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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술에 얽힌 이야기
내 인생에서 술을 빼놓고 생활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조용필」에서 술을 떼어놓으면 뭔가 멋이 덜한 느낌이 든다고들 한다. 그만큼 나는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도 많다.
작은 체구에 술은 씨름 선수이상으로 많이 마셔대니 「저러다간 더이상 못버티지」하며 주위에서는 여러 분들이 걱정하곤 하며 또 그렇게 술을 갖다 부으면서도 끄떡없는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물론 최근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일에 술이 일조를 하지않았다고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이혼, 북경공연등 내 인생의 엄청난 사건들이 한순간에 몰려 받은 스트레스와 그 이후에 한시도 쉴틈없이 계속되는 일정에 치였던 때문이지 결코 술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술이 몸을 조금 피곤하게 했을순 있지만 정신은 자꾸만 새롭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 다음으로 술을 좋아한다. 술은 순간 순간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며 사람들과 보다 가까와질수 있게한다. 인간이 발명한 약가운데 가장 부작용이 없는 약이 술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술을 처음 입에 댄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잘 못하셨지만 명절때는 한잔씩 들곤하셨는데 술상머리에 붙어 앉아있는 나에게 「이놈, 너도 한잔 먹어볼래」하고 술을 건네줘 받아먹던 기억이난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애들한테 웬 술을 주냐」며 눈을 흘기셨고 아버지는 「남자는 술을 먹을줄 알아야 된다」며 자꾸 술을 권해 먹고는 취해서(?) 잠들곤했다. 술이 거나해지신 아버지는 「바우고개」를 즐겨불렀고 항상 잠결에 그노래가 귓전을 스쳤다. 내가 지금 술을 잘하는것은 이때의 훈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있는데 반친구가 막걸리 한통을 가지고와 먹자고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몇모금씩 나눠마시고 자다 내려온 일이 있었고 이후 가끔 악동들끼리 모여 「시음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였던가, 시골(경기도 화성)집에 놀러갔었는데 이광남이라고하는 고향친구가 반갑다며 막소주 한되를 들고 찾아와 주거니받거니하며 다마셔버렸고 그대로 인사불성이 돼 사흘동안 꼼짝못하고 누워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나보다 술이 세던지 정신을 못차리는 나를 집에까지 업어다 놓고는 어머니에게 된통 혼이나고 달아났는데 이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들이 못하는짓이 없다. 그렇게 되려면 뭐하러 술은 마셨더냐. 마시려면 잘마셔야지」하며 모질게 꾸지람을 했고 술에 학을 뗀 나는 한동안 술이라는 말도 떠올리기 싫었다.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졸후 집을 나와 기지촌 무명악사로 떠돌때였다. 여기저기서 온갖 수모를 당하던 시절 소주한잔이 유일한 벗이었고 외로움, 괴로움을 잊을수 있는 수단이었다.
「김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던 71년 여름 리더 김대환, 이남이등과 함께 부산해운대백사장에서 소주를 놓고 마시던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마신 술은 소주 12병인데 내 주력(酒歷) 38년에 가장 많이 마셨고 술맛도 기가 막혔다. 당시 김대환은 드러머에서 매니저로 물러나 있었고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 그 자리는 새출발을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이야기와 소주로 밤을 새우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알려지자 「조용필은 모지방 공연에 갔다 소주 한박스를 다 비워버린 일이 있다」「소주됫병을 입도 안떼고 한번에 다마셔버렸다더라」는 과장된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실상 그렇게 많이 마시진 못한다. 아마 그렇다면 위장이 강철로 됐어도 다녹아버렸을 것이고 나는 알콜중독자가 돼도 중증이 됐을것이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잘어울려 항상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밤새도록 마시다보면 술병이 여남은개씩 쌓이는 것을 보게되는 일이 가끔있을뿐이다.
내 주위에는 유난히 술자리가 많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술을 좋아했다.
연예기자 이상벽씨나 개그맨 허참은 평소에 잘어울리는 「주당클럽」멤버들이다. 이상벽씨는 내가 무명밴드에서 뛰던시절 KBS라디오 드라마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러 히트시키자 처음으로 취재를 해갔던 기자였다. 첫인터뷰여서 인상이 깊게 남기도 했고 기자답게 냉철하고 날카로와 보인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정이 먼저 느껴졌다. 업무를 떠나서 나를 무척 걱정해주었고 솔직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원래 홍익대 미술대를 졸업한 미술학도였는데 언젠가 내 심벌마크를 직접 도안해 선물로 보내주는 정성을 보여주기도했다. 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 심벌마크까지 제작해준 그에게 고마와 어쩔줄 몰라했고 그는 『전공이 사장될 것 같아 한번 되살려본 것 뿐이다. 고마우면 술이나 한잔사라』고 껄껄 웃어댔다.
나는 이후 그를 「형님」으로 불렀다. 허참은 74년 내가 「조용필과 그림자」의 리더로 활동할때 종로2가 초저녁 고고클럽 「웨스턴」에 함께 출연하면서 알고 지냈는데 방송에 거의 동시에 진출, 그는 TBC TV 「쇼쇼쇼」의 사회를 맡았고 나는 그 프로에 자주 얼굴을 내밀면서 어울리곤 했다. 마치 입사동기같은 감정에서 서로 자신의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했고 술먹는 취향이 비슷해 자연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서로 말을 놓고 지내며 심한듯한 욕까지 스스럼없이 해댈 수 있는 그와의 술자리는 항상 즐겁기 그지없다.
일이 끝나고 「오늘 한번 뭉칩시다」하고 의기가 투합하면 잘가는 술집은 반포아파트근처의 소주집이다. 주로 해물안주를 파는 술집인데 나를 비롯해 상벽이형, 허참 모두 얼굴이 잘 알려져있어 한동안 그곳에오는 손님들에게 「술공격」을 많이 당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손님들이 「어이, 조용필선생, 내 술 한잔 받으쇼」하고 술을 권하곤 하는데 그도 항상 조금씩이 아니라 맥주잔이나 대접에 그득 따라주고 한사람이 그러면 그 일행 모두가 너도나도 술을 따라주는데 혹 「이제, 그만 됐다고」고 하면 간혹 「건방진 사람, 내 성의를 무시하기냐」며 시비를 거는일도 있었다.
우리 「주당클럽」은 결국 아이디어를 내 「진주집」 한귀퉁이에 칸막이를 세우고 스티로폴을 깔아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주인아주머니도 우리가 나타나면 반가와하긴 하면서도 다른 취객들이 성가시게 굴지않을까 염려하던차에 잘 생각했다며 대찬성했다.
요즘에는 나는 나대로 외국공연이 많고 상벽이형과 허참도 방송프로그램과 밤무대등으로 인해 시간을 맞추기 힘들지만 작년, 재작년만해도 지겹도록 같이 술을 마셔댔다.
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80년초에는 방송이나 공연만 끝나면 소위 룸살롱으로 달려가 술을 마셨다. 지나치게 여자를 좋아해 호스티스가 있는곳에 가야만 술이 넘어간다고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얼굴이 알려지다보니 남이 안보이는 장소에 들어가 편히 술자리를 갖기 위해서였다. 또 공연 주최측이나 방송 관계자들도 일이 끝나면 「알아서」룸살롱으로 데려갔었다.
룸살롱을 많이 드나들다보니 심지어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씨와 내가 룸살롱에 함께 술을 마시러간 일이 있었고 그곳 마담과 호스티스들이 극진히 대접했는데 잘놀고난 후 의당 주어야할 팁을 주지않았다는 것이다. 왈 「한국최고의 코미디언과 가수가 와서 쇼를 보여준거나 마찬가지인데 너희들이 오히려 관람료를 내야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 나가버렸다는 이야기.
일부 설익은 연예인들이 술집에 가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모르나 나는 결코 이런 일이 없었고 인기에 금이 갈지도 모르는 행동은 할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큰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생각할 일이 많은 최근에는 여자가 나오는 술집은 잘안가게 된다. 여자들에 신경을 쓰다보면 대화가 끊어지기 쉽고 깊은 생각에 빠지기 어렵기때문이다. 내 음악의 많은 부분은 술에 젖어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명악사시절, 무대에 오르기전 초조감을 달래기위해, 일이 끝난후 피로를 풀기위해 마시던 술은 언제부터인가 악상을 떠올리는데도 도움을 주고있다.
방에 혼자 앉아 브랜디를 홀짝홀짝 마시며 음악에 관한 구상을 하는것이 요즘에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공연관계로 외국에 나가면 내가 술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 사람들은 고급술을 선물했고 술선물이 없을때는 공항면세점에서 브랜디를 사와 집에는 술끊어질날이 없었는데 이를 계속 비우다보니 특히 브랜디를 아주 입맛을 붙인것이다.
새로운 곡을 준비할 때는 습관처럼 브랜디술잔이 손에 들리워져 있었고 순간순간 묘한 아이디어가 반짝이곤 한다.
최근곡 「한강」의 경우도 술을 마시다가 한강이 개발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리되면 옛날 한강은 사라지는셈 아니냐」는 아쉬운감이 들어 바로 작곡에 들어갔었고 「1987년 서울」도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전옥숙(全玉淑)여사(시네텔서울대표)와의 술자리에서 지난해의 민주화 열기와 아픈 상처들은 잊을수 없는 시간들이라며 열을 올리다가 악상이 떠올라 만들어보았고 전여사가 작사를 맡아 주었던 곡이다.
전여사는 80년 KBS 진필홍PD를 통해 연락이 와 저항시인 김지하(金芝河)씨와 함께 전씨가 경여하던 카페 「기러기」(여의도)에서 처음 만나 알게됐는데 문학, 음악, 미술, 철학 등 모든면에서 대선배로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않는 분이다.
전여사는 지난 75년부터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에 소개하는 문학계간지 「한국문예」를 출간하는등 일본어에 능하고 최근 MBC TV 6.25특집극 「캄푸치아 그 지옥의 기록」을 비롯한 MBC TV 「베스트셀러극장」 KBS TV 「TV문학관」등 드라마제작과 용평팝페스티벌을 기획하는등 특히 대중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있는데 나의 일본진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일본가수 다니무라 신지에게 선사한 내 노래 「생명」(生命)의 역사(譯詞)를 해주었고 84년 KBS와 아사히TV공동제작 「한일선상토론」비디오물에는 나를 게스트 싱어로 밀어주었다.
김지하(金芝河)씨와도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긴급조치와 계엄법 위반으로 복역하다 80년 형집행 정지로 출감했을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김지하씨는 감옥에 있을때 쥐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내 노래들을 즐겼는데 「한풀이」를 하는듯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 밖으로 나가면 꼭 만나보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는 면에서 나와 공통점이 있었고 판소리에도 일가견이 있어 처음 만났을때부터 마음이 잘맞았다.
