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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펌 [ 가수왕 열전 4 - 조용필(中)/ 조용필과 <품행제로>]

ypc스타, 2003-01-28 01:5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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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왕 열전 4 - 조용필(中)/조용필과 <품행제로>  

<창밖의 여자>가 라디오 연속극이 아니라 TBC-TV드라마 주제가
아니었느냐는 분들이 많았는데,
확인결과 동아방송(80년 통폐합 전까지 <동아일보>가 운영하 던
라디오 방송국인 DBS) 라디오 연속극이 맞더군요.
다만 <창밖의 여자>는 80 년 TBC 가요대상에서 드라마 주제가상을 받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달동네>는 노주현-정윤희 주연의 드라마 <야, 곰례야>와 착각하신 분 이
일부 계셨던 것 같습니다.
또 정윤희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드라마는 81년 의 <물망초>가 아니라
83년 <청춘행진곡>이더군요.
둘 다 KBS 2 였습니다.

또 가요톱텐 골든컵이 5주냐, 7주냐, 10주냐를 놓고 말씀하셨는데
확인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희미한 제 기억에만 의지해보겠습니다.
가요순위 프로 그램은 70년대(이 프로그램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MBC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변웅전씨가 진행한 <금주의 인기가요>가 있었습니다.
(저는 ` 금주'의 뜻이 금요일이라고 알았더랬습니다)

<금주의 인기가요>는 지난번에 이야기 한 것처럼
75년 송창식의 <왜불러>가 9 주동안 1위를 차지한 이후 5회가 되면 순위에서
명예은퇴시켰습니다.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 김만수의 <영아>, 이종용의 <너>,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김만중의 <모모>,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
이은하의 <밤차> 등이 모두 5주만 되면 더 이상 순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KBS2의 <가요톱텐>은 80년 언론 통폐합 후, 등장했습니다.
초대 MC는 임성훈 과 눈이 크고 예뻤든 여자분(무용을 전공했다고 하는)이
공동으로 맡았습니다.
이후 임성훈은 90년까지 여자 MC를 바꿔가며 계속 진행해 왔습니다. <가요 톱텐>은
매주 수요일마다 방영했는데,
<금주의 인기가요>가 20위까지를 순위로 올린데 반해 <가요톱텐>은
순위권을 10위로 한정한 것이 차이였습니다.
물론 10위권 이하 곡들도 후보곡으로 소개했습니다.

처음에는 5주 단위로 1위곡을 졸업시켰습니다.
그런데 신곡출시부터 1위 히트 곡까지의 기간이 점점 짧아지면서,
1위로 올라간 뒤 5주가 지나면 `강제은퇴’ 를 하게되는 것이 오히려 해당
가수의 음반판매 등에 지장이 됐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5주 규정'(골든컵)은 사라집니다.
(아니면 제한하는 주 단위를 늘렸던지) 독자들께서 지적하신 부분이 이 부분인 것
같습니다.

MBC는 이에 앞서 80년 초반부터 이 5주 제한제를 없앱니다.
1위를 할 때까지 하고, 수명이 다하면 서서히 순위가 떨어지게끔 한 것입니다.
(빌보드 팝차트와 같은 방식입니다)
그래서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의 경우, 아마 7주 가량 1위를 하지 않았나 기억됩니다.
<가요톱텐>은 81년 무렵부터 제한제를 없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이 5주 제한제는 다시 부활됩니다.
아마도 TV 방송국 입장에서는 더 많은 가수들에게 상을 나눠줘야 했던 필요성
때문이었고,
또 예전과 달리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5주 뒤
은퇴를 하더라도 이것이 음반판매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됐기 때문이 아닌가
추 측됩니다.

