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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대학가요제와 고고리듬(좀 깁니다.)

ypc스타, 2004-09-02 21: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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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0년대말 새로운 사운드, 고고의 시대


1)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고고-트로트의 열풍

60년대 미8군 무대가 있었다. 여기에는 아마추어적인 포크와는 달리 당시 한국의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당시 주류 대중음악은 트로트와 민요등 이었던데 반해 미8군무대는 서구 유행 음악을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밴드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그 당시에 경쾌한 리듬의 경음악스타일의 연주를 하고 있었다. 60년대말부터 미군들이 본국으로 송환되거나 월남으로 파병되면서 국내 주둔 미군의 숫자가 줄면서 미군 무대도 줄기 시작한다. 그때 베트남전쟁으로 그곳에 새로운 미군무대가 생기고 많은 미8군무대 출신들이 그 곳으로 향했다. 신중현 역시 미군들이 있는 월남으로 무대를 옮기려하려던 중 자신의 노래를 취입한 '펄시스터즈'가 크게 히트하면서 미군무대에서 벗어나 주류로 활동무대를 옮겨 작곡가와 기타리스트로서 활동한다.

당시 가요계는 트로트가 대세였는데 남진이 월남에 갔다온 사이 나훈아가 그를 대신해 스타의 자리에 있었다. 이에 남진은 새로운 트로트를 선보이며 정통트로트를 하던 나훈아에 맞서 트로트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남진은 허리춤과 함께 <님과 함께> <그대여 변치마오>등으로 엘비스 프레리를 표방하며 트로트에 록앤롤을 가미한 댄스 곡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두 사람이 리사이틀(극장 쑈)을 할 때면 여공들이 단체로 결근해 그 지방의 공장들이 모두 자동 휴무가 될 정도였다. 주류 다른 편으로 <커피한잔>의 펄시스터즈에 이어 <님은 먼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김추자가 수퍼스타 대열에 오른다. 그들 뒤에는 곡을 준 신중현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음악을 '소울'이라 불렸다. 신중현은 록 스타일의 곡도 있었지만 그 외의 다양한 리듬의 곡들도 있었다. 그 중 고고는 당시에 사용되던 리듬 중의 하나였고 그 곡들은 소울이라고 불렸다.

히트 곡들이 있었다해도 아직까지 고고는 대세가 아니었다. 조용필에 와서야 고고는 커다란 주류로 등극 한다. 그것이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이다. 조용필의 얘기를 들어보자.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트로트 곡이지만 고고 리듬으로 편곡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시켰어요. 또 포크 송에 싫증이 난 팬들이 트로트에 향수같은 것을 느끼고 있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하구요."

당시 조 용필은 어느 인터뷰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인기의 이유를 그렇게 분석했다. 트로트에 고고 리듬을 가미하여 현대화시켰다는 점과 포크 뮤직에 대한 팬들의 싫증. 그 두 가지 이유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사회적인 이슈와도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졌다는 점이다. 당시는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모국 방문이 행해지던 시기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작곡한 황 선우씨는 그 곡을 "모국을 찾는 재일교포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위의 조용필의 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트로트를 고고리듬으로 편곡 했다
-포크음악에 이미 대중들이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가사가 시대상황과 잘 맞았다.

미8군 출신들의 가수들은 고고가 친숙했다. 대부분 경음악 밴드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미 고고가 신중현에 의해 대중에게 친숙한 상태였다. 역시 미군무대 출신인 조용필은 고고에 익숙했을 것이고 트로트를 고고리듬으로 편곡하여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크게 히트시켰다. 미군무대 출신들이 미군무대가 사라지면서 주류시장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조용필의 훌륭한 예를 따르지 않을리가 없었다. 아래의 노래를 들어보자. 미8군 출신들의 트로트고고 곡 들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오동잎(최헌), 사랑만은 않겠어요(윤수일), 처녀뱃사공(금과은), 안개속의 두그림자(함중아)