80년초 한동안은 상당히 자주만나 술자리를 가졌는데 사상, 정치문제이야기는 하지않았고 주로 술과 여자이야기였다. 김지하씨가 원주에 있을때 집으로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그는 항상 하얀모시옷을 입고 난초를 그리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까지 계속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술을 들며 『어떤면에서 우리들은 광대이다.
조금씩 형태는 다르지만 바닥을 흐르는 맥은 같다』며 남다른 친밀감을 보였다. 우리는 판소리를 토대로해 그의 노랫말을 가사로 옮겨적는 작업을 시도한적도 있었는데 주변의 복잡한문제, 건강상태등으로 인해 중단해야했다. 요즘은 전남 해남에서 글을 쓰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주변환경이 정리되고 시간이 나는대로 한번 찾아가볼 작정이다.
술에 얽힌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건강만은 걱정말라는 말은 팬들에게 꼭하고 싶다. 술은 분명 내게 힘을 주었으면 주었지 해를 끼치지않았다. 어느때 전남 광주에 지방공연을 가서 그곳분들이 어떻게 술을 계속 먹였는지 술에 만취해 혀가 꼬부라진 상태로 무대에 섰는데 제대로 노래가 안돼 「앗따, 광주술인심이 너무 좋아 이리됐응게, 이해해주쇼」하고는 공연을 계속하자 더욱 환호하던 팬들이 기억난다
[12]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창밖의 여자」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방송가에서는 나를 뻔질나게 찾아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송과 인연을 끊고 있었고 대마초 가수로 활동이 묶인 주원인이 방송에 출연하면서부터라는 생각이 들어 선뜻 출연제의에 응해지지 않았다.
대마초 가수로 묶여있다 해금된 79년말 각방송에서는 「대마초가수」를 출연시키는 쇼프로를 너도나도 제작해 내보냈는데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않자 내가 다시 은퇴를 고려하고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모신문에는 『대중연예인이란 인기의 정상에 있을때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짧고 굵게 봉사한뒤 스스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조만간 가요계를 떠나겠다』라는 하지도 않은 내 코멘트가 근사하게(?) 실리기까지 했다.
그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가요계를 떠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멋있게 팬들에게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였다.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골똘히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을때 TV에「대마초가수」라며 나오는 가수들은 내 눈에 무척 초라하고 촌스러워 보였던 것 같다.
나는 우선 새로운 팀을 조직하기로 했다. 「조용필과 그림자」는 「그림자」라는 말이 이미지가 마치 암울했던 기간을 말해주는것 같아 과감히 버리고 「위대한 탄생」을 만들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위대하게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었고 일부 촌스럽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이 그룹은 지금까지도 국내 최고수준의 팀일 것이라고 자신한다.
유재학씨를 매니저로하여 스트링에 「조용필과 그림자」로 함께뛰던 김청산(金晴山), 드럼에 「검은나비」출신의 이건태(李建泰), 피아노에 「동방의 빛」에서 피아노를 치던 이호준(李鎬俊), 기타에 미8군무대출신 곽경욱(郭景煜), 베이스에 「밥벌레」란 그룹에서 활동하던 김택환(金澤煥)으로 구성된 이팀은 당시 밤무대에서 한가닥씩 하다온 멤버들만 고른 최정예의 그룹이었다. 이름 그대로 「위대한 탄생」을 하기위해 우리는 무척 열심히 연습했다.
연습장소는 북한산 밑에 있는 허름한 창고로 정해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야말로 「지옥훈련」이라고나 할까. 대마초로 평가절하돼있는 나와 그동반자인 「위대한 탄생」은 뭔가 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당분간 밤무대도 서지 않고 음악성 향상에만 전념하던 우리들은 돈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국내최고의 그룹을 만들자는 희망으로 배고프지도 않았다.
우리는 뿌듯한 가슴을 안고 창고에서 나온 이후에도 한동안 밤무대출연은 되도록 하지않았다. 당시 국내그룹가운데 고정적인 밤무대출연을 안하는 팀은 「위대한 탄생」뿐이었다. 음악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자는 것이 우리들의 지론이었다.
어느 무대에서도 1시간이상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레퍼토리가 짜여져있던 우리들은 「창밖의 여자」를 비롯, 「단발머리」「촛불」등의 음악을 직접 연주해 취입했다. 레코드사에선 악기를 다양하게 구사하는 오케스트라밴드를 이용하라고 했지만 나는 「위대한 탄생」의 연주가 아니면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만큼 이 그룹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나의 새로운 이미지 부각에 온신경을 곤두세우고있었기 때문이다.
관악기를 배제하고 전자건반악기를 많이 사용하는등 다른 록그룹에 비해 훨씬 진보된 사운드를 고수하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디스크가 히트하기 시작하면서 간헐적으로 시도해보는 라이브무대에 팬들의 수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해 「대마초해금」후 첫방송출연을 하기로했다. 내가 TV에 비치면 촌스럽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사라졌고 자신감이 섰기때문이었다. 80년 구정때 KBS TV 진필홍 PD가 맡고있던 「가요대행진」 출연은 팬들로부터 대단한 반응을 얻게 된다.
나는 무척 인복(人福)이 많은 사람이다. 오늘날 이 정도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의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목소리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를 놓고 따진다면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겠다. 내 성대구조는 그렇게 노래를 잘부르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던 것 같다. 피를 토하는 훈련이 없었던들, 마음놓고 뛸 무대가 주어지지않았던들 「창밖의 여자」「돌아와요 부산항에」「한오백년」이 어떻게 나올수 있었겠는가.
그런 노력들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을 들라면 몇날며칠을 두고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운데서 몇사람만이라도 꼭 밝히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위대한 탄생」을 조직했을때 그는 자기 그룹을 갖고 있으면서도 중요한 공연이 있을때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보조싱어로 출연해주었고 바쁠때는 운전기사에 가방 비서까지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기지촌을 돌며 「파이브 핑거스」에서 무명악사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김정수는 당시 「미키」라는 4인조그룹의 리드싱어로 꽤 이름이 알려져있었고 돈 많은 집의 장남으로 음악은 취미활동으로 할 정도로 풍족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돈이 없어 먹을 것도 제대로 못먹고 하숙비가 없어 이리저리 쫓겨다니던 나는 부럽다못해 그가 미워지기까지 했었다.
그는 노래도 잘불러 「나는 언제나 저렇게 잘 부를수있나」하고 생각하다가 한번 테스트를 부탁, 그의 팀과 함께 노래를 불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잘되질 않았고 그로부터 「노래는 안되겠다. 기타나 계속치는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순간 항상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자존심이 크게 상해 「반드시 노래만은 너를 따라잡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가 가수가 되려는 생각을 먹은적이 있다면 아마 이때가 아닐까.
그후 김정수와는 나혼자만의 감정(?)때문에 만나길꺼렸고 그도 71년 군에 입대, 기지촌에서의 만남은 더이상 없었다.
다시 만난 것은 「김트리오」를 조직. 이태원에 진출했을 때였다. 「라이더스」라는 그룹에서 싱어로 활동하고 있던 그를 본 나는 당시 기지촌 시절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실력이 향상돼있어 자신있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후 우리들은 서로 찾아다니며 자주 만났다. 나이 한살차이로 생각이 비슷했고 음악적인 취향도 같았던 우리는 음악이야기로 여러날 밤을 새우곤 했다.
대마초사건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낼때도 그는 자주 찾아와 「곧 좋은소식이 있을게다. 설령 무대에 서지못해도 음악인생이 끝나는건 아니지않느냐」고 위로의 말을 했다. 그다운 이야기였지만 내겐 커다란 위안이 됐다.
대마초가수 해금조치이후 김정수는 나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다년간의 실전경험을 가진 그는 레코딩이나 스케줄 관리에 빈틈없는 솜씨를 발휘했다.
그보다 더욱 큰 힘이 됐던 것은 외로움을 자주 타는 내게 없어서는 안될 친구였다는 것이다. 일이 잘 안풀리는 날이면 밤새도록 앉아 소주를 마시며 얘기 상대가 돼 주었다. 월급도 안받고 운전기사에서 매니저 역할까지 다해주자 주위에서는 「네일도 바쁜데 뭣때문에 남의 뒤치다꺼리에 시간을 쓰고있냐」「시간이 그렇게 남으면 네 연습이나 해라」는 핀잔이 그에게 쏟아졌다. 사실 나로서도 이해가 안갈때가 있을 정도로 그의 도움은 헌신적이었다. 그는 그럴때마다 「친구가 바쁠때 서로 도와야하는건 당연한 일 아니냐」며 반문하곤했다.
나의 방송 진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부산 MBC의 김양화PD와 광주 MBC 소수옥PD이다. 두사람은 햇병아리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줄곧 지켜보며 실의에 빠졌을때는 용기를 북돋워주려 애를 썼고 슬플때는 함께 붙잡고 울어주던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가수로서 나의 가능성을 점치고 나를 밀어준 것이었고 나역시 지방방송사의 유력한 쇼PD들은 잘알고 지내야겠다는 생각에 자주 만났던 것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인간성에 끌렸다. 솔직담백하고 꾸밈없는 성격의 그들에게 나는 모든것을 털어놓지 않을수 없었다.
김양화(44)씨를 만난것은 내가 「김트리오」의 리드기타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71년이었다. 당시 우리는 「사랑의 자장가」「하얀 모래의 꿈」「님이여」등 6곡을 수록한 앨범을 출반했으나 별반응은 얻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김양화씨는 「김트리오」가 무대에 서던「XO」라는 고고클럽의 사장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 자주 찾아왔는데 「사랑의 자장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스테이지가 끝난후 『그노래 참 좋다. 열심히 해봐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원래 가수지망생이었다고 털어 놓은 그는 『나는 소질이 부족해 가수를 계속하지 못했지만 너만은 반드시 성공해 내 몫까지 해줬으면 좋겠다』며 술도 사주고 잠자리가 마땅치 않을때는 며칠동안을 그의 집에서 지내게하기도 했다. 대마초로 활동이 묶여 암울하던시절, 답답한 마음에 부산으로 찾아가면 『그래, 잘왔다. 우리 한번 미쳐볼까』하며 술집으로 데려가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고는 엉엉 울어댔다. 술이 취해 잠들어있으면 『자빠져서 자는것 보면 완전히 얼란(아이)데 그래 큰일을 당했으니 우짜노』하며 혀를 쯧쯧차면서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는 큰형님이나 아버지와 같았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가수 해금뉴스가 발표됐을때 제일 먼저 축하전화를 해준 사람도 그였다. 『야, 필이가. 니봤나, 한턱내그라』하며 즐거워하던 그의 목소리는 잊을수 없다. 이후 80년부터 지난해까지 그가 맡고있던 라디오 쇼프로 「그랜드쇼」에는 한번도 빠지지않고 출연했다. 올해들어 눈코뜰새없이 바쁜 해외 공연스케줄로 만나지못했다가 지난달 틈을 내 부산으로 휴가차 내려갔다 연락했는데 위장병으로 병원의사로부터 「금주령」 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 한번 미쳐보자』며 계속 술을 들이켰다. 아마 다음날 탈이 나도 많이 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부산MBC FM제작부장을 맡고있는 김양화씨가 경상도 지방의 대부라면 광주 MBC FM편성부장 소수옥(44)씨는 전라도 지방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화통하고 가식이 없는 소수옥씨는 광주지방공연이나 방송관계로 내려가면 꼭 만나는 사이인데 「수옥이형」하면 술이 생각날 정도로 엄청나게 마셔댔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광주공연을 내려갔다가 사흘연속으로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밤낮도 안가리고 술마시고 잠들었다 깨나면 또 술이 있었다.
