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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인을 잃으신 조용필씨에게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80년대 가요를 더듬어보려 하니, `조용필’이라는 거인의 그림자가 먼저 밟힙
니다. 조용필은 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80년에서 86년까지 7년동안 82년 단
한차례(이용)만 제외하고, 완전히 천하통일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해 곧잘 부산 출신으로 오해받는 조용필은 1950
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동고를 졸업(프로야구 백인천 감독도 경
동고 졸업)한 그는 음악을 위해 졸업식날 친구들과 가출합니다.
조용필이 처음 매료된 음악은 록이었습니다. 69년 10대의 조용필은 `화이브 핑
거스’의 기타리스트로 미8군 무대에 섭니다. 우리가 아는 조용필은 뛰어난
가수, 작곡가로 알고 있지만 조용필은 기타 연주실력만으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혔습니다.
조용필이 노래를 시작한 것은 어느 날, 그룹 리더싱어가 몸이 아파 응급조치
로 기타치던 조용필을 무대에 올렸는데 반응이 더 좋았을 때부터입니다.
71년 조용필은 3인조 록그룹 `김트리오’(80년대 초반 <연안부두>를 부른 김
트리오가 아닙니다)를 결성합니다. 김트리오에는 80년대 `사랑과 평화’의 멤
버였던 이남이도 함께 합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이 시기에 처음 부릅니
다. 이 시기에 김 트리오는 `선데이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에 나가 최우수상
을 받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까지 조용필은 그저 극장무대와 지방 중소도시를 순회하
는 배고픈 무명가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하면서 달라집니다. 부산쪽에서부터
인기몰이가 시작되면서 인기가수의 대열로 진입하려 합니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대마초 가수’ 파동이 일어나고 무명가수 조용필도 명단에 낍니다. 미
8군 무대 주변에서 한 대 얻어피웠던 옛 일이 문제가 됐던거죠.
조용필은 실의에 빠져 가수생활을 접기로 합니다. 그러나 77년 무렵 조용필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민요 <한오백년>을 듣고 다시 음악의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이때부터 고행이 시작됩니다.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판소리 명창들이 폭포
아래에서 소리하듯 연습, 또 연습합니다.
원래 조용필의 목소리는 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용필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늘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80년 조용필이 스타가 된 뒤, 인터뷰에서 조용필은 `
로드 스튜어트를 연습했다’고 했는데, 그때 저는 많이 의아해 했습니다. 조용
필과 짙은 허스키 보이스인 로드 스튜어트는 같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또 당시 조용필의 노래도 슬로고고, 디스코, 트롯트 등으로 로드 스튜어트 류
의 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조용필은 이 은둔의 시기에 양동이에 피를 토하며, 성대를 긁는 `탁
성’을 갈고 닦습니다. 조용필의 목소리에 약간 거친 음색이 가미된 것도 이
때부터라고 생각됩니다.(저는 탁성을 갖기 이전의 조용필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대마초 가수에게도 해금이라는 한 줄기 빛을 내립니다.
조용필은 은둔의 시기때 갈고 닦은 노래들을 한꺼번에 내놓습니다.
조용필 시대의 화려한 막이 오른 것입니다.
1집 <창밖의 여자> 앨범에서는 그해 봄 <창밖의 여자>, 여름 <단발머리>, 가
을 <잊혀진 사랑> 등이 연달아 히트합니다.
조용필이 작곡한 <창밖의 여자>는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였습니다.
이 노래는 이곳저곳에서 많이 인용됐는데, 1980년 가을 무렵 드라마 <달동네>
에서도 곧잘 나왔습니다.
잠시 <달동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단칸방에 어울려 사는 달
동네 서민들의 이야기인데, 집주인은 강부자였고, 추송웅과 6살짜리 딸 똑순
이 김민희(`계란 노른자 동동 띄웠어요’, `아빠 손잡고, 어매 손잡고' 등의
명대사 기억하십니까?), 차화연, 권투선수(불량배 역으로 많이 나왔는데 요
즘은 안보이네요), 신혼부부 노주현(?)-이미숙 부부(이미숙은 아마 이때 데
뷔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식모살이하던 장미희.
