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게시판
(여성중앙 21) 대중 음악의 살아 숨쉬는 신화 - 조용필
취재·강은영 기자/사진·김정윤 기자, 예술의 전당 제공
국민가수, 대중가수의 보통명사, 작은 거인, 슈퍼스타…
그를 표현하는 말들에는 ‘최고’라는 그리고 ‘카리스마’라는, ‘신화’라는 단어가 낮게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예술의 전당에서 네 번째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그와의 특별한 조우.
※ 길
서울 시내의 교통 지옥은 결국 인터뷰 약속 시간보다 20여 분 늦게 가게 만들었다.
후다닥, 약속 장소인 역삼동 그의 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차분하게 기자를 맞는다.
조용필. 20세기 한국 최고의 가수로 누구나 인정하는 그는 여전히
젊은 ‘오빠’의 모습이다.
응접실에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춥다며 작업실로 옮기자고 한다.
작업실은 한결 따뜻하다.
낯익은 기타가 있고 신디사이저가 있고 여러 음악 기계들이 놓여 있다.
그는 소파에 몸을 푹 파묻더니 커피를 마신다.
그의 왼편에 놓여진 하얀 칠판에는 콘서트 콘티가 노래 위주로 쓰여져 있다.
군데군데 무대 장치에 대해 써놓은 빨간색 글귀들이, 콘서트에 임하는
그의 ‘전투적인’ 자세를 읽게 만든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 선 최초의 대중가수인 그의 연말 공연은 이번이 내리 네 번째.
그의 공연은 매년 숱한 클래식 공연을 제치고 예술의 전당 최고의 공연으로 꼽힐 정도로
대중적 인기와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공연은 이번에도 소리소문없이 거의 다 팔렸다.
이번 콘서트의 제목은 그의 히트곡명과 같은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메인 테마는 시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길’입니다.
‘공간의 이동’이기도 하면서, ‘시간의 변화’이기도 한 모티브예요.”
나지막한 목소리.
그의 음악에는 때로는 ‘좌절’ 하고 때로는 ‘희망’으로 가슴 부푼 우리들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조용필이 떠나는 길’은 그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 ‘우리들의 길’이기도 하다.
그는 아직도 공연을 앞두고 하루 8시간씩 연습을 한다.
“무대를 절반으로 나누는 거예요. 왼쪽에 조명이 비치다가 싹 꺼지면,
오른쪽에 불이 확 들어오면서 내가 나타나는 거죠.”
인터뷰를 시작한 이래 피우기 시작한 줄담배는 여전하다.
공연 준비에 피곤했는지 입술이 부르텄다.
폭발하는 성량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그의 입술엔 터졌다가 마른 상처가 남아 있다.
12월 7일부터 1주일간 총7회 진행되는 콘서트 준비는 거의 다 됐다는 설명이다.
챙겨야 할 세부적인 것들만 남아 있다는 말에서 자신감이 묻어난다.
닥쳐서 준비하기보다는 여유있게 미리 아이템들을 준비하기 때문이란다.
이번 무대의 가장 큰 특징은 ‘평면 무대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
입체적인 공간연출과 드라마틱한 장면전환을 통해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의 무대 시스템이 최대한 활용될 계획이다.
특히 뮤지컬 제작의 꿈을 버리지 않는 조용필의,
그간의 무대경험과 아이디어가 공연 곳곳에 들어가 있다.
“전 세계에 나처럼 공연하는 가수는 없을 거예요.
그냥 나가서 노래하는 게 아니라, 공연 연출을 한 편의 스토리처럼,
뮤지컬처럼 하는 거죠.”
해마다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온 조용필의 공연 아이디어는 대부분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다.
조용필은 이 공연을 위해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들을 모조리 봤다.
‘거미여인의 키스’,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같은 뮤지컬은 10여 회를 봤을 정도.
“이런 공연을 하는 자체가 재미있고 보람을 느껴요.
물론 이것은 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팬들은 제게 용기를 주고 자부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의 팬들은 세대를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고 충성심이 높다.
그의 팬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조용필 기념관을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뜨겁다.
그에 대한 모든 것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혀를 내두를 정도.
※ 인생
그가 밴드 ‘파이브 핑거스’로 데뷔한 것이 1968년 말. 내년이면 데뷔 35년이다.
강산이 바뀐 횟수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이른바 조용필 시대인 70~80년대만 해도
어느덧 ‘그때 그 시절’로 꾸며지고 있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대목.
“34년… 이렇게 생각하면 무척 긴 시간이지만 정작 내가 가수생활한 지 34년이
되었다고 하니 ‘참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음악도 미숙한 부분이 많고.
그때 만든 노래를 들으면 ‘지금 같으면…”하고 후회도 하죠.”
80년에 냈던 ‘창밖의 여자’를 들어보면 소름이 끼친다.
내가 왜 저렇게 힘들게 노래를 불렀을까.
저런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왜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받았을까…. 생각 끝에 결론을 얻었다.
모든 노래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창밖의 여자’는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
노래였고,
가슴 깊숙이 숨어 있는 한을 뽑아 올리지 않으면 미쳐 버렸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는 것을.
가수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은 지난 34년에 대해 그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화려한 무대 인생을 산 그가 지난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중요한 것은 지금이고 미래라고 생각해요.