2) 대학가요제 - 신선한 고고리듬 대학가를 휩쓸다


▶ 제1회 MBC 대학가요제

70년대 중반이 되면서 포크의 열기는 급격히 시들해지고 포크가수들이 대거 대중가요 가수화 된다. 대표적으로 송창식 어니언스 박인희 김세환 윤형주 등이다.
펄시스터즈와 김추자를 통해 고고곡이 히트하긴 했지만 신중현은 75년부터 활동정지를 당하게 된고 7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용필에 의해 세련되고 흥겨운 트로트고고의 바람에 휩싸인다. 고고리듬이 주류의 대표적 리듬이 되어 트로트를 빛내고 있을때 산울림에 의해 고고리듬은 다른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70년대 중반 대학가에는 학교 축제 때만 되면 으례껏 거창하게 가요제라는 이름을 내건 교내 장기자랑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 노래 좀 한다는 대학생은 다 모여 자신을 과시했고 이들은 대부분 팝송이나 샹송, 혹은 구전가요나 기존 포크 곡을 불렀다. 또 학내 체육대회나 축제등의 행사에서 분위기를 띄우던 그룹사운드가 함께 하기도 했다. 이런 대학생들에게 일년에 한번 봄이나 가을에 열리는 학교축제는 자기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역시 우리나라의 정서상 줄줄이 노래만 하고 끝나면 굉장히 싱겁기 때문에 대상,금상,은상,동상,인기상 등으로 순위를 매겨 상품도 주고 또 그래야 사람들의 흥미를 한층 고조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대학내 축제 중 하나인 가요제는 가장 재미있고 중요한 행사의 하나였다. 77년에 MBC에 의해 대학내 축제가 전국적인 규모로 기획된다. 그 것이 대학가요제 이다.

대학가요제를 놓고 정치적인 해석을 하는 시각도 있다. 그 것에 대한 박춘흠과 김창완의 생각을 들어보자,

박준흠: 일부평론가들은 마치 1980년도 국풍80처럼 대학가요제를 공권력에 의해 기획된 행사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유신정권 말기 사람들의 증폭된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가 대마초 파동으로 허전해진 대중음악계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방송사의 전략과 맞아 떨어진 결과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주로, 샤프, 작은거인, 마그마 라는 주목할 만한 밴드들이 탄생되었고, 산울림과 함께 이들은 록 음악의 대중화를 이루는 역할을 수행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미자, 송대관 등 트로트 가수들이 세를 형성하고 있었고, 분명 산울림과 기타 대학가요제 그룹들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후 대중 음악 판도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김창완: 록그룹 자체가 대마초 사건 때문에 궤멸되고 청년문화가 특별한 대안을 찾지 못하던 당시, 대학가요제가 생겨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정치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옳지 못하다고 본다. 그때 수많은 대학교에서, 심지어는 단과대학 차원에서도 자기네들끼리 학교 가요제를 열지 않았나?

그렇다. 이미 많은 대학내 가요제가 있었고 MBC는 그것을 방송국으로 옮겨놓았을 뿐이다. 당시 가요에대한 인식이 매우 낮았고 가수도 '딴따라'라 칭하면서 미군무대나 요정에서 노래하고 반주나 하는 하찮은 직업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인식하에서 아무리 모든 사안에 민감하게 굴었다해도 정부가 가요 쇼 프로그램까지 일일히 기획하고 간섭 할리는 만무하며 그럴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았다. 다만 대학생들의 무대다 보니 너무 정치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 정도는 주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인터뷰어의 내용중 유신말 대마초 파동으로 가요계가 허전해진 것 처럼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앞서 지적한대로 조용필 이후 가요계는 트로트고고 열풍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음악을 선보이고 있었다. 또 70년대말에 이미자는 명맥은 유지하였지만 남진, 나훈아에 완전히 밀려 무너진 상태나 다름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대학가요제는 대학내 가요제를 옮겨놓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위의 얘기를 미루어 짐작컨데 아마 대학가요제가 대학 장기자랑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 예상은 빗나갔다. 역사를 반전시키는 산울림 형제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가요제는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고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거기에는 명문 서울대 출신의 '샌드페블즈'가 있었던 것이다.