이 드라마의 헤로인은 장미희였습니다.(장미희는 70년대말~80년대초 정윤희,
유지인과 함께 2세대 트로이카였습니다. <꽃순이를 아시나요>, <앵무새 몸으
로 울었다> 등에 출연한 정윤희가 관능미의 화신이었다면, <바람불어 좋은 날
> <26X365=0> 등에서 대학생 역을 주로 맡은 유지인은 지성미가 강했고, 77년
<겨울여자>로 데뷔한 장미희는 청순미가 강했습니다.-지금의 장미희
만 아는 이들은 잘 이해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장미희는 이때 머리를 옛 여고생들처럼 두 갈래 머리로 땋고, 촌스런
옷차림에다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순박한 처녀였습니다. 새댁 이미숙에게 매
번 꾸중듣곤 하는.
그런데 이때 늙다리 노총각 김인문(아시죠?)이 장미희를 짝사랑합니다. 집집마
다 돌아다니며 고장난 라디오 등을 고쳐주는 일을 하던 김인문은 밤만 되면 장
미희가 식모살이하는 집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정말 처량한 표정으로 라디
오 볼륨을 크게 높이는데, 이때 나오는 노래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였습니
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대목. 그때마다 난처해진 장미희가
밖으로 뛰쳐나와 `증말 왜 이런대유, 제발 이러지 마세유’(<명랑소녀 상경기>
의 장나라 대사와 거의 흡사합니다)라고 하고, 김인문은 아래로 처진 그 불쌍
한 눈망울을 하고서 `00씨(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 제 마음을 지발 좀 알아주
세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 장미희는 옆방의 권투선수를 또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때 권투선수는 또다른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안소영이었습니다.
<애마부인>(82년)으로 명성을 떨치기 전인 이때, 이 드라마가 안소영의 데뷔무
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조연인 안소영을 지금껏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제가 당시 `몽정기’에 막 접
어들 무렵인지라, 처음 안소영을 보고서(그때 안소영은 장미희 때문에 마음
이 흔들리는 애인과 장미희에게 톡톡 쏘아붙이는 못된 역이었는데 주로 몸매
가 잘 드러나는 니트와 몸에 쫙 들러붙는 흰 면바지, 그리고 털모자를 쓰고 나
왔습니다) `와, 무슨 젖이 저렇게 크냐’라는 생각을 좀처럼 떨치지 못했기 때
문이었을 것입니다.
<달동네> 이야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다시 조용필로 돌아가서.
<창밖의 여자> 이후 나온 <단발머리>는 또다른 조용필이었습니다.
<단발머리>는 `신서사이저’와 `가성’을 인용한 첫 가요가 아닌가 생각됩니
다. 전자오락에서나 들을 수 있는 `뿅뿅뿅’하는 효과음(갤러그 소리와 비슷했
습니다. 저는 갤러그보다 제비우스를 더 좋아했습니다만)과 노래의 대부분을
진성이 아닌 가성으로 부르는 것은 이때 조용필에 의해 처음 시도됐습니다.
<창밖의 여자>가 주로 어른들이 좋아했다면, <단발머리>는 가요의 향유층을 청
소년층으로 넓힌 계기가 됩니다. `오빠부대’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입니다. 이전까지는 가요란 어른들이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청
소년들이 적극적으로 가요를 듣기 시작하면서 가요의 흐름도 청소년 위주로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그 단초가 조용필에서부터 본격화된 것입니다. 예전에
도 남진 등이 오빠부대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팬클럽이라는 형태로 조
직화되기 시작한 것은 조용필이 처음이었고, 그 `오빠부대’를 끌어들인 단초
가 된 노래는 <창밖의 여자>가 아닌 <단발머리>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기 노래 가운데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를 좋아
해 중학교때 들은 이 노래를 대학때까지도 중요한 시기(?)마다 흥얼거리곤 했
습니다. 고등학교때 여자친구에게 실연당한 제 친구가 `00야, 다 잊었는데,
이 노래만 들으면 마음을 못 잡겠다'고 말한 것도 기억납니다.