그것은 소수옥씨의 생활방식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정이 떨어질 정도로 함께 술을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에 녹아난 것은 나였지만 술마시고난후 『아가야, 필이 술깨게 박카스 좀 사와라, 잉』하며 심부름시키던 구수한 목소리와 진하게 느껴지는 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가『산넘으면 또 산이 있는법인게, 일 잘풀린다고 너무 마음놓진말고 열심히해라』하던 말은 내 음악인생에 항상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방송쪽에서 KBS TV 진필홍 PD역시 내게 큰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79년 4월 대마초 가수의 방송활동금지가 풀리기전 대한극장에서 첫리사이틀을 열었을때 누구나 달갑지않게 생각하던 쇼기획을 자청해서 해주었다. 공연은 예상대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실의에 빠졌는데 「한술 밥에 배부르겠냐, 한번 더 해보자」며 격려해주었고 결국 자신이 맡고있던 KBS TV 「가요대행진」에 「조용필아워」를 마련해주는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79년 4월 대한극장에서 가졌던 내 리사이틀은 애초부터 잘되리라고 생각하고 시작한것은 아니었다.
78년말부터 방송활동을 제외하고 일부 활동이 허용됐다곤 했지만 대마초가수는 대마초가수였고 당시 사회분위기가 가수들의 공연을 보며 기분낼 상황이 아니였다. 신학기에 접어든 대학가는 여기저기서 데모를 벌였고 정가는 극도의 불안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공연기간도 4월 5일부터 9일까지 닷새나 잡았으니 여간한 「똥배짱」이 아니었던 듯하다.
오랜 공백기간을 가지는동안 팬들이 나를 잊어간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싫어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팬들의 반응을 피부로 느껴보고 싶은 욕망이 무엇보다 앞섰던 것이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기획, 연출을 맡았던 KBS TV 진필홍 PD 매니저 유재학씨등은 묵묵히 일을 도와주었다.
허참이 사회를 보았고 윤시내, 춘희등 국내가수가 찬조출연 했으며 필리핀의 로메즈시스터와 에다버니타가 나왔는데 송파산대놀이까지 가미하는등 아이디어는 있는대로 다 내놓은 셈이었다. 그러나 흥행은 비참할 정도로 실패.
대마초로 잠시 팬들과 거리를 두고는 있었다해도 ?瀏린逃沮?팬들이 나를 잊어버리다니. 연예인의 인기란 눈만 잠깐 다른데로 돌려도 사라진다는 매정함을 절실히 느낀 계기였다.
「가수생활은 끝났다. 팬 없는 가수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깊은 실의에 빠져있을때 다시 힘을 북돋아준 사람은 국가대표축구선수 이회택씨의 소개로 알게된 박춘근(43)씨였다. 현재 무역회사 「도일통상」의 사장으로 있는 그는 그 당시에도 조그만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하루하루를 한숨만 쉬며 지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지내면 사람이 병든다. 음악은 잠시 쉬더라도 무슨 일이든 하고는 있어야지』하며 음악외에는 아는 것이라고는 없는 나를 자기회사에 이름을 올려놓곤 월급까지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염치도 없는 일이었지만 답답한 심정에 혼자서 술을 마시다 돈이 떨어져 『춘근이형, 나 술집에 있는데 술값이 없어』하고 불러대면 언제 어디든간에 달려나와 술친구가 돼주었다. 왠지 남같지않게 따뜻하게 느껴지던 그는 『음악을 이대로 포기해야할까봐』하고 내가 말을 뱉을 때마다 『야 임마.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냐. 너는 행복한거야. 음악하지않고 다른 일하면 지금보다 나을것 같냐』하며 오히려 나보다 더 흥분해 술을 들이켜곤 했다.
연예계종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와 혈연, 학연, 지연관계도 없는 그와 지금까지 오?친분을 유지하고 있음은 남들이 보면 이해가 잘안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가 기쁠때 누구보다도 기뻐해주고 슬플때는 피눈물까지도 쏟는 사람이다. 얼마전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있을때도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와 옆에서 밤을 새우며 염려해 주었다.
그와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얽혀있지않다. 그저 형과 동생같이 순수한 우애만이 있을 뿐이다. 내 주위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 아닐수 없다. 내가 아무리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들 어찌 그 많은 어려움을 겪고 이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 나는 항상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들을 만나게 해주신 것을.
나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은 모르지만 내 일을 자신의 일같이 관심를 가져주는 팬들도 더욱 고맙다. 중국공연을 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힘내세요, 오빠』하고 외치던 목소리, 이혼소식이 나가자 『오빠, 인기떨어지면 어떡해요』하며 전화에 대고 울먹이던 목소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병실창가밑에서 꽃다발을 들고 밤늦게까지 서있다 돌아가던 모습들.
요즘 너무 힘들어 음악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나를 지켜보는 많은 눈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 그들을 실망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13] 미국 카네기홀 초청공연
대마초가수의 쇼크에서 벗어나 재기의 몸짓을 보일무렵인 80년초 미국 카네기홀 초청공연이라는 빅이벤트가 내 앞에 던져졌다.
한국일보社 로스앤젤레스 지사가 재미교포 위문을 위해 매년 실시하던 이 행사는 더없이 좋은 컴백무대임이 분명했지만 무척 망설이지않을 수 없었다. 「창밖의 여자」가 한달간 동아방송 라디오 연속극주제가로 방송이 되고 레코드로 나온것이 3월말이었고 막 레코드 반응을 얻을 무렵인 6월에 국내가요계를 비워둔다는 것은 인기생명을 건 일대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도 가느냐, 안가느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아무도 무우쪽 자르듯이 단호히 결정을 내려주지못하고 내 눈치만 살폈다. 잘못하면 재기불능의 상황으로 몰고 갈수도 있을 이 일의 결정은 나자신만이 할수있었다.
나는 결국 부딪쳐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꿈의 무대인 카네기홀에 언제 서보겠느냐는 생각이 앞섰고 당시 카네기홀이 너무 낡아 허물고 다시 짓는다는 소문이 돌아 슈퍼스타들의 체취가 담긴 카네기홀은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작용했던 것이다. 또 미국에 가 계시던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결혼을 한후 미국뉴욕으로 이민가 살고있던 큰누이(종희), 둘째누이(종남)가 79년 부모님을 초청해 「효도관광」을 시켜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마초가수 징계가 풀려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이렇게 떳떳이 미국까지 가서 무대에 서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여드리고 싶었다.
첫출국이자 첫해외공연. 공연이 결정되고 나서 떠나기전 며칠간은 가슴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팝의 본고장 미국에서 눈이 높아질대로 높아져있는 교포들에게 나정도로 통할수 있을까.
6월 9일. 마음만 급했지 제대로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이 출국 일자를 맞고 말았다. 김세환, 고영수, 이수미 등이 동행이었다. 모두 대마초가수로 묶여있다 빛을 본 가수들. 출연진을 짜다보니 공교롭게도 그렇게된 것이었지만 비슷한 처지였던 우리들은 동료의식을 더욱 진하게 느껴 「한번 멋있게 해내자」고 손을 굳게 잡았다.
국내에 가수없이 노래만 남을 「창밖의 여자」등 뒷일은 매니저 유재학씨와 전속레코드사인 지구레코드사에 모두 맡기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까지 발붙이고 살아온 땅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역사적인 순간, 나는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기념으로 메모를 남겼다.
「난생처음 외국이라는 곳, 미국을 간다. 아침부터 전화가 마구 울려댔다. 잘다녀오라는 전화. 정말 가는걸까? 짐은 어제 벌써 다 챙겨놓았지만 또 확인했다. 엄마, 아버지는 뉴욕에 계시고 누나, 형들도 다있는데 이제 며칠 있으면 만난다. 가자 비행기야. 빨리가자 아버지 엄마있는 미국으로 어서가자!」
로스앤젤레스 슈라인오디토리엄을 시작으로 꿈의 무대 카네기홀, 샌프란시스코, 하와이등 13개 도시 순회공연이 45일동안 계속됐다.
처음가서는 입국 절차를 잘몰라 헤매던 일, 기내에서 식사할 때 손가락을 씻는 핑거보울이라는 물을 마셔버려 창피를 당하던일 등 외국에 처음 나갔을때 남들이 겪는다는 실수를 계속했고 특히 워싱턴공연 때는 김세환과 골프공을 튀겨 누가 더높이 올라가나 내기를 하다 골프공이 왼쪽눈에 정통으로 맞아 멍이 드는 바람에 이후공연은 선글라스를 쓴채 해야했다.
그러나 공연은 모두 기대이상의 대성황을 이뤘다. 첫공연지였던 로스앤젤레스 슈라인오디토리엄에서는 6천5백석의 객석을 가득메운 관객들이 「창밖의 여자」에 대단한 호응을 보였다. 나온지 얼마되지도 않은 「창밖의 여자」를 교포들이 잘알고 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워낙 매스컴을 자주탔고 히트한지 오래돼 미국에 이민간 교포들도 꽤 알고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창밖의 여자」는 아는 사람이 없을줄 알았다.
처음에는 레퍼토리에서도 빠져있었으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자 눈물까지 흘리며 따라부르던 교포들의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여러분들은 잘모르시겠지만 최신곡을 들려드리는것이 예의인것 같아 「창밖의 여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갑자기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고 나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재미교포들의 고국왕래가 빈번해 이미 「창밖의 여자」가 미국교포 사회에서도 히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나는 잠시 뭐가 잘못돼 야유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지기도했다.
