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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였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남녀공학이였는데 입학하자마자
첫소풍때 선생님 손에 이끌려 여학생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문세님
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였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군요. 아무튼, 한자락 폼
나게 불렀더니 소풍 이후로 제법 유명세를 치루었지요. 자랑입니다. 그 학교 다닌 사
람 중에 제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래나, 뭐래나.
그 일이 있고 며칠 뒤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섰는데 어느
여학생 하나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더군요. 다른 곳에 시선 한번 안돌리고 저만 빤
히 정말 민망하게 쳐다보더군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
(135번이였을 겁니다. 부산 사직동행)가 오길래 냉큼 올라 탔는데, 아까의 그 문제의
여학생이 따라 타더군요. 햇살 비치는 자리를 골라 잡아 앉았는데 세상에! 그 여학생
이 버스 안에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었슴에도 불구하고 제앞에 떡하니 서는게 아닙니
까!
뭐, 어쩌겠어요. 저기 빈자리가 있는데요, 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가방주세요.." 라고
했지요. 벗어주는 가방을 받으려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는데 제법 귀여운 얼굴을 하고
서는 빙글빙글 웃고 있더군요. 집으로 가던 내내 오만 생각을 다 했습니다. 겁이 나기
도 하고. 그때만 해도 제가 순수, 그 자체였걸랑요. 지금도 순수합니다만은.
내릴 곳이 되어 가방을 돌려주고는 버스문 입구에 섰는데 두번째 세상에나!! 그녀 역
시 제 옆에 따라 서는게 아닙니까! 이 동네 사나? 처음 보는 애인데.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다 내리면서 얼핏 그녀의 얼굴을 보았더니 역시나 빙글빙글 저를 보며 웃고 있더
군요. 내리자마자 용기를 내어 물었습니다. "이 동네 사나?" "아~니~" "그럼.." "내 이
름은 **숙"이야, 친하게 지내자"
이 아이 이전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자애들과 곧잘 어울려 지내기는 했습니다만은
첫사랑이라고 불리울만한 사람은 바로 이 여자애였답니다. 제법, 머리가 굵어졌다고
는 하지만 머리에 피는 안 마른 아이들인지라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한 육개
월 갔나? 이러쿵 저러쿵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헤어졌는데, 문제는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었다는데 있지요. 구멍..
슬픔을 비유할 적에, 가슴에 구멍이 났다는 말을 곧잘 쓰던데 그때 정말 제가슴에 구
멍이 생기더군요. 뻥- 하고 뚫린 구멍.. 상실감이였지요. 대충 일주일정도 끙끙 앓았
습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은 저 홀로 다 떠안은 기분이였습니다. 밥맛도 없고 나오느
니 한숨이요, 눈물이라. 가슴에 뚫린 구멍 사이로 찬바람이 휙휙- 지나다니는 느낌에
이불 뒤집어 쓰고 울기도 많이 울고. 지금 와 생각하니 웃음만 납니다.
그때, 처음 경험을 한 것이지요. 상실감. 유식한 티를 내서 '애별리고' '애별리고'라는
말이 문학서적을 읽다보면 곧잘 나오는데, 풀어 해석하자면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하
는 고통' 쯤으로 해석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것'에서 '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고
사물이 될 수도 있겠고, 어떤 좋은 '환경'이나 '위치' 또는 '자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불교의 여덟가지 고통 중 제일 첫번째로 올라와 있을만큼 대단한 고통이지요.
...
조용필님, 그리고 故안진현님을 생각해봅니다.
...
애별리고(愛別離苦)에 회자정리(會者定離)운운하며, 가신 님을 맘으로 보내지 못하고
계실 조용필님께 얕은 글로나마 위안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은 님의 슬픔과 고통들이
감히 측량치 못할만큼 크신 것을 짐작하기에, 얼른 글머리가 생각이 나질 않아 잡설이
길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셨다구요.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신다구요..
그소식을 접하고는 가슴이 막막해져 눈물만 하릴없이 떨굽니다. 도대체 뭘 어찌 위로
를 드릴 방법이 없어 멀리서 애만 태웁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한숨에 눈물
에 드느니 걱정뿐입니다. 강하신 분이라 잘 이겨 내실 것이다, 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
봅니다만은 식음 전폐에 눈물만 흘리신다는 소식에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
해보니, 이놈의 '팬'이란 것이 환호하고 즐기는 것에만 소용이 있을뿐 정작 감당치 못
할 일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군요.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하고..