TBC에서는 어떤 가요순위 프로그램이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많은 분들이 TBC 이야기를 하셨는데, 개인적으로는 `TBC의 아픔’이 있습니다.
TBC는 당시 수도권과 부산지역에서만 송출돼 지방도시에 살았던 저는
TBC를 늘 신문 TV 안 내표로만 봐야 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좋아했던 권투 세계타이틀매치의 상 당수가 TBC에만 방영돼
너무너무 분개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77년 홍수환이 파나마에서 `지옥에서 온 악마’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4전5기 신화를
창조하며 물리친 것은 그 다음날에야 녹화장면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78년 9월 태국의 네트로이 보라싱을 3회 KO로 물리치고 세계챔피언이 된
WBC 라이트플라이 급 챔피언 김성준,
그해 12월 역시 태국의 사엔삭 무앙수린을 13회 KO로 물리 치고
WBC 슈퍼라이트급 챔피언이 된 김상현(당시 태국의 세계챔피언 2명을 짧은 기간에
모두 한국 선수들이 꺾어버려 그 당시 태국에서는 반한 감정이 일기도 했습니다)의
세계타이틀 매치도 늘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 또는 당일 스포츠 뉴스 등을 통해
결과만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지방 차별’이라고 난리가 났을 사안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이던 80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TBC가 KBS2로 바뀌면서
지방에도 UHF 채널로 전국방송 될 때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론통폐합에 많은 박수를 보내기도 했었더랬습니다.



하나 더. 지난 2편에서 하청일씨가 LA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는데,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살고 있다는 한 교포께서 제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하청일씨는 텍사스주 댈라스에 거주하고 있으며,
지난 송년회 때에도 교포잔치의 사회자나 초청가수로 나와 활동했고,
평상시에는 부인이 하는 사업을 도우며 지내고 있다고. 정정하겠습니다
(그 교포분께 답장 메일을 보냈으나 반송돼 돌아오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3편에서 제가 음악의 순위를 언급한 게 있는데,
그것은 가수나 그룹의 서열을 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 청소년들(특히 하드록을 최고로 치던 극소수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런 기류가 있었다는 것 뿐입니다.
혹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 같은 경우도 실제로는 그 순위표에서는 2순위에 속하는 퀸에
푹 빠졌었더랬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처음 들을 때의 그 감동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고 심장마비에 걸릴 뻔한 스탕달의 그 충격에 견줄 수 있을까요? 또 순위표에서는 3순위에 속하는 비지스, 아바, 올리비아 뉴튼 존, 에어 서프라이,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 대중적인 팝 가수들도 아주 많이 좋아했습니다.
(가수왕 열전이 끝나면, 80년대 팝스타 열전을 잇따라 해야하는 걸까요?)

< 1982년>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제, 전편에 이어 82년부터의 조용필로 들어갑시다.

국내무대를 완전히 휩쓴 조용필은 이때부터 일본시장 개척에 서서히 나섭니다.
그 와중에 이해 봄 4집 <못 찾겠다 꾀꼬리>를 발표합니다.
<못 찾겠다 꾀꼬리>는 어린 시절,
숨바꼭질 하다 숨은 아이를 찾지 못하면 술래가 `못 찾겠다 꾀꼬리’라고 외치는 것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노래입니다.(제가 자란 경상도에서는 술래가 `못 찾겠다.
따까리’(상처난 부위에 생기는 `딱지’의 사투리)라고 말했고,
그러면 숨어있던 아이는 `따까리 띠면(떼면) 아프다’고 외치며 나타나곤 했습니다)

이 노래는 판소리 대중화를 위해 애쓴 조용필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조용필은 음악 속에만 갇혀
외부와의 소통에는 전혀 관심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조용필은 원래 친구와 술을 무척 좋아한 사람입니다.
무명시절 가수 김정수와 해운대 백사장에서 소주 1박스를 밤새 나눠 마시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쓰러져 자다가,
지나는 사람들이 사람이 죽은 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조용필은 이에 대해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긴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용필의 노래를 보면,
굳이 <친구여>를 들먹이지 않아 도 친구와 관련된 노래가 많습니다.

