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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남이씨가 세상을 떠나셨네요.

弼心으로 대동단결, 2010-01-30 19: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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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랑도 같이 활동했던 분이고 한국 대중음악사의 굵직굵직한 밴드에서 멋진 베이스 연주를 들려주셨던 분이라 더 안타깝습니다. 생전에 하셨던 인터뷰 중에 형님이 언급된 인터뷰가 있어서 하나 퍼옵니다.

형님이 기타를 치셨던 '드럼드럼드럼 앰프키타 고고 고고 고고 고고'를 들으면서 김대환씨 드럼 엄청 잘 친다구 생각했는데 그 앨범은 김대환씨가 연주한게 아니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들어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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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vol.4/no.24 [20021216]



프론트맨보다 더 중요한 사이드맨, 이남이와 인터뷰
최지선 fust@dreamwiz.com | editor
 
날짜: 2002년 11월 28일
장소: 춘천 한림대병원 앞 커피 숍 비르츠 하우스
참석 및 질문: 신현준, 이용우
정리: 최지선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라고 했던가. 대중 음악계 역시 사정은 똑같다. 그러나 1등을, 주연 역할을 하는 가수들을 빛내게 해준 진짜 주연은 바로 뒤에서 곡을 쓰고 연주하던 이들일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유산을 정리하고자 하는 본 팀의 포커스도, 앞에 나선 가수보다 뒤에 서 있던 연주인, 작곡인들에게 있다. 엽전들, 사랑과 평화 등 굵직한 다수의 그룹 사운드를 거친, 그러나 평생 사이드맨으로 살아왔던("울고 싶어라" 이후에는 솔로 앨범 내기도 했지만) 이남이도 그런 중요한 조연 중 한 사람이다. 노래제목처럼 '한동안 뜸했던' 그가, 2002년 초 이름도 독특한 '철가방 프로젝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우리는 기억해두지 않을 수 없었다. 뒤늦었지만 수소문해 이남이의 동반자 이외수의 연락처를 알아냈고 곧 그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춘천이라는 거리는, 그러나 그와의 조우에 장애물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모자에 예의 수염을 기른 모습이었다. 물론 수염은 희끗희끗하게 변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성장기, 미8군 무대
Q: 기본 인적사항 먼저 여쭙겠습니다. 학창시절 음악과 관련된 활동 사항도 말씀해 주십시오.
- 생년월일은 1948년 8월 3일이고 3남 2녀중 막내입니다. 서울 북아현동에서 살았고, 청계초등학교, 경희중학교, 동대문상고를 나왔어요. 중학교 때부터 브라스 밴드 같은 밴드부 활동을 했고 혼을 맡았죠. 나중에 트럼펫도 조금 했구요.

Q: 베이스는 언제부터 치신 거죠?
- 고교때부터 밴드 활동하면서 그와는 별도로 연습했었죠. 거기서 세컨드 기타 연주했던 사람이 영화배우 이영하(!)입니다. 노래는 영하가 했는데 나머지 멤버는 기억이 안 나네요. 비틀스, 애니멀스 같은 밴드의 이미테이션을 했었죠. 처음 베이스 구입하신 건 고등학교때죠. 제대로 된 베이스는 있었지만 귀했어요. 나중에 쓴 베이스 기타 모델은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모델인데 외국 걸 그대로 쓰지 않았고 인천에 주문제작 하는 데가 있었어요. 거기서 비슷하게 바이올린 모양쯤으로 만들었죠.

Q: 미8군 무대에 서신 건 언제입니까? 그리고 어떤 성격의 쇼였는지요.
- 고교 졸업 후 팀을 조직해서 1년 연습했어요. 이인성 학원에서 멤버를 조직한 건데, 8군쇼에 시험 봐서 A 클라스를 받았어요. 패키지 쇼였죠. 쇼단체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소속은 유왕. (최)헌이도 거기서 시작한 거죠.

Q: 미8군 무대 생활은 얼마나 하셨나요.
- 미8군 생활은 한 1년 했었죠. 그리고 나중에 사랑과 평화 할 때 2-3년 활동한 적이 있죠.

Q: 데블스의 김명길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건데 파라다이스 클럽에도 서섰나요?
- 전국을 다 다녔죠. 파주, 용주골도 섰고. 파주의 파라다이스 클럽도 섰었는데 말하자면 하우스 밴드였죠. 앞서 말한 패키지 쇼에 선 후 몇 달 정도 섰죠.

매력남, 챠밍 가이스 시절
Q: 챠밍 가이스는 어떻게 결성되었죠? 조경수 씨도 계셨나요?
- 미8군 무대에서 나와서 (최)헌이랑 챠밍 가이스라는 그룹을 만든 거죠. 조경수는 다른 팀이었어요. 차도균, 조경수는 가이스 앤 돌스였죠. 챠밍 가이스란 이름은 저희가 지은 건데, 왜 그런지 '가이스' 들어가는 게 유행이었나봐요. 챠밍 가이스, 가이스 앤 돌스, 황규현 씨 계시던 포 가이스처럼 '가이스'란 이름이 들어간 밴드가 많았죠.

Q: 챠밍 가이스 멤버는? 선생님이 리더셨어요?
- 그때는 리더가 없었어요. 특별히 나이 많은 사람이 없었고 같은 나이, 친구끼리 활동했으니까요.멤버는 최헌(보컬, 세컨드 기타), 윤원형(세컨드 기타), 이성(드럼), 이남이(베이스), 그리고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퍼스트 기타가 있었죠.

Q: 서신 무대는 어디였죠?
- 미도파 살롱하고 라틴 쿼터. 라틴 쿼터는 종로 2가 관수동에 있는 음악 살롱으로, 서정길 씨가 운영하던 곳이죠. 당시 라틴 쿼터에는 데블스, 라이더스, 스핑크스, 팝콘스, 쉐그린이 있었죠. 멤버는 오래 되어서 잘 기억이 안나요. 이 그룹들이 전부 색깔이 다르기는 했죠. 외국에 여러 그룹이 있듯이 다 취향도 달랐죠. 데블스가 흑인 음악 전문이었고. 우리도 오티스 레딩 같은 흑인 색깔이 들어간 음악을 했었죠.

Q: 연습은 어디서 하셨나요?
- 주로 클럽에서 연습했죠. 일하던 업소에 악기가 다 있으니까. 미도파 살롱, 라틴 쿼터에 서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매일 일하던 곳은 이태원이었어요. 킹 클럽, 세븐 클럽, 유엔 클럽 같은 데서요. 하루도 안 쉬고 밤에 일했는데, 그걸 기본으로 하고 낮에도 했죠. 그때는 미도파 살롱도 밤엔 캬바레고 낮엔 젊은이들의 생음악 살롱이었으니까요.