아래는 노래가사입니다.
다시는 생각을 말자 생각을 말자고
그렇게 애타게 말 한마디 못하고
잊어야 잊어야만 될 사랑이기에
깨끗이 묻어버린 내 청춘이건만
그래도 못잊어 나 홀로 불러보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1980년 조용필은 방송사 가요상을 싹쓸이합니다.
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꽃다발에 파묻혀 조용필은 흐느껴 웁니다. 아마도
암울했던 지난 시절이 절절이 가슴에 스며들었기 때문이겠죠.
1981년초 조용필은 2집을 발표합니다.
<촛불>이 히트곡이었습니다. `그대는 왜~’라고 하면 에코음이 울리는 게 인상
적이었습니다만, 1집이 워낙 빅히트를 기록한 탓에 그 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습
니다.
저는 2집에서는 개인적으로 <간양록>을 좋아했습니다. MBC 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가였습니다. <간양록>은 이정길이 주연한 드라마로,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입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 이고
어버이 한숨실은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 어야- 어야-
피눈물로 한줄 한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그린 뜻 바다되어 하늘에 달을 세라
어야- 어야- 어야-
이때부터 조용필은 우리음악인 창에 대한 관심으로 매 음반마다 판소리풍 가요
를 계속 발표하는데, 간양록도 그 일환이었던 것 같습니다.
2집 발표 이후, 봄부터 조용필은 방송활동을 잠정중단합니다.
가수들이 음반발표한 뒤, 활동하다 방송중단하고 음반준비하다가 다시
복귀하고 하는 활동형태도 조용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입니다.
81년 8월1일 조용필은 3집을 들고 몇 개월만에 다시 나타납니다.
아마도 해운대 해변이었던 것 같은데, 바닷가에 특설무대를 마련하고 들고 나
온 노래가 <고추잠자리>였습니다. <단발머리>의 후속편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
다.
<고추잠자리>는 `엄마야’라는 멜로디 부문이 유행어처럼 번졌고, 5주로 묶여
있는 텔레비전 부문에 비해 무제한으로 돼있는 라디오 부문에서는 13주동안
(그해 가을 내내)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조용필은 팬층이 전연령층으로 확대됩니다. 10대 후반~20대들에게
는 <고추잠자리> <여와 남>(OB맥주 CF음악으로도 쓰입니다. 대관령 목장에서
친구와 함께 양떼를 모는 조용필이 등장하는 광고 기억나십니까?), <물망초>
(드라마주제가로도 쓰입니다. 정윤희가 거의 마지막으로 나온 TV드라마가 아닐
까요?) 등으로 다가갔고, 중년층들에게는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
레야> 등 정통 트로트 음악으로 어필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강원도 아리랑> <황성옛터> 등으로 노년층까지 팬층으로 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한 국민가수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팬클럽으로 조직되는 오빠부대가 꾸역꾸역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입니다. 조용필은 이때 이미 서른을 넘어선 나이였지만, 워낙 동안(童顔)
인데다 당시 노래가 저같은 10대들에게 크게 다가와 여중생, 여고생 팬들이 넘
쳐났습니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히트곡을 한꺼번에 쏟아내면서 가요 인기순위는 조용필
노래로 도배가 됐고,(60년대 중반, 비틀즈가 빌보드 팝차트 1~5위까지를 몇 주
동안 내리 휩쓴 것과 비교해도 될 듯 합니다) TV에서는 <미워 미워 미워>가,
라디오에서는 <고추잠자리>가 나란히 1위를 하는 경우도 늘어났습니다.
조용필이 최고의 고공행진을 한 게 아마도 81년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다
른 가수들은 아예 활동을 중단하는 게 나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조용필을 두
고 가왕(歌王)이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했고, 20세기를 통틀어 40~50년대의 남
인수와 비교되기도 했습니다.