이 음반에 함께 수록된 <자존심>도 판소리 대중화를 위한 또하나의 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대중적 인기는 그렇게 많이 누리진 못했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조용필이 특별히 아꼈던 곡이라고 보여집니다.
`말을 할까 돌아서보면 당신은 저 ~만치 있고’라면서 시작되는 <자존심>은
<못 찾겠다 꾀꼬리>에 비해 판소리 가락을 더욱 짙게 뿜어넣었지만,
악기 구성과 리듬은 록을 그대로 따왔고,
또 후렴구에서는 <단발머리> 등에서 보여준 가성을 보여주는 등 일종의 `퓨전 음악’
이었습니다.
조용필은 공연을 할 때면 이 노래를 반드시 비중있게 다뤘습니다.
조용필이 작곡(이 당시 조용필의 히트곡 대부분은 조용필이 직접 작곡했습니다)
한 이 노래는 여동생(조종순)이 작사한 곡이어서 더욱 애착을 느낀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와 함께 이 음반에는 <난 아니야>, <따오기> 등 동요를 넣기도 했습니다.
< 난 아니야>를 부를 때는 수화를 함께 사용했고,
조용필 원래 음색인 미성을 엿 들을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 음반은 또 이듬해인 83년초에 인기를 끌게 될 <비련>과 <생명>이
들어있는 등 히트곡 모음곡이나 마찬가지 일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쏟아낸 음반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 조용필은 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가수왕을
신인인 이용에게 빼앗깁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시기 조용필은 국내보다는 막 시작한 일본 공연 등에 신경을 더 많이 써 상대적으로
예년에 비해 국내 활동이 뜸했습니다.
81년 <고추잠자리> 음반이 나오자마자 음반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이 동시다발적으로
히트했던 것과 달리 82년 음반에서는 순차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그 이듬해에까지
걸쳐 히트곡이 나오게 됐고,
이것이 가수왕을 빼앗긴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추계예술전문대(요즘의 서울예전) 대학생 이용은 `국풍 81’에서 <바람이려오> 로
데뷔합니다.
아줌마 파마머리를 하고 나타난 이용은 <아기공룡 둘리>의 만화가 김수정과 거의
흡사한 외모입니다.
그 만화에 나오는 `마이콜’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용은 타고난 가창력으로만 따진다면 어쩌면 조용필보다 나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이테너이면서도 목소리에 파워가 넘쳤고 저음 처리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용은 이해 가을 <잊혀진 계절>로 10대 소녀들을 뒤흔듭니다.
(지금도 매년 10월31일이 되면,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되는 이 노래가 라디오에서 몇 번씩 흘러나옵니다)
이때부터 오빠부대는 조용필파와 이용파로 나눠집니다.
이들은 서로 싸우기도 합니다.
조용필로서는 처음으로 라이벌이 등장한 셈입니다.

<잊혀진 계절>에 대해 한 마디 더하자면,
원래 이 노래는 조영남이 취입할 뻔하기도 한 곡입니다.
조영남은 그러나 당시 `노래가 너무 밋밋하다’는 이유로 고사합니다.
나중에 조영남이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는지.
저는 조영남씨를 좋아합니다만,
아마도 이 노래를 당시 조영남이 불렀으면 그렇게 빅히트를 기록했을까 의문이
들긴 합니다.

조용필은 이해 12월께부터 `기도하는, (꺄악)’으로 유명한 <비련>을 메인 곡 으로
적극 내놓으며 급피치를 올렸습니다.
82년 1년동안 조용필의 히트곡은 초 여름의 <못 찾겠다 꾀꼬리> 한 곡이어서
<바람이려오>, <잊혀진 계절> 등으로 치고 들어온 이용에 비해 조금 뒤처진
느낌이었는데,
이 당시 <비련>의 폭발성이 워낙 강해 막판 가수왕 경쟁은 쉽게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KBS 가요대상에서는 조용필이 최우수가수상(이때 KBS는 남자, 여자가수를 구분 해
발표했습니다.
81~83년은 조용필-윤시내가 3연패를 했습니다)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MBC에서는 이용이 차지했습니다.
`가수왕 이용’이 발표될 때 이용은 두 손을 번쩍 들고 나타났습니다.
마치 무적의 챔피언을 거꾸러뜨린 도전자의 표정이었습니다.