1회 MBC대학가요제는 기획자나 참가자 모두 상당히 미숙했다.

비록 출전곡의 절반이 넘는 자작 포크곡과 대중가요 스타일의 곡이 있었지만 한 두곡을 제외하고는 시대에 뒤쳐져 대중의 시선을 모을만한 곡이 없었다. 게다가 번안가요(가시리,권투선수,나의 어머니,제비)나 구전가요(세노야) 기성인기곡(당신은 모르실꺼야)으로인해 전국노래자랑의 대학생편을 보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한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나 어떻해'로 쓰이기도 하는데 원곡 제목은 아님) 가 이 모두를 뛰어넘어 대학가요제를 빛나게 했다. 결국 '나 어떡해'는 대상을 받았고 MBC대학가요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성공했다.

지금 생각과 달리 당시는 그룹사운드인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받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입상도 아니고 밴드에게 대상을 준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심사위원들은 그룹사운드에게 선뜻 대상을 주기엔 부담이 많았을 것이다. 최고 성적으로 본선에 올라왔고 노래들을 직접 비교해서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나 어떡해'는 전체 대중가요와 동등하게 놓고 보더라도 너무나 탁월한 음악이었지만 그룹사운드라는 구성 때문이었다. 포크에서 처럼 통기타를 치며 낭만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매우 건전하게 비쳐졌지만 당시의 밴드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았다. 밴드라하면 경음악단을 말하는 것이며 쉽게는 불온한(?) 고고장을 떠올리고 미군무대나 캬바레, 리사이틀 백반주나 하는 것으로 아주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룹이 연주를 하는 것이 높게 평가되는것은 대대수의 사람들에게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선 곡이 엄청나게 뛰어났고 가요제에 참석한 관객들의 호응도 대단했다. 여기에 맴버는 명문 서울대학생들이었다. 이런 점들이 그들의 약점을 커버해주었으며 심사위원들은 대상을 안줄래야 안줄수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이 대학가요제 예선에 '문좀 열어줘'로 산울림도 참여했었고 당연히 예선 1등이었다. 그러나 당시 김창완은 졸업한 상태여서 자격상실로 샌드페이블즈가 유일한 그룹으로 참여했다. 잘 알다시피 동생 김창훈이 후배에게 준 '나 어떡해'는 명백히 산울림의 노래이다.

자신의 노래를 대중에게 보여 줄 수 없었던 산울림은 서라벌레코드를 직적 찾아간다. 그들의 데모테잎을 들은 레코드사 사장은 자비로 녹음하려던 산울림 형제들에게 공짜로 녹음 할 수있게 해주었다. 결국 산울림의 1집은 '아니벌써'로 전국을 강타하였고 카세트와 레코드 플레이어가 상당히 귀한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중, 고, 대학생들에게 그들의 숨겨진 노래를 듣게 만들었다. 산울림이 카세트 보급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77년은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와 산울림 1집의 열기로 들썩이게 된다.

▶ 77년 샌드페블즈 이후 가요계 고고리듬 열풍

박준흠과 김창완의 인터뷰중 일부이다.

박준흠:70년대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 사운드 기조는 산울림의 그것을 계승한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김창완:산울림이라기 보다는 1회 대학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샌드페블즈의 영향이 컸다. 악기편성도 그렇고.

우리는 이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위의 인터뷰어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사운드가 산울림에 이 후에 쏟아져 나왔다는 점에서 산울림의 뒤를 잇는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김창완은 산울림류가 아니라고 말한다.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사운드는 산울림류가 아닌 샌드페블즈류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산울림과 샌드페블즈가 다르고 그들은 샌드페블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고있다. 우선 구체적으로 언급한 악기편성은 기타,베이스,드럼 외에 올겐이 있다는 점에서 산울림과 다르다.

