서 길음동 학교까지 왕복 네 시간을 걸어다녀야 했다. 고등학교 때 낸 소설책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더 이상 팔리지 않아 생활이 다시 어려워졌던 것이다.
  
  
  자존심 하나는 새파란 세대
  
  梁仁子씨는 함께 자란 세대의 감성이 어떠했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서라벌藝大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람으로 任永祚(임영조) 시인, 李東河(이동하) 소설가, 權五云(권오운) 시인, 소설가 盧淳子(노순자), 이런 분들이 있어요. 두 해 선배로는 소설가 金芝娟(김지연)씨가 있지요. 서라벌藝大 학생은 세상에서 배고픈 사람만 끌어 모은 것처럼 다들 어려웠어요.
  
  그런데 모두들 헐벗고 굶주려도 자존심 하나는 새파랬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세대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들 자존심 하나는 청청했지요』
  
  다같이 가난했기 때문인지 가난 때문에 가슴이 아팠던 기억은 없다.
  
  『배고팠던 기억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朴正熙 대통령이 참 고마워요. 내가 배 안 곯고 산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은 건 1979년에 아시아방송작가 모임이 있어서 일본에 갔을 때였어요. 필리핀 작가도 왔었는데 카메라를 하나 사더니 케이스와 봉투, 포장지를 다 싸갖고 가더군요. 그걸 보면서 「필리핀보다는 우리가 낫구나」 하는 걸 그때 느꼈죠』
  
  梁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여학생 잡지 기자가 됐다. 창간멤버로 같이 활동했던 사람이 드라마 작가로 유명한 金秀賢(김수현)씨. 그녀는 1943년생이다.
  
  『소설에 목을 매달고 있으면서 방송은 격이 좀 떨어지는 걸로 생각해서 쳐다보지도 않을 때, 金秀賢씨는 「이 월급 갖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金秀賢씨가 1968년에 라디오 공모에 당선됐지요. 「저 눈밭에 사슴이」라는 작품인데,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할 생각은 없었지요. 金秀賢씨가 「돈은 방송국에 있어 방송국 쪽으로 와」 그러더군요. 「무슨 글쓰는 사람이 돈, 돈하는 거야」 이러다가, 결국 두 손 들고 1974년에 나도 방송국으로 갔지요』
  
  梁仁子씨는 그 해에 소설로도 등단했다. 여기 저기 글을 발표했지만 기성문단에서 작가 대접을 해주지 않자 뒤늦게 문단 데뷔라는 절차를 거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소설가가 된 해에 방송국에서 일하게 됐다.
  
  『그때 우리 집에 TV도 없었어요. 아래층 슈퍼에 가서 TV를 보니까 「부부만세」라는 걸 하는데, 배삼룡, 김희숙, 구봉서, 이순주씨가 나오는 시트콤이더군요. 그 드라마를 보니 「저거 같으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편을 써서 갖고 갔더니 金秀賢씨가 어떤 사람을 만나라고 소개해 줬어요. 작품이 좋다는 반응이 나오면서 계속 하게 되었지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더 열심히 썼다
  
  소설은 몇 편 쓰다가 중단했지만, 드라마 작가로는 참 열심히 활동했다고 했다. 그녀는 드라마를 800편이나 썼지만 늘 아쉬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
  
  『드라마 쓰면서도 「소설을 써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늘 있었죠. 하지만 드라마에 대한 짝사랑이 깊었어요. 점수로 보자면 맨날 80점 언저리였어요. 누구나 보면서 「아 잘 썼어, 좋았어」하고 말하지만 탁치고 나가지를 못했지요.
  
  1991년에 마침 KBS와 계약도 끝났고, 체력의 한계도 느껴져서 드라마 쓰는 걸 그만두었는데 희한하게 그 후에 드라마나 소설에 대한 미련이 다 없어졌어요』
  
  梁仁子씨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더 열심히 드라마를 썼다고 말했다.
  
  『우리 세대는 참 어려웠어요. 눈꼽만큼이라도 다른 재주가 있었으면 다른 거 해보고 싶었지요. 목청이라도 컸으면 시장바닥에 가서 장사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했죠. 세계적인 작가들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90명이 「다른 것을 할 줄 몰라서 글을 썼다」고 했다는데, 나도 그랬어요. 소설, 드라마, 가사 중에서 방송 드라마 쓰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시간에 맞추어야 하고, 늘 새로운 얘기를 해야 하고. 질릴 정도로 많이 썼어요. 원고지에 세로로, 그야말로 아날로그 스타일로 썼지요』
  
  많은 원고를 타이핑해서 디스켓에 담아두었는데도 아직 남은 원고가 몇 박스나 된다며, 그걸 볼 때마다 「내 청춘이 저기 다 들어 있구나」하는 생각에 뭉클해진다고 한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梁仁子씨는 드라마의 주제가 가사를 쓴 것이 계기가 되어 작사가의 길로 들어섰다.
  