이해 10대 가수가요제도 조용필 위주로 바껴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누구
나 `가수왕’이 조용필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에 방송사는 아예 다른 가수들
의 시간은 짧게 끝내고, `가수왕 조용필’을 발표하고 뒷부분을 `조용필 무
대’로 꾸며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10대 가수가요제를 이렇게 구성한 것은 36
년 역사동안 이때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저는 이때부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른바 팝과 가요의 위상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때에야 어른들 쫓아다니며 가요를 듣곤 했는데, 청소년기가 되어 친
구들과 어울리면서 팝(구체적으로는 록)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록 계
보를 줄줄 꿰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가요를 듣는 것을 거의 경멸하다
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팝을 들으면서 강렬한 비트와 사운드에 매료되면서 단조로운 리듬
과 멜로디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가요가 시시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빽판을 사러 돌아다니기도 하고, 레드 제플린 원판을 다 갖고
있다는 아이를 무슨 영웅처럼 우르러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보냈습니다. 또 당
시 <월간 팝송>은 우리들의 음악교과서였습니다.
팝을 듣는데도 일종의 서열이 있었습니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롤링 스톤즈, ACDC 등 정통 하드록 계열이 최고의 자리
를 차지했고,
퀸, ELO, REO 스피드웨건, 포리너, 저니 등 프로그레시브 록 계열은 두번째 자
리를,그리고 비지스, 아바, 올리비아 뉴튼 존, 캐니 로저스 등 디스코 또는 컨
트리 발라드 계통의 일반 유명 팝가수들은 3번째 자리였습니다.
4번째 자리도 있긴 했는데, 외국에는 무명이지만 한국에만 알려진 뿌리없는 유
럽의 팝그룹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Wanted>의 둘리스(영국), <Hello, MR.
Monkey>, <Hey, Midnight Dancer> 등을 부른 아라베스크(독일/가운데 17살짜
리 여자 싱어가 당시 남자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습니다), <Sexy
Music>의 여성 4인조 놀란스(영국?) 등이 그들입니다.(혹 4번째 서열의 가수들
을 좋아했다고 해서 자존심 상해하시진 말기 바랍니다. 당시 아이들의 치기였
으니까요)
이른바 록을 듣는답시고, 겉멋이 든 우리들에게 가요의 위치는 이 4번째 자리
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요를 안 듣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용필 노래는 웬
지 모르게 떨치기 힘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 몰래 레코드점에 가서 테이
프 하나에 조용필 노래를 모두 녹음시켜 놓고(당시에는 레코드점에서 팝이나
가요를 돈받고 녹음해 주는 게 성행했습니다), 겉에는 아무 표시도 하지 않고
서 집에서만 몰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또하나, 저를 괴롭히는 게 더 생겨났습니다.
이때 저는 친구 따라 교회를 다녔는데, 당시 보수적이었던 그 교회는 학생들에
게 `록음악은 사탄의 음악이니 듣지말라’고 한 것입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가요는 친구들 눈치 보느라 못 듣고, 록은 교회에서 듣지 말라고 하고.(교회에
서 제발 성경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식의 이런 이야
기를 청소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이제 그만 했으면 합니다). 귀가 얇은 저는
한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클래식 음악을 억지로 꾸역꾸역 듣곤 했습니
다. 갈 곳이 거기 밖에 없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또하나의 세계를 찾을 수 있
는 기회가 되긴 했습니다.
조용필이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긴 한가봅니다. 80년과 81년 두 해를 이야기했
을 뿐인데도 글이 너무 길어져 이쯤에서 일단 끝을 맺겠습니다.
`가수왕 열전’ 4편에서 이용, 김수철, 전영록 등 조용필과 맞짱 뜨는 인물들
이 생기는 80년대 중반부터 그 이후까지의 조용필을 압축적으로 전하겠습니다.
권태호 올림 ho@hani.co.kr
드립니다.