나는 얼떨떨한 정신을 가다듬고 「창밖의 여자」를 멋지게 뽑았고 관객들은 또 한차례 눈물을 흘렸다. 앙코르가 계속 터져나왔고 「단발머리」와 「한오백년」까지도 신청곡으로 요청됐다.
카네기홀 무대에 섰던 감격은 대단했다. 5층으로 만들어진 객석은 으리으리하기 짝이 없었고 우리가 공연하기 바로전 프랭크 시내트라가 공연했다는 말을 듣고는 연주생활중 드물게 긴장하여 떨어봤다. 카네기홀 공연 역시 교포들로 만원을 이뤘고 부모님, 형제들이 찾아와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공연이 끝난후 모처럼 아버지로부터 『고생했다』는 말을 들어보았고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나는 『한국에 돌아갈때 같이 가요. 이제부터는 속안썩여 드리고 편히 모실께요』하고는 부모님의 손을 꼭 잡았다.
가는 곳마다 내 노래가 의외의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한 나는 더있다가라는 형제들의 만류. 교포들의 공연제의를 뿌리치고 귀국을 서둘렀다. 「창밖의 여자」의 인기를 빨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자고나니 유명해져 있었다」라는 말대로 하와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조용필 축 귀국」이라는 플래카드와 꽃다발을 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속사인 지구레코드사의 임정수사장이 『축하하네, 「창밖의 여자」가 1위야』하고 악수를 청했다. 도착시간이 새벽녘이라 큰형이나 누이동생정도 마중나와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의외로 빨리 그동안 국내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창밖의 여자」는 전국 TV, 라디오 인기순위프로에서 최고 14주에서 최저 7주 이상씩 1위를 하고 있었고 앨범도 40만장이 팔리고 있다고 유재학씨가 말해주었다. 10만장이 팔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훨씬 능가하는 기록이었다.
「됐어. 이제 시작이야」
나는 본격적으로 공연과 새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그해 추석에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펼친 단독콘서트는 폭발적인 인기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저녁시간의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고 예매한 입장권은 진작에 다 팔려 나갔다. 불과 1년전만해도 대마초가수로 온갖수모를 다 당하던 내가 언제 이렇게 됐나 신기할 정도였다. 79년 4월 대한극장에서 「똥배짱」으로 강행, 실패를 봤던 단독리사이틀과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후 여세를 몰아 지방순회공연을 계속했고 팬들은 계속 불어났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려면 여학생팬들이 사인을 받으려고 가로막아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일이 가는 곳마다 일어났다. 인기라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꿈에도 되리라고 생각못했던 「인기가수」라는 것이 됐구나』
그해 9월 27일 있었던 16회 방송가요대상에서 나는 마침내 가수의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최우수남자가수상에 인기가수상, 주제가작곡상등 3관왕의 기록을 세우며.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손...」
트로피와 꽃다발을 안고 수상축하곡 「창밖의 여자」를 부르던 나는 감격에 목이 메어 노래를 계속할 수 없었다.
[14]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야지
80년은 내가 언제 대마초사건 같은 암울한 시절이 있었느냐는듯 눈코뜰새없이 바빠졌고 즐거운 일들이 계속됐다.
TBC TV방송가요대상에서 3관왕을 차지한데 이어 TBC주최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금상, MBC TV 10대가수상에서의 3관왕 등을 휩쓸었고 공연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
순식간에 가요계의 슈퍼스타로 떠오르자 영화계에서도 관심을 갖고 출연교섭을 해왔다. 이제 막 가수라는것이 무엇인지 알듯한데 영화배우까지? 처음에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농담하지 말라」는 식으로 영화출연 제의를 거절했으나 태창영화사에서는 내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꾸며 보겠다며 집요하게 접근해왔다. 영화사가 제시한 개런티는 2천만원. 이 액수는 당시 최고였다. 스타급 인기 여배우들이 그해 기록을 경신한 것이 고작 1천만원대였고 남자는 코미디언 이주일이 1천3백만원으로 기록을 깨뜨린 직후였다.
나를 그렇게까지 평가해준 영화사에 미안한 마음조차 들었고 난생 처음 만져보는 거금에 조금씩 생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래부르는 것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인데 영화를 해보면 큰 공부가 되겠지」
또 스타부재로 불황의 늪에 빠져있던 국내영화가에 새바람을 불어넣겠다는 맹랑한 꿈까지 품게된 나는 결국 영화사의 제의에 응하기로 했다.
이형표(李亨杓)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유지인이 내 상대역이었다. 제목은 「그사랑 한이 되어」로 결정됐다.
그러나 강한 의욕과 달리 뭐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배우로 치면 햇병아리에 불과한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에 분장을 하는 것부터 쉬운일이 아니었다. 방송국분장실에서 가끔 연기자들이 분장하는 모습을 봤던 기억을 떠올려 분칠을 하고 나섰더니 유지인과 함께 출연하는 박근형씨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래도 내깐에는 괜찮게 됐다 싶었는데 프로들이 보기에는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보였던 것이다.
결국 박근형씨가 분장을 고쳐줘 촬영에 임할 수 있었고 이후 다른 배우들이 돌아가며 내 분장을 손봐주었다.
당초 시나리오를 보니 키스신은 물론 베드신까지 들어있었다. 키스신만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여배우와 옷을 벗고 침대에서 몸을 비빈다니. 상상만해도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사정해서 베드신은 뺐으나 키스신만은 어쩔 수 없이 강행해야 했다. 기지촌의 무명가수로 떠돌다 「혜련」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그녀에게 힘을 얻어 가수로서 성공을 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키스신마저 없으면 막말로 「앙꼬없는 찐빵」이었다.
영화촬영에 들어가기전 나는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키스신이나 베드신은 프로배우가 아니라서 힘들것 같다」고 대답해 일은 더욱 꼬였다. 이를 잘못 이해한 모기자가 「조용필, 키스신거부」라고 크게 써버리는 바람에 상대역 유지인이 토라져버린 때문이었다.
한동안 대사이외는 말도 안하려는 그녀를 「그 기사는 잘못나간거니 오해말아달라」고 달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그러나 산넘어 산이라고 키스신장면은 계속 NG가 났다. 유지인이 눈을 감고 내 입술에 갖다대려는 순간이면 꼭 고개가 옆으로 돌려졌다. 아름다운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녀가 싫을리가 없는데 마치 무릎을 톡치면 다리가 들리듯 반사적인 동작이 나왔다. 감독에게 「조형, 당신은 지금 연기하는게 아냐. 실제로 유양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해봐」라는 말을 여러차례 들은 후에야 간신히 해낼 수 있었다. 「사랑하는 혜련이, 사랑하는 혜련이...」눈을 감고 중얼중얼거리다가 「쪽」.
가슴이 후련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사람들은 왜 그렇게들 보기 좋아하는지.
키스신이 무사히 넘어갔지만 그다음은 내가 팬들과 영영 헤어질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고등학교때 음악을 못하게하는 부모님들이 미워 몇번이고 자살을 기도한적이 있지만 타의로 그것도 음악때문이 아닌 이유로 죽고 싶진 않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그 순간은 약보름간에 걸친 지방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되돌아온 직후였다. 그 다음 장면은 내가 공연도중 무대위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 응급치료를 받는 내용이었는데 빡빡한 촬영스케줄로 피로해있던 나는 마침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연기를 하는데 링게르를 실제로 맞으면 더욱 실감날 것이 아니냐고 감독에게 부탁, 촬영세트로 이용된 모산부인과의사에게 링게르를 맞기로 했다.
의사에게 팔뚝을 맡긴 나는 「아, 이제 한숨자볼까」하고 눈을 감았고 감독의 목소리, 스태프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후 약 20분쯤 지났을까. 마치 몸이 붕떠오르는듯한 기분이 들었고 생각대로 손발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정신이 차차 몽롱해지며 그이후는 기억이 없다. 깨어나보니 의사, 간호원들이 빙둘러서 있었고 이형표감독, 유지인, 박근형씨등이 근심어린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냐고 간신히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물어보니 이감독이『여보게, 자네 죽을뻔했어』했고 스태프들이 『황천길에 한번 갔다 돌아왔으니 오래 살겠네』하며 두런두런거렸다.
이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나의 응급치료장면을 한컷 찍은뒤 다음장면촬영에 대한 의논을 하기위해 나를 남겨둔채 모두들 밖에 나가있었는데 그사이 쇼크부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원래 알레르기를 잘 일으키는 등 과민성체질인데다 링게르가 빠른 속도로 들어가 미처 몸이 흡수를 못했던 것이다.
다음촬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병실로 들어온 이감독은 나를 무심코 흔들어 깨웠는데 일어나기는커녕 숨을 몰아쉬고 몸에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었다고 한다. 눈꺼풀을 뒤집어보니 흰자위뿐. 기겁을 한 이감독은 의사와 간호원을 급히불렀고 산소호흡, 심장마사지에 캄프르주사까지 맞고 나서야 한참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온갖 소동을 다벌인뒤에야 간신히 촬영을 끝냈는데 기간은 겨우 18일간. 나의 레코딩, 공연스케줄이 계속 밀려있었기 때문에 짜여진 초스피드의 일정이었다. 아마 18일로 촬영을 끝낸것도 기록은 기록일 것이다.
「그사랑 한이 되어」는 그 이듬해인 81년초 서울중앙극장에서 개봉됐는데 시사회를 보고는 「다시는 영화를 하지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연기였지만 어쩌면 그렇게 촌스러워 보이는지. 나를 위해 함께 공연해준 유지인이나 박근형 선배에게 죄송스런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죽을고비까지 넘겼으니. 이는 내게 영화에는 눈돌리지 말고 음악에만 전념하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시사회평은 의외로 좋게 나왔다. 나는 쑥스럽기 짝이 없었다.
태창영화사 대표 임원식씨의 평에 따르면 「조용필의 연기는 노래실력 못지않다. 그런데다가 열의가 대단해 연기자로서도 대성할 수 있다. 다음 영화는 가수역이 아닌 본격 청춘애정물에 출연시키고 싶다」고 한것.
물론 그 영화는 비교적 흥행에 성공을 했다. 당초 불황의 영화가에 활력소가 되자는 맹랑한(?) 생각을 했던 나의 목표가 어느정도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영화 「그사랑 한이되어」를 보러온 관객들이 아니라 가수로서 내 팬들이 찾아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까지 좋게나자 각영화사들은 너도나도 출연제의를 해왔다. 김응천감독은 내노래 「촛불」을 주제로한 영화를 만들자고 했고 모영화사에서는 「단발머리」가 좋겠다고 교섭해왔다.
그러나 나는 모두 거절했다.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야지」내겐 음악뿐이었다. 지금도 영화에는 전혀 출연할 생각이 없다.