조용필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축하해줬지만, 얼굴에 아쉬움이 역력한 것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상은 받아도 받아도 또 받고 싶은 것인가 봅니다.
이때 MBC 10대가수 가요제 시상식 현장에서는 조용필팬과 이용팬이
서로 몸싸움을 벌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 이미 10대는 가요 소비자의 메인스트림으로 부상한 것입니다.

이때 10대들이 가요(또는 팝)를 소비하는 기제는 음반이나 테이프가 아니라
대부분 라디오 심야프로그램이었습니다.
70년대에도 이수만, 전영혁, 이종환 등이 진행하는 음악 심야프로가 있었지만,
대부분 대학생 언니,오빠들의 차지였습니다.
그런데 80년대 `마이마이’가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라디오를 꿰차기 시작한
10대 청소년들이 대학생들을 밀어내고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의 새 주인공이 된 것이죠.
더욱이 이 시기 이른바 초기 386 대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순간 운동권 세대로
흡수돼 70년대와 달리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을 듣는 대학생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 빈자리를 청소년들이 채운거죠.
저도 그 중의 한 명이긴 합니다.
이들은 같은 386이면서도 초기 386과는 달리 80년대에 대해 이중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 나이키, 프로야구, 두발과 교복자율화, 영화 <그로잉업>, 디스코텍,
피비 케이츠, 브룩 실즈 등 이른바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정책적으로 쏟아낸 자율화의
혜택을 처음으로 만끽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세대 구분을 지나치게 하고 싶진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386세대 중에서도 <품행제로>
세대라고 해야 할까요?

이 <품행제로> 세대에게는 조용필도 위에 언급한 여러가지 아이콘 중의 하나 였습니다. 그리고 요즘 청소년들에게 컴퓨터가 그들이 삶인 것인처럼 <품행제로> 세대에게는
라디오가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이 시기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KBS2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였습니다.
81년께부터 탤런트 송승환이 약 3년동안 진행한 프로였는데,
송승환은 인정많은 오빠로 청소년들의 밤을 가꿔줬습니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으로 시작하는 <시바의 여왕> 테마음악이 깔리면서
매일밤 10시에 어김없이 나타나서는 짧은 라디오 드라마(여주인공 이름이 `꼭지’)를
들려주기도 하고, 팝음악을 무한정 소개해줬습니다.
원래 송승환 직전에는 아나운서 황인용이 DJ를 맡았었는데,
황인용이 맡았을 때는 그렇게 많은 인기는 없었습니다.
특히 매주 화요일인가에는 `영어 한마디만’ 코너를 진행하는 미국인 `미스 쎅’
(당시 그는 가수 이주호(이름이 정확한 지 모르겠네요)와 결혼한 20대 중후반의
주부였는데,
왜 `미스’라고 했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이 나왔는데 그녀는 특히 청소년(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습니다.
목소리가 너무너무 예뻤고, 한국말도 곧잘 하곤 했는데,
티끌 하나 없을 정도로 순박해 보였고 정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중학생 연합고사를 치르는 날에는 송승환이 `오늘 중3들이 고등학교 들어가는
시험치른 날이다’라고 하자,
`미들스쿨이면 아직 애기 아니에요.
그런데 시험을 치러야 해요’라고 하며 정말 안타까워 하는 표정까지 보이는 듯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다음날 아침이면,
전날 미스 쎅이 한 말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남학생 녀석들도 여학생과 별 차이 없습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매주 일요일마다 공개방송을 진행했는데,
이때에 조용필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김형곤 등이 나와 분위기를 이끌었고.
KBS2는 초저녁 시간에도 <가위 바위 보>라는 프로그램이 7~9시간대에서 높은
인기를 차지했고,
9~10시 시간대에는 스포츠뉴스에 이어 청소년 드라마를 또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저녁 7시부터 밤 12시까지가 온통 청소년 프로 일색이었던 셈이니 지금보다 더했습니다.

