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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
부인 안진현씨의 49제 지낸 조용필 ‘못다 부른 사부곡’
“사랑하는 사람 떠나보낸 아픔 잊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래할 겁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약속장소인 방배동의 한 일식집. 기다리는 내내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미닫이문을 열고 그가 들어섰다. 다소 초췌한 모습. 지난 2월말에 있었던 아내의 49제 이후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조용필(53)은 그간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안색이 어두웠다. 어색한 위로의 말보다는 우선 그에게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주려고 기다리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3월초에 이사를 했어요. 남향집이어서 예전 집보다 분위기가 밝아요. 예전 집에서 6년 넘게 살았는데 집안 여기저기 아내의 손길이 남아있어 견디기 힘들더군요. 낮엔 사람을 만나고 하니까 괜찮은데 밤에 혼자 있을 땐 부쩍 더 생각이 났어요. 눈에 보이지 않아야 빨리 잊을 수 있다고 해서 아내의 옷도 모두 태워서 하늘로 보내고, 사진도 몇장만 남기고 다 한쪽에 치워놨죠. 그래도 멀리 떠나지 못하고 근처에 집을 얻었어요. 아내와 함께 걷던 골목, 즐겨 찾던 식당, 커피숍…. 한꺼번에 다 버릴 수는 없잖아요.”
앞에 놓인 물잔을 바라보며 한꺼번에 긴 이야기를 털어놓은 그가 깊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날리는 연기가 그의 얼굴을 그늘지게 했다.
“아내가 끊으라고 해서 지난해 담배를 끊었는데, 이걸 또 피우게 되네요.”
그는 49제를 지내고, 아내의 유품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 지난 3월초 미국에 다녀왔다고 한다. 장모를 비롯해 처가 친지들을 방문해 서로 위로하며 슬픔을 달랬다고. 뉴욕과 워싱턴에도 들러 음악과 공연에 관한 여러가지 준비도 했다.
아내 안진현과 사별한 지도 어느덧 3개월. ‘국민 가수’에게 일어난 커다란 사건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에게 ‘49제까지는 혼자 있게 해달라’며 두문불출했던 그는 슬픔에 싸여 있는 듯했다. 애써 “인터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편하게 식사나 하자”며 술잔을 건넸지만, 그는 결코 편해 보이지 않았다.
“49제 후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산소에 가요. 아내가 꽃을 좋아해서 시든 꽃을 갈아줘야 하거든요. 지난주엔 아내의 산소 주변으로 측백나무랑 회양목을 열한 그루 심었어요.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이 지겠죠.”
“남는 시간엔 무얼 하냐”는 질문에 그가 피식 웃으며 흘리듯 말했다.
“그냥 멍하니 있는 거지, 뭐. 정 못 견디겠으면 술이나 한잔 하고….”
조용필에게 아내는 친구였다. 미국에서 컨설팅회사를 경영하는 아내와 한국에서 노래를 부르던 조용필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하루 10통이 넘게 전화를 주고받으며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다.
“1년의 6개월은 아내가 있는 워싱턴에서 지냈어요. 함께 골프도 치고 한국 마켓에서 김치도 사곤 했죠. 그러다 떨어져 있으면 매일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어요. 아침마다 모닝콜도 서로 해줬어요. 10분만 더 잔다고 하면 10분 뒤에 또 전화를 하고…. 떨어져 있어도 서로 하루 스케줄을 훤히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내가 가고 난 후 한동안 휴대전화와 침실 전화를 하루종일 꺼놓지 않았어요. 금방이라도 벨소리가 울릴 것 같아서…. 이젠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한때 ‘조용필 부부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이는 모두 사실 무근이라고. 이들 부부의 생활을 잘 아는 주위사람들은 “부부 사이가 남달리 좋아 하늘이 질투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연신 담배를 피워 무는 그. 우울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아내의 유산으로 설립한다는 복지재단 이야기를 꺼냈다.
슬픔 잊기 위해 얼마 전 이사 아내 유산으로 복지재단 설립 준비중
“아내가 제게 남겨준 재산은 4백만달러, 약 48억원이에요. 세금을 공제하면 2백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24억원쯤 되는 셈이죠. 여기에 제 재산을 합쳐 내년 2월에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할 계획이에요. 사회 각계의 명사들을 재단이사로 모실 계획이고, 운영은 제 사무실 직원들이 담당할 거예요. 일단 이 돈을 시드 머니로 해서 더 많이 불려야 해요. 후원자들의 후원금도 받을 겁니다. 처음 3년 동안은 심장병 환자를 중심으로 돕고 그 이후엔 소년소녀 가장, 생활보호대상 노인 등으로 대상을 넓혀갈 계획이에요.”