Q: 조용필 씨 전기에 보면 1969년도 무렵에 유상윤, 권용남 씨등과 친했다고 하던데요.
- 친했죠. 권용남, 유상윤이 히 화이브에 있었고 나중에 최헌이 히 식스로 스카웃되는거죠. 그래서 같이 오비스 캐빈에 가서 놀기도 했죠. 최이철하고 나하고는 영 에이스도 했는데 오비스 캐빈 2층에서도 섰었어요. 히 화이브는 그곳 3층에서 하고. 그 뒤에는 로얄 호텔에서도 섰죠.

Q: 악보, 편곡, 매니지먼트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요?
- 그때 악보는 없었어요. 전부 다 귀로 듣고 따서 하는 거죠. 이미테이션이니까 편곡 개념은 없다고 볼 수 있죠.

Q: 어떤 복장이었죠? 1971년경에 '단발령'이 있었는데요. 라스트 챤스가 머리가 퍽 길었다고 하던데요. 샴푸 모델할 정도로(웃음).
- 비틀스 영향 때문에 높은 구두 신고 양복들도 많이 입었죠. 머리는 다 길렀죠. 비틀스도 긴 머리라고 인식되었을 때인데 라스트 챤스는 여자머리처럼 길러서 파격이었죠. 그들이 나오면 구경거리였고. 처음으로 머리를 그렇게 길렀으니까요.

Q: 이태원에 있던 여관 같은데서 계셨죠? 오복여관 같은...
- 주로 그랬죠. 나와서 전부 같이 방 얻어서 있었어요. 저녁엔 끝나고 여관에서 자고. 그곳은 유명한 여관이에요. 저녁때 되면 음악인들이 다 모였죠.

Q: 많은 분들이 그때에 대한 추억이 강하신 듯하네요.
- 제일 젊을 때 음악에 미쳐있을 때니까 어떻게 보면 그때 기억이 제일 재미있어요. 그때야 그냥 좋아서 했죠. 일하니까 생활할 정도는 나왔지만 돈 벌 생각은 안했죠.

영 에이스, 김 트리오 - 복잡하면서도 중요한 인맥의 접합지
Q: 군대는 다녀오셨어요?
- 군대는 안갔어요. 논산까지 갔다가 한 15일 있다가 퇴짜맞았죠. 폐가 안 좋은 걸 몰랐었어요. 몸도 많이 말랐었고. 다시 돌아와 한 2-3년 몸 추스리고 시작한 게 김 트리오죠. 그러니까 차밍 가이스 하다가 군대 가려고 했고, 다시 돌아와서 시작한 게 김 트리오죠.

Q: 아이들(idol)은 잠깐 했던 건지요?(주: [아이들과 춤을](성음 DG 가 30, 1971. 1. 25. 발매) 음반에 기록된 아이들의 멤버들은 김영호(색서폰), 김태흥(드럼), 허경(베이스), 최이철(보컬, 기타), 박병무(키보드), 이인호(기타))
- 그때는 난 아니었어요. 그 다음부터 한 거죠.

Q: 영 에이스와 김 트리오를 같이 하신 건가요?
- 영 에이스를 철이(최이철)하고 나하고 둘이 멤버를 만들어서 그때부터 (최이)철하고 인연이 계속된 거에요. 영 에이스 하다가 그 다음에 김 트리오로 이름을 바꿨어요. 최이철은 최이철 대로 영 에이스라고 하고 활동하고 나는 김 트리오로 하고.

Q: 영 에이스 멤버는 어떻게 되나요? 오승근 씨 계실 때가 아니죠? 보컬이 오승근-정한옥-이철호 순인가요? 그리고 홍순백 씨는?
- 오승근은 저보다 전에 있었죠. 철이 오승근 씨하고 했을 거에요. 제가 있을 때 멤버는 최이철(기타), 이남이(베이스), 이철호(보컬, 그때는 퍼커션 안했죠), 김태흥(드럼)이었고. 박병무(오르간)도 잠깐 있었어요. 그리고 정한옥도 중간에 잠깐 있었죠. 솔로싱어도 자주 바뀌고 그랬으니까요. 홍순백 씨는 우리와는 다른 멤버죠.

Q: 영 에이스가 로얄 호텔에서 활동했을 때 멤버는 어떻게 되나요? 옥상에서 안건마 악단과 잼 하셨다던데요.
- 그 멤버죠. 그때가 1973년쯤일거에요. 그때 음악이 참 좋았어요. 우리도 신세대였으니까 신세대 음악중에서는 수준도 있었고 시카고 같은 음악 접하면서 재즈 록 같은 것도 손대고 했으니까. 꼭대기 층에서 연주하던 안건마 씨나 이봉조 씨는 밑으로 내려와서 우리 연주하는데 합류하기도 하고 우리도 좋아서 올라와서 연주하곤 했죠. 말하자면 선배들이 나이트클럽에 놀러온 거에요. 새로운 음악이니까 접할 겸 같이 잼도 하구요.

1971년 5월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조용필 가수왕 수상)에 참가했을 당시 김 트리오의 모습. 왼쪽부터 최이철(g, b), 김대환(d), 조용필(g, b, v).
Q: 그런데 영 에이스와 김 트리오 관계가 헛갈리는데요.
- 그때는 1-2년 사이에 이름이 바뀌어서 고정 그룹이 아니었어요. 멤버는 기본으로 (최이)철랑 나랑 둘이 쭉 계속 했는데, 나머지는 멤버 변동이 심했죠. 그 후 엽전들에서 활동했고 그 다음에는 미8군 무대 들어가서 사랑과 평화를 만든 거죠. 사실 엽전들 이전까지는 (최이)철랑 둘 이외에 나머지 멤버는 계속 변동이 있었고, 김 트리오도 1년 정도밖에 안했으니 오래한 건 아니었죠. 엽전들하면서 실제로 본 궤도에 들어간 거죠. 그때부터 신중현 선배랑은 오래 했었고.

Q: 저희 관심은 멤버 변동인데요. 자연스럽게 바뀐 건지 요즘 말로 매니저가 있어서 멤버를 조율한 건지요.
- 그때는 매니저 개념이 없었죠. 물론 김대환 씨가 매니저 비슷한 일을 하신 거죠. 그 전에는 자기들끼리 나가는 거지, 누군가 비즈니스하는 게 없었죠. 우리가 방송 위주로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업소는 뻔하니까 그냥 주인이 알아서 고용했죠. 엽전들 할 때 박영걸 씨가 매니저를 하셨는데 그분이 그룹에서 처음으로 매니저의 개념을 들여온 거죠. 라스트 챤스 데리고 다니면서 머리 기르게 하고 연습시키면서. 그 형이 그룹 사운드 쪽 매니저로는 효시라 할 수 있죠.