그러나 그것으로 샌드페블즈류라고 했을리 만무하다. 올겐은 산울림도 많이 썼다. 그럼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사운드들이 본받은 것이 산울림이 아닌 샌드페블즈인 핵심적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고리듬 이다. 산울림은 록그룹이지만 샌드페블즈의 '나어떡해'나 그에 영향받아 배출된 그룹사운드들은 고고리듬을 쓴 밴드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대학가요제 출신들은 산울림이 아닌 샌드페블즈를 계승한 그룹사운드인 것이다. 이제 고고리듬을 사용한 샌드페블즈와 그에 영향받았던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사운드들을 살펴보자

어느집이나 기타를 좀 칠줄알고 노래 좀 부를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집안 어딘가 노래 모음집 하나쯤 굴러다니는 것을 본적이 있을것이다. 여기저기 페이지를 넘기며 구경할라치면 어김없이 악보위에 기타코드가 나열되어있고 그 맨위 '고고', '슬로우 고고'라는 단어가 쉽게 발견될 것이다. 고고는 60년대 중반이후 크게 유행했던 모든 록계열의 댄스음악을 총칭하는 말이다. 당시는 트위스트, 스윙 등 가볍게 몸을 흔들려 춤출수 있는 것을 모두 고고라 불렀다. 4박자 8비트, 세번째에 악센트를 주는 '쿵쿵따다 쿵쿵따다'가 기본인 고고는 4분의4박자 곡이면 대략 연주가 가능하고 몸을 가볍게 흔들수 있는 정도의 누구나 부담없는 리듬이다. 리듬을 모른다해도 즐겁고 빠른곡이면 고고이고 늘어지는 곡이면 슬로우 고고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친근하고 부담없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리듬인 것이다.

앞에서 고고라는 리듬은 60년대말 <커피한잔>등이 히트되면서 친근해졌고 본격적으로 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후 트로트고고 바람이 불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 고고를 산울림 형제들이 받아들였고 가요제를 위해 준비하던 샌드페블즈에게 준 것이 '나 어떡해'이다. '나 어떡해'는 당시 밴드의 전형이기도한 기타,드럼, 베이스에 올겐이라는 악기편성을 하고 있었다. 곡 전개역시 올겐으로 조용히 시작해서 마지막에 하이라이트 마무리하는 기승전결의 입체적인 곡 전개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곡 중간에는 기타 솔로와 연주를 멈추고 화음으로 장식하는 특징을 하고있다.

결국 제1회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서울대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즈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나팔바지에 고고춤을 추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고고리듬은 익히 친숙한 것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출신 그룹사운드가 그 고고리듬으로 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했고 그들에 의해 고고 리듬이 과거와 달리 밝고 신선하게 표현되었다. 모두들 '나 어떡해'에 열광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 열기는 곧 바로 대학내의 그룹사운드 붐으로 이어졌다. 다들 샌드페블즈처럼 대학가요제를 목표로 하고 말이다.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는 음지의 밴드 이미지를 대학생의 지적 이미지와 함께 밝고 젊은 밴드로의 인식전환을 가져왔고 뽕짝 스타일의 고고리듬을 경쾌하고 신나는 젊은 리듬으로 변화를 주어 고고리듬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샌드페블즈의 이런 사운드는 신생 그룹사운드에게 모범사례 였고 신나는 고고리듬의 '나 어떡해'의 사운드는 78년, 79년을 휘어잡은 대학가요제 출신의 거의 모든 그룹사운드의 원형이 되었다. 즉, 대학생 그룹사운드들은 기성의 고고리듬을 '나 어떡해'를 통해 받아들여 샌드페블즈식의 그룹사운드를 만들어갔던것이다.

