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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야인으로 돌아간 이회택=
인터넷 바둑의 등장으로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동네 곳곳에서 기원이 성업중이던 시절 승세를 굳힌 사람은 맞은편의 기적(棋敵)을 향해 ‘조남철이 와도 이 바둑은 못이긴다’고 떵떵 큰소리를 치곤 했다. 담배 한대 맛있게 피워 물면서. 이미 전성기를 훨씬 지났지만 조남철 9단은 오랫동안 바둑의 최고수, 나아가 바둑 그 자체로 통하고 있었다.
그 무렵 마을 공터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지던 동네축구에서 제법 폼나게 단독 드리블을 할 참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핀잔이 ‘네가 이회택이냐’였다. 소뒷걸음치다 쥐잡는 격으로 어쩌다 상대편의 결정적인 공격을 가로막았을 때는 ‘이회택이도 막을 수 있겠다’는 어설픈 찬사를 받았다. 그랬다. 축구가 대중들의 울분을 풀어주는 유일무이한 스포츠였던 시절 이회택은 최고의 공격수, 불세출의 스타 플레이어이자 살아있는 신화였다.
-한국축구 대명사·의리의 사나이로 통해-
만 스무살 약관의 나이였던 66년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이래 선수로, 지도자로 40년 가까이 그라운드를 호령했던 ‘풍운아 이회택’이 최근 전남 드래곤즈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떠나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니만큼 사실상의 완전한 은퇴인 셈이다. 야인으로 돌아간 이회택(57)을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서울 풍납동 올림픽 파크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회택은 “승부세계에서 정신적으로 많이 지쳤다”며 “아무런 미련도 없다”고 말했다. 이회택에게 전남은 선수시절의 땀과 감독으로서의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팀이다. 73년 창단된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실업선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86년 포항아톰스의 감독을 맡아 92년 팀에 우승을 안긴 뒤 곧바로 물러났다. 98년 전남 감독으로 복귀한 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에 대한 문책으로 그가 팀을 떠난 것은 아니다. 이회택은 “1년안으로 우승할 자신도 있고, 팀도 안정궤도에 올랐지만 그냥 떠나는 것”이라며 “더이상 하면 욕심일 뿐”이라고 말했다.
40년 축구생활을 통해 그에게 가장 벅찬 기쁨이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국가대항전에서의 승리가 아니다. 63년 고향인 김포에서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공고에 적을 두고 있을 무렵 전국단위의 첫번째 공식대회에서 강호 부산상고를 만나 두골을 내리 넣어 2-0으로 이겼을 때이다. ‘이회택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동북고로 옮긴 그는 특유의 스피드와 순발력으로 팀의 ‘싹쓸이’ 우승을 이끌었다.
고교졸업 직후 그는 국가대표 상비군 격인 ‘양지팀’에 선발됐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지만 양지팀은 중앙정보부가 만든 것으로 팀 명칭도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정의 부훈(部訓)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시 북한의 런던 월드컵 8강에 큰 충격을 받은 중정은 김형욱 부장의 주도아래 팀을 창설했고, 선수들은 중정의 이문동 청사 안에 있는 잔디구장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것으로 병역의무를 대신했다. 이회택은 “선수들은 현역 사병의 신분으로 당시 대기업 계장 월급수준인 2만원을 매달 지급받았다”면서 “김형욱 부장은 가끔씩 선수들의 훈련광경을 관심있게 지켜보곤 했다”고 말했다.