Q: 김 트리오 처음 결성될 때 선생님이 계셨던 건가요?
- 처음에 최이철, 조용필, 김대환 형하고 셋이 있었고. 최이철이 나오고 내가 들어갔죠. 1971년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때는 없었고 그 다음에 들어간 거죠.

Q: 김대환 선생님이 픽업하신 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진 거죠?
- 그때는 서로 누가 누군지 알고 실력이 누가 있는지 전부 아니까. 인구가 많질 않고 모이는 곳이 뻔해서 명동 혹은 주로 이태원이었으니 다 알았죠.

Q: 1971년 부산에서 동아 데포트 4층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하셨다고 하던데?
- XO 고고클럽이라고, 원래 카바레였을텐데 서울에서 고고클럽이 붐을 이루는 초창기에 부산에 처음 생겼던 곳이었어요. 한 6개월 정도 연주했죠.

김대환과 김 트리오의 [앰프기타 고!고!](아세아, AALS-0004, 1972년 3월 10일) 음반. 모두 연주 음악으로 김대환 전속 기념 앨범.
Q: [앰프기타 고!고!] 음반이 있는데요...
- 최이철이 있을 때는 김 트리오가 정규 음반을 낸 적이 없고, 제가 최이철 대신 들어갔을 때 나온 음반인데, 김대환 선생이 음반사에 전속계약을 하면서 낸 음반이죠. 이때 고고가 유행할 때였는데 드럼 솔로, 드럼 위주로 해서 김대환 선생이 드럼을 연주하셨고, 조용필은 기타, 저는 베이스를 친 거죠. 나머지 현악 같은 거는 세션이고. 그렇지만 이 음반 녹음 당시 김대환은 이미 매니저로 한발 물러나 있었고, 실제 드러머는 이성이었죠.

Q: 올갠을 잘 치시던데 세션을 누가 해주었나요?
- 그건 잘 기억이 안나요. 대환이형이 알지 난 잘 몰라요.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녹음전문 세션 맨들을 쓰는 거죠. 김 트리오에 잠시 도한길이 건반 주자로 있었어요. 부산 XO 클럽에서 두 달인가, 잠깐 같이 섰었죠. 하지만 음반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 같네요.

Q: 김 트리오에서 조용필 님이 기타치셨다고 들었는데요.
- 원래 조용필은 기타였어요. 노래하면서 솔로 기타를 쳤죠. 노래도 개성 있게 잘했어요.

Q: "꿈을 꾸리"는 어떤 곡이죠? 아이들 음반에서는 최이철 작곡으로, 조용필 음반에서는 조용필 작곡으로 나와있더라구요.
- 그것도 창작곡이 아니고 외국곡이 아닐까요. 그때는 외국곡을 전부 개사해서 했으니까 아마 이미테이션일텐데... 확실하게 기억이 안 나네요.

Q: 1972년 음반 [조용필 데뷔집: 꿈을 꾸리]에서 선생님이 기타도 치셨나요?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 기타가 두 대던데요. 나일론 기타 같던데...
- 난 기타친 적은 없어요. 베이스만 쳤죠.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내가 참여한 게 아니에요.

Q: 조용필 씨의 "님이여"랑 "하얀 모래의 꿈" 있는 [변혁 작편곡 제1집](오스카, OR1001)에도 참여하신 건가요?
- "님이여" 같은 곡에요.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네요.

Q: 이 음반은 그룹 음반이 아니라 기존의 변혁 씨가 곡을 줘서 취입한 거죠? 기성의 가요계의 음악이구요.
- 그렇죠. 그룹 음반과는 많이 달랐죠. 이처럼 조용필을 가수로 끌어가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김 트리오는 자동으로 해산된 거죠.

Q: 김 트리오가 그렇게 해산된 후 다시 최이철 씨와 영 에이스 했으니 어떻게 보면 영 에이스가 재건된 셈이네요. 원래 영 에이스에서, 김 트리오를 거쳐서 다시 영 에이스를 했으니까요.
- 그렇죠.

영 에이스와 엽전들 사이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노재명 저, 새길, 1994) 122쪽 "초기 엽전들, 1973년, 왼쪽부터 이남이, 김기표, 문영배, 신중현, 최이철"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 사진. 그러나 사실 당사자들은 엽전들 초기 멤버라고 기억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남이에 의하면 신중현은 더 맨과 엽전들 사이, 이남이는 영 에이스와 엽전들 사이에 잠시 거쳐간 중간 단계였다. 김기표도 이름 없이 잠깐 했던 시기였다고 술회하며 최이철 역시 초기 엽전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Q: 사진에 있는 멤버가 초기 엽전들이란 말도 있는데요.
- 이건 (김)기표하고 (최이)철하고 난데, 신중현 선배랑 영 에이스 할 때에요. 나하고 철이하고 영 에이스 활동할 때 (김)기표, 동포(문영배)가 신중현, 이태현, 손학래 등과 더 맨 같이 하다가 신중현 선배하고 헤어지고 우리한테 들어온거죠. 이철호도 있었고 이근수도 있었고. 같은 또랜데 실력이 좋았죠. 항상 함께 하고 싶은 맘이 있었는데 들어왔어요. 그게 아까 말한 로얄 호텔 때죠. 우리 음악이 젊은 음악에서는 독보적이었죠. 그런데 신중현 선배가 팀이 없었어요. 더 맨이 깨지고 나서니까. 그후 타워 호텔에서 비즈니스가 들어와서 신중현 선배가 잠시 낀 거에요. 이름을 아마 '신중현과 영 에이스'인가 했을 거에요. 엽전들은 아니고.

Q: 신중현 선생님은 더 맨과 엽전들 사이, 이남이 선생님은 영 에이스와 엽전들 사이네요. 이 사진의 멤버가 타워 호텔 라인업이란 말씀이죠?
- 나는 남아서 신중현 선배하고 히 화이브의 드러머 권용남과 3인조로 엽전들을 만든 거죠. 그러면서 기존의 영 에이스는 해산이 된 거고, 그리고 김기표와 동포가 검은 나비(주: 검은 나비의 [Album Vol. 1](킹 프로덕션/지구 KLG-7002, 1974)에 의하면 라인 업은 최헌(리드 보컬) 김영균(보컬, 키보드) 이태현(베이스 기타) 손학래(색스폰, 오보에, 작곡자, 리더) 김인섭(트럼펫) 김성철(예명 김기표, 기타, 키보드) 문영배(드럼) 조영철(엔지니어))를 만들었고, 최이철은 영 에이스로 독립을 했고. 아마 영 에이스에서 허경이 했을 거에요. 철이랑 어려서부터 친했으니까. 이 둘은 아이들 멤버들이고.