80년대 들어 그룹사운드들이 펑키화 된 고고리듬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샌드페블즈의 악기편성과 곡 전개 방법의 영향하에 있다. 그외 산울림이나 활주로를 모방한 그룹도 있었지만 주목받진 못했다.
이렇듯, 김창완의 지적대로 70년대 그룹들은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의 영향 하에 있다고 보는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나 어떡해'가 본질적으로 산울림의 노래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TBC와 MBC

TBC 동양방송을 알고있는가. TBC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삼성회장였던 고 이병철회장이 가장 아끼던 삼성그룹 소유의 민간방송이다. 삼성은 당시로서는 방송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80년에는 여의도에 신사옥을 세울정도로 의욕있게 방송국을 운영했다. 그 방송국이 지금의 KBS별관 이다. 아마 서태지팬들 대다수가 그런 방송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80년 말 언론장악을 위해 언론통합 시행령을 내린 전두환군부에 의해 같은해 12월 1일을 기해 공중분해되며 KBS에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서른을 넘은 사람이어야 겨우 달동네나 장수만세, 황금박쥐, 날아라 태극호 등을 기억해 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 당시 TBC는 라디오든 티비 드라마든 쇼나 코미디, 만화영화든 모든 프로그램이 엄청난 시청률을 올렸다. TBC는 프로그램이 다른 두 공영방송에 비해 감각적이고 젊은 취향이었고 재미가 있었다. 그것은 서울, 부산등 일부 대도시만 방송되던 지역방송인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지역방송이라는 단점은 78년 '해변가요제'라는 이름의 대학가요제를 개최하면서 장점으로 변한다.

MBC는 KBS와 더불어 공영방송으로 전국적 방송망을 갖고 있었다. 마치 새마을 방송 같았던 KBS의 공익 프로그램은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MBC는 프로그램면에서 TBC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거의 실효성은 없었다. 당시 지방은 농촌 사회였고 텔레비젼은 마을의 공동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할 때 쯤이면 마을사람들이 몰려들어 함께 시청하곤 했다.(삼성 광고중 김일 박치기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당시 레슬링선수였던 김일과 여권부는 최고의 티비 스타 였다.) 당시는 텔레비젼엔 미닫이 문이 달려있었는데 그 문을 열수있는 사람은 집안의 최고 어른이었다. 문이 열려야 티비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어떤 친구의 집에는 장농속에 TV가 있었고 장농을 열쇄로 열어야 TV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MBC가 TBC를 견제한다고 해도 MBC는 궁극적으로 공영방송이었고 방송국직원은 공무원이었고 관료적이었다는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전국민이 보는 오락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입장에서 당시 사회를 장악하던 가부장들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시청률보다는 어르신들에게 욕먹지 않는 방송이 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77년 제1회 MBC대학가요제는 대성공을 했다. 캠퍼스가요제를 방송국으로 옮겨놓고자 했던 소박한 기획은 산울림을 만나게 했고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MBC대학가요제는 그것으로 역사의 발걸음을 멈춘다. 이후 그룹사운드의 붐을 담아내지 못했다. 전국방송으로서의 지방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역사의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은 TBC의 해변가요제이다. 77년의 엄청난 열풍은 대학가요제를 목표로 하는 대학내 그룹사운드 결성 붐으로 이어졌다. 샌드페블즈와 산울림로 인해 공부잘하는 학생들도 하는 밴드는 결코 음지의 것이 아니며, 훌륭한 그룹음악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TBC는 77년 이후 급진전한 그룹사운드들을 자신의 무대에 세웠고 '샌드페블즈식의 사운드'라는 그룹음악의 전형을 널리 알리며 그들과 함께 가요계의 발전에 앞장서게 된다. 그것은 대도시 중심의 시청률을 중시하는 지역방송이었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78년 개최된 해변가요제는 2회부터 젊은이의 가요제로 이름을 바꾸며 3회까지 이어지고 방송국 공중분해와 함께 막을 내린다. 그때까지 대학그룹사운드와 함께 대학생 가요제로서 큰 역할을 한다.