80년대 가요를 더듬어보려 하니, `조용필’이라는 거인의 그림자가 먼저 밟힙
니다. 조용필은 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80년에서 86년까지 7년동안 82년 단
한차례(이용)만 제외하고, 완전히 천하통일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해 곧잘 부산 출신으로 오해받는 조용필은 1950
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동고를 졸업(프로야구 백인천 감독도 경
동고 졸업)한 그는 음악을 위해 졸업식날 친구들과 가출합니다.
조용필이 처음 매료된 음악은 록이었습니다. 69년 10대의 조용필은 `화이브 핑
거스’의 기타리스트로 미8군 무대에 섭니다. 우리가 아는 조용필은 뛰어난
가수, 작곡가로 알고 있지만 조용필은 기타 연주실력만으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혔습니다.
조용필이 노래를 시작한 것은 어느 날, 그룹 리더싱어가 몸이 아파 응급조치
로 기타치던 조용필을 무대에 올렸는데 반응이 더 좋았을 때부터입니다.
71년 조용필은 3인조 록그룹 `김트리오’(80년대 초반 <연안부두>를 부른 김
트리오가 아닙니다)를 결성합니다. 김트리오에는 80년대 `사랑과 평화’의 멤
버였던 이남이도 함께 합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이 시기에 처음 부릅니
다. 이 시기에 김 트리오는 `선데이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에 나가 최우수상
을 받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까지 조용필은 그저 극장무대와 지방 중소도시를 순회하
는 배고픈 무명가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하면서 달라집니다. 부산쪽에서부터
인기몰이가 시작되면서 인기가수의 대열로 진입하려 합니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대마초 가수’ 파동이 일어나고 무명가수 조용필도 명단에 낍니다. 미
8군 무대 주변에서 한 대 얻어피웠던 옛 일이 문제가 됐던거죠.
조용필은 실의에 빠져 가수생활을 접기로 합니다. 그러나 77년 무렵 조용필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민요 <한오백년>을 듣고 다시 음악의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이때부터 고행이 시작됩니다.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판소리 명창들이 폭포
아래에서 소리하듯 연습, 또 연습합니다.
원래 조용필의 목소리는 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용필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늘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80년 조용필이 스타가 된 뒤, 인터뷰에서 조용필은 `
로드 스튜어트를 연습했다’고 했는데, 그때 저는 많이 의아해 했습니다. 조용
필과 짙은 허스키 보이스인 로드 스튜어트는 같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또 당시 조용필의 노래도 슬로고고, 디스코, 트롯트 등으로 로드 스튜어트 류
의 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조용필은 이 은둔의 시기에 양동이에 피를 토하며, 성대를 긁는 `탁
성’을 갈고 닦습니다. 조용필의 목소리에 약간 거친 음색이 가미된 것도 이
때부터라고 생각됩니다.(저는 탁성을 갖기 이전의 조용필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대마초 가수에게도 해금이라는 한 줄기 빛을 내립니다.
조용필은 은둔의 시기때 갈고 닦은 노래들을 한꺼번에 내놓습니다.
조용필 시대의 화려한 막이 오른 것입니다.
1집 <창밖의 여자> 앨범에서는 그해 봄 <창밖의 여자>, 여름 <단발머리>, 가
을 <잊혀진 사랑> 등이 연달아 히트합니다.
조용필이 작곡한 <창밖의 여자>는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였습니다.
이 노래는 이곳저곳에서 많이 인용됐는데, 1980년 가을 무렵 드라마 <달동네>
에서도 곧잘 나왔습니다.
잠시 <달동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단칸방에 어울려 사는 달
동네 서민들의 이야기인데, 집주인은 강부자였고, 추송웅과 6살짜리 딸 똑순
이 김민희(`계란 노른자 동동 띄웠어요’, `아빠 손잡고, 어매 손잡고' 등의
명대사 기억하십니까?), 차화연, 권투선수(불량배 역으로 많이 나왔는데 요
즘은 안보이네요), 신혼부부 노주현(?)-이미숙 부부(이미숙은 아마 이때 데
뷔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식모살이하던 장미희.