Q: 문영배, 김태흥, 김대환 선생님 등의 드러머와 호흡을 맞추셨는데 각각의 스타일이 보시기에 어땠어요? 연주하시기 편했던 드러머는? 그리고 문영배 선생님은 왜 동포라고 했죠?
- 다 개성이 달랐죠. 동포가 녹음실에서 세션 맨도 많이 하고 판도 많이 내서 비트나 블루스 쪽에선 아주 잘 했고 디스코 나오고 고고 쪽으로 오면서는 태흥이가 잘 했죠. 김대환 선생은 그룹에서 했지만 참 화려한 드럼이에요. 솔로적인 개성이 강했죠. 대환이 형하고는 오래 같이한 게 아니고 실질적으로 동포하고 태흥이하고는 같이 했으니까 아무래도 둘이 제일 편했겠죠. 문영배가 배에 살이 쪄서 포동포동했어요. (웃음) 말을 거꾸로 해서 부른 거였죠.

Q: 엽전들 결성 직전에 재즈 하셨다고 하던데요? 이남이, 권용남, 김명곤, 유복성, 최이철, 김광길, 변영택과 함께 재즈를 했고, 1973년 성음 제작소에서 [김준(김명곤 작품집)] 음반이 제작되었다고...
- (김)준이 형은 (김)명곤이하고 가까워서 남산 공개홀에서 준이 형 콘서트 할 때도 알앤비를 명곤이가 많이 했죠. 반주도 우리가 하고. 참여한 멤버는 사랑과 평화 전신인 서울 나그네 멤버들이죠. 최이철, 이남이, 키보드 김명곤, 드럼 김태흥. 나팔 같은 건 없었고.

Q: 김준 씨 음반에 참여하신 김광길, 김영근, 변승택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지 기억나세요?
- 그냥 세션맨들이었죠. 포지션은 생각 안나요. 변승택은 오르간 쪽이었고.

엽전들 - 한국적인 록을 향하여
엽전들 (1집) 비매품 초판 [저여인/나는 몰라(음반 타이틀에 4곡 들어감. 리뷰 참조)](지구 JLS-120891, 19740825): 사진의 인물들은 이남이, 신중현, 김호식. 사진 속의 맨 위 인물은 김호식으로 실제 음반 속의 드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Q: 창작곡은 염두에 안 두었던 것 같아요?
- 그땐 그룹들은 다 그랬어요. 엽전들과 사랑과 평화 때 좀 창작적인 면에 관심을 두었죠.

Q: 어떻게 신중현 선생님과 일하시게 된 건가요.
- 신중현 선배님과는 많은 뮤지션들이 한번 같이 해보고 싶어했죠. 신중현 선배의 베이스 라인이 좋았어요. 검은 나비의 베이스 이태현 형이 신중현 선배와 오래 했었고, 제가 십 몇 년을 중간에 헤어졌다 만났다 하면서 오래 활동했죠. 신중현 선배님이 한국적 록을 만드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선두적이었죠. 나름대로 한국 가요의 색깔을 만들었던 김희갑 씨와 양대 산맥이었었어요. 대중적인 곡은 김희갑 씨가 많이 썼고 현대적인 곡은 신중현 선배가 많이 썼고. 사실 엽전들 전에 김추자 "님 먼곳에" "커피 한 잔" 이런 류의 노래들은 많았지만, 직접 노래를 하고 가장 한국적인 록을 시도한 건 엽전들 때부터죠. 이런 테마는 나하고 둘이 호텔방 얻어놓고 둘이 곡 만들고 연습하면서 만들어 나갔죠. 타워 호텔 일 하면서 밤에는 그곳의 방 하나 얻어놓고 한 거죠.

Q: 그전에는 신중현 선생님이 작곡 편곡 다 하셔서 악보를 다 만들어 주셨다고 하던데요. 이태현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더 맨 때도 그랬구요.
- 그렇죠. 완전히 악보로 만들었죠. 하지만 엽전들 하고 세 나그네 때부터는 악보 없이 그때그때 만들고 연습 다 된 걸 녹음하는 방식이었어요. 악보를 따로 그린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었죠. 만들어가는 그 과정을 같이 한 거죠. 세 나그네 때도 그런 식으로 차 타고 돌아다니면서 만든 거죠.

Q: 호텔 방에 앰프는 들고 가셨나요?
- 기타는 그냥 그대로 하고, 베이스를 통기타에 네 줄짜리로 만들어서 했죠.

Q: 덩키스의 김호식 씨가 잠깐 있으셨죠? 안건마 악단에 계셨다고 하던데요.
- 맨 처음에는 호식이와 엽전들 음반을 녹음했어요. 녹음은 김호식이 하고 나중에 권용남이 들어온 거죠. 나중 음반은 권용남이 들어와서 다시 녹음을 했는데 김호식이 한 게 훨씬 깨끗하더라구요. 김호식은 그 때 완전 세션맨으로 드럼 제일 잘 친다고 이름이 나있었던 상태였어요. 그땐 왔다갔다 했으니까. 안건마 악단에도 있었을 거예요. 어니언스 음반도 하고. 드럼이 아주 좋았죠. 엽전들 1집 커버에 나온 이 인물이 김호식이죠.

Q: 신중현 선생님이 킹박(박성배) 선생님이랑 하시다가 지구로 가신 거잖아요. 말하자면 큰 음반사로 가신 건데요. 어떤 이유에서였죠? 신문 자료에 보니 당시 계약금이 150만원이었다던데요. 당시로서는 큰 돈인데...
- 물질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킹박에서 대박을 몇 곡 터뜨려서 신중현 선배가 킹박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계약금 문제 같은 건 잘 모르겠어요.

Q: (엽전들 1집) 재판은 러닝타임 줄이고 다시 한 건데 당시 매니저인 박영걸 선생님이 관여한 건가요?
- 요구는 했는지 모르지만 그때 음악하는 우리들로썬 신중현 선배가 해나가는 거여서 자존심 때문에 줄이거나 하진 않았어요. 어떤 요구는 했을지 몰라도 음악에 관여는 못했어요.

Q: 초판이 잘 안돼서 다시 녹음한 거라 볼 수 있나요? 아니면 어디서 보니 지구의 임정 사장님이 초판이 잘 안 팔린다고 못내겠다고 하셨는데 신중현 선생님이 내야한다고 주장을 하셔서 몇 장만 홍보용으로 찍어 신문사나 방송사에 돌렸다던데요. 그런데 돌린 음반들을 방송사에서 틀어보니 인기가 좋아서 다시 찍어줄 테니까 다시 해보라고 해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 그 내막은 잘 모르겠어요.