옛날 일은 다 흘려 보내는 것 아닌가요.
왕년에 내가 가수왕을 열한 번 했다든지,
그때 우리집 앞에는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들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 생각 오래 할수록 병만 든다고 명쾌하게 한마디로 정리해버리는 조용필.
오래 전, 그러니까 처음 인기라는 것을 얻을 때부터 독하게 마음 먹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미끄러질 때가 올 것이라고. ‘가요무대’에 쟁쟁했던 선배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가 바로 저런 것이라고 자신 속에 있는 자만심을 죽였다.
그의 34년 장수의 비결로, 많은 이들은 ‘느림의 철학’을 꼽는다.
최정상에 있을 때인 87년 스스로 가수왕을 반납하는 등 속도를 늦춰왔다.
“물론 방송에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틀어주면 웬만한 노래는 다 히트하죠.
그러나 난 자유롭고 싶었어요. 방송에 끌려다니다가는 내 노래가 단명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마침 외국을 돌아다니며 대중과 직접 만나는 콘서트의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그때 천천히 가자고 다짐했어요.”
물론 쉽지 않았다.
완전히 이 길로 들어서게 되는 데 1, 2년 아니 3, 4년은 걸린 것 같다.
지금은 방송이 활동의 1%도 차지하지 않는다.
그동안 낸 앨범들이 거의 모두 큰 히트를 기록,
대중의 흐름을 읽는 비밀이 있을 법하지만 그런 건 없단다.
그냥 자신의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맡겨둔 결과다.
판소리 실험이나 가성 실험도 그런 것이고 요즘은 뮤지컬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할 뿐이라는 것.
가수가 아닌 자연인 조용필의 34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당대 최고 스타와의 염문, 첫 결혼의 실패 등 결코 순탄치 않았던 생활이었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팔자였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은 억지로 되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아내
”나이 드는 게 이런 건가 봐요. 결혼 9년째인데 서로 나이가 있으니까 연애하는 기분은
없지만 이젠 옆에 없으면 허전해요.
딱히 뭘 챙겨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없으면 불안해집니다.”
그에게 느껴지는 편안함과 여유, 자신감은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연유한다.
동갑내기 아내 안진현씨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나이 먹으면 헤어져 살기 힘들다는 고백에선 아내밖에 모르는 남자가 느껴진다.
마흔네 살의 나이로 94년 결혼한 아내는 미국에서의 일을 많이 줄였지만 요즘도 일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그는 “그 사람은 일 안 하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라고 설명했다.
미국 메릴랜드에도 집이 있지만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미국은 외로워요.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끼리 살아야죠.
여기가 편해요.
와이프랑 외식도 하고, 부부 동반 모임이 있으면 같이 어울리고 그래요.”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가 ‘미국식’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남편은 천상 한국 여자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과 결혼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아내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 그를 즐겁게 한다.
미국에선 그녀가 모든 반찬을 직접 만든다.
남편의 노래 중에 ‘꿈’ ‘친구여’를 좋아하는 아내는 자동차에 오르면
남편의 음악 테이프를 틀고서야 차를 출발시킨다.
“사람들도 그러고 점쟁이도 그러는데 우리 부부가 천생연분이래요.
점쟁이 얘기가 나는 나무고 와이프는 흙이랍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이 돼요.
가끔 와이프랑 절에 가면 우리 부부 행복하게 해달라, 와이프 건강하게 해달라,
나도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공연 때마다 아내가 함께 했지만 이번 공연에 아내는 참석하지 못한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예술의 전당 공연에는 매년 참석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오지 못한다는 것.
“미국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얼마 전부터 조용필씨 아내 안진현씨가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하자 조금 놀라는 표정.
그는 “그 얘기는 어떻게 들었어요?” 하며 “많이 아픈 것은 아니고 조금 아프다”고 했다.
“암투병 소문까지 돌았다”고 하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버린다.
“암이면 내가 어떻게 여기서 공연을 준비할 수 있겠냐”며 강하게 부정했다.
다만 심장 쪽이 과히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해선 부정을 하지 않았다.
기자에게 너무나 편안하게 와이프한테 충실하고 싶다며 강한 애정을 표시하는 그,
그는 아내가 자신의 전부인 음악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이런 아내와는 부부싸움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단다.
간혹 자신이 짜증을 부려도 아내는 대꾸는 커녕 오히려 그의 비위를 맞춘다.
이런 아내의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자신에게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을 보내는 모습을 볼 때면 어떨 때는 콧날이
시큰해질 때가 있다.
그의 표현대로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이번 공연에 연이어 몇 차례의 지방 공연을 가질 계획이다.
늘 연말에는 바빴다. 2002년을 그렇게 넘긴 후에는,
또 늘 그렇듯이 연초엔 일을 안 하고 1주일이라도 아내와 오붓한 여행을 할 생각이다.
내년에 5년 만에 18집 앨범이라는 ‘거사’를 해내고 나면 내후년엔
아내와의 이집트 여행도 미리 구상해놓았다.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하고 싶고 그건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 조용필.
때론 차분하게 때론 털털한 웃음으로 자신의 음악과 사랑을 논하는 그가 왜
모든 세대를 통틀어 최고의 가수로 꼽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1 댓글
짹짹이
2002-12-14 19:3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