이 드라마의 헤로인은 장미희였습니다.(장미희는 70년대말~80년대초 정윤희,
유지인과 함께 2세대 트로이카였습니다. <꽃순이를 아시나요>, <앵무새 몸으
로 울었다> 등에 출연한 정윤희가 관능미의 화신이었다면, <바람불어 좋은 날
> <26X365=0> 등에서 대학생 역을 주로 맡은 유지인은 지성미가 강했고, 77년
<겨울여자>로 데뷔한 장미희는 청순미가 강했습니다.-지금의 장미희
만 아는 이들은 잘 이해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장미희는 이때 머리를 옛 여고생들처럼 두 갈래 머리로 땋고, 촌스런
옷차림에다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순박한 처녀였습니다. 새댁 이미숙에게 매
번 꾸중듣곤 하는.
그런데 이때 늙다리 노총각 김인문(아시죠?)이 장미희를 짝사랑합니다. 집집마
다 돌아다니며 고장난 라디오 등을 고쳐주는 일을 하던 김인문은 밤만 되면 장
미희가 식모살이하는 집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정말 처량한 표정으로 라디
오 볼륨을 크게 높이는데, 이때 나오는 노래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였습니
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대목. 그때마다 난처해진 장미희가
밖으로 뛰쳐나와 `증말 왜 이런대유, 제발 이러지 마세유’(<명랑소녀 상경기>
의 장나라 대사와 거의 흡사합니다)라고 하고, 김인문은 아래로 처진 그 불쌍
한 눈망울을 하고서 `00씨(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 제 마음을 지발 좀 알아주
세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 장미희는 옆방의 권투선수를 또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때 권투선수는 또다른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안소영이었습니다.
<애마부인>(82년)으로 명성을 떨치기 전인 이때, 이 드라마가 안소영의 데뷔무
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조연인 안소영을 지금껏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제가 당시 `몽정기’에 막 접
어들 무렵인지라, 처음 안소영을 보고서(그때 안소영은 장미희 때문에 마음
이 흔들리는 애인과 장미희에게 톡톡 쏘아붙이는 못된 역이었는데 주로 몸매
가 잘 드러나는 니트와 몸에 쫙 들러붙는 흰 면바지, 그리고 털모자를 쓰고 나
왔습니다) `와, 무슨 젖이 저렇게 크냐’라는 생각을 좀처럼 떨치지 못했기 때
문이었을 것입니다.
<달동네> 이야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다시 조용필로 돌아가서.
<창밖의 여자> 이후 나온 <단발머리>는 또다른 조용필이었습니다.
<단발머리>는 `신서사이저’와 `가성’을 인용한 첫 가요가 아닌가 생각됩니
다. 전자오락에서나 들을 수 있는 `뿅뿅뿅’하는 효과음(갤러그 소리와 비슷했
습니다. 저는 갤러그보다 제비우스를 더 좋아했습니다만)과 노래의 대부분을
진성이 아닌 가성으로 부르는 것은 이때 조용필에 의해 처음 시도됐습니다.
<창밖의 여자>가 주로 어른들이 좋아했다면, <단발머리>는 가요의 향유층을 청
소년층으로 넓힌 계기가 됩니다. `오빠부대’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입니다. 이전까지는 가요란 어른들이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청
소년들이 적극적으로 가요를 듣기 시작하면서 가요의 흐름도 청소년 위주로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그 단초가 조용필에서부터 본격화된 것입니다. 예전에
도 남진 등이 오빠부대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팬클럽이라는 형태로 조
직화되기 시작한 것은 조용필이 처음이었고, 그 `오빠부대’를 끌어들인 단초
가 된 노래는 <창밖의 여자>가 아닌 <단발머리>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기 노래 가운데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를 좋아
해 중학교때 들은 이 노래를 대학때까지도 중요한 시기(?)마다 흥얼거리곤 했
습니다. 고등학교때 여자친구에게 실연당한 제 친구가 `00야, 다 잊었는데,
이 노래만 들으면 마음을 못 잡겠다'고 말한 것도 기억납니다.