Q: 권용남 선생님이 처음에 히 화이브하셨고, 그후 히 식스가 김홍탁 씨가 미국으로 가면서 히 식스의 남은 멤버들이 히 화이브로 활동할 때 계셨는데요. 그럼 김준 음반 녹음할 때랑 어떤 것이 먼저죠?
- 김준 음반이 먼저죠. 그 다음에 히 화이브하다가 엽전들로 들어왔구요.

Q: 한대수 선생님 "물 좀 주소"에 권용남 선생님이 참여하셨는데요.
- 히 화이브가 오비스 캐빈에서 활동할 때 2층에 통기타 위주의 무대가 있었으니까 아마 연계돼서 세션에 참여했을 거에요. 이건 사랑과 평화 때 얘기인데요. 그땐 세션비가 상당히 괜찮았어요. 주로 전문적으로 세션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세션 하면 최고의 플레이어가 되니까 다른 거보다 세션비가 괜찮았죠. 아무나 한 건 아니지만 우리가 세션을 꽤 해줬어요. 준이 형꺼 주로 했었고, 조영남 씨가 미국에서 왔을 때 '귀국 리사이틀'인가 해줬죠. 미국에 쭉 있다가 이장희 씨가 판 내면서 "제비"로 히트를 했는데 그때 세션을 사랑과 평화가 다 한 거죠. 투 에이스도 해줬는데 어떤 음반인지 구체적으로는 기억 안나네요. 투 에이스와 영 에이스가 서로 알고 지냈는데 세션 해달라고 해서 참여했죠. 임창제의 "비"라는 노래에도 참여했어요.

Q: 엽전들 때 시민회관이 없을 땐데 리사이틀이라고 한 단독 공연은 하셨나요?
- 그때는 그룹들은 리사이틀 같은 게 없었고 주무대가 나이트클럽이었죠. 단독공연 같은 건 없었어요. 유일한 곳인 시민회관 사라지면서 없어진 거죠. 그때가 제일 전성기였었고. 극장쇼는 엽전들 때 했었고 사랑과 평화는 최봉호 씨가 우리 매니저했을 때 매니저로 전국 다니면서 사랑과 평화 콘서트를 했던 거죠. 그때 나미하고 만난 거에요. (이)주일이 형은 우리 무대에서 데뷔하고 그 형이 방송 나가면서 완전히 떴었죠. 사담이지만 주일이형이 하춘화 쇼 같은 거 다녔지만 우리는 주로 대학생이나 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팬이 많았거든요.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처음 시작하는데 주일이 형을 사회자로 쓰라고 했지만 말도 안된다고 다 반대했죠. 결국 설득해서 주일이 형이 사회를 보게 되었죠. 그때는 제일 인기 좋았던 사회자가 고영수였어요. 그래서 고영수하고 주일이형하고 둘이 같이 사회봤죠.

Q: 엽전들 음반은 더빙을 많이한 것 같던데요.
- 많이 한 건 아네요. 한번씩이요. 그때 엽전 녹음은 치면서 직접 한 거에요. 노래도 같이 부르고. 기타만 한번 더빙하고. 엽전들 다음에 세 나그네에서 멀티를 좀 했죠. 그때도 노래하면서 라이브하고 기타 한번 더 한 거였죠.

Q: 엽전들 2집에서 뻣뻣하게 서 있는 사진은?
- 하나의 풍자, 조롱이죠. '지금이 왜정시대냐' 하는 식의 반발이죠.

문제작 "선녀" - 한국적 싸이키델릭을 향하여
"선녀"가 들어있는 엽전들 데모.
Q: 문제의 음반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선녀" 있는 음반의 녹음 시기가 언제죠?
- 타워 호텔 있으면서 한 거죠. 그때는 플루트의 왕준기라고 있었고. 처음 시작한 게 "미인"이었으니까 "미인" 전은 아니고 그 다음에 한 거죠.

Q: 이펙트는 어떻게 하신 거죠?
- 녹음실 기계로 만들어낸 거죠. 음향효과로 리버브 넣고...

Q: 기타는 플렌저 쓰신 거죠? 신중현 선생님은 이펙트를 잘 안 쓰시는 것 같던데요.
- 플렌저 걸고 했을 거에요. 신중현 선배도 지미 핸드릭스를 좋아해서 이펙트를 썼어요.

Q: 놀라운 음반인데 발표가 안됐습니다. 그래서 곡 제목을 다 알 수 없는데요. 2집 녹음할 때 같이 하신 겁니까?
- 네. 그때 "뭉치자" 같은 곡 할 때 같이 한 것 같은데... 이상하네요. 다 공연 무대나 라이브클럽에서 다 했었는데. (노래를 들으며) 이 곡은 "너만보면 좋더라"였나? 곡 제목은 기억할 수가 없네요. 신중현 선배가 아실텐데...

Q: 음악이 많이 다르던데요. 2집은 건전가요 같구요.
-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하도 주목을 받고 있어서 건전성으로 피해가볼까 한 거죠.

Q음악이 사이키델릭한데 참고했던 음악은?
- 전부다 사이키델릭하게 시도를 한 거죠. 한국적 사이키델릭이랄까요. 신중현 선배가 지미 헨드릭스를 좋아했죠. 그 시대 자체가 사이키델릭한 시대였었으니까 그런 음악이 많이 나왔었죠.

Q: TV 출연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금주의 인기가요'가 기억나는데요.
- '금주의 인기가요'보다는 아침방송이었는데 TBC였나보다. 패널이랑 대중들이 나와서 음악을 들려주고 토론하는데 인형 갖고 벙거지 쓰고 하는 저희를 두고 찬반 양론 비슷하게 했던 게 기억이 나요. 저게 무슨 노래냐 하는 쪽도 있었고 신선하다는 쪽도 있었고.

서울 나그네 - 사랑과 평화의 전신
서울 나그네의 유일한 앨범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오아시스, OL-1869), 1976년 12월. 서울 나그네의 멤버는 김명곤(키보드&보컬), 최이철(리드기타&보컬), 김태흥(드럼&보컬), 이철호(퍼커션&보컬), 이남이(베이스&보컬)이다

Q: 영 에이스가 서울 나그네가 된 거고 그 중간에 김명곤 씨가 들어온 거네요. 영 에이스에서 김명곤 씨가 들어와서 서울 나그네가 된 거죠? 서울 나그네를 김명곤 씨, 최이철 씨와 같이 하셨다던데요.
- 그렇죠. 신중현 선배랑 활동하다가 대마초 걸렸죠. 그래서 둘 다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신중현 선배도 그때 은둔했고. 그때 전 사랑과 평화의 전신인 멤버들을 모아서 미8군 무대로 새롭게 들어간 거에요. 미8군 쪽은 대마초와는 관계가 없었어요. 그때 우리가 영 에이스라고 만들었던 팀 멤버가 다시 모여서 미8군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거죠. 그때 음반을 녹음까지 했는데 대마초가 안풀린 상태였던 거에요. 그래서 전 거기서 나와서 신중현 선배하고 세 나그네를 만든 거죠.