휴가를 잡았습니다. 가시는 길, 어찌 절이라도 드릴 기회가 있을련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였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남녀공학이였는데 입학하자마자
첫소풍때 선생님 손에 이끌려 여학생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문세님
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였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군요. 아무튼, 한자락 폼
나게 불렀더니 소풍 이후로 제법 유명세를 치루었지요. 자랑입니다. 그 학교 다닌 사
람 중에 제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래나, 뭐래나.
그 일이 있고 며칠 뒤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섰는데 어느
여학생 하나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더군요. 다른 곳에 시선 한번 안돌리고 저만 빤
히 정말 민망하게 쳐다보더군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
(135번이였을 겁니다. 부산 사직동행)가 오길래 냉큼 올라 탔는데, 아까의 그 문제의
여학생이 따라 타더군요. 햇살 비치는 자리를 골라 잡아 앉았는데 세상에! 그 여학생
이 버스 안에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었슴에도 불구하고 제앞에 떡하니 서는게 아닙니
까!
뭐, 어쩌겠어요. 저기 빈자리가 있는데요, 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가방주세요.." 라고
했지요. 벗어주는 가방을 받으려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는데 제법 귀여운 얼굴을 하고
서는 빙글빙글 웃고 있더군요. 집으로 가던 내내 오만 생각을 다 했습니다. 겁이 나기
도 하고. 그때만 해도 제가 순수, 그 자체였걸랑요. 지금도 순수합니다만은.
내릴 곳이 되어 가방을 돌려주고는 버스문 입구에 섰는데 두번째 세상에나!! 그녀 역
시 제 옆에 따라 서는게 아닙니까! 이 동네 사나? 처음 보는 애인데.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다 내리면서 얼핏 그녀의 얼굴을 보았더니 역시나 빙글빙글 저를 보며 웃고 있더
군요. 내리자마자 용기를 내어 물었습니다. "이 동네 사나?" "아~니~" "그럼.." "내 이
름은 **숙"이야, 친하게 지내자"
이 아이 이전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자애들과 곧잘 어울려 지내기는 했습니다만은
첫사랑이라고 불리울만한 사람은 바로 이 여자애였답니다. 제법, 머리가 굵어졌다고
는 하지만 머리에 피는 안 마른 아이들인지라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한 육개
월 갔나? 이러쿵 저러쿵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헤어졌는데, 문제는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었다는데 있지요. 구멍..
슬픔을 비유할 적에, 가슴에 구멍이 났다는 말을 곧잘 쓰던데 그때 정말 제가슴에 구
멍이 생기더군요. 뻥- 하고 뚫린 구멍.. 상실감이였지요. 대충 일주일정도 끙끙 앓았
습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은 저 홀로 다 떠안은 기분이였습니다. 밥맛도 없고 나오느
니 한숨이요, 눈물이라. 가슴에 뚫린 구멍 사이로 찬바람이 휙휙- 지나다니는 느낌에
이불 뒤집어 쓰고 울기도 많이 울고. 지금 와 생각하니 웃음만 납니다.
그때, 처음 경험을 한 것이지요. 상실감. 유식한 티를 내서 '애별리고' '애별리고'라는
말이 문학서적을 읽다보면 곧잘 나오는데, 풀어 해석하자면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하
는 고통' 쯤으로 해석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것'에서 '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고
사물이 될 수도 있겠고, 어떤 좋은 '환경'이나 '위치' 또는 '자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불교의 여덟가지 고통 중 제일 첫번째로 올라와 있을만큼 대단한 고통이지요.
...
조용필님, 그리고 故안진현님을 생각해봅니다.
...
애별리고(愛別離苦)에 회자정리(會者定離)운운하며, 가신 님을 맘으로 보내지 못하고
계실 조용필님께 얕은 글로나마 위안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은 님의 슬픔과 고통들이
감히 측량치 못할만큼 크신 것을 짐작하기에, 얼른 글머리가 생각이 나질 않아 잡설이
길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셨다구요.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신다구요..
그소식을 접하고는 가슴이 막막해져 눈물만 하릴없이 떨굽니다. 도대체 뭘 어찌 위로
를 드릴 방법이 없어 멀리서 애만 태웁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한숨에 눈물
에 드느니 걱정뿐입니다. 강하신 분이라 잘 이겨 내실 것이다, 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
봅니다만은 식음 전폐에 눈물만 흘리신다는 소식에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
해보니, 이놈의 '팬'이란 것이 환호하고 즐기는 것에만 소용이 있을뿐 정작 감당치 못
할 일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군요.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하고..
휴가를 잡았습니다. 가시는 길, 어찌 절이라도 드릴 기회가 있을련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댓글
▦망초
2003-01-08 07:2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