아래는 노래가사입니다.
다시는 생각을 말자 생각을 말자고
그렇게 애타게 말 한마디 못하고
잊어야 잊어야만 될 사랑이기에
깨끗이 묻어버린 내 청춘이건만
그래도 못잊어 나 홀로 불러보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1980년 조용필은 방송사 가요상을 싹쓸이합니다.
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꽃다발에 파묻혀 조용필은 흐느껴 웁니다. 아마도
암울했던 지난 시절이 절절이 가슴에 스며들었기 때문이겠죠.
1981년초 조용필은 2집을 발표합니다.
<촛불>이 히트곡이었습니다. `그대는 왜~’라고 하면 에코음이 울리는 게 인상
적이었습니다만, 1집이 워낙 빅히트를 기록한 탓에 그 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습
니다.
저는 2집에서는 개인적으로 <간양록>을 좋아했습니다. MBC 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가였습니다. <간양록>은 이정길이 주연한 드라마로,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입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 이고
어버이 한숨실은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 어야- 어야-
피눈물로 한줄 한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그린 뜻 바다되어 하늘에 달을 세라
어야- 어야- 어야-
이때부터 조용필은 우리음악인 창에 대한 관심으로 매 음반마다 판소리풍 가요
를 계속 발표하는데, 간양록도 그 일환이었던 것 같습니다.
2집 발표 이후, 봄부터 조용필은 방송활동을 잠정중단합니다.
가수들이 음반발표한 뒤, 활동하다 방송중단하고 음반준비하다가 다시
복귀하고 하는 활동형태도 조용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입니다.
81년 8월1일 조용필은 3집을 들고 몇 개월만에 다시 나타납니다.
아마도 해운대 해변이었던 것 같은데, 바닷가에 특설무대를 마련하고 들고 나
온 노래가 <고추잠자리>였습니다. <단발머리>의 후속편 같은 것이기도 했습니
다.
<고추잠자리>는 `엄마야’라는 멜로디 부문이 유행어처럼 번졌고, 5주로 묶여
있는 텔레비전 부문에 비해 무제한으로 돼있는 라디오 부문에서는 13주동안
(그해 가을 내내)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조용필은 팬층이 전연령층으로 확대됩니다. 10대 후반~20대들에게
는 <고추잠자리> <여와 남>(OB맥주 CF음악으로도 쓰입니다. 대관령 목장에서
친구와 함께 양떼를 모는 조용필이 등장하는 광고 기억나십니까?), <물망초>
(드라마주제가로도 쓰입니다. 정윤희가 거의 마지막으로 나온 TV드라마가 아닐
까요?) 등으로 다가갔고, 중년층들에게는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
레야> 등 정통 트로트 음악으로 어필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강원도 아리랑> <황성옛터> 등으로 노년층까지 팬층으로 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한 국민가수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팬클럽으로 조직되는 오빠부대가 꾸역꾸역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입니다. 조용필은 이때 이미 서른을 넘어선 나이였지만, 워낙 동안(童顔)
인데다 당시 노래가 저같은 10대들에게 크게 다가와 여중생, 여고생 팬들이 넘
쳐났습니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히트곡을 한꺼번에 쏟아내면서 가요 인기순위는 조용필
노래로 도배가 됐고,(60년대 중반, 비틀즈가 빌보드 팝차트 1~5위까지를 몇 주
동안 내리 휩쓴 것과 비교해도 될 듯 합니다) TV에서는 <미워 미워 미워>가,
라디오에서는 <고추잠자리>가 나란히 1위를 하는 경우도 늘어났습니다.
조용필이 최고의 고공행진을 한 게 아마도 81년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다
른 가수들은 아예 활동을 중단하는 게 나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조용필을 두
고 가왕(歌王)이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했고, 20세기를 통틀어 40~50년대의 남
인수와 비교되기도 했습니다.