당시 MBC에서도 이에 대항해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밀리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MBC는 82년께부터 전영록을 MC로 내세워 총공세를 시작했습니다.
(`꼭지’를 패러디한 듯 `보리’라는 이름을 쓰는 여학생이 등장하는 라디오 드라마를
삽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렇게 인기가 높았던 전영록도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완전히
거꾸러뜨리진 못했고 이후 <별이 빛나는 밤에>는 MC가 서세원 등으로 바뀌는 등
안간힘을 쓰다가 85년께 이문세가 등장하면서 완벽한 역전에 성공합니다.
이때 또하나의 라디오 프로가 더 있습니다.
위 두 프로그램은 모두 AM이었습니다.
물론 FM으로도 청취는 가능했습니다만.
KBS제2FM에서는 밤 10시에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가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 프로그램을 굳이 구분하자면,
전영록이 MC로 나오는 <별이 빛나는 밤에>는 중학생들이,
송승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은 고등학생들이,
그리고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는 대학생들이 주로 좋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샜습니다.

다시 조용필로 돌아가서.

<1983년>

83년 조용필은 <비련>, <생명>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다시 한 번 건재를 과시합니다.

특히 <생명>은 조용필이 무척 아꼈던 곡으로 보여집니다.
이 시기 조용필은 공연 장면에서 꼭 마지막 곡은 <생명>으로 끝맺었습니다.
`생명이여, 생명이여 ~’라고 노래를 마무리할 때 쯤이면 무대가 어두워지면서,
`뚝딱뚝딱’하는 심장 뛰는 소리가 울려나고 무대 뒤쪽에 희미한 녹색 심장 이미지가
조명을 받아 나타나곤 했습니다.

이해 6월께 조용필은 5집 <산유화>를 발표합니다.
이 음반에서는 <산유화>, < 친구여>, <나는 너 좋아> 등이 히트했는데
특히 <나는 너 좋아>는 조용필답지 않은 노래였지만,
오빠부대로부터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조용필은 늘 진지했습니다.
<비련> <생명> <친구여> 등이 조용필의 흐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나는 너 좋아>는 `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라고 하는 상당히 신세대적인
노래입니다.
아마도 오빠부대를 의식한 서비스곡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이 노래를 부를 당시 조용필은 당시 유행하던 핑클파마를 하고,
옷은 펑퍼짐한 흰 찐빵바지(앙드레 김 옷을 연상하시면 됩니다)를 입고,
`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라고 부르며 몸을 90도로 홱 돌리는 등 솔직히 좀
서른 넘은 사람이 주책이다 싶을 정도로 폴짝거렸습니다.

그러나 <쇼2000>(이덕화와 김청이 MC를 맡은 MBC 쇼프로그램. 매주 토요일. `
부탁~해요’라는 MC 명대사는 이덕화가 이 프로에서 처음 들고 나온 것입니다) 등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이때 방송사에서는 오빠부대의 비명 소리를 일부러 더 자극하려 애쓰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요즘의 <시사 매거진 2580> 또는 <추적 60분> 같은 프로그램에서
`오빠부대'를 특집으로 다루기도 하곤 했습니다.
이해 조용필은 MBC와 KBS 양쪽에서 모두 가수왕을 차지합니다.

82년에 라디오 프로를 이야기했다면,
83년에는 TV 프로이야기를 않을 수없군요.

