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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그 이름, 조용필!
그는 영웅이며,천재이며, 거장입니다.
그의 탄생 배경부터가, 영웅적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관이 조용필 조부의 묘자리를 보더니,이 가문에 앞으로 나라의 대 소리꾼이 나온다고,예언합니다.
이유인즉,묘자리가,풍수지리상으로 학의목부분에 해당되기때문이었습니다.그런 징표를 받고 태어난 우리의 영웅은, 어렷을 때 동네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던 하모니카 소리에,하늘로부터 받은 천명을 인지하게되고, 그때부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빠져살게됩니다. 고교학업을 마치기도 전(경동고 중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을 위해 미8군으로 도망친것도 하늘의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운명이 그 길로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었을것입니다.
처음에는 기타리스트로 출발합니다.(사실 대중들은 그를 보컬리스트로만 생각하지만,또 아주 무지한자들은 그를 트롯가수의 한사람으로밖에 생각할정도이지만, 조용필은 수구초심의 심정인지 늘 스스로를 기타리스트로 생각합니다.)
기타리스트로 어느정도 정상궤도에 오를 무렵 운명적인일이 발생합니다.그룹의 보컬이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대신 마이크를 잡았던것이 계기가 되어 가수가 됩니다.그가 보컬로 참여하는 음반을 만들었지만,묻힙니다.그러나 하늘은 영웅을 묻히게 놔두고 싶지 않았던지, 행운을 줍니다.
재일교포방문이라는 국가적이벤트가,열리게되고,교포방문이 이뤄지는 부산을 거점으로 돌아와요부산항에가 전국에 힛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이 , 위대한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는 혹독한 단련을 시켜야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유신세력은 사회정화를 시킨다는 명목으로 각분야를 탄압하는데 ,가요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음악평론가 강헌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대마초가 불법이 아니었고, 또 대마초를 피운 확실한 증거도 없는 가수들을 무작위로 잡아다가 남산에서 고문을 합니다. 조용필도 대마초 경험이 있긴 있었지만 딱 한번이었고,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새벽에 자다가 봉변을 맞은 우리의 영웅은,남산으로 끌려가,구조가 특이하게생긴 고문실 코너 벽틈에 박혀 각목세례를 받게됩니다.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아무나 50명을 적으라고 합니다.그후 우리의 영웅은 강제적으로 은퇴를 당하게되고, 방황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무의식적으로 천명을 자각하였던 걸까.방황의 시기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자신의 마음속의 연마하는 돌을 더욱 빛나게 하고자,지속적으로 절차탁마 합니다. 판소리를 익힙니다.목에 피가 나도록 연습하며 득음을 갈구합니다.
드디어 그의 밍숭맹숭한 미성이 탁성으로 변하고, 미국음악이 체화된 그의 감성에 코리안소울이라는 신무기가 장착이됩니다.시대에 와신상담하던 그에게 활동정지 해제소식이 전해지고, 그리고 고난시기의 결실과도같은 노래가 발표됩니다.
창밖의여자, 대중들은 전기에 감전된 듯 전율합니다.그리고 이런 쇼킹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전에,고추잠자리,단발머리등 그간 다른 뮤지션들이 시도조차 못했던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다양한 사운드기법을 도입하여, 거의 대부분의 노래들을 히트시킵니다.
우리의 영웅이 시련의 시기를 거쳐 천재로 재탄생하게 된 것입니다.팝송음반을 사야 창피하지 않았던 청춘들은 자랑스럽게 우리 뮤지션의 음반을 구매하게 되었고,서슬퍼런 군사정권에 대립하던 학생시민들은, 낮에 군가 같은 시위송에 지쳐 피로해진 밤을, 조용필 노래로 받게 됩니다.그의 다양한 음악적시도는,계속 멈추지 않습니다.점점 더 그 스펙트럼이 넓어집니다..국악,트롯,락,발라드,가곡,동요,라틴음악, 오페라....,그리고 그것은 시도로만 끝나지 않고, 대부분 큰 성공을 거둡니다.
결국에 그의 음악은 남성에서 여성까지,아이에서 노인까지,문맹인에서 지식인까지,프롤레타리아에서 브루주아까지, 대중에서 전문가까지 전국민,전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각종 가요차트에 그의노래가 빠질 날이 없었고, 10대가수상 6회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등 각종 가요상을 휩쓰는데, 이런 위대한 기록들도,스스로,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가요프로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이어졌을 지 알지 못 할 일입니다.