복지재단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자 사람들은 ‘역시 조용필’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복지재단 설립은 오래 전부터 그가 계획해왔던 일이다. 그는 재단 출범 이후 국내외에서 펼치는 모든 콘서트의 수익금 10%를 재단에 적립하는 한편 사후 발생하는 저작권료 전액도 희사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아내가 유산을 남긴 것에 대해서 처음엔 화가 났어요. 오히려 내가 주고 가야 하는데…. 저는 자식도 없어요. 그래서 오래 전부터 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어요.”
과거가 아닌 미래의 이야기를 하다보니 기분이 좀 나아진 것일까? “아내와 자주 왔었는데, 특히 이 음식이 맛있다”며 기자에게 권하는 그의 음성이 조금은 밝아졌다.
지난 3월21일은 그의 쉰세번째 생일이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 때문에 가까운 친구들과 집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토요일이었던 다음날 서울 양재동 교육회관에선 그의 팬클럽연합이 주최하는 생일잔치가 있었다. 그는 지금껏 한번도 참가한 적이 없지만 팬클럽은 한데 모여 그의 공연 동영상을 보며 축하해왔다.
“이번 장례를 치르며 저에 대한 팬들의 깊은 사랑을 느꼈어요. 마치 자신이 당한 일인 듯 눈물을 흘리는 팬들을 보며 ‘그래도 난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에겐 지금도 공연이 열리면 몰려오는 ‘같이 세월을 보내온 팬들’이 있다. 그들은 조용필이라는 가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었고, 가수 조용필은 그들에게 청소년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었다. ‘오빠부대’가 나이 들어서도 그대로 ‘아줌마부대’로 건재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신의 슬픔을 함께해준 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는 공연을 시작한다. 올해는 그가 데뷔한 지 35주년이 되는 해. 그에 맞춰 35차례 콘서트를 갖겠다는 계획이다.
“4월12일 의정부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에 들어가요. 매 공연을 모두 다른 내용으로 채울 생각이에요. 4월말 울산 공연을 거쳐 5월엔 서울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도 공연을 펼칠 거예요. 가장 큰 규모는 아마 8월30일에 열릴 서울 잠실주경기장 콘서트가 아닐까 싶어요.”
추모곡 담은 새 앨범·공연 준비 아내의 빈자리 음악으로 채울 터
공연 얘기가 시작되자 그는 말이 많아졌다. 35년을 무대에서 살아온 사람이니 당연할 수밖에. 요즘 들어 아내의 그림자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것도 바로 공연 준비 때문이라고 한다.
“이번엔 콘서트마다 주제를 달았어요. 의정부 콘서트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자’이고 울산은 ‘사랑콘서트’, 코엑스 공연은 ‘재회’, 그리고 잠실 공연은 가수데뷔 35년을 맞이하는 ‘기념콘서트’예요. 공연 때마다 아내가 생전에 좋아했던 노래인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떠나가는 배’ ‘봉선화’도 부를 생각이고요.”
그의 공연은 그 규모나 기획에서 여느 공연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도 그렇지만 공연에서도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늘 직접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한다. 지난해 예술의 전당 공연 때 보여주었던 입체적이며 환상적인 무대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오는 8월15일은 아내의 생일. 그는 아내의 생일에 선물할 노래를 구상중이라고 한다.
“생일선물을 주려면 그전까지 곡을 다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요즘 콘서트 준비하랴, 신곡 만들랴 정신이 없어요. 추모곡은 아니에요. 단지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담을 거예요. 그래서 슬프지 않은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가볍고 단순하지만, 애틋함이 있는 그런 노래요.”
아내를 그리는 노래와 함께 지난해 예술의 전당 공연 때 선보였던 ‘태양의 눈’, 월드컵 노래 ‘아리랑’, 그리고 새로운 곡으로 18집 앨범을 구성, 8월 잠실공연에서 첫선을 보일 계획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평소 음악과 가정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 어색하게 웃으며 “반반”이라고 대답했던 그가 아내를 잃은 쓸쓸함 속에 이제 음악을 더욱 가까이 두려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다는 것,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거예요. 시간이 많이 흘러야겠죠. 대신 바쁘게 일할 거예요. 일하는 시간엔 잊을 수 있거든요.”
밝았던 음성이 어느새 젖어들었다. 그는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측은함이었을까, 아니면 취재원의 속내를 읽고 싶은 기자의 습성 탓이었을까? ‘음악적으로는 한국 최고의 가수라는 찬사를 받지만 개인적으로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는 말을 건네자 한참 만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인정합니다. 저 또한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에요. 하지만 그런 숱한 고생의 기억이 제 노래에 깊이를 주지 않았나 싶어요.”
술잔이 몇 번 더 돌아가고 그와의 자리가 끝났다. “아내를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더욱 열심히 노래할 겁니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차에 올랐다. 그의 아내가 숨을 거두던 날 창밖에 내리던 하얀 눈처럼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끝)
■ 글- 조득진 기자
■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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