다 읽으셧나요???설마^^
내 인생에서 술을 빼놓고 생활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조용필」에서 술을 떼어놓으면 뭔가 멋이 덜한 느낌이 든다고들 한다. 그만큼 나는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도 많다.
작은 체구에 술은 씨름 선수이상으로 많이 마셔대니 「저러다간 더이상 못버티지」하며 주위에서는 여러 분들이 걱정하곤 하며 또 그렇게 술을 갖다 부으면서도 끄떡없는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물론 최근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일에 술이 일조를 하지않았다고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이혼, 북경공연등 내 인생의 엄청난 사건들이 한순간에 몰려 받은 스트레스와 그 이후에 한시도 쉴틈없이 계속되는 일정에 치였던 때문이지 결코 술이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술이 몸을 조금 피곤하게 했을순 있지만 정신은 자꾸만 새롭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 다음으로 술을 좋아한다. 술은 순간 순간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며 사람들과 보다 가까와질수 있게한다. 인간이 발명한 약가운데 가장 부작용이 없는 약이 술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술을 처음 입에 댄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잘 못하셨지만 명절때는 한잔씩 들곤하셨는데 술상머리에 붙어 앉아있는 나에게 「이놈, 너도 한잔 먹어볼래」하고 술을 건네줘 받아먹던 기억이난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애들한테 웬 술을 주냐」며 눈을 흘기셨고 아버지는 「남자는 술을 먹을줄 알아야 된다」며 자꾸 술을 권해 먹고는 취해서(?) 잠들곤했다. 술이 거나해지신 아버지는 「바우고개」를 즐겨불렀고 항상 잠결에 그노래가 귓전을 스쳤다. 내가 지금 술을 잘하는것은 이때의 훈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있는데 반친구가 막걸리 한통을 가지고와 먹자고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몇모금씩 나눠마시고 자다 내려온 일이 있었고 이후 가끔 악동들끼리 모여 「시음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고2 여름방학 때였던가, 시골(경기도 화성)집에 놀러갔었는데 이광남이라고하는 고향친구가 반갑다며 막소주 한되를 들고 찾아와 주거니받거니하며 다마셔버렸고 그대로 인사불성이 돼 사흘동안 꼼짝못하고 누워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나보다 술이 세던지 정신을 못차리는 나를 집에까지 업어다 놓고는 어머니에게 된통 혼이나고 달아났는데 이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들이 못하는짓이 없다. 그렇게 되려면 뭐하러 술은 마셨더냐. 마시려면 잘마셔야지」하며 모질게 꾸지람을 했고 술에 학을 뗀 나는 한동안 술이라는 말도 떠올리기 싫었다.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졸후 집을 나와 기지촌 무명악사로 떠돌때였다. 여기저기서 온갖 수모를 당하던 시절 소주한잔이 유일한 벗이었고 외로움, 괴로움을 잊을수 있는 수단이었다.
「김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던 71년 여름 리더 김대환, 이남이등과 함께 부산해운대백사장에서 소주를 놓고 마시던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때 마신 술은 소주 12병인데 내 주력(酒歷) 38년에 가장 많이 마셨고 술맛도 기가 막혔다. 당시 김대환은 드러머에서 매니저로 물러나 있었고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 그 자리는 새출발을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이야기와 소주로 밤을 새우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알려지자 「조용필은 모지방 공연에 갔다 소주 한박스를 다 비워버린 일이 있다」「소주됫병을 입도 안떼고 한번에 다마셔버렸다더라」는 과장된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실상 그렇게 많이 마시진 못한다. 아마 그렇다면 위장이 강철로 됐어도 다녹아버렸을 것이고 나는 알콜중독자가 돼도 중증이 됐을것이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잘어울려 항상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밤새도록 마시다보면 술병이 여남은개씩 쌓이는 것을 보게되는 일이 가끔있을뿐이다.
내 주위에는 유난히 술자리가 많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술을 좋아했다.
연예기자 이상벽씨나 개그맨 허참은 평소에 잘어울리는 「주당클럽」멤버들이다. 이상벽씨는 내가 무명밴드에서 뛰던시절 KBS라디오 드라마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러 히트시키자 처음으로 취재를 해갔던 기자였다. 첫인터뷰여서 인상이 깊게 남기도 했고 기자답게 냉철하고 날카로와 보인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정이 먼저 느껴졌다. 업무를 떠나서 나를 무척 걱정해주었고 솔직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원래 홍익대 미술대를 졸업한 미술학도였는데 언젠가 내 심벌마크를 직접 도안해 선물로 보내주는 정성을 보여주기도했다. 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 심벌마크까지 제작해준 그에게 고마와 어쩔줄 몰라했고 그는 『전공이 사장될 것 같아 한번 되살려본 것 뿐이다. 고마우면 술이나 한잔사라』고 껄껄 웃어댔다.
나는 이후 그를 「형님」으로 불렀다. 허참은 74년 내가 「조용필과 그림자」의 리더로 활동할때 종로2가 초저녁 고고클럽 「웨스턴」에 함께 출연하면서 알고 지냈는데 방송에 거의 동시에 진출, 그는 TBC TV 「쇼쇼쇼」의 사회를 맡았고 나는 그 프로에 자주 얼굴을 내밀면서 어울리곤 했다. 마치 입사동기같은 감정에서 서로 자신의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했고 술먹는 취향이 비슷해 자연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서로 말을 놓고 지내며 심한듯한 욕까지 스스럼없이 해댈 수 있는 그와의 술자리는 항상 즐겁기 그지없다.
일이 끝나고 「오늘 한번 뭉칩시다」하고 의기가 투합하면 잘가는 술집은 반포아파트근처의 소주집이다. 주로 해물안주를 파는 술집인데 나를 비롯해 상벽이형, 허참 모두 얼굴이 잘 알려져있어 한동안 그곳에오는 손님들에게 「술공격」을 많이 당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손님들이 「어이, 조용필선생, 내 술 한잔 받으쇼」하고 술을 권하곤 하는데 그도 항상 조금씩이 아니라 맥주잔이나 대접에 그득 따라주고 한사람이 그러면 그 일행 모두가 너도나도 술을 따라주는데 혹 「이제, 그만 됐다고」고 하면 간혹 「건방진 사람, 내 성의를 무시하기냐」며 시비를 거는일도 있었다.
우리 「주당클럽」은 결국 아이디어를 내 「진주집」 한귀퉁이에 칸막이를 세우고 스티로폴을 깔아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주인아주머니도 우리가 나타나면 반가와하긴 하면서도 다른 취객들이 성가시게 굴지않을까 염려하던차에 잘 생각했다며 대찬성했다.
요즘에는 나는 나대로 외국공연이 많고 상벽이형과 허참도 방송프로그램과 밤무대등으로 인해 시간을 맞추기 힘들지만 작년, 재작년만해도 지겹도록 같이 술을 마셔댔다.
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80년초에는 방송이나 공연만 끝나면 소위 룸살롱으로 달려가 술을 마셨다. 지나치게 여자를 좋아해 호스티스가 있는곳에 가야만 술이 넘어간다고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얼굴이 알려지다보니 남이 안보이는 장소에 들어가 편히 술자리를 갖기 위해서였다. 또 공연 주최측이나 방송 관계자들도 일이 끝나면 「알아서」룸살롱으로 데려갔었다.
룸살롱을 많이 드나들다보니 심지어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씨와 내가 룸살롱에 함께 술을 마시러간 일이 있었고 그곳 마담과 호스티스들이 극진히 대접했는데 잘놀고난 후 의당 주어야할 팁을 주지않았다는 것이다. 왈 「한국최고의 코미디언과 가수가 와서 쇼를 보여준거나 마찬가지인데 너희들이 오히려 관람료를 내야할 것 아니냐」고 말하고 나가버렸다는 이야기.
일부 설익은 연예인들이 술집에 가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모르나 나는 결코 이런 일이 없었고 인기에 금이 갈지도 모르는 행동은 할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큰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생각할 일이 많은 최근에는 여자가 나오는 술집은 잘안가게 된다. 여자들에 신경을 쓰다보면 대화가 끊어지기 쉽고 깊은 생각에 빠지기 어렵기때문이다. 내 음악의 많은 부분은 술에 젖어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명악사시절, 무대에 오르기전 초조감을 달래기위해, 일이 끝난후 피로를 풀기위해 마시던 술은 언제부터인가 악상을 떠올리는데도 도움을 주고있다.
방에 혼자 앉아 브랜디를 홀짝홀짝 마시며 음악에 관한 구상을 하는것이 요즘에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공연관계로 외국에 나가면 내가 술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 사람들은 고급술을 선물했고 술선물이 없을때는 공항면세점에서 브랜디를 사와 집에는 술끊어질날이 없었는데 이를 계속 비우다보니 특히 브랜디를 아주 입맛을 붙인것이다.
새로운 곡을 준비할 때는 습관처럼 브랜디술잔이 손에 들리워져 있었고 순간순간 묘한 아이디어가 반짝이곤 한다.
최근곡 「한강」의 경우도 술을 마시다가 한강이 개발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리되면 옛날 한강은 사라지는셈 아니냐」는 아쉬운감이 들어 바로 작곡에 들어갔었고 「1987년 서울」도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전옥숙(全玉淑)여사(시네텔서울대표)와의 술자리에서 지난해의 민주화 열기와 아픈 상처들은 잊을수 없는 시간들이라며 열을 올리다가 악상이 떠올라 만들어보았고 전여사가 작사를 맡아 주었던 곡이다.
전여사는 80년 KBS 진필홍PD를 통해 연락이 와 저항시인 김지하(金芝河)씨와 함께 전씨가 경여하던 카페 「기러기」(여의도)에서 처음 만나 알게됐는데 문학, 음악, 미술, 철학 등 모든면에서 대선배로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않는 분이다.
전여사는 지난 75년부터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에 소개하는 문학계간지 「한국문예」를 출간하는등 일본어에 능하고 최근 MBC TV 6.25특집극 「캄푸치아 그 지옥의 기록」을 비롯한 MBC TV 「베스트셀러극장」 KBS TV 「TV문학관」등 드라마제작과 용평팝페스티벌을 기획하는등 특히 대중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있는데 나의 일본진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일본가수 다니무라 신지에게 선사한 내 노래 「생명」(生命)의 역사(譯詞)를 해주었고 84년 KBS와 아사히TV공동제작 「한일선상토론」비디오물에는 나를 게스트 싱어로 밀어주었다.
김지하(金芝河)씨와도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긴급조치와 계엄법 위반으로 복역하다 80년 형집행 정지로 출감했을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김지하씨는 감옥에 있을때 쥐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내 노래들을 즐겼는데 「한풀이」를 하는듯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 밖으로 나가면 꼭 만나보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는 면에서 나와 공통점이 있었고 판소리에도 일가견이 있어 처음 만났을때부터 마음이 잘맞았다.