Q: 대마초 사건이 1975년 12월이고 76년에 서울 나그네 캐롤 음반에 참여하셨던데요.
- 서울 나그네는 사랑과 평화 전신이에요. 이름만 서울 나그네고, 그때 크리스마스 캐롤 음악을 우리 나름대로 알앤비 스타일로 냈던 거에요. 시판될 때 서울 나그네로 했었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는 사랑과 평화로 지어서 활동했지요. 미8군 무대에서는 그룹명을 하드 록이라고 했었고 음반은 한글로 서울 나그네로 냈었죠.

Q: 이 당시 키보드 치신 김명곤 선생님하고 더 맨의 키보드 김기표 선생님, 두 분의 스타일 차이는?
- 명곤이는 그룹 출신은 아니고 대구에서 혼자 피아노 치고 악단의 주자였어요. 우리는 이름이 있는 팀이었었고. 그런데 우리가 대구 갔을 때 한 하숙집에 있으면서 클럽에서 음악하는 걸 봤는데 잘하더라구요. 그때는 비트나 그룹적인 냄새는 없지만 실력이 좋았어요. 곧 친해져서 픽업해 서울로 올라왔죠. 명곤이는 애드립이나 멜로디적인 면이 좋았죠. 클래시컬하달까, 악단 출신이니까. 기표는 리듬감이 아주 좋았어요. 그때 기표가 원래 키보드보다 기타를 잘 쳤죠. 음악이 제일 좋을 때가 기표 있던 영 에이스 때였죠. 그룹에서 신디사이저 개념의 무그라던가 샘플링 같은 걸 우리가 처음으로 시도했어요. 우리가 처음으로 올맨 브라더스 음악을 투 기타로 시도했죠. 투 건반이 필요할 땐 투 건반 시스템으로 연주하고, 투 기타로 나갈 땐 기표가 최이철하고 투 기타가 되었죠. 그건 그때까지 한국에선 전혀 보지 못한 스타일이었죠. 중간에 철호가 베이스 치면 내가 트럼펫도 불었는데, 명곤이가 색소폰도 잘 부니까 둘이 같이 부는 거죠. 멤버는 여섯인데 굉장히 음악적으로 화려하고 악기도 바꾸며 연주했어요. 아쉽게도 녹음해 둔 건 없네요.

Q: 대마초 때는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요?
- 고생이라기보다는 완전히 그것 때문에 피본거죠. 해금은 한 3년 뒤였죠. 그때 나는 들어가진 않았었어요. 삼척 산골에 쌍용양회 자제과에 매부가 있었는데 거기로 수배를 피해 피신을 간 거죠. 그때 기억나는 게 사택에서 내가 살았는데 아주 산골도 그런 산골이 없었죠. 사택에 있다가 답답하면 가끔 시내로 한참 걸어나와 포장마차 같은 데서 혼자 소주를 마셨죠. 그때는 한참 유명할 때지만 TV에 계속 나오는 상태가 아니고 곧 피신했으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얼굴은 잘 모르죠. 그런데 옆에 술마시는 사람들이 신중현과 엽전들이 대마초 때문에 다 잡혀 들어갔다더라, 그런데 벙거지쓴 이남이만 못 잡아서 수배가 내렸다고 바로 옆에서 그러는 거에요. 내가 삼척에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하죠. 그래도 얼굴 알아볼까 해서 먹다 말고 돈 내고 바로 나왔죠.

Q: 1980년에도 사랑과 평화가 대마초에 걸렸죠?
- 그때도 한번 걸렸죠. 나도 같이 걸렸고. 싹 다 걸렸죠.

세 나그네를 경유하다
세 나그네 음반 [세 나그네](서라벌 SB-7786, 19831125). 1982년 겨울경부터 석 달 동안 전국을 떠돌며 음악 여행을 하면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Q: 1982년에 서일구와 선생님이 세 나그네 활동으로 음반 하나 내시고, 1984년에 신중현과 뮤직파워 후기에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뮤직파워 메들리 음반 녹음한 기억 안 나시나요? 세 나그네 하다 깨지고 1980년에 전기 뮤직파워 말고 후기 뮤직파워에서 잠깐 활동하시신 게 아닌가요?(주: 후기 뮤직파워는 1984년에 재결성되었다. 신중현(기타, 보컬), 이수용·이남이(베이스), 원치욱·배수연(드럼), 최구희·김광석(리듬 기타), 김형권·김용년(무그), 김문숙·박점미(노래))
- 난 뮤직파워는 안 했어요. 뮤직파워 때는 신중현 선배하고 나하고 굉장히 가까웠기 때문에 음악 끝나면 가서 맨날 만나고 합숙하는데도 같이 있고 그랬지, 뮤직파워에 참여는 안했어요.

Q: 이수용, 원치욱, 배수연, 최구희, 김광석, 김형권, 김용년, 김문숙 박점미 같은 분들이랑 같이 안하셨다구요?
- 난 안했어요. 참여는 안했지만 맨날 만나서 그 사람들도 다 알죠.

Q: 서라벌에서 낸 음반은 다 킹박과 한 거죠?
- 네. 엽전들은 지구에서 냈고, 세 나그네 때는 다시 킹박과 손 잡았고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했죠.

Q: 업소가 줄어들었을텐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어디서 연주하셨죠?
- 어려움이 많았죠. 업소도 없었고 음악도 디스코 위주로 바뀌었죠. 그래서 우리는 그때 부산이나 지방으로 가서 젊은애들 디스코 클럽 같은데서 일하면서 세 나그네를 만들어낸 거에요. 서면쪽에 젊은애들 많이 모이는.. 업소이름은 잘 기억 안나고.. 호텔 나이트클럽은 아니고 시장 같은 곳, 무교동에서 막걸리 팔면서 하는 그런 클럽이었었어요.