이해 10대 가수가요제도 조용필 위주로 바껴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누구
나 `가수왕’이 조용필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에 방송사는 아예 다른 가수들
의 시간은 짧게 끝내고, `가수왕 조용필’을 발표하고 뒷부분을 `조용필 무
대’로 꾸며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10대 가수가요제를 이렇게 구성한 것은 36
년 역사동안 이때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저는 이때부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른바 팝과 가요의 위상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때에야 어른들 쫓아다니며 가요를 듣곤 했는데, 청소년기가 되어 친
구들과 어울리면서 팝(구체적으로는 록)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록 계
보를 줄줄 꿰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가요를 듣는 것을 거의 경멸하다
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팝을 들으면서 강렬한 비트와 사운드에 매료되면서 단조로운 리듬
과 멜로디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가요가 시시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빽판을 사러 돌아다니기도 하고, 레드 제플린 원판을 다 갖고
있다는 아이를 무슨 영웅처럼 우르러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보냈습니다. 또 당
시 <월간 팝송>은 우리들의 음악교과서였습니다.
팝을 듣는데도 일종의 서열이 있었습니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롤링 스톤즈, ACDC 등 정통 하드록 계열이 최고의 자리
를 차지했고,
퀸, ELO, REO 스피드웨건, 포리너, 저니 등 프로그레시브 록 계열은 두번째 자
리를,그리고 비지스, 아바, 올리비아 뉴튼 존, 캐니 로저스 등 디스코 또는 컨
트리 발라드 계통의 일반 유명 팝가수들은 3번째 자리였습니다.
4번째 자리도 있긴 했는데, 외국에는 무명이지만 한국에만 알려진 뿌리없는 유
럽의 팝그룹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Wanted>의 둘리스(영국), <Hello, MR.
Monkey>, <Hey, Midnight Dancer> 등을 부른 아라베스크(독일/가운데 17살짜
리 여자 싱어가 당시 남자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습니다), <Sexy
Music>의 여성 4인조 놀란스(영국?) 등이 그들입니다.(혹 4번째 서열의 가수들
을 좋아했다고 해서 자존심 상해하시진 말기 바랍니다. 당시 아이들의 치기였
으니까요)
이른바 록을 듣는답시고, 겉멋이 든 우리들에게 가요의 위치는 이 4번째 자리
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요를 안 듣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용필 노래는 웬
지 모르게 떨치기 힘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 몰래 레코드점에 가서 테이
프 하나에 조용필 노래를 모두 녹음시켜 놓고(당시에는 레코드점에서 팝이나
가요를 돈받고 녹음해 주는 게 성행했습니다), 겉에는 아무 표시도 하지 않고
서 집에서만 몰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또하나, 저를 괴롭히는 게 더 생겨났습니다.
이때 저는 친구 따라 교회를 다녔는데, 당시 보수적이었던 그 교회는 학생들에
게 `록음악은 사탄의 음악이니 듣지말라’고 한 것입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가요는 친구들 눈치 보느라 못 듣고, 록은 교회에서 듣지 말라고 하고.(교회에
서 제발 성경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식의 이런 이야
기를 청소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이제 그만 했으면 합니다). 귀가 얇은 저는
한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클래식 음악을 억지로 꾸역꾸역 듣곤 했습니
다. 갈 곳이 거기 밖에 없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또하나의 세계를 찾을 수 있
는 기회가 되긴 했습니다.
조용필이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긴 한가봅니다. 80년과 81년 두 해를 이야기했
을 뿐인데도 글이 너무 길어져 이쯤에서 일단 끝을 맺겠습니다.
`가수왕 열전’ 4편에서 이용, 김수철, 전영록 등 조용필과 맞짱 뜨는 인물들
이 생기는 80년대 중반부터 그 이후까지의 조용필을 압축적으로 전하겠습니다.
권태호 올림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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