80년초 한동안은 상당히 자주만나 술자리를 가졌는데 사상, 정치문제이야기는 하지않았고 주로 술과 여자이야기였다. 김지하씨가 원주에 있을때 집으로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그는 항상 하얀모시옷을 입고 난초를 그리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까지 계속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술을 들며 『어떤면에서 우리들은 광대이다.
조금씩 형태는 다르지만 바닥을 흐르는 맥은 같다』며 남다른 친밀감을 보였다. 우리는 판소리를 토대로해 그의 노랫말을 가사로 옮겨적는 작업을 시도한적도 있었는데 주변의 복잡한문제, 건강상태등으로 인해 중단해야했다. 요즘은 전남 해남에서 글을 쓰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주변환경이 정리되고 시간이 나는대로 한번 찾아가볼 작정이다.
술에 얽힌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건강만은 걱정말라는 말은 팬들에게 꼭하고 싶다. 술은 분명 내게 힘을 주었으면 주었지 해를 끼치지않았다. 어느때 전남 광주에 지방공연을 가서 그곳분들이 어떻게 술을 계속 먹였는지 술에 만취해 혀가 꼬부라진 상태로 무대에 섰는데 제대로 노래가 안돼 「앗따, 광주술인심이 너무 좋아 이리됐응게, 이해해주쇼」하고는 공연을 계속하자 더욱 환호하던 팬들이 기억난다
[12]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창밖의 여자」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방송가에서는 나를 뻔질나게 찾아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송과 인연을 끊고 있었고 대마초 가수로 활동이 묶인 주원인이 방송에 출연하면서부터라는 생각이 들어 선뜻 출연제의에 응해지지 않았다.
대마초 가수로 묶여있다 해금된 79년말 각방송에서는 「대마초가수」를 출연시키는 쇼프로를 너도나도 제작해 내보냈는데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않자 내가 다시 은퇴를 고려하고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모신문에는 『대중연예인이란 인기의 정상에 있을때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짧고 굵게 봉사한뒤 스스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조만간 가요계를 떠나겠다』라는 하지도 않은 내 코멘트가 근사하게(?) 실리기까지 했다.
그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가요계를 떠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멋있게 팬들에게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였다.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골똘히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을때 TV에「대마초가수」라며 나오는 가수들은 내 눈에 무척 초라하고 촌스러워 보였던 것 같다.
나는 우선 새로운 팀을 조직하기로 했다. 「조용필과 그림자」는 「그림자」라는 말이 이미지가 마치 암울했던 기간을 말해주는것 같아 과감히 버리고 「위대한 탄생」을 만들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위대하게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었고 일부 촌스럽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이 그룹은 지금까지도 국내 최고수준의 팀일 것이라고 자신한다.
유재학씨를 매니저로하여 스트링에 「조용필과 그림자」로 함께뛰던 김청산(金晴山), 드럼에 「검은나비」출신의 이건태(李建泰), 피아노에 「동방의 빛」에서 피아노를 치던 이호준(李鎬俊), 기타에 미8군무대출신 곽경욱(郭景煜), 베이스에 「밥벌레」란 그룹에서 활동하던 김택환(金澤煥)으로 구성된 이팀은 당시 밤무대에서 한가닥씩 하다온 멤버들만 고른 최정예의 그룹이었다. 이름 그대로 「위대한 탄생」을 하기위해 우리는 무척 열심히 연습했다.
연습장소는 북한산 밑에 있는 허름한 창고로 정해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야말로 「지옥훈련」이라고나 할까. 대마초로 평가절하돼있는 나와 그동반자인 「위대한 탄생」은 뭔가 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당분간 밤무대도 서지 않고 음악성 향상에만 전념하던 우리들은 돈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국내최고의 그룹을 만들자는 희망으로 배고프지도 않았다.
우리는 뿌듯한 가슴을 안고 창고에서 나온 이후에도 한동안 밤무대출연은 되도록 하지않았다. 당시 국내그룹가운데 고정적인 밤무대출연을 안하는 팀은 「위대한 탄생」뿐이었다. 음악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자는 것이 우리들의 지론이었다.
어느 무대에서도 1시간이상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레퍼토리가 짜여져있던 우리들은 「창밖의 여자」를 비롯, 「단발머리」「촛불」등의 음악을 직접 연주해 취입했다. 레코드사에선 악기를 다양하게 구사하는 오케스트라밴드를 이용하라고 했지만 나는 「위대한 탄생」의 연주가 아니면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만큼 이 그룹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나의 새로운 이미지 부각에 온신경을 곤두세우고있었기 때문이다.
관악기를 배제하고 전자건반악기를 많이 사용하는등 다른 록그룹에 비해 훨씬 진보된 사운드를 고수하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디스크가 히트하기 시작하면서 간헐적으로 시도해보는 라이브무대에 팬들의 수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해 「대마초해금」후 첫방송출연을 하기로했다. 내가 TV에 비치면 촌스럽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사라졌고 자신감이 섰기때문이었다. 80년 구정때 KBS TV 진필홍 PD가 맡고있던 「가요대행진」 출연은 팬들로부터 대단한 반응을 얻게 된다.
나는 무척 인복(人福)이 많은 사람이다. 오늘날 이 정도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의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목소리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를 놓고 따진다면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겠다. 내 성대구조는 그렇게 노래를 잘부르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던 것 같다. 피를 토하는 훈련이 없었던들, 마음놓고 뛸 무대가 주어지지않았던들 「창밖의 여자」「돌아와요 부산항에」「한오백년」이 어떻게 나올수 있었겠는가.
그런 노력들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을 들라면 몇날며칠을 두고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운데서 몇사람만이라도 꼭 밝히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위대한 탄생」을 조직했을때 그는 자기 그룹을 갖고 있으면서도 중요한 공연이 있을때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보조싱어로 출연해주었고 바쁠때는 운전기사에 가방 비서까지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기지촌을 돌며 「파이브 핑거스」에서 무명악사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김정수는 당시 「미키」라는 4인조그룹의 리드싱어로 꽤 이름이 알려져있었고 돈 많은 집의 장남으로 음악은 취미활동으로 할 정도로 풍족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돈이 없어 먹을 것도 제대로 못먹고 하숙비가 없어 이리저리 쫓겨다니던 나는 부럽다못해 그가 미워지기까지 했었다.
그는 노래도 잘불러 「나는 언제나 저렇게 잘 부를수있나」하고 생각하다가 한번 테스트를 부탁, 그의 팀과 함께 노래를 불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잘되질 않았고 그로부터 「노래는 안되겠다. 기타나 계속치는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순간 항상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자존심이 크게 상해 「반드시 노래만은 너를 따라잡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가 가수가 되려는 생각을 먹은적이 있다면 아마 이때가 아닐까.
그후 김정수와는 나혼자만의 감정(?)때문에 만나길꺼렸고 그도 71년 군에 입대, 기지촌에서의 만남은 더이상 없었다.
다시 만난 것은 「김트리오」를 조직. 이태원에 진출했을 때였다. 「라이더스」라는 그룹에서 싱어로 활동하고 있던 그를 본 나는 당시 기지촌 시절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실력이 향상돼있어 자신있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후 우리들은 서로 찾아다니며 자주 만났다. 나이 한살차이로 생각이 비슷했고 음악적인 취향도 같았던 우리는 음악이야기로 여러날 밤을 새우곤 했다.
대마초사건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낼때도 그는 자주 찾아와 「곧 좋은소식이 있을게다. 설령 무대에 서지못해도 음악인생이 끝나는건 아니지않느냐」고 위로의 말을 했다. 그다운 이야기였지만 내겐 커다란 위안이 됐다.
대마초가수 해금조치이후 김정수는 나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다년간의 실전경험을 가진 그는 레코딩이나 스케줄 관리에 빈틈없는 솜씨를 발휘했다.
그보다 더욱 큰 힘이 됐던 것은 외로움을 자주 타는 내게 없어서는 안될 친구였다는 것이다. 일이 잘 안풀리는 날이면 밤새도록 앉아 소주를 마시며 얘기 상대가 돼 주었다. 월급도 안받고 운전기사에서 매니저 역할까지 다해주자 주위에서는 「네일도 바쁜데 뭣때문에 남의 뒤치다꺼리에 시간을 쓰고있냐」「시간이 그렇게 남으면 네 연습이나 해라」는 핀잔이 그에게 쏟아졌다. 사실 나로서도 이해가 안갈때가 있을 정도로 그의 도움은 헌신적이었다. 그는 그럴때마다 「친구가 바쁠때 서로 도와야하는건 당연한 일 아니냐」며 반문하곤했다.
나의 방송 진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부산 MBC의 김양화PD와 광주 MBC 소수옥PD이다. 두사람은 햇병아리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줄곧 지켜보며 실의에 빠졌을때는 용기를 북돋워주려 애를 썼고 슬플때는 함께 붙잡고 울어주던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가수로서 나의 가능성을 점치고 나를 밀어준 것이었고 나역시 지방방송사의 유력한 쇼PD들은 잘알고 지내야겠다는 생각에 자주 만났던 것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인간성에 끌렸다. 솔직담백하고 꾸밈없는 성격의 그들에게 나는 모든것을 털어놓지 않을수 없었다.
김양화(44)씨를 만난것은 내가 「김트리오」의 리드기타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71년이었다. 당시 우리는 「사랑의 자장가」「하얀 모래의 꿈」「님이여」등 6곡을 수록한 앨범을 출반했으나 별반응은 얻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김양화씨는 「김트리오」가 무대에 서던「XO」라는 고고클럽의 사장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 자주 찾아왔는데 「사랑의 자장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스테이지가 끝난후 『그노래 참 좋다. 열심히 해봐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원래 가수지망생이었다고 털어 놓은 그는 『나는 소질이 부족해 가수를 계속하지 못했지만 너만은 반드시 성공해 내 몫까지 해줬으면 좋겠다』며 술도 사주고 잠자리가 마땅치 않을때는 며칠동안을 그의 집에서 지내게하기도 했다. 대마초로 활동이 묶여 암울하던시절, 답답한 마음에 부산으로 찾아가면 『그래, 잘왔다. 우리 한번 미쳐볼까』하며 술집으로 데려가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고는 엉엉 울어댔다. 술이 취해 잠들어있으면 『자빠져서 자는것 보면 완전히 얼란(아이)데 그래 큰일을 당했으니 우짜노』하며 혀를 쯧쯧차면서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는 큰형님이나 아버지와 같았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가수 해금뉴스가 발표됐을때 제일 먼저 축하전화를 해준 사람도 그였다. 『야, 필이가. 니봤나, 한턱내그라』하며 즐거워하던 그의 목소리는 잊을수 없다. 이후 80년부터 지난해까지 그가 맡고있던 라디오 쇼프로 「그랜드쇼」에는 한번도 빠지지않고 출연했다. 올해들어 눈코뜰새없이 바쁜 해외 공연스케줄로 만나지못했다가 지난달 틈을 내 부산으로 휴가차 내려갔다 연락했는데 위장병으로 병원의사로부터 「금주령」 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 한번 미쳐보자』며 계속 술을 들이켰다. 아마 다음날 탈이 나도 많이 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부산MBC FM제작부장을 맡고있는 김양화씨가 경상도 지방의 대부라면 광주 MBC FM편성부장 소수옥(44)씨는 전라도 지방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화통하고 가식이 없는 소수옥씨는 광주지방공연이나 방송관계로 내려가면 꼭 만나는 사이인데 「수옥이형」하면 술이 생각날 정도로 엄청나게 마셔댔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광주공연을 내려갔다가 사흘연속으로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밤낮도 안가리고 술마시고 잠들었다 깨나면 또 술이 있었다.