이회택에게 평생 가슴아픈 회한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선수로서 월드컵과 올림픽 본선에 출전하지 못한 것이다. 충분히 나갈 수 있었는데도 불운이 겹쳐 본선 문 앞에서 좌절한 적이 딱 두번이다. 국가대표가 된 이듬해인 67년 멕시코 올림픽 예선에서 후반 2분을 남겨놓고 김기복이 슈팅한 볼이 골대를 맞는 바람에 3-3으로 비겼고, 결국 골득실차로 탈락했다. 71년 뮌헨올림픽 예선에서는 말레이시아와 시종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1-0으로 무릎을 꿇어 본선행이 무산됐다. 이회택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선수로서는 월드컵 본선무대에 서지 못했지만 이회택은 대표팀을 이끄는 감독으로서는 소원을 풀었다.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둔 88년 12월 축구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국가대표감독에 취임한 그는 중국, 카타르, 사우디, 북한 등과 함께 예선전을 치러 4승2무라는 무패의 기록으로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이러한 좋은 성적은 당연히 국민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이회택은 “국민들의 열화같은 성원과 기대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며 “본선을 앞두고 안면근육이 마비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월드컵·올림픽서 못 뛴것 평생 아쉬움-
본선은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 등 전통적인 강호들과의 대결에서 3전 전패한 것이었다. ‘비분강개와 왜곡의 명수’인 한국언론이 이를 놓칠 리 만무했다. 벨기에와의 1차전에서 3-0으로 패배한 뒤 선수들이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 기자들은 ‘수영하며 휴식하는 모습을 담고 싶다’며 선수들에게 풀장 안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곧바로 ‘참회하고 반성해도 시원찮을 선수들이 수영이나 하며 희희락락하고 있다’는 보도가 신문지면과 TV화면을 장식했다. 이회택은 “언론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무차별로 공격해대는 바람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16강은 한국민들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당시 우리 수준으로서 그같은 성적은 너무나 당연했다”고 말했다.
강인한 용모와 직선적인 성격, ‘놀고 싶어’ 대표팀을 이탈한 파격적인 행보 등으로 이회택에게 늘 따라붙는 말이 ‘풍운아’이다. 또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꾸는 탓에 ‘의리의 사나이’ ‘맏형’ 등도 친숙한 수식어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그냥 끌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마음과 정을 나눴을 뿐”이라고 말했다.
축구계 외에도 이회택은 특히 가요계에 많은 지인을 갖고 있다. 그와 ‘국민가수’ 조용필(53)은 수십년동안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이다. 조용필이 아직 출세하기 전 ‘25시’라는 보컬팀에서 퍼스트 기타를 치고 있을 무렵 이회택은 자신의 친구이자 팀의 드럼 주자였던 조갑출을 통해 조용필을 알게 됐다. 첫대면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곧바로 ‘형님 동생’하면서 급격히 가까워졌다. 대마초 사건으로 조용필의 활동이 묶이자 이회택은 권력기관에 근무하던 ‘빽’을 동원해 계속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투서가 잇따르자 결국 조용필은 1년 있다가 뒤늦게 은퇴기자회견을 했고 회견을 주선한 이회택도 당연히 자리를 함께 하면서 매니저 노릇을 했다. 이회택은 “서로 바빠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얼마전 부인 상가에서 조용필을 만났다”고 말했다. 조용필 외에도 신중현, 남진, 윤수일 등도 이회택의 ‘가요계 인맥’들이다.
이회택은 지금의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과도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70년 한국대표팀이 내한한 포르투갈 벤피카팀과 친선경기를 가졌을 때 스트라이커 이회택을 전담 마크한 수비수가 바로 코엘류였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회택은 ‘시기를 잘못 선택한’ 코엘류에게 연민의 정을 갖고 있다. 월드컵 4강이라는 ‘영원히 다시 나오기 어려운’ 성적을 거둔 마당에 ‘하느님이 한국팀 감독이 되더라도’ 무엇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회택은 “이미 부와 명예라는 단맛을 봐서 정신력이 해이해진 선수들을 휘어잡아 통솔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필과 막역, 코엘류와도 특별한 인연-
최정민의 뒤를 잇는 2세대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이 작성한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는 자신의 뒤를 이어 차범근-최순호-황선홍 등을 꼽았다. 황선홍에 이어 이동국과 김은중은 가능성을 보이다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현역중에서는 ‘마음에 드는 선수’가 없지만 김동현과 정조국이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김동현은 기술적인 측면이 다소 모자라고 정조국은 근성과 순발력이 부족하지만 대성의 자질이 충분히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회택은 10여년전부터 고향인 김포에서 운영중인 ‘어린이 축구교실’을 통해 어린 유망주를 발굴하는 것으로 마지막 축구인생을 보낼 예정이다. 또 축구 때문에, 친구 만나느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부인에게 그동안의 ‘죄값’을 치르겠다고 다짐했다.