78년 제1회 해변가요제

-구름과 나(BLACKTETRA, 우수상) - 나중에 송골매에 합류하여 더 큰인기를 끈다.
-그대로 그렇게(FEVERS, 인기상) - 그룹 인기에 힘입어 이명훈을 솔로로 독립한다.
-그 바닷가(벗님들, 인기상) - 이치현과 벗님들의 전신. 이때는 중창형식으로 노래했다.
-내 단하나나의 소원(BLUEDREGONS, 장려상)
-바람과 구름(장님들, 장려상)
-세상모르고 살았노라(Runway, 인기상) - 활주로는 78년 해변가요제와 MBC 대학가요제에 동시에 출전하여 은상(탈춤)을 탔고 두곡 모두 히트했다.
-여름(징검다리,최우수상) - 크게 히트한 중창곡. 후에 왕영은은 MC로 활동한다

제1회 TBC 해변가요제는 그룹사운드의 한마당이었다. 모두 12팀 참가 중 그룹이 5팀이었는데 이들 모두 수상했으며 모두 히트곡이 되었다. '샌드페블즈식 사운드'가 모든 그룹에게 영향주었음을 알수있다.

79년 제2회 젊은이의 가요제

-연(Linus,우수상)
-예쁜 곷잎찾아(Zebra,장려상)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Last Point,장려상)
-심메마니(Black Tetra 3기, 인기상)
-날아가는 새(톱니바퀴)
-불꽃(RunWay 11기)
-철없던 시절(Caravan)

15개팀중 7팀이 그룹사운드이다. 제2회의 그룹들의 음악은 '샌드페블즈식 사운드'와 산울림과 활주로 스타일의 전형을 따르는 팀이 함께 나온다. 78년 활주로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와 '탈춤'(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은상)이 또하나의 돌풍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80년 제3회 젊은이의 가요제

-하늘색꿈(로커스트,대상)
-불놀이야(옥슨,금상)
-나비가 되어(킨젝스,은상)
-젊은미소(건아들2기, 장려상)

3회 가요제에서는 '샌드페블즈식 사운드'의 고고에서 변형된 고고스타일의 펑키사운드를 선보이며 대학생 그룹사운드의 다양성과 발전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TBC는 그룹사운드의 인기를 주도했다. 당시 TBC는 라디오든 티비든 엄청난 인기프로그램을 다수 갖고 있었다. 이를 통해 그룹사운드를 팍팍 밀어주었고 모두 히트곡으로 만들며 가요계를 휩쓸었다.
반면 MBC는 이에 질세라 자신의 MBC대학가요제 수상곡을 열심히 밀었다 MBC는 1회의 폭발적인기에 힘입어 다수의 히트곡을 냈지만 가요계의 주도권을 잡지는 못했다 '나 어떡해'와 산울림 이후 크게 일어난 그룹사운드의 붐을 담아내기엔 전국방송이 한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 한국 록음악의 작은 가능성들

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로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는 당시 유행하는 고고리듬을 대학생다운 감성으로 받아들였고 밝고 경쾌한 스타일로 재해석하여 그룹사운드의 전형을 만들었다. 이후 많은 대학 그룹사운드가 생겨나고 '나 어떡해' 영향으로 이들에 의해 다시한번 고고열풍이 불었다. 이곡의 본래 주인인 산울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록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77년 1집 '아니벌써'와 데뷔앨범 발매 얼마 후인 이듬해에 나온 산울림의 2집 '내마음의 주단을 깔고'가 그 것 이다. 또 78년에 MBC대학가요제와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모두 수상한 활주로를 출발로 본격적인 록밴드들이 잇달아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국 록음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니벌써(산울림1집,77년)
-내마음의 주단을 깔고(산울림2집,78년)
-세상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78년 제2회 젊은이의 가요제)
-탈춤(활주로,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해야(마그마,80년 4회 MBC 대학가요제)
-연극이 끝난후(사프, 상동)

그러나 81년 이후에 록밴드의 명백은 끊어지고 86년 시나위가 나올때까지 공백상태가 계속된다.

출 처 : [기타] 인터넷 : http://taiji.hitel.net/public_html/html/buglist/70-4%20UNIV.HTM#70THNEW

1 댓글

송상희

2004-09-03 20:53:39

서태지 팬클럽에서 한국 대중음악 역사 총정리작업같은 걸 했나보네요. 히야, 열심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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