그것은 소수옥씨의 생활방식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정이 떨어질 정도로 함께 술을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에 녹아난 것은 나였지만 술마시고난후 『아가야, 필이 술깨게 박카스 좀 사와라, 잉』하며 심부름시키던 구수한 목소리와 진하게 느껴지는 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가『산넘으면 또 산이 있는법인게, 일 잘풀린다고 너무 마음놓진말고 열심히해라』하던 말은 내 음악인생에 항상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방송쪽에서 KBS TV 진필홍 PD역시 내게 큰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79년 4월 대마초 가수의 방송활동금지가 풀리기전 대한극장에서 첫리사이틀을 열었을때 누구나 달갑지않게 생각하던 쇼기획을 자청해서 해주었다. 공연은 예상대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실의에 빠졌는데 「한술 밥에 배부르겠냐, 한번 더 해보자」며 격려해주었고 결국 자신이 맡고있던 KBS TV 「가요대행진」에 「조용필아워」를 마련해주는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79년 4월 대한극장에서 가졌던 내 리사이틀은 애초부터 잘되리라고 생각하고 시작한것은 아니었다.
78년말부터 방송활동을 제외하고 일부 활동이 허용됐다곤 했지만 대마초가수는 대마초가수였고 당시 사회분위기가 가수들의 공연을 보며 기분낼 상황이 아니였다. 신학기에 접어든 대학가는 여기저기서 데모를 벌였고 정가는 극도의 불안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공연기간도 4월 5일부터 9일까지 닷새나 잡았으니 여간한 「똥배짱」이 아니었던 듯하다.
오랜 공백기간을 가지는동안 팬들이 나를 잊어간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싫어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팬들의 반응을 피부로 느껴보고 싶은 욕망이 무엇보다 앞섰던 것이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기획, 연출을 맡았던 KBS TV 진필홍 PD 매니저 유재학씨등은 묵묵히 일을 도와주었다.
허참이 사회를 보았고 윤시내, 춘희등 국내가수가 찬조출연 했으며 필리핀의 로메즈시스터와 에다버니타가 나왔는데 송파산대놀이까지 가미하는등 아이디어는 있는대로 다 내놓은 셈이었다. 그러나 흥행은 비참할 정도로 실패.
대마초로 잠시 팬들과 거리를 두고는 있었다해도 ?瀏린逃沮?팬들이 나를 잊어버리다니. 연예인의 인기란 눈만 잠깐 다른데로 돌려도 사라진다는 매정함을 절실히 느낀 계기였다.
「가수생활은 끝났다. 팬 없는 가수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깊은 실의에 빠져있을때 다시 힘을 북돋아준 사람은 국가대표축구선수 이회택씨의 소개로 알게된 박춘근(43)씨였다. 현재 무역회사 「도일통상」의 사장으로 있는 그는 그 당시에도 조그만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하루하루를 한숨만 쉬며 지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지내면 사람이 병든다. 음악은 잠시 쉬더라도 무슨 일이든 하고는 있어야지』하며 음악외에는 아는 것이라고는 없는 나를 자기회사에 이름을 올려놓곤 월급까지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염치도 없는 일이었지만 답답한 심정에 혼자서 술을 마시다 돈이 떨어져 『춘근이형, 나 술집에 있는데 술값이 없어』하고 불러대면 언제 어디든간에 달려나와 술친구가 돼주었다. 왠지 남같지않게 따뜻하게 느껴지던 그는 『음악을 이대로 포기해야할까봐』하고 내가 말을 뱉을 때마다 『야 임마.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냐. 너는 행복한거야. 음악하지않고 다른 일하면 지금보다 나을것 같냐』하며 오히려 나보다 더 흥분해 술을 들이켜곤 했다.
연예계종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와 혈연, 학연, 지연관계도 없는 그와 지금까지 오?친분을 유지하고 있음은 남들이 보면 이해가 잘안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가 기쁠때 누구보다도 기뻐해주고 슬플때는 피눈물까지도 쏟는 사람이다. 얼마전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있을때도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와 옆에서 밤을 새우며 염려해 주었다.
그와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얽혀있지않다. 그저 형과 동생같이 순수한 우애만이 있을 뿐이다. 내 주위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 아닐수 없다. 내가 아무리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들 어찌 그 많은 어려움을 겪고 이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 나는 항상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들을 만나게 해주신 것을.
나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은 모르지만 내 일을 자신의 일같이 관심를 가져주는 팬들도 더욱 고맙다. 중국공연을 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힘내세요, 오빠』하고 외치던 목소리, 이혼소식이 나가자 『오빠, 인기떨어지면 어떡해요』하며 전화에 대고 울먹이던 목소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병실창가밑에서 꽃다발을 들고 밤늦게까지 서있다 돌아가던 모습들.
요즘 너무 힘들어 음악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나를 지켜보는 많은 눈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 그들을 실망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13] 미국 카네기홀 초청공연
대마초가수의 쇼크에서 벗어나 재기의 몸짓을 보일무렵인 80년초 미국 카네기홀 초청공연이라는 빅이벤트가 내 앞에 던져졌다.
한국일보社 로스앤젤레스 지사가 재미교포 위문을 위해 매년 실시하던 이 행사는 더없이 좋은 컴백무대임이 분명했지만 무척 망설이지않을 수 없었다. 「창밖의 여자」가 한달간 동아방송 라디오 연속극주제가로 방송이 되고 레코드로 나온것이 3월말이었고 막 레코드 반응을 얻을 무렵인 6월에 국내가요계를 비워둔다는 것은 인기생명을 건 일대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도 가느냐, 안가느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아무도 무우쪽 자르듯이 단호히 결정을 내려주지못하고 내 눈치만 살폈다. 잘못하면 재기불능의 상황으로 몰고 갈수도 있을 이 일의 결정은 나자신만이 할수있었다.
나는 결국 부딪쳐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꿈의 무대인 카네기홀에 언제 서보겠느냐는 생각이 앞섰고 당시 카네기홀이 너무 낡아 허물고 다시 짓는다는 소문이 돌아 슈퍼스타들의 체취가 담긴 카네기홀은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작용했던 것이다. 또 미국에 가 계시던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결혼을 한후 미국뉴욕으로 이민가 살고있던 큰누이(종희), 둘째누이(종남)가 79년 부모님을 초청해 「효도관광」을 시켜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마초가수 징계가 풀려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이렇게 떳떳이 미국까지 가서 무대에 서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여드리고 싶었다.
첫출국이자 첫해외공연. 공연이 결정되고 나서 떠나기전 며칠간은 가슴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팝의 본고장 미국에서 눈이 높아질대로 높아져있는 교포들에게 나정도로 통할수 있을까.
6월 9일. 마음만 급했지 제대로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이 출국 일자를 맞고 말았다. 김세환, 고영수, 이수미 등이 동행이었다. 모두 대마초가수로 묶여있다 빛을 본 가수들. 출연진을 짜다보니 공교롭게도 그렇게된 것이었지만 비슷한 처지였던 우리들은 동료의식을 더욱 진하게 느껴 「한번 멋있게 해내자」고 손을 굳게 잡았다.
국내에 가수없이 노래만 남을 「창밖의 여자」등 뒷일은 매니저 유재학씨와 전속레코드사인 지구레코드사에 모두 맡기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까지 발붙이고 살아온 땅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역사적인 순간, 나는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기념으로 메모를 남겼다.
「난생처음 외국이라는 곳, 미국을 간다. 아침부터 전화가 마구 울려댔다. 잘다녀오라는 전화. 정말 가는걸까? 짐은 어제 벌써 다 챙겨놓았지만 또 확인했다. 엄마, 아버지는 뉴욕에 계시고 누나, 형들도 다있는데 이제 며칠 있으면 만난다. 가자 비행기야. 빨리가자 아버지 엄마있는 미국으로 어서가자!」
로스앤젤레스 슈라인오디토리엄을 시작으로 꿈의 무대 카네기홀, 샌프란시스코, 하와이등 13개 도시 순회공연이 45일동안 계속됐다.
처음가서는 입국 절차를 잘몰라 헤매던 일, 기내에서 식사할 때 손가락을 씻는 핑거보울이라는 물을 마셔버려 창피를 당하던일 등 외국에 처음 나갔을때 남들이 겪는다는 실수를 계속했고 특히 워싱턴공연 때는 김세환과 골프공을 튀겨 누가 더높이 올라가나 내기를 하다 골프공이 왼쪽눈에 정통으로 맞아 멍이 드는 바람에 이후공연은 선글라스를 쓴채 해야했다.
그러나 공연은 모두 기대이상의 대성황을 이뤘다. 첫공연지였던 로스앤젤레스 슈라인오디토리엄에서는 6천5백석의 객석을 가득메운 관객들이 「창밖의 여자」에 대단한 호응을 보였다. 나온지 얼마되지도 않은 「창밖의 여자」를 교포들이 잘알고 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워낙 매스컴을 자주탔고 히트한지 오래돼 미국에 이민간 교포들도 꽤 알고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창밖의 여자」는 아는 사람이 없을줄 알았다.
처음에는 레퍼토리에서도 빠져있었으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자 눈물까지 흘리며 따라부르던 교포들의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여러분들은 잘모르시겠지만 최신곡을 들려드리는것이 예의인것 같아 「창밖의 여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갑자기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고 나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재미교포들의 고국왕래가 빈번해 이미 「창밖의 여자」가 미국교포 사회에서도 히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나는 잠시 뭐가 잘못돼 야유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지기도했다.