〈손동우 sdw@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12월 28일 19:41:23
http://www.khan.co.kr/news/artview.html?artid=200312281941231&code=100201
인터넷 바둑의 등장으로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동네 곳곳에서 기원이 성업중이던 시절 승세를 굳힌 사람은 맞은편의 기적(棋敵)을 향해 ‘조남철이 와도 이 바둑은 못이긴다’고 떵떵 큰소리를 치곤 했다. 담배 한대 맛있게 피워 물면서. 이미 전성기를 훨씬 지났지만 조남철 9단은 오랫동안 바둑의 최고수, 나아가 바둑 그 자체로 통하고 있었다.
그 무렵 마을 공터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지던 동네축구에서 제법 폼나게 단독 드리블을 할 참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핀잔이 ‘네가 이회택이냐’였다. 소뒷걸음치다 쥐잡는 격으로 어쩌다 상대편의 결정적인 공격을 가로막았을 때는 ‘이회택이도 막을 수 있겠다’는 어설픈 찬사를 받았다. 그랬다. 축구가 대중들의 울분을 풀어주는 유일무이한 스포츠였던 시절 이회택은 최고의 공격수, 불세출의 스타 플레이어이자 살아있는 신화였다.
-한국축구 대명사·의리의 사나이로 통해-
만 스무살 약관의 나이였던 66년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이래 선수로, 지도자로 40년 가까이 그라운드를 호령했던 ‘풍운아 이회택’이 최근 전남 드래곤즈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떠나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니만큼 사실상의 완전한 은퇴인 셈이다. 야인으로 돌아간 이회택(57)을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서울 풍납동 올림픽 파크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회택은 “승부세계에서 정신적으로 많이 지쳤다”며 “아무런 미련도 없다”고 말했다. 이회택에게 전남은 선수시절의 땀과 감독으로서의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팀이다. 73년 창단된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실업선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86년 포항아톰스의 감독을 맡아 92년 팀에 우승을 안긴 뒤 곧바로 물러났다. 98년 전남 감독으로 복귀한 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에 대한 문책으로 그가 팀을 떠난 것은 아니다. 이회택은 “1년안으로 우승할 자신도 있고, 팀도 안정궤도에 올랐지만 그냥 떠나는 것”이라며 “더이상 하면 욕심일 뿐”이라고 말했다.
40년 축구생활을 통해 그에게 가장 벅찬 기쁨이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국가대항전에서의 승리가 아니다. 63년 고향인 김포에서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공고에 적을 두고 있을 무렵 전국단위의 첫번째 공식대회에서 강호 부산상고를 만나 두골을 내리 넣어 2-0으로 이겼을 때이다. ‘이회택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동북고로 옮긴 그는 특유의 스피드와 순발력으로 팀의 ‘싹쓸이’ 우승을 이끌었다.
고교졸업 직후 그는 국가대표 상비군 격인 ‘양지팀’에 선발됐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지만 양지팀은 중앙정보부가 만든 것으로 팀 명칭도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정의 부훈(部訓)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시 북한의 런던 월드컵 8강에 큰 충격을 받은 중정은 김형욱 부장의 주도아래 팀을 창설했고, 선수들은 중정의 이문동 청사 안에 있는 잔디구장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것으로 병역의무를 대신했다. 이회택은 “선수들은 현역 사병의 신분으로 당시 대기업 계장 월급수준인 2만원을 매달 지급받았다”면서 “김형욱 부장은 가끔씩 선수들의 훈련광경을 관심있게 지켜보곤 했다”고 말했다.
이회택에게 평생 가슴아픈 회한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선수로서 월드컵과 올림픽 본선에 출전하지 못한 것이다. 충분히 나갈 수 있었는데도 불운이 겹쳐 본선 문 앞에서 좌절한 적이 딱 두번이다. 국가대표가 된 이듬해인 67년 멕시코 올림픽 예선에서 후반 2분을 남겨놓고 김기복이 슈팅한 볼이 골대를 맞는 바람에 3-3으로 비겼고, 결국 골득실차로 탈락했다. 71년 뮌헨올림픽 예선에서는 말레이시아와 시종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1-0으로 무릎을 꿇어 본선행이 무산됐다. 이회택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선수로서는 월드컵 본선무대에 서지 못했지만 이회택은 대표팀을 이끄는 감독으로서는 소원을 풀었다.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둔 88년 12월 축구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국가대표감독에 취임한 그는 중국, 카타르, 사우디, 북한 등과 함께 예선전을 치러 4승2무라는 무패의 기록으로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이러한 좋은 성적은 당연히 국민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이회택은 “국민들의 열화같은 성원과 기대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며 “본선을 앞두고 안면근육이 마비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월드컵·올림픽서 못 뛴것 평생 아쉬움-
본선은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 등 전통적인 강호들과의 대결에서 3전 전패한 것이었다. ‘비분강개와 왜곡의 명수’인 한국언론이 이를 놓칠 리 만무했다. 벨기에와의 1차전에서 3-0으로 패배한 뒤 선수들이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 기자들은 ‘수영하며 휴식하는 모습을 담고 싶다’며 선수들에게 풀장 안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곧바로 ‘참회하고 반성해도 시원찮을 선수들이 수영이나 하며 희희락락하고 있다’는 보도가 신문지면과 TV화면을 장식했다. 이회택은 “언론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무차별로 공격해대는 바람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16강은 한국민들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당시 우리 수준으로서 그같은 성적은 너무나 당연했다”고 말했다.