82년 가을께 KBS2는 저녁시간에 <고교생 일기>라는 청소년 드라마를 내겁니다.
아마도 요즘 드라마 <학교>의 형님격이라고 해야할 겁니다.
70년대에도 이정길이 교사로 나오고, 교복입은 임예진이 학생으로 자주 나오는
<제3교실>(어릴때 저는 `제3교실’이라는 말뜻을 몰라 `3반을 말하나’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이 있긴 했습니다만, <고교생 일기>는 <제3교실>과는 차원을 달리
한 것입니다.
흑백 텔레비전 시대의 <제3교실>이 다분히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은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 부무에게 효도해야 한다, 탈선하면 안된다 등등)
반면 컬러텔레비전의 <고교생 일기>는 고교생들의 삶과 생각을 표현 하는데
더 큰 주안점을 뒀습니다.
<고교생 일기>는 첫 회부터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선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했습니다. 중소도시의 한 학교에 서울에서 내려온 강수연이 전학 첫 날을 맞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 학급에는 손창민 등 당시 청춘 아역스타들이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손창민은 `록키’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권투를 하는 바른생활 학생이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선생님은 <왕건>에서 견훤으로 나왔던 서인석이었습니다.
<고교생 일기>는 많은 스타들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까치’ 최재성도 이 드라마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미술학도였고, 이혼한 부모님을 둔 탓인지 어두운 얼굴에 반항아적인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손창민과는 한바탕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강수연은 처음 손창민을 좋아하다가 점점 최재성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외에도 반장을 맡았던 이청(요즘에는 30대 아저씨 역으로 아주 가끔 나오더군요.
하지만 당시에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그리고 여드름 투성이였던 000(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 등등.
그리고 나중에는 또 한 명의 여학생이 전학오는데, 조용원이었습니다.
연보라색 플레어 워피스를 입고 나타난 조용원은 신비스런 이미지를 풍겨
당시 남학생들에게는 `환상 속의 그녀’였습니다.
드라마에서는 강수연과 조용원 사이에 묘한 라이벌 관계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동갑내기인 강수연과 조용원은 80년대 중반실제로 대단한 라이벌이었습니다.
본인들은 부인하는 듯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드라마에 나왔던 강수연은 중학교때 <안국동 아씨>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에 나와 큰 인기를 끌었고, 고교생때 <고교생 일기>
를 거쳐 성인이 돼서는 <고래사냥2>,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등을 찍기도
했습니다만 큰 빛을 못 보다가,
87년 <씨받이>가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명배우의 길로 접어들었죠.
이에 반해 중학교때 데뷔한 조용원은 이 <고교생 일기>를 기점으로 강수연을
역전시켜버린 듯 했습니다.
남학생들은 보통내기가 아닐 것 같은 강수연보다 선한 인상의 조용원을 압도적으로
선호했고,
이후 조용원은 드라마 <보통사람들>에 나온 이후,
광고모델(스포츠웨어 엑셀)로 나오다가 85년 영화 <땡뼡>을 통해
대종상 신인상도 받습니다.
이전까지 연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조용원은 영화 <땡뼡>에서 연기에
눈을 뜬 듯 했습니다.
아마 그때 활동을 계속 했더라면 조용원은 강수연과 함께 80년대 후반~90년대를
잇는 명배우의 반열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85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얼굴을 다치면서 조용원은 활동을 접고
일본유학을 떠나고 맙니다.
이후 몇 차례의 수술로 지금은 그때의 상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조용원은 지금은 대학강단에 서기도 하고, 영화 주간지 <씨네버스>의
발행인이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97년말 <한겨레 21>에 있을 때, 조용원씨를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용원씨가 연극을 제작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인터뷰 할만큼 중요한 사안도 아니었고,
더욱이 그때 제가 경제부로 막 발령이 나 인터뷰가 사실상 불가 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부장에게는 `아직 <한겨레21> 일이 덜 끝났다'고
말하고선(당시 <한겨레21> 부장은 조용원 인터뷰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
그 인터뷰 기사 안써도 괜찮으니 그냥 경제부에 가서 일해라'고 했지만,
저는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마저 다 해놓고 가겠습니다'라고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경제부로 발령난 다음날
조용원씨와 인터뷰했습니다.
조용원씨는 그 연극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청소년 시절, 남학생들의 우상이었던 조용원씨를 직접 만난다고 하니,
얼마나 셀레었던지.
(`인터뷰하면서, 얼굴 빨개지면 큰 일나는데' 라는 부담감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인터뷰를 했는지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조용원씨도 기억이 안 나겠지만.