  『1985년에 「雨期의 연인」이라는 드라마의 주제가 가사를 썼어요. 1983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인생을 시작하자는 생각에서 썼지요.
  
  「길떠나는 그대에게 무얼 전할까, 허허로운 마음이야 너나 없는데, 가는 그대 서러워라 나는 추워라 남은 세상 울고 사는 것을 용서하시오」
  
  이런 내용이었는데 金喜甲 선생이 그 가사를 보고 마음에 와닿았나봐요. 그 무렵에 金선생은 이혼을 했어요. 드라마 주제가 가사를 써서 PD에게 주면, PD가 그걸 金선생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그 전에 몇 번 작업을 같이 한 셈이지만, 서로 만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金선생이 「雨期의 연인」을 보고 전화했더군요. 같이 작업을 해보자고 하길래 의례적으로 전화드리겠다고 하고 끊었지요. 그때도 金喜甲 선생은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일에 치여서 허덕이고 있는데 두 번째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언제 써가겠다고 약속했지요』
  
  드라마 주제가가 아닌 가요 가사로 처음으로 쓴 것이 혜은이가 부른 「열정」이다.
  
  『본격적으로 심판받는 건 처음이었죠. 내 가사를 읽더니 金선생이 「열심히 곡을 써보겠다」고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大家의 공손한 모습에 많이 놀랐지요』
  
  <안개 속에서 나는 울었어/외로워서 한참을 울었어/사랑하고 싶어서/사랑받고 싶어서>로 시작하는 「열정」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두 사람은 이후 「梁仁子-金喜甲표」 음악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1987년에 결혼했다.
  
  梁仁子씨는 가사를 발표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방송사의 가요대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글을 쓰고 답이 빨리 오는 건 노랫말이에요. 금방 1등에 상을 퍼부어 주니까 성취감은 있었지만 감동은 덜했죠. 오랜 짝사랑 끝에 그런 트로피를 받았으면 감격스러웠을 텐데…』
  
  1999년 11월호 月刊朝鮮이 한국의 현역 작사가, 작곡가 100명을 대상으로 「이 시대 최고의 작사가는 누구」인지 물었을 때 梁仁子씨는 半夜月(반야월), 朴健浩(박건호)씨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당시 응답자들은 梁仁子씨의 가사에 대해 「작은 소재로 가슴을 울린다」, 「가장 문학적인 작사가로 비유법이 기가 막히다」, 「대담한 문학적 시도와 뛰어난 어휘 구사로 우리의 정서를 이끌어 낸다」고 평가했다.
  
  梁仁子씨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가사가 바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처음에 긴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레코드社에서 난색을 표했다. 게다가 당시 유행가는 3분20초에서 3분30초 사이라는 게 불문율이었는데, 무려 6분이나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趙容弼(조용필)씨가 8집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내놓자마자 이 곡은 히트를 쳤고, 지금까지도 趙容弼씨의 대표곡으로 거론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趙容弼씨가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계기가 된 곡이다.
  
  노래방에서 누군가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를 때면 일행 모두가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를 목놓아 외치게 된다. 그런 다음 대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누구야. 누가 이런 가사를 썼어. 가슴을 후벼 파네』
  
  
  20, 30代 감성과 通했다
  
  해방둥이의 20代 감성이 40년 뒤 20代와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梁仁子씨가 24세 때 신춘문예에 낙방한 후 이듬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를 대비하여 컴컴한 다방에서 쓴 가사라고 한다.
  