Q: 최고의 록 밴든데 우울하셨을 것 같네요?
- 그때는 전 나이도 젊었어요. 나는 그런 거 잘 못 느꼈어요. 신중현 선배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는데 타워 호텔에서 일할 때 마흔쯤 됐으니까... 음악에 항상 미치다시피 좋아했으니까 일하는 자체만으로도 좋고 대마초가 풀리면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 다시 새로운 음악 만들어서 나름대로 포커스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랄까? 30대였으니까 비굴하거나 우울하지는 않았어요. 음악을 계속 해나가면서 사랑과 평화도 만들어 나가고 8군에서 일을 계속 했으니까요.

Q: 신중현 선생님은 엽전들 때는 최고 인기였는데 뮤직파워 때는 엽전들 때 같은 반응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반면 조용필 선생님은 록 뮤지션이 아니라 가수로 뜨고
- 엽전들 때가 아주 결정적이었죠. 그때는 음악적인 것을 굉장히 많이 생각했어요.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떴지만 그 곡은 록적이라기보다는 대중성이 가미된 것이었고, 신세대쪽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대중적인 뽕짝 스타일의 노래죠.

Q: 조용필 선생님도 그룹사운드 출신이잖아요. 1980년대에 뜨셨는데 같이 활동 하셨던 분이 어떻게 보셨는지요?
- 배신이라고까지는 생각 안했어요. 그때 기표랑 제가 서울 앙상블이라는 팀을 만들어서 명동쪽에서 음악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용필이가 찾아왔더라구요. 처음 일본 진출하기 전이었어요. 처음이라 떨리는 것도 있었고 나랑 잘 알고 내가 쇼맨쉽도 있고 하니 나랑 같이 가서 첫 공연을 하자고 찾아왔었어요. 그때 위대한 탄생이 생긴 건데 그 팀을 만들려던 차였죠. 조용필도 그룹 출신이니까 그룹이 아닌 악단의 사운드는 영 취향에 안맞았을 거에요. 그래서 그룹 사운드 조직하면서 일본에 같이 가서 하자고 상의를 하러 나한테 왔던 거죠. 그런데 나는 기표, 동포랑 같이 6개월인가 1년간 노력하면서 활동하는 팀이 있는데 나만 혼자 빠질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냥 서울 앙상블 하겠다 했죠. 물론 그때 생각으론 생각이 전혀 없던 건 아니죠. 용필이가 부탁을 하는 데다가 처음 있는 일본진출인데, 괜찮은 밴드가 같이 가서 하는 게 국위선양이 될 수도 있고, 게다가 그때는 외국 맘대로 다니던 시절도 아니니까. 그래도 나만 혼자 쏙 빠져서 할 수는 없더라고요.

사랑과 평화 - 훵키한 음악으로. . .
사랑과 평화의 3집 [노래는 숲에 흐르고/울고 싶어라](지구, JLS-1202154, 198801). 최이철(리드 기타, 리드 보컬, 하모니카), 한정호(키보드), 박성식(피아노), 장기호(베이스, 보컬), 이병일(드럼). 이남이가 노래한 "울고 싶어라"가 뜬 음반.

Q: 사랑과 평화에서 선생님의 역할은? 이탈리아인(Sarvo) 베이스가 따로 있었는데요?
- 철이가 중학교때부터 객지생활하면서 외롭게 살아서인지 항상 나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음악적으로도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었죠. 자체 구심점은 기타나 철이지만 이름도 내가 지었고 실질적인 모체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제가 같이 했죠. 게다가 잘못 알려진 게 있어요. 최고 전성기때 만들었던 음반들,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어머님의 자장가" "울고 싶어라"는 사실 다 내가 연주하고 만든 곡이에요. 이탈리아인은 일할 때만 했고. 사랑과 평화 때 내가 대마초로 걸려있으니까 이남이라는 이름 자체를 못쓴 거죠. 그래서 다른 이름 쓰라고 한 거죠. "어머님의 자장가"와 2집에 실린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나 "장미" 등의 곡을 쓴 이장희도 대마초에 걸려서 다른 이름을 쓴 거고. 이장희는 무갠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때 만났어요. 어쨌거나 당시 TBC에는 '가요톱7'이라고 있었는데 1위에서 3위까지 우리 1집이 휩쓸었죠.

Q: 선생님이 쇼맨쉽의 대가였다던데요?
- 굉장히 화려한 베이스였죠. 베이스 주자들은 움직이지 않을 땐데 나는 막 뛰어다니고 별안간 앰프위로 올라가고 밑으로 내려오고 그랬죠. 철이도 얌전하게 기타치는 편이고 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활동적인 무대매너 쪽으로는 (이)철호하고 둘이 다 한 거죠.

Q: 1985년경 용인에서 '산아 강아'라는 까페 하시면서 농사 지으셨다던데...
- 그때 대마초 걸리고 사랑과 평화를 나왔어요. 나와서 텀이 좀 있었죠. 그전에는 나이트클럽에서도 분위기 자체가 반은 라이브 공연 하는 식으로, 춤추면서 구경하고 이런 식이었지 악단 따로, 손님 따로가 아니었죠. 하나의 공연장 분위긴데 술먹고 춤추면서 좋아하고... 그런데 나와보니 디스코판으로 바뀌어서 완전히 악단 개념으로, 손님 춤추는데 발 맞추는 밴드로 전락이 되버리니까 그땐 음악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죠.

Q: 세션같은 걸 하실 생각은 없으셨어요?
- 세션 일이라는 게 일이 있으면 하는 거지 항상 있는 게 아니죠. 생각한 것도 여러 가지가 있고, 중광 스님하고 상당히 가깝게 지낼 때니까 용인으로 가서 35살에 들어가서 한 5년 있었죠. '산아 강아' 까페는 용인의 외대 앞에 차려놨지만 맨날 내가 술먹고, 심심하면 황금종(골든벨) 쳐서 내가 다 술값내니 장사가 되겠어요? 6개월만에 들어먹었죠.(웃음)

Q: 그리고 "울고 싶어라" 하신 거죠? 굉장히 히트했는데요.
- 네. 철이가 쭉 노래했고 "한동안 뜸했었지" 같은 대단한 노래를 불렀는데 그 판에서만 내가 한 곡 부른 게 왕창 떠버렸죠.

'한동안 뜸하다' 철가방 프로젝트로...
Q: 최이철 선생님은 한쪽 귀가 안들리시다던데요. 앰프 옆에 있으니까.
- 나는 그런 건 없어요. 그런데 조용한 곳에 있으면 윙~ 하는 이명은 조금 있죠. 그건 뮤지션 대부분 다 갖고 있어요.

Q: 심근경색으로 수술하신 어떠세요?
- 괜찮아요. 한 4년 됐죠.