하지만 그때 마주 대한 조용원씨의 얼굴은 제가 청소년 시절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봤던  
그때의 모습과 이미지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66년생인 조용원씨는 제가 인터뷰할 때,
이미 우리 나이로 이미 32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수연-조용원 이후 <고교생 일기>는 2세대인 빛나라
(명랑발랄. 지금의 장나라 이미지와 비슷) 등이 등장하는 시기로 넘어갔고,
3세대까지 이어지는 듯하다가 막을 내린 것 같습니다.

<고교생 일기> 이전까지 청소년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철저히 소외돼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웃 사이더’, `국외자’의 위치에 머물렀습니다.
텔레비전은 어른들이 보는 것이거나 아니면 어린이가 보는 것(뽀뽀뽀, 만화영화 등)
이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80년대 초반 마이마이의 보급으로 우선 라디오를 자신의 무대로
만들며,
진지를 구축하더니 <고교생 일기>를 시작으로 텔레비전까지 치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미 81년 무렵부터 조용필을 쫓아 청소년들이 텔레비전까지 따라들어온
것이 기초가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어째, 조용필 이야기보다 곁가지 이야기로 자꾸 삐쳐나가네요.
다시 조용필로 돌아가서.

< 1984년>

조용필은 이 해 <눈물의 파티> 등을 발표하지만,
이때부터는 국내활동보다는 일본 활동에 더욱 신경을 쓰는 듯했습니다.
국내 활동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 <못다핀 꽃 한송이>를 들고 김수철이 나타납니다.
이해 김수철은 영화 < 고래사냥>에 출연하는 등 난공불락일 것 같던
조용필의 아성에 맹렬하게 도전 합니다.
김수철의 도전은 2년전 이용의 도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조용필과 마찬가지로 싱어송 라이터였던 김수철은 자기 나름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인물이어서 조용필만 알던 청소년들에게 또다른 아이콘을 제시해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수철은 이후 80년대 가수들을 다시 한 번 소개할 때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해 KBS 가요대상에서 최우수상은 김수철이 차지합니다.
그리고 MBC에서도 김수철이 예상됐습니다.
그런데 조용필이었습니다.
조용필은 `가수왕’으로 자신이 발표되자, 뒤에 서있던 김수철의 손을 잡고
앞으로 잡아끌면서 `저는 이 친구가 될 줄 알았어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1985년>

85년 조용필은 7집을 발표합니다.
이 음반에서 조용필은 하반기에 <어제, 오늘, 그리고>(지난해 유승준이 리바이벌)와
<그대여> 등을 잇따라 히트시킵니다.
그리고 이 음반에는 당시에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숨어있던 노래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요>와 <사랑하기 때문에>가 그것입니다.

이문세 음반 끝에 붙어있는 <어허야, 둥기둥기>처럼 이른바 건전가요로 넣은 것이
<여행을 떠나요>입니다.
이 <여행을 떠나요>는 지난번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에서도 인기를 끌만큼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래방, 야유회 등에서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또 유재하 작사,작곡의 <사랑하기 때문에>도 이때 발표한 곡입니다.
지금 <어제, 오늘, 그리고>는 유승준이 리바이벌 하지 않았다면 그 가락을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가운데 <그대여>의 멜로디가 기억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여행을 떠나요>와 <사랑하기 때문에>는 아마 거의 다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굳이 인기순위로 따지자면 <어제, 오늘, 그리고>와 <그대여>는 모두 가요순위에서
1위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요>와 <사랑하기 때문에>는 당시에는 순위에 오르지도 못했지만,
결국 살아남은 노래는 뒤의 2곡입니다.
우리네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이 해에도 조용필은 MBC에서 가수왕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KBS에서는 80년대 초반부터 오빠부대의 또다른 한 축을 형성해왔던
전영록에게 빼앗깁니다.
(조용필이 `폭풍’이라면, 전영록은 `강’과도 같습니다.
전영록에 대해서도 다음에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1986년>