  『신춘문예에서 떨어지면 가슴이 무너져 내리잖아요. 좌절감과 실의감을 달랠 길 없어서 미리 쓴 당선소감이죠. 1985년에 金선생이 곡을 하나 주었는데 멜로디를 들으면 무한한 공간이 느껴지는데, 가사를 많이 담을 수가 없어요. 얘기 좀 실컷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내레이션을 많이 쓸 수 있도록 곡을 만들어줬어요』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문학성 풍부한 이 가사 때문에 이후 노래 가사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실연한 남녀들은 또 어떤가. 梁仁子씨가 쓴 「큐」를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램프가 켜져 있는 작은 찻집에서 나 홀로/우리의 추억을 태워 버렸다…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 버렸다/그대를 이제는 내가 보낸다… 사랑, 눈 감으면 모르리/사랑, 돌아서면 잊으리/사랑, 내 오늘은 울지만 다시는 울지 않겠다>
  
  이전까지 「사랑은 눈 감아도 떠오른다」는 식이었는데 「눈 감으면 잊혀진다」는 식의 역설적인 표현이 사람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복수보다는 잊는 편을 택하는 넉넉한 마음이 실연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랬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타타타」의 가사도 빼놓을 수 없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한치 앞도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그런 거지 아 하하/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金秀賢씨가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이 노래를 듣고 수소문 끝에 제목을 알아낸 뒤 1992년에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에 삽입하여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곡이다.
  
  梁仁子씨가 가사를 쓴 것 중에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그 겨울의 찻집」이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이른 아침에 그 찻집/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외로움을 마셔요/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홀로 지샌 긴 밤이여/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왜 한숨이 나는걸까/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그대 나의 사랑아>
  
  그동안 발표한 300곡 가운데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10곡 정도라고 한다. 예상 외로 노래방에서 사람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는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라고 한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도 인기 높은 곡이다. 梁仁子씨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히트가 되지 않은 「사랑의 기도」라는 노래이다. 김진영이라는 가수가 불렀다가 히트가 안 되어 여러 가수에게 주었지만 역시 빛을 못 봤다며 안타까워했다.
  
  <천상에 계신 이여/나의 기도 들으소서/그 사람을 사랑하니/그이를 내게 주소서/이 내 마음 진실하니/이 내 사랑 믿으소서>
  
  
  가슴 저미는 가사는 내 삶에서 나온다
  
  가슴 저미는 가사를 쓰는 비결에 대해 梁仁子씨는 『삶이 자양분이 되었겠죠』라고 말했다. 梁仁子씨는 살아오면서 30代가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고 회고했다.
  
  『삶 자체도 그렇고, 감정적으로도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1985년에 金선생을 만나면서부터 편안해졌어요. 대신 金선생을 만난 후 生에 대한 치열함이 없어지니까 작품이 안 돼요. 드라마를 그만 쓰게 된 것에 그 이유도 작용을 했지요. 30代는 눈만 들어도 누군가가 그리웠어요.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좋고, 마음이 많이 흔들렸지요. 그런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글을 집중해서 잘 쓸까 했는데, 정작 없어지니까 글이 안 써졌어요』
  
  梁仁子 선생은 가사 쓰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드라마 쓰는 일은 노동이지만 가사는 노동이 아니에요. 세상을 어느 각도에서 보는가 하는 아이디어가 중요하죠. 예를 들어 실연을 당했을 때 「아프다」가 아니라 「남자가 떠났다」, 「남자가 여자를 잃었구나」라고 생각해 보는 거죠』
  
  梁仁子씨가 작사한 300개의 노랫말에 남편 金喜甲씨가 거의 곡을 붙였다. 그 중에 일부만 趙容弼씨가 작곡을 했다. 다른 사람과 작업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과도 작업을 해봤어요. 金선생은 내 글을 어떻게 가장 베스트로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 구미에 맞게 고칠까 생각하더군요. 심지어 아이템만 뽑아서 자기 작사로 만들려는 일도 있었어요. 趙容弼씨는 내 가사를 잘 수용해서 같이 일하게 되었지요. 趙容弼씨와 함께 한 곡으로는 「서울 서울 서울」이 있어요』
  
  梁仁子씨 부부는 사람들과 만남을 많이 갖지 않는다고 한다.
  
  『둘 다 성격이 조용한 편이에요. 金선생은 창작하는 사람은 외로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달리 친구가 없으니까 둘이 잘 지내죠. 그룹 코리아나하고 가수 홍민씨랑 좀 친하게 지내는 편이에요』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각자의 자녀 다섯을 함께 키웠다는데 梁仁子씨는 『남편이 아이들을 아주 정성껏 길렀다』고 말했다.
  
  梁仁子씨는 1990년대에 계속 가사를 썼지만 최근에 趙容弼씨가 부른 「珍」 외에 다 사장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코리아나, 趙英男 등의 가수가 음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는데, 7개의 CD에 70곡 정도가 아직 빛을 못 보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에 梁仁子, 金喜甲씨는 뮤지컬 「명성왕후」, 「몽유도원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음악 작업을 함께 했다.
  