그가 2013년에 바운스로 가요프로에서 1위를 했을때, 가요프로에 나오지 않은 것이, 단순히 거만해서가 아니고 자신의 과거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인성의 면모도 얼마나 훌륭한 지, 오늘날 약속위반을 밥먹듯이 하는 정치인들도 반드시 본받아야 할 거룩한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성얘기가 나온김에 여담으로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 합니다.이상벽씨의 증언입니다.조용필은 아무리 첫술집이 최고급 술집이어도 마무리는 여느 때고, 포장마차나,함바집 같은 누추하고, 서민적인 술집에서 한다고 합니다.그 날도 마무리로 들른 곳이,노동자들이 찾는 허름한 함바집이었다고 합니다.소주를 한참 마시고 있는데,소문이 났는지 사람들이 몰려 왔다고 합니다.그러던 중 옆자리 주당아저씨들이,조용필보러,노래 한 곡 불러 보라고 장난처럼 얘기하자,이상벽씨가 말리는데,조용필은,'아니다,다른 팬들은 가식일 수도 있지만,이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팬이다'라고하며,그자리에서 한오백년을 불렀다고합니다.그리고 또 언젠가도, 어떤 허름한 식당에서 마무리로 칼국수를 시켜 한참 먹고 있는데,국수에 운동화끈이 섞여 씹혔는데, 조용필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운동화 끈을 빼내고 그냥 맛있게 다 먹었다고 합니다.이 일화들은 그의 최전성기 때의 팩트입니다.또 한 번은 그가 밤무대1회 출연에1억씩 받을 때 어떤 불치병 걸린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스케쥴을 취소하고,소녀의 병상으로 달려가,비련을 불러 주었다는 일화는 다소 가공된 것 같은데,이런 가공되는 일화를 무시할 수없는 것이,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들이 하나같이 가공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는것인데,뉴튼이 떨어지는 사과를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했다거나,에디슨이 어렷을 때 달걀을 품었다거나,논개가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적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내렸다거나, 문익점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기고 왔다거나, 이순신 장군이,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거나등 수도 없는 일화들이 가공되는 것은 일화의 주인공이 한치의 틀림의 여지가 없는 영웅임을 징표해 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조용필은 음악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완벽자라서, 무명 때에는 미8군에서 새벽5시까지 공연을 하고도 이후에 자지 않고 몇시간씩 연습을하는데,연습 때에는 심한 욕도 하고,재털이도 날아갈 정도인데,음악 외적으로는 일화들의 예처럼 쿨하다고 합니다.밴드 맴버가 결혼 하는데,부조로,차 한 대 값을 줬다거나,아지켜도 상광없을 소록도 공연 약속을 지켰다거나,음악 장비에 모두 투자 하느라 전세 살고 있다거나,전세 사는데도 기부한 돈이 100억이 넘는다거나 하는 사실들만보 아도, 음악과 세상을 각기 다른 잣대로 대하는 그의 높은인격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시대의 영웅이자, 천재였던 조용필은 더이상 국내에 경쟁자가 없음이 마치 그의 노래에 나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고독한 처지로 느껴졌는지 우리보다 음악이 30년 앞서 있다는 일본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기 시작 합니다.
다른 음악인들이 그토록 우러러 보던 신중현을 유일하게 비판적으로 봤던 사람이 조용필이었다는 것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신중현은 자신만이 미국 정통락을 하는 사람이고, 다른 밴드들은 뽕락이라고 무시하였는데,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던 조용필에게 신중현은 과거에만 머무는 고리타분한 음악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겁니다.
이미 82년에 일본에 진출하여 공연을 하였던 조용필은 86년도에 일본에서 사랑의미아(오모이데마이고)라는 타이틀곡의 앨범을 발표하여, 힛트하고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하면서도 국내에서의 앨범발표와 공연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단지 티비에 나오는 횟수가 줄었을 뿐이지 일본활동이라든지 국내외 공연은 여전히 열성적이었습니다.앨범발표는 다소 간격이 길어졌지만 그것은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그런 것이지,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92년도에 서태지가 우리나라 가요계의 물길을 크게 바꾸는 혁신이 일어 납니다.이후 힙합 랩 같은 댄스음악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이후 조용필은 티비 화면에서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모두 조용필이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였습니다.
조용필을 좋아했던 저의 기억에서도 조용필은 점점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던 2013년 어느날 조용필은 19집을 발표합니다.
모두가 깜짝 놀랍니다.조용필을 전혀 모르던 세대들은, 실력파 신인가수가 등장한 걸로 놀랐지만, 조용필을 아는 세대들은 그의 파격성에 깜짝 놀랐습니다.그의 공연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공연 실황 앨범을 들어보았습니다.제가 주목하게 된 것은 나이만큼 다져진 목소리의 곰삭음보다도,그의 편곡솜씨와 밴드의 연주의 깊이였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갈고 닦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80년대 위대한탄생 맴버연주는 외국의 유명 뮤지션들의 연주에 비하면 약간은 부족 하였습니다.90년대에는 그럭저럭 상위클라스는 되었지만, 탁월하다고는 볼 수는 없었습니다.그러나, 티비에 비추지 않던 그 20여년의 기간 동안에 얼마나 열심히 갈고 닦았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탄생의 편곡과 연주는 세계 최상급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영웅이었지만, 운명에만 기대지 않았기에 말로가 처참하지 않았고, 그는 천재였지만, 재능만 믿고 게으름 피우지 않았기에 긴 생명력을 얻게 되었습니다.그는 운명의 편한 지름길을 과감히 버리고,돌고돌아야 하는 힘든 인간의 길을 우직하게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영웅이요, 천재였던 우리의 가왕은 이제 거장으로 다시 한 번 거듭 난 것입니다.
음악을 그토록 사랑하여 아이조차 안낳았지만, 당신이 창조한 음악유전자는 당신이 죽은뒤에도 천세대 만세대를 번성할것입니다.
당신이 죽는다면 우리는 당신의 비석에 이런 글을 새길 것입니다.
'가왕이 떠나 빈 의자, 다시 앉을 자 없으리라. 인류가 끝나도록...'
4 댓글
상
2016-10-15 05:33:10
특히 마지막 구절 극히 공감합니다
김동령417
2016-10-15 09:09:33
상님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동입니다.
정 비비안나
2016-10-16 01:15:50
님의 글에 감동하고 절절하게 공감합니다~~~!
우리 오빠께서도 노벨문학상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강력 추천합니다~~!^^
김동령417
2016-10-16 08:42:26
노벨음악상이 있었다면 가왕님께서 이미 수상하셨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