86년에도 조용필의 아성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조용필은 이때부터 자신의 나이를 의식한 것인지,
오빠부대 보다는 성인들을 위한 배려에 더 신경을 쓰는 듯했습니다.
완벽한 옛날 트롯트 리듬으로 콧소리까지 섞은 <허공>은 이해 봄 큰 인기를 누립니다.

그러면서도 조용필은 젊은 층들을 위해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 등
이후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을 곡들도 이때 함께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해 조용필은 KBS, MBC 가수왕을 또 한 번 석권합니다.

그러나 조용필의 7년동안 계속된 `가수왕 행진’은 여기가 종착역입니다.
조용필은 86년 상을 받은 뒤,
`후배들을 위해 더 이상 `가수왕’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선언 때문이었을까요?
때맞춰 가수왕 제도의 문제점이 지적되자 양 방송사는 약속이나 한 듯
87년 가수왕 대회를 폐지합니다.

<1987년>

그 조치의 최대 피해자는 이문세였습니다.

87년에도 조용필은 마지막(?) 피치를 올립니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등을 히트시키지만,
예전같은 폭발성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어집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이문세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듯했습니다.
더욱이 이때부터 조용필은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기간이 더 길어집니다.
실제로 조용필은 이후 일본의 10대 가수가요제격인 NHK 가요 홍백전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출연해 87~90년, 92년 등 5차례나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용필이 국내 활동을 완전히 접은 건 아닙니다.
87년 조용필은 그 유명한 맥콜 CF를 찍습니다.
노르웨이 그룹 아하의 를 사실상 표절한 광고 기억나시죠?
(87~88년 무렵에는 보리 음료가 온통 휩쓸었습니다. 맥콜을 비롯해 맥,
보리보리 등등. 음료도 유행을 타는가 봅니다.
89~90년 무렵에는 또 우유탄산 음료의 인기가 대단했죠.
암바사, 밀키스, 크리미 등 말입니다.
특히 주윤발과 왕조현을 각각 내세운 밀키스와 크리미의 광고전도 볼만 했죠)

오늘은 곁가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
82~87년까지 이야기에 그쳤군요.
다음번에는 88년 이후 지금까지로 조용필 이야기를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공교롭게도 전두환 치하였던 87년에서 일단 끝맺음을 했네요.
그러고보니, 조용필은 80년 전두환과 함께 등장한 인물이군요.

그리고 조용필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시기도 전두환 통치시기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군요.
조용필은 전두환의 독재치하에서 숨막혀하던 민중들에게 `오아시스'였을까요?
아니면 `모르핀'이었을까요?
아마도 조용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저 음악을 했을 뿐이다라고.

87년 맥콜 광고에서 조용필의 손을 잡고 만화 속 환상의 세계로 들어갔던
그 예뻤던 소녀는 또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2003. 1. 27

권태호 올림 ho@hani.co.kr

첨부

4 댓글

곽노선

2003-01-28 02:13:40

그 당시 상황을 전혀 알수없는 나로써는 정말 흥미있는 기사네요 안그런분도 있겠지만요

필 사랑

2003-01-28 05:08:12

글쎄여 저는 여행을 떠나요나 사랑하기 때문에 보다 어제 오늘 그리고와 그대여가 그당시 더 많이 불러졌고 더 많이 알려 진걸로 알고 있는데요..

조르바

2003-01-28 05:34:36

전영록이 kbs에서 대상받은 건 85년이 아니구 86년입니다. 기사 잘못됐네요.

금관총

2003-01-28 07:45:32

거 흥미끌려구 삐딱하게 썼네 그러니까 딴따라수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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