강인한 용모와 직선적인 성격, ‘놀고 싶어’ 대표팀을 이탈한 파격적인 행보 등으로 이회택에게 늘 따라붙는 말이 ‘풍운아’이다. 또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꾸는 탓에 ‘의리의 사나이’ ‘맏형’ 등도 친숙한 수식어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그냥 끌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마음과 정을 나눴을 뿐”이라고 말했다.
축구계 외에도 이회택은 특히 가요계에 많은 지인을 갖고 있다. 그와 ‘국민가수’ 조용필(53)은 수십년동안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이다. 조용필이 아직 출세하기 전 ‘25시’라는 보컬팀에서 퍼스트 기타를 치고 있을 무렵 이회택은 자신의 친구이자 팀의 드럼 주자였던 조갑출을 통해 조용필을 알게 됐다. 첫대면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곧바로 ‘형님 동생’하면서 급격히 가까워졌다. 대마초 사건으로 조용필의 활동이 묶이자 이회택은 권력기관에 근무하던 ‘빽’을 동원해 계속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투서가 잇따르자 결국 조용필은 1년 있다가 뒤늦게 은퇴기자회견을 했고 회견을 주선한 이회택도 당연히 자리를 함께 하면서 매니저 노릇을 했다. 이회택은 “서로 바빠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얼마전 부인 상가에서 조용필을 만났다”고 말했다. 조용필 외에도 신중현, 남진, 윤수일 등도 이회택의 ‘가요계 인맥’들이다.
이회택은 지금의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과도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70년 한국대표팀이 내한한 포르투갈 벤피카팀과 친선경기를 가졌을 때 스트라이커 이회택을 전담 마크한 수비수가 바로 코엘류였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회택은 ‘시기를 잘못 선택한’ 코엘류에게 연민의 정을 갖고 있다. 월드컵 4강이라는 ‘영원히 다시 나오기 어려운’ 성적을 거둔 마당에 ‘하느님이 한국팀 감독이 되더라도’ 무엇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회택은 “이미 부와 명예라는 단맛을 봐서 정신력이 해이해진 선수들을 휘어잡아 통솔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필과 막역, 코엘류와도 특별한 인연-
최정민의 뒤를 잇는 2세대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이 작성한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는 자신의 뒤를 이어 차범근-최순호-황선홍 등을 꼽았다. 황선홍에 이어 이동국과 김은중은 가능성을 보이다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현역중에서는 ‘마음에 드는 선수’가 없지만 김동현과 정조국이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김동현은 기술적인 측면이 다소 모자라고 정조국은 근성과 순발력이 부족하지만 대성의 자질이 충분히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회택은 10여년전부터 고향인 김포에서 운영중인 ‘어린이 축구교실’을 통해 어린 유망주를 발굴하는 것으로 마지막 축구인생을 보낼 예정이다. 또 축구 때문에, 친구 만나느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부인에게 그동안의 ‘죄값’을 치르겠다고 다짐했다.
〈손동우 sdw@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12월 28일 19: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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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환
2003-12-29 06:56:49
ypc스타님은 어서 누리님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ㅇㅈㄲㄲㅍㄹㄴㄹ
2003-12-29 07:20:16
이상하다.....ㅋㅋㅋ
연말에 바쁘시죠? 음주가무에 충실하시느라....^^
YPC스타님 김석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