최근에 발표한 [철가방을 위하여](드림비트, 2002년 1월), 철가방 프로젝트는 현재 이남이(보컬 & 장고), 김성호(보컬 & 기타), 허남일(보컬 & 하모니카 & 북), 박광호(보컬 & 기타), 엄태환(기타), 정병걸(베이스), 그리고 딸인 이단비(보컬)로 이루어져 있다.

Q: 춘천에 '레인보우 이남이 노래방'이 오픈했다고 들었는데요.
- 그건 이남이 노래방이 아니고, 2년 전에 산 속에서 한 10년만에 나왔죠. 1992년도 중광 스님하고 둘이 산속에 들어가서 음악세계와도 완전히 끊고 전화연락 번호도 없이 지냈죠. 그런데 (이)외수형하고 둘이 의형제로 계속 오래 지내왔어요. 춘천에서 통기타 치면서 아마추어로 음악하는 춘천 음악인들이 있는데 외수 형 집에 왔다갔다 하다가 제가 여기 오면서 그들을 알릴 수 없을까 해서 시작하게 된 게 지금 하는 철가방 프로젝트인거죠.

Q: 철가방 프로젝트는 음반 많이 나가셨어요?
- 그렇게 많이 나가진 않고 우리가 공연에 들고 다니면서 한 3천장 팔았어요. 춘천, 강릉, 속초, 주문진을 비롯해서 전라도 등 전국에 다니면서 공연과 축제에도 참여했죠. 거기서 한시간 정도 노래 다 들려주고 '이 CD에 오늘 한 곡 다 들어있다'고 하면 의외로 50장, 많으면 백장 나가죠.

Q: 어떤 곡이 인기가 있나요?
- 취향이 다 달라요. "나이만 먹었습니다"도 있고 "인생"도 있고 어린 쪽은 "철가방을 위하여"를 선호하고. 곡 자체에 대한 취향이 다르더라고요.

Q: 멤버들은 젊은 분들인가요?
- 21살부터 55살까지 있죠. 내 딸은 강원대 2학년생 스물 한 살이고 엄태환은 이제 스물일곱살, 김성호가 마흔 됐고.

Q: 이곳 어떤 데서 연주를 하시죠?
- 주로 까페죠. 이곳에는 나름대로 음악인의 토양이 있어요. 그래서 외수 형이 한 7곡 쓰고 우리들이 만들었는데 내 이름 안 쓰고 그냥 철가방 프로젝트로 해서 뒤에서 후원하면서 나름대로 알려 보려고 현재 뛰어다니고 있는 상태죠. 방송 출연도 시작했어요. 요새 중견가수들도 음반내지만 한번 TV에 출연하기도 힘들잖아요. 우리는 그래도 큰 프로그램에 다 출연했어요. 어떻게 보면 최장수 그런 프로그램에 라이브 나간 게 아닐까요. 윤도현의 러브레터나 수요 예술무대라던가 임성훈 프로, 박상원 프로. 대구 MBC 텔레 콘서트라는 반주까지 라이브하는 프로, 인천 TV, 울산까지 여기저기 상당히 많은 활동을 한 편이에요.

Q: 옛날에 하셨던 음악과는 다르신 것 같아요. 젊으셨을 적 음악이 더 칙칙하고, 지금 음악이 더 경쾌하달까요. 지향하는 음악은 어떤 것인지요.
- 세월이 지났으니 좀 달라졌죠. 이번에 첫판이지만 나름대로 색깔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름의 의미 있는 가사에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세대차이 별로 느끼지 않고 가족들이 들을 수 있는 그런 음악을 한번 지향해봤어요. 힘들지만 계속 해볼 생각이고 그래서 지금 2집 준비를 하고 있어요. 사실 음악이란 게 테크닉, 기술적인 면으로만 발달하는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인 면도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통기타 하나 갖고 노래할 수도 있잖아요. 음악은 스타일이 여러 가지니까. 최첨단의 세련미가 있는 음악을 평생 해왔는데 이제는 그런 거보다 촌스러운 게 점점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촌스러움이라는 게 자유도 있고 순진함도 있지 않은가... 이제 나이도 들어 이런 걸 축으로 한번 해보려는 거죠. 사실 음질이나 음향은 별로 좋지 않아요. 드럼 없이 장구나 북을 사용했고 녹음도 하루 12시간씩 24시간만에, 더빙까지 45만원 들여 만든 판이니까. 녹음은 홍대앞 토마토에서 했어요.

Q: 후배들한테 한마디 해주세요.
- 음악은 고난의 길인 거에요. 예술이 남들 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선 해나가기 힘든 토양이죠. 왠만한 각오 없이는 굉장히 힘들지 않을까. 잘못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고. 그러니까 잘 선택해서 계속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Q: "울고 싶어라" 때 제외하고 사이드맨이셨죠? 사이드맨에 만족하고 살아오신 자기 평을 하신다면?
-조연, 주연 문제에서 우리나라는 좀 바뀌어야돼요. 1등만 주목하는데 혼자 1등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음악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단체운동이나 마찬가지죠. 여러 명이 모여서 하는 건데, 나중에 뭐가 하나 성공하면 모든 게 한쪽으로 편중되고, 그거 하나만 장사꾼들이 데리고 나가는데 나중에는 음악도 망가지고 그 사람도 망가지죠. 특히 그룹은 가수 혼자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전체적으로 다 같이 봐줘야 되는 건데 나머지는 다 무시해 버리고 하나만 중시해버리니까 음악발전에는 좋지 않죠. 200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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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 뮤직: 한국 록과 포크 음악 사이트
http://www.conermusic.com
한국 록 음반 연구회
http://cafe.daum.net/ad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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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indbird.pe.kr

弼心으로 대동단결

조용필 만세!!!

5 댓글

은솔

2010-01-30 19:21:51

아까운 뮤지션이 또한분 별이되셨네요ㅠ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유현경

2010-01-30 19:51:00

그분을 잘 몰랐는데 ~~~~ 명복을 빕니다.

필사랑♡김영미

2010-01-30 20:39:26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트리오시절에 오빠랑 같이 활동하셔서 우리 팬들에겐 또 남달랐는데...

투병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보고는 맘이 참 짠 했습니다.

 

일본진출 할 당시에 오빠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활동 제안도 하셨군요.

몰랐던 부분들....단결님 덕분에 잘 보고갑니다.

 

정 비비안나

2010-01-31 04:57:52

어제 라디오 방송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울고 싶어라' 를 들려주셨는데  노랫말이 짠한 의미가 느껴졌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모과향

2010-02-02 21:27:54

이남이님의 명복을 빕니다.

 

더불어 단결님께서 올려주신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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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YONGPIL-가황(歌皇), 조용필을 노래하다』 대백과사전&악보집 도서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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