나는 얼떨떨한 정신을 가다듬고 「창밖의 여자」를 멋지게 뽑았고 관객들은 또 한차례 눈물을 흘렸다. 앙코르가 계속 터져나왔고 「단발머리」와 「한오백년」까지도 신청곡으로 요청됐다.
카네기홀 무대에 섰던 감격은 대단했다. 5층으로 만들어진 객석은 으리으리하기 짝이 없었고 우리가 공연하기 바로전 프랭크 시내트라가 공연했다는 말을 듣고는 연주생활중 드물게 긴장하여 떨어봤다. 카네기홀 공연 역시 교포들로 만원을 이뤘고 부모님, 형제들이 찾아와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공연이 끝난후 모처럼 아버지로부터 『고생했다』는 말을 들어보았고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나는 『한국에 돌아갈때 같이 가요. 이제부터는 속안썩여 드리고 편히 모실께요』하고는 부모님의 손을 꼭 잡았다.
가는 곳마다 내 노래가 의외의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한 나는 더있다가라는 형제들의 만류. 교포들의 공연제의를 뿌리치고 귀국을 서둘렀다. 「창밖의 여자」의 인기를 빨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자고나니 유명해져 있었다」라는 말대로 하와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조용필 축 귀국」이라는 플래카드와 꽃다발을 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속사인 지구레코드사의 임정수사장이 『축하하네, 「창밖의 여자」가 1위야』하고 악수를 청했다. 도착시간이 새벽녘이라 큰형이나 누이동생정도 마중나와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의외로 빨리 그동안 국내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창밖의 여자」는 전국 TV, 라디오 인기순위프로에서 최고 14주에서 최저 7주 이상씩 1위를 하고 있었고 앨범도 40만장이 팔리고 있다고 유재학씨가 말해주었다. 10만장이 팔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훨씬 능가하는 기록이었다.
「됐어. 이제 시작이야」
나는 본격적으로 공연과 새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그해 추석에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펼친 단독콘서트는 폭발적인 인기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저녁시간의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고 예매한 입장권은 진작에 다 팔려 나갔다. 불과 1년전만해도 대마초가수로 온갖수모를 다 당하던 내가 언제 이렇게 됐나 신기할 정도였다. 79년 4월 대한극장에서 「똥배짱」으로 강행, 실패를 봤던 단독리사이틀과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후 여세를 몰아 지방순회공연을 계속했고 팬들은 계속 불어났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려면 여학생팬들이 사인을 받으려고 가로막아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일이 가는 곳마다 일어났다. 인기라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꿈에도 되리라고 생각못했던 「인기가수」라는 것이 됐구나』
그해 9월 27일 있었던 16회 방송가요대상에서 나는 마침내 가수의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최우수남자가수상에 인기가수상, 주제가작곡상등 3관왕의 기록을 세우며.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손...」
트로피와 꽃다발을 안고 수상축하곡 「창밖의 여자」를 부르던 나는 감격에 목이 메어 노래를 계속할 수 없었다.
[14]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야지
80년은 내가 언제 대마초사건 같은 암울한 시절이 있었느냐는듯 눈코뜰새없이 바빠졌고 즐거운 일들이 계속됐다.
TBC TV방송가요대상에서 3관왕을 차지한데 이어 TBC주최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금상, MBC TV 10대가수상에서의 3관왕 등을 휩쓸었고 공연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
순식간에 가요계의 슈퍼스타로 떠오르자 영화계에서도 관심을 갖고 출연교섭을 해왔다. 이제 막 가수라는것이 무엇인지 알듯한데 영화배우까지? 처음에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농담하지 말라」는 식으로 영화출연 제의를 거절했으나 태창영화사에서는 내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꾸며 보겠다며 집요하게 접근해왔다. 영화사가 제시한 개런티는 2천만원. 이 액수는 당시 최고였다. 스타급 인기 여배우들이 그해 기록을 경신한 것이 고작 1천만원대였고 남자는 코미디언 이주일이 1천3백만원으로 기록을 깨뜨린 직후였다.
나를 그렇게까지 평가해준 영화사에 미안한 마음조차 들었고 난생 처음 만져보는 거금에 조금씩 생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래부르는 것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인데 영화를 해보면 큰 공부가 되겠지」
또 스타부재로 불황의 늪에 빠져있던 국내영화가에 새바람을 불어넣겠다는 맹랑한 꿈까지 품게된 나는 결국 영화사의 제의에 응하기로 했다.
이형표(李亨杓)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유지인이 내 상대역이었다. 제목은 「그사랑 한이 되어」로 결정됐다.
그러나 강한 의욕과 달리 뭐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배우로 치면 햇병아리에 불과한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에 분장을 하는 것부터 쉬운일이 아니었다. 방송국분장실에서 가끔 연기자들이 분장하는 모습을 봤던 기억을 떠올려 분칠을 하고 나섰더니 유지인과 함께 출연하는 박근형씨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래도 내깐에는 괜찮게 됐다 싶었는데 프로들이 보기에는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보였던 것이다.
결국 박근형씨가 분장을 고쳐줘 촬영에 임할 수 있었고 이후 다른 배우들이 돌아가며 내 분장을 손봐주었다.
당초 시나리오를 보니 키스신은 물론 베드신까지 들어있었다. 키스신만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여배우와 옷을 벗고 침대에서 몸을 비빈다니. 상상만해도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사정해서 베드신은 뺐으나 키스신만은 어쩔 수 없이 강행해야 했다. 기지촌의 무명가수로 떠돌다 「혜련」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그녀에게 힘을 얻어 가수로서 성공을 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키스신마저 없으면 막말로 「앙꼬없는 찐빵」이었다.
영화촬영에 들어가기전 나는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키스신이나 베드신은 프로배우가 아니라서 힘들것 같다」고 대답해 일은 더욱 꼬였다. 이를 잘못 이해한 모기자가 「조용필, 키스신거부」라고 크게 써버리는 바람에 상대역 유지인이 토라져버린 때문이었다.
한동안 대사이외는 말도 안하려는 그녀를 「그 기사는 잘못나간거니 오해말아달라」고 달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그러나 산넘어 산이라고 키스신장면은 계속 NG가 났다. 유지인이 눈을 감고 내 입술에 갖다대려는 순간이면 꼭 고개가 옆으로 돌려졌다. 아름다운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녀가 싫을리가 없는데 마치 무릎을 톡치면 다리가 들리듯 반사적인 동작이 나왔다. 감독에게 「조형, 당신은 지금 연기하는게 아냐. 실제로 유양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해봐」라는 말을 여러차례 들은 후에야 간신히 해낼 수 있었다. 「사랑하는 혜련이, 사랑하는 혜련이...」눈을 감고 중얼중얼거리다가 「쪽」.
가슴이 후련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사람들은 왜 그렇게들 보기 좋아하는지.
키스신이 무사히 넘어갔지만 그다음은 내가 팬들과 영영 헤어질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고등학교때 음악을 못하게하는 부모님들이 미워 몇번이고 자살을 기도한적이 있지만 타의로 그것도 음악때문이 아닌 이유로 죽고 싶진 않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그 순간은 약보름간에 걸친 지방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되돌아온 직후였다. 그 다음 장면은 내가 공연도중 무대위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 응급치료를 받는 내용이었는데 빡빡한 촬영스케줄로 피로해있던 나는 마침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연기를 하는데 링게르를 실제로 맞으면 더욱 실감날 것이 아니냐고 감독에게 부탁, 촬영세트로 이용된 모산부인과의사에게 링게르를 맞기로 했다.
의사에게 팔뚝을 맡긴 나는 「아, 이제 한숨자볼까」하고 눈을 감았고 감독의 목소리, 스태프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후 약 20분쯤 지났을까. 마치 몸이 붕떠오르는듯한 기분이 들었고 생각대로 손발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정신이 차차 몽롱해지며 그이후는 기억이 없다. 깨어나보니 의사, 간호원들이 빙둘러서 있었고 이형표감독, 유지인, 박근형씨등이 근심어린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냐고 간신히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물어보니 이감독이『여보게, 자네 죽을뻔했어』했고 스태프들이 『황천길에 한번 갔다 돌아왔으니 오래 살겠네』하며 두런두런거렸다.
이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나의 응급치료장면을 한컷 찍은뒤 다음장면촬영에 대한 의논을 하기위해 나를 남겨둔채 모두들 밖에 나가있었는데 그사이 쇼크부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원래 알레르기를 잘 일으키는 등 과민성체질인데다 링게르가 빠른 속도로 들어가 미처 몸이 흡수를 못했던 것이다.
다음촬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병실로 들어온 이감독은 나를 무심코 흔들어 깨웠는데 일어나기는커녕 숨을 몰아쉬고 몸에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었다고 한다. 눈꺼풀을 뒤집어보니 흰자위뿐. 기겁을 한 이감독은 의사와 간호원을 급히불렀고 산소호흡, 심장마사지에 캄프르주사까지 맞고 나서야 한참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온갖 소동을 다벌인뒤에야 간신히 촬영을 끝냈는데 기간은 겨우 18일간. 나의 레코딩, 공연스케줄이 계속 밀려있었기 때문에 짜여진 초스피드의 일정이었다. 아마 18일로 촬영을 끝낸것도 기록은 기록일 것이다.
「그사랑 한이 되어」는 그 이듬해인 81년초 서울중앙극장에서 개봉됐는데 시사회를 보고는 「다시는 영화를 하지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연기였지만 어쩌면 그렇게 촌스러워 보이는지. 나를 위해 함께 공연해준 유지인이나 박근형 선배에게 죄송스런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죽을고비까지 넘겼으니. 이는 내게 영화에는 눈돌리지 말고 음악에만 전념하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시사회평은 의외로 좋게 나왔다. 나는 쑥스럽기 짝이 없었다.
태창영화사 대표 임원식씨의 평에 따르면 「조용필의 연기는 노래실력 못지않다. 그런데다가 열의가 대단해 연기자로서도 대성할 수 있다. 다음 영화는 가수역이 아닌 본격 청춘애정물에 출연시키고 싶다」고 한것.
물론 그 영화는 비교적 흥행에 성공을 했다. 당초 불황의 영화가에 활력소가 되자는 맹랑한(?) 생각을 했던 나의 목표가 어느정도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영화 「그사랑 한이되어」를 보러온 관객들이 아니라 가수로서 내 팬들이 찾아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까지 좋게나자 각영화사들은 너도나도 출연제의를 해왔다. 김응천감독은 내노래 「촛불」을 주제로한 영화를 만들자고 했고 모영화사에서는 「단발머리」가 좋겠다고 교섭해왔다.
그러나 나는 모두 거절했다.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야지」내겐 음악뿐이었다. 지금도 영화에는 전혀 출연할 생각이 없다.
다 읽으셧나요???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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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p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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