  『우리가 부부였기 때문에 뮤지컬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기 때문에 그 곡들을 만들 수 있었겠지요. 뮤지컬 가사를 쓸 때 문학, 드라마, 작사를 하면서 살아온 삶이 다 녹아나서 가능했을 겁니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창작뮤지컬로 평가받는 「명성왕후」는 3년간 사전 준비를 한 끝에, 두 달 걸려서 가사를 썼다고 한다.
  
  金喜甲씨가 그동안 작곡한 곡은 3000여 곡에 이른다. 梁仁子씨가 작사한 300여 곡까지 합쳐 두 사람이 벌어들이는 저작권료는 상당한 액수이다. 거기다 세 편의 뮤지컬도 공연수익에 따라 수익을 배분받는다. 梁仁子씨는 남편과 함께 외국의 「지저스 크라이스트」에 버금가는 「부다」에 대한 뮤지컬과 어린이날에 올릴 한국 어린이뮤지컬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위(上)가 없다는 건 쓸쓸한 일
  
  梁仁子씨는 요즘 노래의 가사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너무 말이 안 되는 게 많아요. 자기가 할 일이 있고, 안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싱어송 라이터들이 한두 곡은 괜찮은데, 그 다음엔 같은 얘기를 이리저리 맞추어서 쓰는 경우가 많아요. 남이 쓴 걸 한두 줄 고치는 것이나, 한 편 정도는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문작가가 아니면 가사 쓰기가 힘들어요. 안 써본 사람은 잘 쓸 것처럼 생각하지만, 작가들은 노래 가사처럼 어려운 게 없다고들 하죠』
  
  가사 잘 쓰는 방법을 말해 달라고 하자 梁仁子씨는 평소 시집과 평범한 사람들의 에세이를 많이 읽는다고 했다.
  
  윗세대와의 단절을 부르짖는 일부 젊은이들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위가 없다는 건 언뜻 보면 평등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쳐다 봐야 할 위가 없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 아닐까요. 되고 싶은 목표가 없어지는 거지요. 위를 없애는 건 평등해지는 게 아니에요. 위를 존중해야 꿈이 생기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자꾸 위가 없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죠』
  
  해방둥이 세대의 반성은 없느냐고 묻자 梁仁子씨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일에는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어요. 플러스 속에 마이너스가 있고, 마이너스 안에 플러스가 있어요. 우리가 다 못했어도 못한 만큼 마이너스가 아니라 다른 걸로 채워진 게 있다고 봐요. 아쉬운 건 없어요. 우리는 참 축복받은 세대 같아요. 가난도 알고 풍요도 아는 세대지요. 가난을 모르기 때문에 결핍을 겪지 않아 풍요가 고맙지 않은 것도 불행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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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YONGPIL-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대백과사전&악보집 도서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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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스타 2004-02-20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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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조선 2월호] [환갑 앞둔 해방둥이의 삶과 꿈] 20~30代를 감동시킨 작사가 梁仁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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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스타 2004-02-2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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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천국 주말쯤 복구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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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2004-02-20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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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투데이] 장국영 추모 앨범에 조용필 일본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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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스타 2004-02-1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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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첩 2004. 봄( 집중조명 /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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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사 2004-02-19 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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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 *^^* 장난 한번 했어요 *^^* [수정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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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스타 2004-02-19 1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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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다음 신승훈,서태지 관련 기사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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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t 2004-02-1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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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花)-`장국영 추모음반 참여 곡`을보고<87 일본 튜어 라이브 음반에수록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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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공명 2004-02-19 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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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완전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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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실망! 2004-02-19 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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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페리호 선상의 필님의 비상 DVD (황해上의 울 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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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2004-02-19 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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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메달 수익 음악 영재 발굴에 기부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메달 수익 음악 영재 발굴에 기부 조폐공사, 조용필 50주년 기념 메달 수익금 '음악역 1939' 전달식 (왼쪽부터 조폐공사 류진열 사업 이사, 김성기 가평군수, 음악역 1939 송홍섭 대표) [음악역 1939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가왕' 조용필 50주년 기념 메달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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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폐공사, 조용필 메달 수익금 일부 음악영재 '후원'

조폐공사, 조용필 메달 수익금 일부 음악영재 '후원' 한국조폐공사(사장 조용만)가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음악영재 지원 사업에 후원한다.   공사는 11일 경기도 가평 뮤질빌리지 '음악역 1939'에서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판매 수익금 가운데 2500만원을 가평군과 함께 가평뮤직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